실험실의 진화
홍성욱 지음, 박한나 그림 / 김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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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책 한 권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도 82년생 김지영』이 마지막였던 것 같다. 그렇다. 이 책은 내가 보통 보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20대 말부터 에세이나 소설을 잘 안 읽게 되었다. 가끔 보게 되어도 사지 않았다. 내게는 훨씬 중요한 다른 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나는 책 한 권을 갖고 몇 달을 씨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다른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다른 읽을거리가 생겨서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보통 잘 읽지 않는 주제의 책였지만, 이 책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읽었다. 이 책 독서의 목적은 보름 동안 씨름했던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특히 그 책에 나오는 보일과 홉스의 논쟁과 대조에 관해 좀더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힘들게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직 많은 라투르의 그 책의 배경을 좀더 알고 싶었다. 이 책 『실험실의 진화』의 5-8장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2장의 훌륭한 입문서이다. 오늘 하루의 독서로 이 목적을 이룬 내게 이 책은 분명히 유익했다. 라투르라는 힘든 산을 오르다 쉬고 있는데, 그 산에 먼저 올랐다가 내려오는 사람이 하는 "조금만 더 힘내면 된다"는 인사 같았다. 하지만 턱까지 차는 숨을 내쉬며 산을 기다시피 오르는 사람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말이 주는 기대가 독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화", "매개" 등 라투르 특유의 낯선 개념 없이 라투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잘 전해주고 있다. 


진공은 발견된 것인가, 발명된 것인가? 그것은 자연인가 인공인가? 이런 이분법이 무의미해지는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 또 그 과학을 만들고 있는 공간인 실험실이 이 책의 대상이다. 곧 라투르가 "자연/사회의 대분할"이라고 칭한 것이 과학 활동의 결과이지, 그 전에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아주 쉬운 언어로 밝히고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자연의 일부를 실험실로 들여왔는가, 또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하이브리드들이 생산되고 증식되면서, 결국 마치 저 밖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자연"이라는 결과를 생산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유익함은 이 책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권리 옹호』의 저자 매리 울스턴크래프트라든가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 맑스의 물질대사 균열 이론에 영감을 주었던 유스투스 폰 리비히 같은 이들이 잠시지만 얼굴을 비춰 반가웠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짧아 아쉽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관심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연금술이나 실험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만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은 매우 유익할 것 같다. 그들이 흰 가운을 입고 실험을 해본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잘 모르는 사람들을 거리를 둔 채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을 잘 알게 되면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인류학자의 시선일텐데, 이 책은 그 시선의 온당함과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글도 쉽게 쓰여져 있지만, 읽는 내내 재미있었는데, 세 가지 점이 좋았다. 일단 책 제본이 마음에 들었다. 실로 된 제본이 책 등에서 장이 분리될 위험 없이, 그리고 두 페이지에 걸쳐 있는 삽화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소소한 것일 수도 있는데, 책에서 언급되는 명화들이 실리지 않고 QR 코드로 찍어 보게 되었는데, 이것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셋째, 삽화가 정말 훌륭하다. 나는 "그린이의 말"이 실려 있는 책은 처음 본 것 같은데, 거기에 실린 그린이 박한나의 꼼꼼함과 정성에 격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래서 지은이와 그린이 두 분의 공동저작의 속편을 기대한다. 설령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린이의 다음 작업들이 몹시 기대된다.

과학자는 자연 전체를 실험실로 들여올 수 없다. 실험실로 가지고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연을 일부만 추출하거나 변형해야 한다. - P64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의 핵심 주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실험에는 (이론과 무관한) 그 자체의 삶이 있다‘는 것이다. ... 해킹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실험은 대부분 이론을 검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 해킹은 실험을 ‘자연을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 해킹의 책이 나오면서 실험의 역할은 이론을 검증함으로써 이론의 발전을 보조하는 것에서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그렇지만 무시되었던 실험을 복권해 ‘실험으로의 전환‘을 촉발한 해킹도 실험이 진행되는 공간인 실험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해킹은 자신이 분석한 여러 실험을 실험실이라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이 아니라 마치 추상적인 공간에서 일어난 일처럼 기술했다. - P68

라투르는 ... 병역 의무 대신에 서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대도시 아비장에 있던 프랑스 평화봉사단 근무를 자원했다. 이때 라투르는 아비장의 프랑스 기관에서 일하던 백인 상급자를 지역의 흑인으로 대체했을 때 생길 수 잇는 문제를 연구하는 데 참여했다. ... 당시 아비장의 프랑스인 학교에서는 흑인 학생들이 ‘아프리카인의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기계공학에서 쓰는 3차원 제도 도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하던 교사들이 있었따. ... 그런데 흑인 학생들을 인터뷰한 라투르에 따르면 이들이 제도 도형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엔진 같은 기계를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프리카인의 심성‘과는 상관이 없었다. ... 그는 이 초기 연구에서 전문성이나 능력이라고 부르는 역량은 추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일종의 네트워크, 혹은 링크와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나중에 이런 생각을 과학에도 적용한다. - P74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가설이나 주장 수준에서 확고한 사실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다른 과학자의 연구, 특히 경쟁자의 연구는 사실 수준에서 가설 수준으로 낮추려고 한다. 라투르는 확고한 사실이 된 과학 지식을 ‘블랙박스‘라고 부른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지고 있었떤 링크들이 대부분 떨어져 나가고, 사실 하나만 패키지처럼 남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론 다른 과학자들도 그 가실을 받아들일 뿐, 블랙박스의 속을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이렇게 블랙박스가 된 사실들은 ‘만들어진 과학‘이다. 과학자가 과학철학자들이 합리적, 객관적, 보편적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은 이런 것이다. 반면에 실험실은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을 볼 수 있는 장소이다.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히다. 사실은 아직 주장이나 가설 단계에 있고, 논쟁과 토론이 오가고, 실험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한다. - P81

우리는 보통 과학자가 사실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라투르에 의하면 과학적 사실은 이런 이종의 요소들이 얽힌 네트워크가 공고해지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과학‘에서 과학적 논쟁의 승자와 패자는 자연이라는 실재가 정한다. 승자는 자연에 잘 들어맞는 이론을 제창했꼬, 패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승패가 갈린다. 반면에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에서는 과학 논쟁이 종결되면서 승자의 이론이 자연의 실재에 부합하는 것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자연이 논쟁을 종결한 것은 아니지만, 선후 ㅗ간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연에 의해 논쟁이 종결됐다고 믿는다. 라투르에 의하면 ‘만들어진 과학‘과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이라는 과학의 두 모습은 마치 두 얼굴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야누스와 비슷하다. - P82

파스퇴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배양해서 페트리접시 위에서 세균 군체(colony)를 만들었다. 이렇게 세균을 눈에 보이도록 만들고 나니, 이를 약화시키기 위한 여러 방법을 도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파스퇴르는 무서운 세균을 길들일 수 있게 됐는데, 이는 오직 그의 실험실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즉 파스퇴르의 실험실에서는 파스퇴르가 세균보다 강했다. 실험실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힘의 역전이 일어나는 공간이었따. - P91

사회학자들은 권력이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나 권력 기관, 규율 같은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데 반해 라투르는 백신이나 표준저항 같은 인공물에 주목한 것이다. 인간은 백신과 연합하면서 과거에는 없었던 인간, 즉 특정한 세균에 항체를 가진 인간으로 변한다. 세균은 백신이 되면서 인간을 죽이는 존재에서 인간을 살리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인간과 세균의 새로운 연합을 만들어내는 곳이 바로 실험실이었다. 파스퇴르는 백신으로 프랑스를 실험실화하면서, 스스로 모든 프랑스인이 거쳐가야 하는 존재로 거듭났다.
실험실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혼종 네트워크가 생겨나는 곳이다. 실험실에서 생긴 네트워크는 보통은 인공물 형태로 실험실 밖으로 나온다. 이것은 또 다른 인간-비인간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성장하던 네트워크의 일부는 인공물 같은 형태로 블랙박스화된다. 이런 블랙박스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의무통과점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네트워크는 계속 성장한다. - P96

보일은 집에 있는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를 책이나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실험을 직접 보지 않았떤 다른 과학자들도 그 결과를 믿을 수 있었을까? ... 실험은 사적인 공간에서 보일이알는 개인이 수행한 작업이다. 반면에 그 결과는 공적인 공간에서, 과학자들이라는 집단을 대상으로 발표된다. 실험하고 결과를 발표하던 보일도 어느 시점에 이런 딜레마를 느꼈던 듯하다. ... 우선 그가 채택한 방법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실험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하는 것이었따. 진공펌프의 유리구 속에 새를 넣고 공기를 빼자 새가 점차 기운을 잃다 죽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이 실험을 여러 번 반복했다. 왜 새가 죽는지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기록할 때 숙녀와 신사들, 의사와 수학자들이 이 실험을 목격했다고 썼다. ... 보일은 독자에게 자신은 물론 이런 목격자들 모두가 젠틀맨이고, 따라서 거짓말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다. - P106

실패한 실험에 대한 이런 보고는 성공한 실험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었다. ... 보일의 진공 실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분석한 과학사학자 스티븐 셰이핀은 보일의 스타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셰이핀은 보일이 자신의 실험을 목격했던 사람을 언급하고, 실험의 시시콜콜한 세부사항을 모두 적고, 실패한 실험까지 기록한 것은 자신의 실험이 믿을 만한 것이라는 인상을 독자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동료 과학자들은 보일의 논문이나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보일이 했던 실험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이 실험을 스스로 재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셰이핀은 이를 "가상의 목격"이라고 불렀다. 즉 보일의 산만한 스타일은 사적인 공간인 자신의 실험실에서 했던 실험 결과를 공적인 공간인 과학자 공동체가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셰이핀은 이런 장치를 "문필적 기술"이라고 불렀다. - P110

홉스는 보일이 철학적인 사유 없이 실험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은 점을 비판했다. 보일의 펌프는 명백하게 공기가 새고 있었고, 그런 펌프를 가지고 진공을 만든 뒤에 진공 때문에 새가 숨을 쉬지 못해서 죽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홉스는 진공펌프의 틈으로 공기가 급격하게 빨려 들어와서 유리구 속에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새가 이 공기의 소용돌이에 맞아서 죽었다는 새로운 설명을 제시했다. 홉스는 실험이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주장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 철학자였다. 그에게 확실한 진리는 실험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일은 다시 실험을 통해 홉스를 논박했다. 보일은 새를 넣은 유리구 속에 작은 깃털 하나를 매달았다. 그리고 공기를 빼서 진공을 만들기 시작했다. 새는 괴로워서 헉헉대는데, 깃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홉스의 말대로 공기의 강한 소용돌이가 새를 죽인 것이었다면 깃털은 이런 소용돌이 때문에 요동을 쳤을 것이다. - P113

과학자는 자연을 실험실로 가지고 들어온다. 실험실로 들어온 자연은 단순해지고 반복 조작이 가능한 대상으로 변한다. 실험실에서 자연은 과학자의 통제하에 놓인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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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 (1881년 봄-1882년 여름) 책세상 니체전집 1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안성찬.홍사현 옮김 / 책세상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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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학문을 언제쯤 차분히 볼 수 있을까?

다른 곳에서 인용된 부분들을 먼저 모아둔다.

363. ...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각각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성의 사랑의 조건 중 하나는 하나의 성이 다른 성에 대하여 같은 감정을, "사랑"에 대한 같은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이 이해하는 사랑은 지극히 명백하다. 아무런 고려나 유보를 하지 않는 영육의 완전한 헌신(복종뿐만 아니라), 단서나 조건과 연결된 헌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와 공포를 느끼는 그런 헌신이 여성의 사랑이다. 이처럼 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여성의 사랑은 신앙이다: 여성은 그 외의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 - 남성은 여성을 사랑할 때 바로 이러한 사랑을 원하며, 따라서 그 자신은 여성적인 사랑의 전제 조건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완전한 헌신에 대한 요구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남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 그가 남성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처럼 사랑하는 남성은 노예가 된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제12장 처음 - P362

381. ... 우리끼리 하는 말인데 나의 경우는 나의 무지를 통해서든 나의 활발한 기질을 통해서든 그대들에게 이해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어떤 문제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것에 재빨리 다가가야 한다고 나의 활발함이 아무리 강요할지라도. 나는 심오한 문제들을 다룰 때면 차가운 물에 들어갈 때처럼 - 빨리 들어갔다가 빨리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충분히 깊은 곳까지 내려갈 수 없다고 믿는 것은 물을 두려워하는 자나 차가운 물을 싫어하는 자들의 미신이다.: 그들은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 몹시 차가운 것은 움직임을 빠르게 한다! -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제1장 끝부분 - P390

290.
한 가지가 필요하다. - 자신의 성격에 "樣式을 부여하는 것"은 위대하고 희귀한 예술이다. To "give style" to one‘s character - a great and rare art!
이것을 실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이 지닌 힘과 약점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을 조망하여, 일체의 요소가 예술과 이성으로 보이고 약점조차 눈을 황홀하게 할 때까지, 그것을 예술적 계획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 M. Foucualt, "On the Genealogy of Ethics" in _Ethics, EWF_ Vol. 1, p. 262 <미셸 푸코: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서우석 역, 나남), p. 333.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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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블과 함께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마농지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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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해러웨이의 책이다. 라투르와 마찬가지로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안 읽었는데, 지금 안 읽으면 아예 기회가 없겠구나 싶어서 읽었다. 재미있었다. 매료되었다. 그러나 설득된 것 같지는 않다. 나처럼 해러웨이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그녀의 독창적인 vocabulary, colloquial terms, idioms에 익숙해지는데 꽤 애를 먹기 마련이다. 따라서 원래 영어로 쓰여진 이 글이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의 문제는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영어로 읽을 때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일단 내용을 그녀의 독특한 개념 몇 개를 택하여 실뜨기하는 식으로 리뷰하고, 번역에 대한 의문과 지적은 맨 마지막에 하겠다.

 

1. (대문자)역사 속 (대문자)인간의 막대기 이야기 Vs. 캐리어백 이론

서양의 신화들에는 태초의 도구, 무기, 말로 무언가를 하는 천상의 신들 - 말씀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유대-기독교 하느님, 포세이돈의 삼지창, 아폴론의 활, 토르의 망치, 로키의 홀(scepter) - 과 필멸의 인간이지만 무언가 말하고 무기나 도구를 사용하다 비극적 삶을 살게 되는 영웅들이 나온다. 어슐러 르 귄은 막대기, , 칼처럼 딱딱하고 긴 것을 휘두르고 그것으로 때리고, 찌르는 이야기들을 우리들이 지금껏 들어왔다고 말한다. (https://stillmoving.org/resources/the-carrier-bag-theory-of-fiction) 르 귄은 이를 비판하는 대안()적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캐리어백 이론을 제시한다. 막대기, , 창 등이 아니라, 잎사귀, , 조개껍질, 그물, 가방, 밧줄, 배낭, , 단지, 상자, ()잡이/받침(holder), 용기(容器, recipient) 등의 캐리어백 역할을 하는 것이 문명의 이야기에서 더 중요하다는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73). 사냥꾼이나 영웅이 들고 설치는 길고 단단한 막대기류보다 무언가를 받고, 담고, 운반할 수 있는 오목하고 움푹 파인 것들(74)이 더 중요한 것이다.

 

르 귄이 우리가 원하지 않았지만 지금껏 들어왔다고 한 이 길고 단단한 것들의 이야기를 해러웨이는 역사 속 인간의 막대기 이야기(the prick tale of Humans in History)”라고 부른다. 역자는 이를 역사 속 인간들의 음경 이야기라고 번역하였다(73, 74, 85, 252). 해러웨이가 참조한 르 귄의 원래 글에는 prick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안 나오는데, 해러웨이는 이것들을 찌르다”, “뾰족하게 세우다등의 뜻을 갖고 있는, 그리고 이로부터 음경”, 곧 남성의 성기가 유추되는 prick으로 표현하면서 음란마귀 농담의 뉘앙스를 첨가한다. (따라서 나는 이 뉘앙스 감지와 그것의 연상에 필요한 짧은 시간적 간격을 생략한 채 바로 음경 이야기로 번역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대문자 역사(History)와 대문자 인간(Human)은 그것이 놓여져 있는 상황을 무시하는 신의 트릭일 뿐이라는 해러웨이의 오래된 문제의식이 짓궂은 유머로 표현된 것이다.

 

해러웨이는 라투르와 르 귄 모두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보편적인 - 그 어떤 상황적 맥락이 소거된 채 제시되는 - 어떤 것의 이야기라는) 신의 트릭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며, 이들에게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라투르가 칼 슈미트의 힘의 대결에 관한 물질-기호론적 수사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78-81).

 

2. 인류세/자본세

해러웨이는 유진 스토머와 파울 크뤼천의 연구 속에서 탄생한 층서학적인 개념인 인류세(Anthropocene)”를 검토하면서, 그것이 제기되는 상황의 정당성에는 공감하지만, 그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을 비판한다. 그것 역시 우리가 들어왔던 최초와 최후의 아름다운 말과 무기의 위대한 막대기 이야기와 똑같이 전개되기 때문이다(85-90). 해러웨이는 인류(Anthropos)라는 보편적 행위자의 이름이 붙는 인류세를 사람들이 많이 쓰니까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 말보다는 자본세(Capitalocene)가 더 적절해 보인다고 생각한다(258). 그녀는 맑스주의를 포함한 다른 근대적 서사와 달리, 맑스가 결정론, 목적론, 계획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큰 이야기를 잘 해내었던 것처럼, 자본세도 그럴 수 있는 개념으로 본다. 자본세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관계적으로 만들어졌고, 관계성에 의해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91-92). 해러웨이는 인류세를 하나의 시대(epoch)가 아니라, “경계(boundary)”라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173). 인류세는 단지 극심한 불연속을 표현하는 선이어야지, 두터운 층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수행적(performative) 개념인 쑬루세(Chthulucene)가 출현하는 배경이다.

 

3. 쑬루세

쑬루세 개념은 서론, 2, 4장에서 각각 조금은 다른 이론적 맥락에서 도입되고, 5장에서는 그에 대한 본격 SF 글쓰기가 시전된다. 서론에서는 어원이 추적되면서, 땅 속의 것들이 함께 살고 죽는 시공간으로서 쑬루세가 소개된다(9). 2장에서는 카오스에서 발생한 가이아가 뾰족한 무기들을 휘두르는 인류세의 형상보다는, 그 어떤 형상화, 연대 추정, 단 하나의 이름을 거부하는 두터운 현재진행형의 시간성인 쑬루세라는 상황 속에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시된다(93-94). 4장에서 쑬루세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그 지속성이 위기에 처한 역동적이고 진행 중인 공-지하적 힘들과 권력들을 위한 새로운 이름(173)이다. 5(영어판에서는 8)은 해러웨이의 SF 소설 카밀 이야기의 플롯이 제시된다. 이 소설은 2025년부터 2425년까지 400년 동안의 미래를 살고 죽은 카밀 5세대에 관한 픽션이다. 202580억 명였던 세계 인구가 2100년에는 100억 명으로 정점을 찍고, 차츰 감소하여 2425년에는 30억 명으로 감소되면서 어떤 균형과 공생을 회복해가는 이야기이다. 242530억 명 중 10억 명은 인간-크리터 공생자들이다. 카밀과 같은 미래 세대는 15세에 성인이 되어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게 되고, 그 전에는 세 명의 부모(parents)를 가지며, 부모와 아이의 결정에 따라 비인간 크리터들과 공생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또 공생자로부터의 감염으로 인해, 공생동물의 무늬가 나타나기도 하고 남녀양성의 특징을 띠기도 한다(205). 읽는 내내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미래소년 코난>이 떠올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우시카 이야기가 나와서 반가웠다(208-210). “죽은 자의 날이야기가 나오는 끝부분은 <코코> 이야기였고.. ㅋㅋ

 

인간과 비인간 크리터가 공생하면서 서로 감염시키고, 사이보그처럼 나비 더듬이를 아래턱에 심기도 하면서, 다섯 세대 동안 진화하는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서로를 감염시키면서 진화하고, 사람들끼리만이 아니라, 다른 종들과도 함께 세상을 만들어나가고, 결국에는 죽은 자들, 죽은 크리터들의 영혼들도 함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에 과학적 사실들이 결합된다. 경계가 있는 개인(개체)주의[bounded individualism]라는 관념은 경제학뿐만 아니라, 생물학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가정되었지만, 그 전제의 허구성이 홀로바이온트, 홀로언트, -산 등의 개념에 의해 과학적으로 비판되면서도(108-121), 이 비판에 기반하여 새로운 픽션이 구축된다(204-207, 219-222, etc.) 카밀 이야기가 유토피아에 관한 것이 아님은 확실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예견되는 디스토피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고, 또 봐주기에 따라 있을 수도 있는 픽션임은 부인할 수 없다.

 

4. 단상: SF, 실뜨기, 함께-하기, 함께-되기, -

처음에는 SF가 도대체 무엇인가, fiction이면서 fact인 것이 가능한가, scientific fabulation은 모순형용(oxymoron) 아닌가, 실뜨기가 뭐 대수인가 등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는데, 몇몇 의문들을 남기면서도 전체의 스토리가 들어오는 영화처럼 흥미롭게 읽었다. 그 이유는 해러웨이의 대안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이라 할 수 있는 캐리어백 이론의 힘 때문일 것이다. 대문자 역사 안에서의 대문자 인간, 그 바깥에 있지만 특정 상황 안에서 함께-존재하며, 무언가 함께-되어가는 인간과 비인간 크리터들의 공생-공산의 세계의 재현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쑬루세가 단지 인류세/자본세를 끝내고 도래해야 할 어떤 시점 이후의 목적론적 미래가 아니라, 어떤 지속성의 시간대로서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으면서도, 지금은 위협에 처해있지만 앞으로도 존속해야할 어떤 진행형의 시간성이라는 아이디어 또한 재미있었다.

 

해러웨이가 그리는 세상은 어떠한 문제 - 예컨대, 자본주의적 착취와 전유, 가부장적 지배, 기후변화 등 -가 종식된 평화로운 세계가 아니다. 착한 사람들만이 사는 무구한(innocent)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 곳에서도 죽음, 죽이기, 잡아먹기, 감염 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미래 시제의 해방된 세계가 아니라, 위협받고 있는 지속성을 지속하기 위한 함께 세계 만들기(worlding), 함께 되기(becoming-with), -(sympoiesis)이다. 이것은 여러 시제에 걸쳐있으며 그 시제를 관통하는 수행적 실천이다. 곧 의지가 개입된 실천이고, 때로는 적과 대면해야 하는 싸움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선언은 슬로건을 갖고 있는데, 그 슬로건이 바로 책의 부제에 들어가 있다. “킨을 만들어라, 아기 말고! (Make Kin Not Babies!)”(176)

 

난 해러웨이가 여기에서 모두가 (이해하고) 따라야 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뾰족한 것에 의해 찔려 아프게 죽어 마땅한)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지 않아서 좋다. 공상적이면서도 충분히 비판적이고, 현실적이고, 과학적이고, 윤리적이고, 탈식민지적이고, 생태적인 이야기라서 좋았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여러 물음표들과 함께 이야기를 따라가는 와중에 루시드 폴의 <사람이었네>, <안녕> 등의 노래들이 떠올랐다. 에디 베더의 노래가 인상적이었던 영화 <Into the Wild>. 그러다 보면 내 주변의 비인간 크리터들을 다시 보게 되고, 내가 트러블을 겪고 있던 인간관계들도 조금은 작게 보여지는 것 같아 좋았다. (내용에 대해서 할 말이 더 많은데, 마음이 차분하지 않아 더 못 쓰겠다.)

 

5. 번역

위에서도 썼지만, 해러웨이의 글은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라 해도 쉽게 따라가기 힘들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구어체와 학술논문 문어체가 짬뽕된(muddled) 그녀의 스타일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특유의 어휘들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러웨이의 저작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신어(Newspeak)들로 가득 차 있다 할 수 있는데, 오웰과는 다소 다른 의미에서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봐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옮긴이 해제에서도 밝히듯, 이 책의 번역은 옮긴이에게 트러블이며(384-385), 독자들에게도 트러블이다. 오역도 있고, 논의의 여지가 있는 번역어도 있다. 어떤 번역어에 대해서는 완전한 오역이라고 할 수도 있고, 어떤 번역어에 대해서는 그것보다는 이것이 더 나은 번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것에 대해서는 딱히 대안은 없는데,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옮긴이는 하나의 영단어를 맥락에 따라 다르게 옮기는 경우도 있고, 하나의 우리말로 일관하여 옮기는 경우도 있다. 일관적으로 옮기는 경우 보통 그것은 그 저작 안에서 개념의 지위를 지니고 있는 단어이거나 저자 특유의 수사인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를 개념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저자에게 특유한 수사로서 일관되게 번역해야 할 단어는 무엇이고 맥락에 따라 다르게 번역해도 되는 단어는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 어떤 단어들은 한국어로 옮기지 않고 음차를 하여 영어 그대로 표기하는 반면, 어떤 것들은 어색한 한국어로 옮겨지기도 한다. 몇 가지로 나눠 정리해 본다.

 

1) 역자가 택한 번역어가 부적절하거나 부자연스럽다고 생각되는 경우

- 대표적인 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prick의 번역어로 음경을 택한 것이다(73, 74, 85, 252). 그냥 프릭 테일이라고 음차하는 것도 음경 이야기보다는 나을 것 같다.

- 서론 첫 장부터 나오는 트러블의 어원에 대한 설명으로 불러일으키다”(7, 375)로 번역되는 stir up은 그보다는 뒤집어 섞다헤집어 놓다가 나아 보인다. 이는 젓가락으로 재료들을 뒤집어 볶을 때도 쓸 수 있고, 맑은 냇물에서 물장구치면서 흙탕물을 일으킬 때도 쓸 수 있는 단어이다. “불러일으키다는 이로부터 유추된 말로 훨씬 더 부차적이다.

- “오만한”(97, 167, 171, 185)으로 일관되게 옮겨지는 bumptious의 경우 그 문장들을 읽어보면, “오만한이라는 번역어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반면, “오만이 문맥 속에서 자연스러운 경우(102, 172)arrogant를 옮긴 경우이다. bumptious의 어원이 bumpfractious이고, 그것이 젊은이의 특성을 주로 서술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좌충우돌하는정도로 번역했을 때 훨씬 자연스러운 것 같다.

- involution안으로 말림”(121, 152, 166, 166-7)으로 일관적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의 동사 involve참여하다”(123, 127)로 번역된다. 썩 좋은 대안은 아닌 것 같지만, involution연루, involved연루되다로 옮기면 어떨까?

- 라투르의 개념 Earthbound 또는 earth-bound땅에 뿌리박은 것들”(75), “땅에 붙박인 것”(177)으로 직역하는데, “어스바운드라고 음차하기는 그렇지만, 저 한국말은 너무 부자연스럽다. “지박체또는 땅붙이어떤가?

- “합리적()”(152, 156, 300)으로 옮긴 sensible감각가능한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에서 sense“It makes sense.” 또는 “That’s a nonsense.” 등에서 쓰는 말이 되는이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명사로는 감각”, 동사로는 감각하다의 뜻을 갖는 경우이다. 그래서 믿음의 대상과 반대되는 것인 실재의 감각가능한 대상을 목적어로 취할 때 쓰는 말이다.

- babies아기가 아니라 자식”(176, 295, 298, 299)으로 번역한 이유가 무엇일까? 카밀 이야기를 보면 한 아이는 세 명의 부모(parents)를 갖는데(297), 그 부모에게 이 아이들이 자식이 아니면 무엇인가? “아기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2) 한국어로 옮기지 않고, 음차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경우

- kin친척”(9, 177-9, 293, 295, 296, 298, 299)으로 Oddkin기이한 친척”(9, 11, 13, 209)으로 번역하는데, 그냥 아드킨이라고 음차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싶다. 옮긴이 해제(385)에서 친척으로 번역한 이유를 드는데, 별로 설득력이 없다. 해러웨이의 ”, “아드킨은 핏줄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지속적이고 밀접한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가 친척이라고 쓰는 말과 정반대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말로 풀어서 오래된 가까운 지인”,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막역지우"라고 번역하는 것도 이상하다.

- “정결한”(163)이라고 번역된 kosher유대교 율법에 맞는 음식에 쓰이는 말인데, 그냥 코셔로 음차하는 것이 맞다.

 

3) 개념의 지위를 부여하여 일관적으로 번역되어야 하면서 다른 개념과 구분되어야 하는 경우

- 설명하기가 좀 힘든 경우인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원서의 상이한 두 단어 – assemblage(71, 77, 80, 108, 109, 174, 178, 302)와 라투르의 개념인 collective(75, 77, 93)가 모두 집합체로 동일하게 번역되어 있는데, 서로 다른 말로 구분해줘야 할 것 같다. 특히 assemblage는 영어책의 색인에도 올라가 있는 엄연한 개념이다. 그런데 옮긴이는 이를 집합체로도 번역하고, “무리”(68, 100, 172, 174), “배치”(247), “군집”(270, 271), “결합(하면서)”(109) 등으로 다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한국말로 번역하기 힘들면 아상블라쥬라고 음차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6. 기타 오역 및 어색한 번역

:

원서 쪽

최유미 국역 (마농지)

대안적 번역 제안

28: 3-4

12

파트너들이 어떻게 유능하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

파트너들이 유능하게 되는 방법이다.

33: 3

16

행동가

행위자 (agents)

44: 6

23

덜 합법적인가?

덜 정당한가?

51: 17-18

28

낙태 반대

생명 존중 (prolife)

51: 19

29

불공평한

불평등

73: 11

39

병 하나 상자 하나 통 하나. 소유자 하나. 수취자 하나.“

병 하나 단지 하나 (누락) 상자 하나 통 하나. 손잡이(holder) 하나, 용기(容器, recipient) 하나.

73: 5

40

안 좋은 것으로,

더 안 좋은 것으로,

74: 10-11

40

약간의 물과 거저 ... 껍질의 사소한 굴곡이

아주 조금의 물, 누군가에게 전해주거나 누군가로부터 받은 한 줌의 씨앗들을 담을 수 있는 조개껍질의 약간의 굴곡이

74: 14

40

껍질과

조개껍질과

77: 10

41

귀중한 비유

풍부한 비유

77: 15

42

지저분한 살기와 죽기가 뒤죽박죽된

살기와 죽기가 어지럽혀진 채 뒤죽박죽된

77: 19-20

42

사건이어야

(affair)이어야

78: 2

42

합법적

정당한

79: 11-12

43

않지만 다른 것을 제안하지는 ... 분명히 한다.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지만 다른 것을 제안하지는 않는다.

79: 16

43

주요부에서

뼛속까지

81: 4-6

43-44

가이아는 자율-생산적이다. ... 안정돼 있지만

가이아는 어떤 조건에서는 자율-생산적이어서, 자기-형성적이고, 경계가 유지되고, 역동적이면서도 안정적이지만,

81: 13

44

사고를

통상적 사고를

88: 9-10

48

16~17세기의

장기 16~17세기의

89: 3

49

필연적인

결과적인

92: 9

50

효과가 없었거나,

효과가 없었다고, 만약 그것이 효과적였다면

93: 8

51

우리에게 인정된 무질서는

기존에 확립된 무질서가

93: 16-17

51

인류세를 상징한다.

인류세의 형상을 띤다.

98: 22

55

그들은 식사 중이며, 빵과 함께 있고, 땅의 반려종이다.

그들은 식탁에서 빵을 함께 먹는 지구의 반려종이다.

99: 11

55

찌르며 삼키는

쏘며 빨아대는

100: 16

56

자기충족적인 예측

자기실현적인 예언

102: 18

57

개체주의를

개인주의를

108: 10

60

안전하고 온전한 존재

안전하고 건강한(sound) 존재

109: 19

60

소유욕 강한

소유적

110: 4

60

그녀가 가장 중요시하고 강렬히 사랑한 것은

그녀의 첫 사랑이자 가장 강렬했던 사랑은

113: 20

62

발생학, 발달,

발생학과 발달,

121: 8

67

이 크리터들은

비판자들(The critics)

122: 10-11

68

세계의 캐리커처이다.

세계의 어떤 일면성을 과장한 캐리커처일 뿐이다. [부연 의역]

122: 16

68

포획으로 인해 얽힘이 풀릴 수 없다.

포획으로 인한 얽힘을 풀 수 없다.

123: 19

69

덧없는

순간적인(fleeting)

137: 15

78

DNA

DNA라도 이보다

160: 3

93

초래했고, 애초의

초래했고, 1차 휄티의 결과로 생긴 애초의

163: 3-4

95

정결한 나바호-추로 양 육포

나바호 추로 양 코셔 육포

173: 11

100

뒤에 오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177: 15

102

-지하적인 문제가

-지하적 존재들의 관심이

196: 8

143

부모는

양육 부모는 (child-bearing parent)

208: 5-6

150

유토피아가 담보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유토피아의 상실을 방지함으로써

212: 9

153

공생을

-(sympoiesis)

222: 5-6

160

격정적이고 ... 세계였다.

인정은 격정적이고 짜릿하면서도 위험하였다.

225: 1

162

2340

퇴비주의자들의 서고에 있는 카밀4의 일기를 보면,(번역 누락) 2340

250: 8

179

낡은 이야기라고

오래된 이야기라고

250: 29

180

까다로웠다

간지러웠다

255: 9

183

가끔

때로는

258: 13

185

Capitalism and the Web

Capitalism in the Web [원서의 오류]

259: 22

185

그들의 세속주의가 방황하긴 하지만,

그들의 확고한 세속주의가 이를 방해하긴 하지만,

259: 27

185

서양 마르크스주의자의

서구 마르크스주의자의

277: 25

197

전통적으로 산아 제한을

전통적으로 대가족을 원하지 않았고(번역 누락) 산아 제한을

278: 8

197

낙차가

감소율이

283: 9

200

냉담한

러브리스(Loveless, 사람 이름 고유명사)

283: 24-25

200

멕시칸 부족 출신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멕시코 원주민 타우어링 하우스 부족 출신이다.

291: 23

206

민족 관련

민족(Ethnos, 저널명, 고유명사)에 실린

 

 

 

7. 마치며

번역에 대한 내 생각의 기술이 뾰족한 막대기로 다가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자와 출판사, 그리고 이 책의 진지한 독자들의 캐리어백에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쓸모있는 선의로 받아들여지기를, 그래서 이 책에서는 누락된 원서의 세 장들까지 포함된 제대로 된 번역서의 공-산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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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 - 하이브리드 세계의 하이브리드 사상
아네르스 블록 & 토르벤 엘고르 옌센 지음, 황장진 옮김 / 사월의책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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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더위, 매미소리, 동네 공사, 기저질환이 될지도 모르는 새로 생긴 병, 헬스장에서 샤워를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시작한 두 시간의 밤 산책과 함께 한 20218월초의 일주일을 온전히 이 책만 읽었다. 나한테는 그런 학자/저자가 있다. 실제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는데 읽고 있는 책들도 주변 사람들도 계속 이야기하는 사람, 잘 모르면서 모른다 못하고 조금은 아는 척하는 것이 계면쩍어서 언제고 읽어야 하겠구나 혼자 생각하면서도 막상 읽기 싫은 학자. 읽기 전부터 그 도저함에 주눅들게 하는, 또 나의 익숙한 사고방식으로는 쉽게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그런데 책도 두껍고 어려워서 다른 일들을 물리고 책을 펴기 어렵게 하는 학자.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늘 그 옆에 있는 다른 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나름 정당해 보이는 핑계를 만들어 미뤄두는 해찰질(procrastination)의 대상, 그 학자 중에 한 명이 브뤼노 라투르였다. 나는 책을 끝까지 못 읽고 중간에 포기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데, 다른 네 권의 책을 동시에 각각 읽다가, 그것들을 제끼고 이 한 권을 일주일 동안 잡고 있었다. 방금 다 읽었다. 말 그대로 나처럼 라투르를 처음 읽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소개서이다. 그리고 나는 이 브뤼노 라투르라는 행위자-연결망의 작은 마디로 새로 편입되었다(21). 라투르가 직접 쓴 책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읽을 수 있겠다는 용기를 넘어, 읽고 싶다는 마음도 갖게 했다. 물론 아직 commitment가 그리 크지는 않다. 라투르를 잘 알거나, 철학적 사유에 익숙한 이라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1.

이 책은 덴마크의 사회학자 아네르스 블록과 STS 연구자 토르벤 엘고르 옌센이 라투르를 소개한 책으로 2011년에 영어로 출판되었다. 이들은 라투르가 올가와 함께 쓴 실험실 생활(1979)부터 7장에 실린 인터뷰가 이뤄진 2008년까지 라투르의 지적 여정을 네 정체성들 또는 라투르의 네 얼굴들(47)로 분석하여 본론인 2~5장에서 살펴보는데, 그 구성이 매우 탄탄하다.

 

<> 책의 구성

라투르의 정체성

학문

주제

주요 주장 / 비판대상

대표작 / 주요 개념

2

과학인류학자

인류학

과학

과학적 사실은 구성되는 것; 인간과 사물 간의 동맹 / 과학적 사실에 대한 인식론적 설명 (대응이론, 확산이론); 마키아벨리; 과학적 실재론;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실험실 생활(1979), 프랑스의 파스퇴르화(1984), 젊은 과학의 전선(1987) / 문서의 병렬, 기입, 사실구축자, 병참, 블랙박스(234), 번역(세르), ANT, 행위소

3

근대성의 철학자

철학

근대성

근대성은 1600년대에 확립되기 시작한 자연과 사회의 분리에서 유래(111); “근대 헌법은 이분법을 생산·유지(114~) / 사회 vs. 자연 이분법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3) / 대표(119, 222), 정화(123), 집합체(138, 205)

4

정치생태학자

정치이론

생태학

인간과 비인간의 하이브리드로서 자연의 의회” / 초월적 개념으로서의 Nature & Society

판도라의 희망(1999),

자연의 정치학(2004) / 사물의 의회(143, 158, 184), 인식론적 경찰(161), 코스모폴리틱스(161), 순환준거(164), 사물정치(169), 우려물(172)

5

결합의 사회학자

사회학

결합

사회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설명되어야 함; 행위자들을 따라가라; 비근대적 사회학은 인간 행위소와 비인간 행위소의 이종적 연결을 추적해야 함; 규모는 행위자 자신의 성취(238) / 사회 개념(205); 전통적 비판사회학 (뒤르케임, 부르디외); 비판적 거리두기

사회적인 것의 재조립(2005) / 상호객관성(224), 올리곱티콘(235), 파노라마(237), plug-in(239), 비판적 근접성(240, 274)

 

이처럼 탄탄한 구성 안에 라투르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들(세르, 들뢰즈, 화이트헤드, 가핀클, 퓌레, 듀이, 볼탕스키, , 타르드 등), 위의 표에 보이는 현란한 개념들, 그 개념들을 통해서 구사된 분석과 주장들, 그리고 그것들이 겨냥하고 있는 비판 대상들이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 2장은 연구자로서의 성실성이 돋보였고, 자연/사회의 근대적 이분법을 비판하는 3, 4장은 공감하며 재미있게 보았고, 5장은 의혹, 경악, 혼란의 순간을 거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근데 그럼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방식은 어떻게 되는거지?”하는 상황까지 왔다. 라투르는 대답보다 질문을 더 많이 남긴다(197). 저자들은 독자의 이러한 반응을 미리 예상한 듯, 라투르에 대한 가능한 반론들을 일별하고, 그에 대해 라투르라면 함직한 대답들을 제시하는데, 이 부분도 재미있게 읽었다(244~248).

 

사실 나의 혼란을 정리하고 싶은데, 아침 일찍 병원에 가야 하고, 내일부터는 오늘 온 다른 책을 읽고 싶기 때문에 넘어간다. (, 이 놈의 해찰질만 안 했어도 난 지금보다는 나은 인간이 좀더 일찍 되어 있을거다.)

 

2.

라투르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듣고 맡게 된다. 산책하며 듣게 되는 여러 생물과 무생물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도 조금 다르게 들리고, 집안의 사물들도 달리 보이고, 가끔 안고 걸어야 하는 개도, 알러지 때문에 멀리하는 고양이도, 몸에 나는 두드러기도, ZOOM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도, 베지태리언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눈치보는 상황도, 배달된 양장피도, QR 인증도, 백신도, 마스크도... 인간간의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를 늘 매개하고, 그 관계에 늘 개입하는 사물들을 비로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라투르를 읽고 세상을 다르게 느끼는 것과 라투르처럼 비판적 근접성을 유지하면서 그 어떤 메타담화도 없이 인프라언어(242)로 인간과 사물 간의 이종적 연쇄를 재현하고, 소외된 인간과 소외된 사물들을 대표함으로써 소위 인간주의적 비판 사회학이 못해내는 것들을 실제로 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원할지언정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종류의 과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여간 지금은 그렇다.

 

3.

저자들은 라투르의 비판의 수행적(performative) 성격을 강조한다(126, 148, 198).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에 대한 정의의 이중적 성격에 주목한 프랑수아 퓌레를 인용하며, 당시에 혁명은 (1) 사건에 대한 정의이면서 동시에 (2)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렇지 않았다면 가질 수 없었을 용기와 낙관주의를 고취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같은 논리로 자신이 근대적이라는 믿음은 그 믿는 자들, 곧 근대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얻게 해줬다. 수행성에 대한 이런 강조는 비판대상뿐만 아니라, 대안적 질서화 양식을 확립하려는 시도에서도 관찰된다. 라투르의 비근대 헌법이나 사물의 의회”는 적극적인 노력이며 선언, 우리로 하여금 다르게 행동하도록 고안된 해석이다. 단순한 기술(description)이 아니라, 제안이고 개입인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수행성을 강조하다 보면,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면 찬성할 수 없는 주장이 펼쳐진다. “자본주의에 대항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라투르는 먼저 그것의 존재를 믿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247). 이 말을 좋게 생각하면, ‘자본주의에 대해 우리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을 근원적으로 재검토하여야 한다정도로 읽어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존재해왔고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일 뿐이라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이 떠올랐다. 이들은 라투르에게는 매우 전형적인 비판사회학자들일텐데, 이 부분에서는 일치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잘 모르면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능주의자 에밀 뒤르케임의 사회적 사실의 존재에 집착하는 근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다 보면, 라투르가 이를 비판하며 했던 말을 나는 뭘로 들은건가 하는 생각이 또 드는 것이다. 아휴 참... 라투르가 직접 쓴 글을 읽을 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의문들을 기억해낼 수 있으면 좋겠다.

 

4.

라투르를 잘 모르지만 번역은 매우 훌륭한 것 같다. 다만 interdisciplinary학제적으로 옮긴 것은 잘못이다. “학제간으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이 형용사가 수식어가 아니라 서술어로 쓰일 때, “학제간적이다라는 심히 이상한 한국말을 만드는 것을 기피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오역이다. 255쪽을 보면, post-disciplinary탈학제적으로, cross-disciplinary교차 학제적으로 제대로 옮겼는데, inter-disciplinary학제적으로 옮겨졌고,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러하다. 이상으로 진지한 책에 대한 날라리 리뷰를 마쳐야 하겠다. 읽을 때에는 쓸 말이 장마다 넘쳤는데, 어디로 다 증발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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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is 2021-08-19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상세하고 생생한 리뷰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리뷰로 이 책에 대한 훌륭한 안내를 받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학제적˝이라는 번역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국어사전(네이버)에 이렇게 정의됩니다.
학제: (1) 학교 또는 교육에 관한 제도. (2) 학문 간의 경계를 아우름.
학제적: 여러 학문에 관계되는 성격을 가지거나 그 범위가 여러 학문에 미치는

간학제적이라고 번역하시는 분도 있으나 너무 일본어 느낌이 강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리뷰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

에로이카 2021-08-1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nto님 안녕하세요? 만약 ˝학제적˝을 네이버 국어사전 (2)의 뜻으로 쓴다면, post-disciplinary, cross-disciplinary에서 접두사가 붙는 어간, disciplinary를 ˝학제적˝으로 번역할 수는 없겠지요? 번역이 어렵다는 것은 압니다. 다만 저는 그저 저 번역에 반대하는 독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번역은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해러웨이의 ˝트러블과 함께 하기˝를 읽고 있는데, 번역이 트러블이네요.. 하.. 이것도 참 라투르적이군요.. ㅋㅋ

kois 2021-08-19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네. 번역은 참 어려운 것임을 새삼 느낍니다. 해러웨이 책은 중간에 몇 장을 빠뜨리기까지 했더군요 좋은 리뷰, 도움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 즐거운 공부 되시길 바랍니다 !!!
 
현자와 목자 : 푸코와 파레시아
나카야마 겐 지음, 전혜리 옮김 / 그린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0.

20216월 중에 읽은 책. 600페이지쯤 되는데 매일 보지는 못해서 보름 조금 넘게 걸렸다. 이전에 본 아렌트, 데리다 해설서처럼 서양 학문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훈고학적 해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두껍지만 내용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고 번역도 훌륭해서 막힘 없이 잘 읽혔다. 번역을 탓하지 않고, 번역서를 읽은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1. 요점

『육체의 고백』이 출판되기 전인 2008년에 일본에서 출판된 이 책은 푸코의 1980년대 저작들 - 『주체의 해석학: 1981-82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성의 역사』 2, 3(1984), Wrong-Doing, Truth-Telling (1981년 루벵 가톨릭대학 강의) 에서 언급된 고대 그리스 철학(현자)과 초기 기독교 교부철학(목자)에서 전개된 고백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주체인 자기개념의 전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요점만 이야기하자면, 전자에서 자기는 배려의 대상이었던 반면, 후자에서 자기는 부정과 포기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된다. 자기 포기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저주해 마지 않았던 니힐리즘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겠다. 전자, 특히 소크라테스적인 진실 말하기에서는 주로 스승이 말하고 제자가 들었지만, 후자에서는 제자가 말하고 스승이 귀를 기울인다. 전자의 목표가 자기 배려와 자기 통치라면, 후자의 목표는 자기 포기, 다른 말로 타자의 권력에 복종하는 주체의 형성이다 (575).

고대 그리스의 파레시아와 초기 기독교의 고백은 모두 타자와의 비대칭적인 관계에서 행해지는 진실 말하기이지만, 이처럼 그 효과는 전혀 다르다. 파레시아가 리스크를 감수하며 용기있게 진실을 말하는 행위인 반면, 기독교의 자기해석과 자기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말해지는 내용의 진실 여부가 아니라, 그 말한다는 행위를 통해 공고화되는 전면적 복종과 자기 포기이다. 이 자기 포기야말로 예술작품으로서 자신을 가꿔가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고, 『감시와 처벌』에 나오는 순종적이고 쓸모있는 신체의 또 다른 모습이다.


2. 『육체의 고백』과의 관계

『육체의 고백: 성의 역사 4권』을 읽기 전에 보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 책을 읽었던 덕에 이 책을 더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번 『육체의 고백』 리뷰(https://blog.aladin.co.kr/eroica/11540266)는 다시 봐도 너무 난삽한데, 그 때는 잘 몰랐던 교부 철학자들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활동한 이들였는지를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육체의 고백』에서는 잘못 번역되었던 엑소몰로게시스와 엑사고레우시스도 어쭙잖게 한국말로 번역되지 않고 원문대로 표기되어 있어 그 뜻이 오도되지 않는다. 그 때는 엑소몰로게시스는 옷차림이나 행위로, 엑사고레우시스는 말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정도만 알았는데, 전자는 수도원 밖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후자는 수도원 안에서 이뤄졌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육체의 고백』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욕망하는 주체(따라서 고백되어야 하는 주체)와 권리의 주체(따라서 책임져야 하는 주체)의 포개짐이 서구 역사에서 성행위의 이론적 위상 변화를 갖고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책 『현자와 목자』에서 법적 주체와 관련된 측면은 주목되지 않는다.


3. 마치며

참을성을 갖고 꾸준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고, 나중에 그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라면 열 페이지도 안 되는 결론을 대신한 글을 읽으면 될 것 같다. 역자 후기는 푸코 초심자들에게 유용한 내용으로 아주 쉽고도 유려하게 잘 쓰여 있다. 파레시아의 핵심도 잘 정리되어 있고, 그것이 초기 기독교의 고백과 어떻게 다른지도 명확히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푸코의 1970년대 중반 이후 연구의 전반적 맥락을 잘 보여준다.


4 문득 생각난 것, 더 생각해볼 것 등

1) 역시 푸코에 대한 나의 주요 관심은 1975년부터 1979년 사이의 저작에 한정된 것 같다. 그 이전 저작들도, 그리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그 이후  1980년대 저작들도 약간의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일 뿐, 지금 당장 다른 것들을 제쳐두고 공부할 엄두는 내지 못하겠다.

2) 『성의 역사』 4부작을 만약 다시 읽는다면, 1권부터 4권까지 차례대로 읽을 것이 아니라, 이 책 『현자와 목자』를 길잡이삼아 2, 3, 4, 1권의 순서로 읽어야 할 것 같다. 2, 3권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쾌락의 활용과 자기 배려를 다루고 있고, 4권이 초기 기독교에서 리비도에 주목하게 되면서 고백과 참회(엑사고레우시스/엑소몰로게시스)가 자기 포기의 효과, 곧 예속적 주체화를 가능케 하는 진실 말하기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가 각주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책의 가장 끝부분(585)이다.

3) 역자 후기를 감탄하면서 읽었는데, 권력(관계)에서 통치성으로의 (연구대상이라기보다는) 문제설정(problematique)의 변화를 정리한 부분(598-599)을 읽으면서 든 느낌적인 느낌(그러니까 아직 사유는 말할 것도 없고 생각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무언가 말로 정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곧 통치성 연구로의 전환의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통치성 연구로의 변화가 과연 이전의 권력관계 연구에 비해 더 가치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물론 파레시아와 대항품행과의 연관 속에서, 곧 정치와 윤리의 통합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움직임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규율권력과 생명관리권력이 제기한 문제들, 또 그것이 야기한 논란들이 통치성 논의를 통해 해결된다기보다는 회피되는 것이 아닐까? 그냥 문득 든 의문이지만, 답이 빠르고 쉽게 나올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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