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사유가 가장 무겁게 흘러가는 액체라고 생각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1932) , 조지 오웰 『1984』(1949)를 논하며 전자는 낙관적 디스토피아를, 후자는 부정적 디스토피아를 제시하며, 상당 부분 예지적이었지만 그것이 아직도 유효한가 묻는다. 특히나 『1984』에 대해서는 "플리니우스Gaius Plinius의 『박물지Historia Naturalis』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사이 어디쯤엔가 어중간하게 자리매김되었다"(p46)고 말한다. 이 시대는 더이상 '파놉티콘'과 '빅 브라더'로는 설명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율하며 『멋진 신세계』,『1984』를 읽었던 사람은 아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하며 이 책을 펼치면 된다.

그렇게 보무당당히 말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 책은 2000년도에 출간되었는데, 현시점(2015년 한국과 세계)에 대입해도 유효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유효하고 비껴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미 그런 책이 나왔나? 이 책에 대해 어떤 이들은 최종 해법은 안 나와 있잖아! 투덜대기도 한다. 사회학자는 진단가이지 (우리가 언제나 기다리는)지도자가 아니다. 바우만이 말하는 이 액체 시대는 지도자를 통한 혁명 시대도 될 수 없다. 우리는 예전 혁명 시대의 '시민'이 아니라 내·외적으로 아주 '개인'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아래 요약들은 본문 중에 내가 눈여겨 보는 현재상황에 맞춰 발췌해 소제목과 공감 단상을 달았다. 이 리뷰는 책의 이해를 위함이 아니라 지극히 내 주관에 따른 정리다. 당신은 내 글을 의심해야 하며 자신의 관점으로 이 책을 볼 필요를 느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 책을 쓴 의도이자 그 이전 테오도르 W. 아도르노의 뜻이지도 않을까 생각한다.

책읽기는 그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현실도피성 카니발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작가는 우리를 그러하게 이끌어주고 모이게 만든다. 그 이후는 우리 몫이다.

나는, 사유는 최대한의 검토(반드시 빈틈이 있겠지만) 끝에 육화되어야 하고 그를 통해 우리 행동이 조금이라도 나은(발전이 아니라) 세계를 만드는데 보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든 개인사든 이 헛점많은 독서기록이든 그 속의 많은 실패와 실수 또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다(지금 한국 현실은 어떤 보상도 불가라고 말하는 듯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쓸모있는 생각을 최대한 모아야 할 때이며, 서로를 돕고 격려할 때다. 나는 뼈아프게 내 생각의 단점들을 고칠 것이다. 자신이 틀렸을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이 하나의 반성이기도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매일 사유가 너무 버겁지만 이곳의 많은 이들 또한 그러했다고 말하고 있다.  

기 드보르 "인간은 자기 조상을 닮은 것보다 자신의 시대를 더욱 닮는다."(p207)는 말은 매우 끔찍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희망적이기도 한 주문 같다.   

 

 

ㅡAgalma

 

 

 (p8) 액체는 자신이 어쩌다 차지하게 된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 액체는 공간을 차지하긴 하되 오직 '한순간' 채운 것일 뿐이다. 어떤 의미로 고체는 시간을 무효화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액체는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고체를 설명할 때, 우리는 시간을 송두리째 무시할 수도 있지만, 유체를 설명할 때 시간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이는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다. 유체에 대한 설명은 하단에 날짜가 있어야 하는 사진들과 같다.(…중략…) 우리는 액체 일반반이 고체로 된 모든 것들보다 더 가볍고 덜 '무게가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가벼움'이나 '무게 없음'에서 이동성과 무일관성을 연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험상 가볍게 여행할수록 더 쉽고 빠르게 이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장 해방]

 

§  사회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길 멈춘 현대 액체성의 특징

 

⊙ 비판에 대한 호의 - 캠핑용 차량 캐러밴 단지의 방식(포드주의적 공장도 이에 해당)

운전자(사회 구성원-Agalma 임의)들은 관리자에게 (p42) 원하는 것이 것이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고 볼 수 있는 소망, 즉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고, 간섭받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 대가로 그들은 관리자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사용료를 제때 내겠다는 약속을 한다. 돈을 내기 때문에 때로는 요구사항이 있을 때도 있다. 제공받기로 한 것들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때 이들은 몹시 단호한 경향을 띤다. 그러나 그 외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지내고 싶어하며 그렇게 되지 못할 때는 화를 낸다. 가끔씩, 더 질 좋은 서비스를 목청껏 외치기도 하는데, 일단 목소리를 높이면 꽤나 떠들썩하고 단호하여 원하던 것을 얻기도 한다. 무시당했다고 느끼거나 관리자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캐러밴 생활자들은 불만을 늘어놓으며 자신들의 몫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동 주택 단지의 관리 철학에 질문을 던지거나 이를 두고 교섭하려고 마음 먹는 일은 결코 없다. 기껏해야 앞으로 이곳에 다시는 오나봐라 하며 친구들에게도 이곳이 좋지 않다고 말해주자고 마음먹는 정도이다. 각자 자신의 일정에 따라 단지를 떠날 무렵, 그곳은 이들이 도착했을 때 그대로 남아 있다. 뜨내기 야영꾼들에게 좌우되지 않고 또 다른 야영꾼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행여 뒤이어 도착한 여행자 무리들이 연이어 특정한 불만을 계속 품게 된다면, 차후에 똑같은 불평이 반복되지 않도록 편의제공 사항이 바뀔 수도 있다.

 

⊙ 성찰과 선택의 자유을 잃은 개인화 - 의자 빼앗기 놀이

(p55~56) 어떠한 '토대'도 '재구축'에 제공되지 않으며, 선결조건으로 추구되는 종류의 토대들은 무너져내리기 쉽고 '재구축' 작업이 완성되기 전에 종종 사라지기도 한다. 그 대신 의자 빼앗기 놀이에 사용되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지닌, 개수와 위치가 변화하는 의자들이 있다. 이 의자들로 인해 개개 남녀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 놀이는 결코 '성사'되는 법이 없다. 조금의 휴식도 없으며, 우리가 무장을 풀고 느긋하게 더 이상 조바심 내지 않을 수 있는 최종 목적지에 당도했다는 만족감도 없다. 기반이 해체된 개인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걸어온 길의 끝에 새로운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전망은 없다.

 

 

(p57) 운명으로서의 개인성과 자기 주장을 위한 실제적, 현실적 능력으로서의 개인성 간에 점차로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

 

⊙ 공동화될 수 없는 무관심

(p58) 개인의 힘이 단독으로는 아무리 나약하고 무능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집단적 입장과 행동으로 결집된다면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 착착 이루어질 것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문제는 개인 차원의 고충을 그런 식으로 집중시켜 모아서 공동의 관심사로 만들어 공동 행동을 취하는 것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과제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모든 개인의 운명이 떠안고 있는 가장 흔한 고충들은 더해질 수 없는non-additive'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고충들은 '전부 더하여' '공동의 대의명분'의 합으로 이끌어지지 못한다. 서로 나란히 놓일 수는 있겠지만 하나로 응결되는 법이 없다. 개인의 고충들은 그 발생에서부터 다른 사람들의 고충과 연계될 수 있는 접점이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p59) 또 다른 장애물이 있다. 토크빌이 이미 오래전에 의심했던 것처럼,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한다는 것이 어쩌면 그들을 '무관심'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암시하는 바, 개인은 시민의 최악의 적이다. '시민'은 시의 복지를 통해 각자의 복지를 추구하는 경향을 띤 사람이다. 반면 개인은 '대의명분' '공공의 선' '선의의 사회' 혹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미온적이거나 회의적이며 경계심을 갖는다. '공공의 이익'이란 것이 각 개인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것 이외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개인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것 이외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개인이 모여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들 공동의 노력이 어떤 다른 이득을 가져올 수 있든지 간에, 그것은 개개인이 각자 적합하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도 그러한 추구를 돕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공의 힘'이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상하고 희망할 수 있는 유용한 것은 두 가지뿐인데, 그 하나는 개개인이 자기 방식대로 살 수 있도록 '인권'을 지켜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것이 평화 속에서 ㅡ 실제 범죄자이거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강도나 성도착자, 거지, 그 밖의 다른 불쾌하고 유해한 이방인들이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통해 개인의 신체와 재산의 안년을 수호해줌으로써 ㅡ 추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문제를 발견한 사유는 우리를 구할 수 있는가

"사유 속의 욕구가 우리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 테오도르 W. 아도르노『부정의 변증법』

사유를 통한 실행 명령은 지배로 변질되고, 실행 거부는 현상태의 방치가 될 것이다.

(p71) 사유하는 삶vita contemplativa과 행동하는 삶vita activa 사이의 딜레마는, 별로 탐탁지 않다는 점에서만 닮았다고 할 두 가지 전망 중 택일을 하는 문제로 응축된다. 사유를 통해 유지되는 가치들을 타락으로부터 잘 보호할수록 그들의 삶에 봉사해야 할 그 가치들이 그들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자꾸만 축소된다. 그 가치가 그들 삶에 끼치는 영향이 클수록 혁신을 촉구하고 장려했던 가치들에 상응하는 개선된 삶을 떠올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된다.

 

 

 

 

 

 

[2장 개인성]

 

§ 자본주의 시간 속 삶의 딜레마 - 죽음의 방식만 다를 뿐이다

'무거운 자본주의'도 '가벼운 자본주의'도 우리를 구해주지 못한다. 뉴스에서는 침몰과 추락 소식이 연일 들려온다. '세월호 사고'는 21세기 한국 자본주의 속 개인의 침몰 상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예였다.

(p96) '무거운 자본주의'호에 올라탔던 승객들은 선장의 갑판 위에 오를 수 있는 선택받은 일부 선원들이 목적지로 배를 몰고 갈 것이라 믿었다(이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승객들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통로마다 큼지막한 글자로 내걸린 규칙들을 익히고 준수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써도 되었다. 이들이 불평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때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는 선장이 배를 빨리 항구에 대지 못했거나 승객의 편의를 지나칠 정도로 무시한 데 대한 항의였다. 반면 '가벼운 자본주의' 항공기에 탄 승객들은, 조종실은 텅 비어 있는 상황에서, 비행기가 어디로 날아가고 어디에 착륙하며 누가 공항을 선택하는지, 또한 도착할 때까지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규정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등등의 정보를 '자동운항'이라고 적힌 정체 모를 블랙박스로부터 얻을 방도가 전혀 없다는 공포를 경험할 것이다.

 

 

§§ 소비라는 욕망의 경주트랙을 초월하는 '소망'이라는 시간의 출현

(p117~118) 욕망은 그 자체가 이의제기나 질문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목적이 된다. 다음 바퀴에서 포기되거나 그다음 바퀴에선 아예 잊혀지는, 뒤따르는 다른 모든 목적들은 주자를 계속 달리게 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한다. 두어 바퀴를 있는 힘껏 최대 속도로 달려 다른 주자들이 기록을 경신할 만큼의 속도를 내도록 유도하고 경주에서 빠지는, 경주 운영진이 고용한 '선두 주자', 혹은 우주선이 일정한 속도 이상을 내게끔 한 뒤 분리되어 우주로 떨어져나가는 보조로켓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목적들은 위로가 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을 뿐 아니라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수단보다 광범위하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수단들의 크기와 효율성이다. 이때 경주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수단이, 그야말로 초월적인 수단이 된다. 다른 수단들에 대한 믿음과 필요를 살아 있게 만드는 수단 말이다.

 

(p121) "소비를 자기표현, 그리고 취향과 차별성이라는 개념과 연결 짓고 있다. 개인은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그러나 상품의 지속적 확대에 전념하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입장에서는, 이는 매우 협소한 하나의 심리적 틀인 바, 결국에는 사뭇 다른 심리적 '경제'에 무릎을 꿇는다. 소망은 욕망을 대신하여 소비를 자극하는 힘이 된다."(Harvie Ferguson, The Lure of Dreams : Sigmund Freud and the Construction of Modernit, 1996)

소비자주의의 역사는 환상의 자유로운 비상을 가두고 '쾌락 원칙'을 깎아내려 '현실 원칙'에 지배받는 규모로 줄이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체' 장애물을 무너뜨리고 폐기해온 역사이다. 19세기 경제학자들이 '고체성'ㅡ불변하고, 영구히 제한되고, 유한한ㅡ의 진정한 결집체로 간주했던 '필요'는 폐기되었고, 표출되기만을 기다리는 '내면의 자아'의 진정성에 대한 변덕스럽고 유연한 꿈과 절반쯤 불법적 결탁을 한 탓에, 욕망은 필요보다는 훨씬 유동적'이고 널리 확산될 수 있었으며 한동안 필요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제 욕망이 폐기될 차례이다. 욕망은 그 유용성이 이미 끝나버렸다. 소비 중독을 작금의 상황으로 몰고 온 터라, 이제 욕망은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소비자 수요를 공급과 동등한 수준으로 유지시키는 데는 더 강력하고, 무엇보다도, 더 기민한 자극제가 필요하다. 바로 '소망'이야말로 그토록 필요로 하는 대체품이다. 소망은 쾌락 원칙을 완성시키면서 '현실 원칙'이라는 장애물의 마지막 남은 찌꺼기까지 깨끗이 소각 처분해준다. 원래 가스처럼 형체없는 내용물이 마침내 용기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퍼거슨을 다시 한번 인용해보자.

 "욕망의 용이함이 비교와 허영, 질시, 그리고 자긱 찬미에 대한 '필요'를 바탕으로 하는 곳에서는, 그 소망의 즉시성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매는 우발적이고 예측을 불허하며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구매는 어떤 소망을 표현하는 동시에 실현하는 환상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소망과 마찬가지로 진지하지 않고 유치하다."( Harvie Ferguson, "Watching the world go round: Atrium culture and the psychology of shopping." in Lifestyle Shopping: The Subject of Consumption,1992 

 

 

§§§ 자본주의 시간 앞에 몸이라는 허위성 또는 상품성

개인이라는 협소한 대지밖에 가지지 못한 우리에게 몸은 절대적인 자본이다. 우리는 이윤을 위해 이 몸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보물 '건강'의 적신호는 용납할 수 없다. 질병의 기미는 전쟁의 신호로 파악되고, 난무하는 건강 식단은 치료와 예방책이 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발병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의학의 활발한 개입은 치료를 넘어 더 큰 위험성을 불러온다(성형시술의 폐해와 각종 의료사고를 생각해보라).

(p125) '균형 잡힌 몸매'가 된다는 것은 유연하고 흡수력이 있으며 적응력이 있는, 아직은 겪어보지 못하여 미리 상술할 수 없는 정서들을 겪으며 살 준비가 된 몸을 가졌다는 것이다. 건강이 '더도 덜도 아닌' 식의 상태라면, 균형 잡힌 몸매는 구체적 기준의 육체적 능력은 전혀 지칭하지 않고, 그 능력(무한하면 더 좋고)의 확장 가능성을 지칭한다. '균형 잡힌 몸매'는 예외적이고, 일상적이지 않은, 평범치 않은 것들ㅡ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새롭고 경이로운 것들ㅡ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건강이 '규범적인 것들을 고수라는 것'이라면, 균형 잡힌 몸매는 모든 규범을 깨고 이미 달성한 기준 일체를 뒷전으로 밀어내는 능력을 중시하고 있다.

 

 

 

§§§§ 쇼핑만큼이나 늘어나는 쇼핑의 의미들 - 액막이, 접착성, 일회성

(p130) 강박적/중독적 쇼핑이 정말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또한 밤잠을 설치게 하는 불확실성과 불안이라는 섬뜩한 유령을 몰아내는 대낮의 의식이다. 실상 이것은 매일매일의 의식이다. 슈퍼마켓 선반에 놓인 물건들은 거의 대부분이 '유통기한' 도장이 찍혀 있는 한시적인 것이고, 상점에서 구매가 가능한 종류의 확실성들도 쇼핑을 하게 만드는 첫번째 이유인 불확실성을 확실히 뿌리뽑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액막이 의식은 매일같이 반복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이 게임이 계속되게끔 하는 것은ㅡ그 명백한 미결성과 전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ㅡ액막이 의식들의 놀라운 속성이다. 즉, 이 의식들은 악령을 몰아내는 것(이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이 아니라 그 의식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효과를 지니며 만족을 준다. 액막이의 기술이 존재하는 한, 유령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개인화된 소비자 사회에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모든 일들은 '스스로 하라(DIY)'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쇼핑말고 다른 그 무엇이 '스스로 하는' 액막이 의식의 필요조건에 그토록 잘 부합할 수 있단 말인가?

 

(p133~134) 경험과 삶에서 얻은 정체성은 환상, 혹은 어쩌면 백일몽이라는 접착제가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전기적 경험이라는 완강한 증거처럼 너무나도 강력한 접착제가 있다면ㅡ쉽게 녹아버리고 깨끗하게 닦아낼 수 있는 환상이라는 접착제보다 접착력이 훨씬 뛰어난ㅡ그것이 보여주는 전망은 백일몽이 부재하는 것만큼이나 불쾌하다. 바로 이 때문에 에프라트 체엘론Efrat Tseelon이 언급한 대로, 유행이 그토록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보다 더 약하지도 더 강하지도 않은 딱 알맞은 재료이다. 유행은 "행동에 참여하지 않고도 (……) 그로 말미암은 결과를 감당하지 않고도 그 극한을 밟아볼 수 있는 방법이다." 체엘론이 우리에게 일꺠우는 바, "동화에서 공주의 진정한 정체성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환상적인 복장이 핵심이다. 요정 대모가 신데렐라에게 무도회 드레스를 입힐 때 그녀는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Efrat Tseelon, "Fashion, fantasy and horror",1998)

 

(p136~137) 엠마 로스차일드Emma Rothschild "마케팅에 대한 알프레드 슬론(1875~1966. 제너럴모터스의 총수를 지냄)의 혁신성 - 매년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고, 지속적으로 상품을 업그레이드하며, 상품을 사회적 지위와 연관시켜 변화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인위적으로 심어주는ㅡ은 생산에서의 헨리 포드의 혁신성과 분명한 한쌍을 이룬다. (……) 두 가지 모두 진취성과 독립적으로 사고하려는 의지를 저하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취향의 문제에서도 스스로의 판단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의 기호들을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여기게 되었고, 이를 정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알프레드 슬론은 이후 보편적인 추세가 된 경향의 개척자였다. 상품 생산 전반이 오늘날 '지속력이 있는 사물들의 세계'를 '즉각 구식이 될 수 있도록 고안된 일회용 상품들'로 바꾸었다. 그 결과를 제레미 시브룩은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 상품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점점 상품에게 배달되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성격과 감수성 자체가 상품들과 경험들, 감정들에 (……) 대략적으로 어울리는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개조되어 (……) 이것들을 판매함으로써만 우리 삶의 윤곽이 드러나고 의미가 생기게 된 것이다."(Jeremy Seabrook, The Leisure Society,1988)

 

 

 

 

 

[3장 시·공간]

 

§ 배타적인 유토피아

수도원을 연상케 하는 부유층이 만들어가는 집단주거지, 타인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만드는 이러한 도시 생활의 유형은 광범위하게 퍼져가고 있으며, 조정과 타협을 거부하는 특성으로 서로를 더욱 고립화시킨다.

 

§§ 수많은 이방인의 탄생들 - "공공의 가면"

도시 속에서 우리들의 만남은 노사연의 "우연이 아니야~" 노래가 아니라 (서로를 믿을 수 없는)"과거가 없는 사건"이며, 대개 (언제 끊어져도 아쉬울 것 없는)"미래가 없는 사건"이다. 우리는 잘못된 만남(김건모 곡은 알아서 생각하시고)이 되지 않도록 "예의"를 갖추며 항상 조심하며 경계한다. 그 "예의"는 양날의 검으로서 우리를 가깝게 만들기도 하지만 더 이상의 접근도 막는다. 

 

§§§ 구경거리 공간들 - 소비의 사원들

도시 속 멋진 경관의 빌딩들은 그곳에 입장할 수 있는 허용과 단지 구경만 할 수 있는 거부를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가 공유하는 "콘서트, 전시 공간, 휴양지, 스포츠 공간, 쇼핑몰, 매점"은 서로 상호적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제공하며 "개인적 소일거리" 속에 즐거움만을 찾는 소비자로 만든다. 이 시점에서 알라딘 북플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빈다!

 

§§§§ 교류 과잉으로 인한 이방인 너머 이방인과 우리의 파편적 집착

아래 본문은 많은 인종차별 사태와 국내 거주 외국인 살인사건들에서 나타나는 반응들과 관련해 좋은 돋보기 역할을 한다.

(p175~177)우리 시대에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는 공동체주의를, 이후 근대화 과정 속에서 무력화無力化 혹은 약화될 어떤 본능이나 습관이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데서 오는 거북한 딸꾹질 정도로 설명해버리는 것은 오류라 하겠다. 공동체주의를 잠시 합리성이 실패한 것으로ㅡ유감스럽지만 피하기 어려운 비합리적인 일로, 합리적으로 지향한 '공적 선택'이 의미하는 것들과 노골적으로 대립되는 어떤 일로 치부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모든 사회 무대는 각각의 특정한 합리성을 고무하며, 이를 합리적 삶의 전략 개념으로 투사한다. 따라서 현재 공동체주의의 징후를 나타내는 것들은 '공적 공간'의 진정한 위기, 따라서 공적 공간이 본령으로 삼고 있는 인간 행위인 정치의 위기에 대한 일종의 '합리적' 대응이라는 가설이 그 힘을 얻게 된다.

 

  정치 영역이 공적 심경 토로의 장으로, 친밀함을 공적으로  전시하거나 사적인 미덕과 악덕들을 공적으로 검토하고 검열하는 장으로 좁혀짐에 따라, 정치가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려하는 대신 공적 무대에 모습을 비추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성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살기 좋고 정의로운 사회의 전망이 정치적 담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되면서, (세넷이 이미 이십 년 전에 갈파했듯이 Sennett, The Fall of Public Man) 사람들은 "그들에게 행동이 아닌 의도와 감정만을 소비할 것을 권하는 정치적 배우를 바라만 보는 수동적 관객이 되었다." 그러나 요점은, 관객들이 멋진 구경거리말고는 바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정치가로부터도 그다지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현재 주목받는 다른 분야의 배우들한테도 괜찮은 구경거리를 전혀 바라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대에 오른 다른 구경거리들처럼, 정치 무대 역시 이해관계를 초월한 정체성이 우선이라는 메시지가 무차별적으로 단조롭게 주입되거나, 혹은 진정 중요한 것은 이해관계가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식, 혹은 당신이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누구인가를 강조하는 끊임없는 공공 교육의 장으로 변하고 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는 문제가 더욱더 공적인 관계와 공적 삶의 실제 내용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자아 정체성은, 한때 이해관계로 항로를 삼던 배들이 침몰하자 구조를 기다리는 조난자들이 가장 움켜쥘 법한 지푸라기가 되었다. 세넷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동체 유지 자체가 하나의 삶의 목표가 되고, 확실히 소속되지 않은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공동체의 주요한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협상을 거부하고 이방인을 끊임없이 제거하는 것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댈 필요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다르고 낯선 외래의 '타자'를 멀찍이 거리 두려는 노력, 소통하고 조정하고 상호간 충실할 필요를 사전에 없애는 결정은, 사회적 유대 관계에 새롭게 등장한 취약성과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 실존적 불확실성에 대한, 상상 가능할 뿐 아니라 예측 가능한 반응이다. 확실히 그러한 결정은 오늘날 오염과 정화에 대한 우리의 편집증적 관심, '외부인들'의 침입이 곧 개인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경향, 섞이지 않은 순수함이 곧 위협이 없는 안전이라고 보는 경향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우리 몸 주변으로 남몰래 스며드는 외부인들은, 마치 코와 입을 통해 들어오는 물질들에 대해 우리가 신경을 곤두세우듯, 위협적인 이물질로 인식된다. 이 두 가지 모두 '나의(우리의) 체계로부터 그것(들)을 추방'하려는 유사한 욕구를 충동질한다.

  그러한 욕구는 인종 분리의 정치 속으로 수렴되고 뭉쳐지고 농축된다. 특히 '외국인들'의 유입을 반대하여 자신들을 지키자는 정치에서 특히 그러하다. 조지 벤코의 지적을 보자.(Benko, "Introduction")

  "타자들보다 더 타자인 타자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외국인들이다. 우리가 이제 타자를 구상해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외국인이라고 배제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 병리현상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병리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확고하고 신뢰할 만한 의미가 없는 세상에 헛되이 의미를 강제하려 애쓰는 정신적 병리현상이 아니다. 이는 정치적 병리현상을 초래하는 공적 공간의 병리현상, 즉 대화와 조정의 기술이 시들고 쇠퇴하고, 참여와 상호 헌신 대신 도피와 생략을 하는 현상이다.

  "이방인에게 말 걸지 말라"ㅡ한때 근심에 찬 부모들이 자신들의 힘없는 자식들에게 건네는 충고였다ㅡ는 말은 정상적 삶을 사는 성인들의 전략적 교훈이 되어버렸다. 

 

 

§§§§§ 공간 정복

(p182~183) 이제부터 시간과 공간의 관계는 미리 정해져 있거나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추이에 따르는, 가변적이며 역동적인 것이어야 했다. '공간 정복'은 더 빠른 기계를 의미하게 되었다. 가속화된 움직임은 더 넓은 공간을 뜻했고, 움직임을 가속화하는 것이 공간을 확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쫓고 달리는 게임에 붙은 이름은 공간 확장이었고, 포상품은 공간이었다. 즉, 공간은 가치이고 시간은 도구였다. 그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도구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막스 베버가 시사했듯이, 근대 문명은 운영 원칙인 '도구적 이성'의 대부분은 업무를 더 신속히 수행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데 초점이 주어진 반면, '비생산적'이고 한가하고 공허한,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들은 제거되었다. 혹은, 행동의 방법이 아니라 결과라는 측면에서 다시 풀이하자면, 도구적 이성은 공간 안에 사물들을 좀더 조밀하게 채워 넣고, 주어진 시간 내에 다시 채워지게 될 공간을 더 확장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근대적 공간 초입에서 데카르트는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한듯, 존재와 공간성을 동일시하며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외연을 가진 실체res extensa'라고 규정하였다(롭 쉴즈(Rod Shields, "Spatial stress and resistance: social meanings of spatialization", in Space and Social Theory)가 재치 있게 표현했듯이, 데카르트의 유명한 코기토를 "나는 공간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 바꾼다 해도 그 뜻이 손상되지는 않을 것이다).

 

 

§§§§§§ 소프트웨어적 세계의 '존재의 가벼움' '순간적인 삶'

(p192) 오직 존재하는 것은 일차워적 시간의 점들, 즉 '순간'뿐이다. 그렇다면 순간들을 모아놓은 형태들에 불과한 그러한 시간은, '우리가 아는 시간'임에 여전한가? '순간적 시간'은 최소한 어떤 긴요한 측면에서는, 모순어법이다. 혹시 공간의 가치를 말살시킨 뒤 시간은 자살을 해버렸을까? 시간의 광기 어린 자기파멸의 길에서 공간은 그저 첫 사상자였던 것은 아닐까?

 

 

 

 

 

[4장 일]

§ 진보 그리고 역사에의 믿음 - 요즘 내가 가장 아프게 느끼는 단어들 3개가 다 모였네;

현 상태에서는 비껴보이는 지점이 여기였다. 진보의 믿음은 인식으로도, 현실로도 지금 붕괴되어 가고 있다.

(p214) '진보'는 역사의 어떤 특징이 아닌, 현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한다. 가장 심오하고 아마도 진보의 의미는 두 가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믿음,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믿음과 그리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라는 믿음으로 구성된다. 이 두 가지 믿음은 공존 공생한다. 그리고 이 둘의 공존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에 의해 뒷받침되면서 어떤 일을 이루어지게 할 힘이 있는 한 계속 유지된다.

 

(p218) 우리를 이끌어줄 목적지라는 개념이 없이 우리는 여행을 하고 있는데, 살기 좋은 사회를 찾으려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무엇이 우리를 정처 없이 질주하게 만드는지도 확실치 않다. " 더 이상의 사회적 구제는 없다. (……) 이십 년 전 린든 존슨 대통령이 하던 식으로 오늘날 '위대한 사회'를 주창하는 자가 있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이 비웃음감이 될 것이다"라고 한 피퍼 드러커의 평결(Peter Drucker, The New Realities,1989)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한치의 오차 없이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진보라는 근대의 로맨스, 즉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고, 지금보다 더 많은 만족을 얻게 될 것이며, 그렇게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믿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조만간 끝날 것 같지도 않다. 근대성은 오직 '만들어가는' 인생밖에 모른다. 근대의 남녀 개인들에게 삶이란 주어진 과제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혹독한 과제, 엄청난 집중과 새로운 노력을 요하는 과제인 것이다. '액체' 근대나 '가벼운' 자본주의 단계에 인간 조건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양식에 원기를 부여하였다. 진보는 최종적으로(그리고 곧) 완전한 상태(모든 일이 완성되고 더 이상 변화가 필요치 않은 상태)에 이르기 위한 임시적 수단이나 잠정적 현안이 아니다. 진보는 영원한, 아마도 끝이 없을 도전이자 '살아 있되 그것도 잘살아 있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현재 체현된 진보 개념이 너무나 생소하여 그것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머물고 있는지 궁금해진다면 이는 현대적 삶의 다른 매개변수들처럼 진보 역시 '개인화'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좀더 핵심을 말하자면 진보 개념에서 공적인 성격이 빠져나가고 사적인 것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보, 그것은 이제 공적인 성격이 사라졌다. 이는 지금 현실을 '업그레이드'하려는 제안들이 다종다양하졌기 때문이고, 기발하고 새로운 것이 정말 개선을 의미하는가라는 논쟁이 그것이 도입되기 전후로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고 선택된 연후에조차도 논박당할 여지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개선이란 문제가 이제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 차원의 기획이 되었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되었다. 이제 자신들의 지혜와 자원과 근면함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좀더 만족스러운 조건으로 끌어올리고, 불쾌한 현재의 조건들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바로 개개 남녀들이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은 『위험한 사회』에서 이렇게 썼다.

  "개인화된 삶의 양식과 조건들이 출현하면서 사람들은ㅡ살아남기 위해ㅡ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고 관리할 때 스스로를 중심으로 세우게 된다. (……) 개인은 실제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선택하거나 바꾸어야 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일의 위험을 직접 감수해야 한다.  (……) 남녀 개인들이 생활 세계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단위가 되는 것이다.

 

 

§§ 에피소드화된 삶 - 불가능한 목표

(p224) 타협의 여지가 없는 미로와도 같은 세상에서 인간의 노동은 사람의 다른 양상들과 마찬가지로 자족적 에피소드들로 분할되어 있다. 또한 인간이 해야 하는 다른 행위들과 마찬 가지로, 행위자의 의도에 일치하는 목표는 자꾸만 회피하는 듯 물러나는데, 어쩌면 그것은 달성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일은 질서를 세우고 미래를 통제하는 세상에서 게임의 영역으로 떠내려왔다. 일하는 행위는 조심스럽게 단기적 목표를 세워 그저 한 두 걸음만 앞으로 내딛는 게임 참가자의 전략처럼 되었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마다 얻게 되는 즉각적 결과로, 그것은 바로 그 현장에서 소비될 만한 것이어야 한다.

 

 

§§§ 복지국가 체제에 대한 의심 - 국가의 포드공장화

푸코 '감옥'보다 한 발 더 나간 것 같은데!

(p234~235) 일부 사람들은 복지국가를, 불행에 대비한 이 집단 보험을 통해 가입자들이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을 만큼 과감하고 영리해지고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갖게 되면, 즉 보험 가입자들이 '자기 발로 서는 것'이 가능해지면 바로 파산선고를 내려야 하는 일시적 조치라고 보았다. 좀더 회의적인 사람들은 복지국가를 집단이 기금을 모아 관리하는 공중위생 장치로 보았다. 자본가 기업 측에서 (꽤나 긴 앞으로의 시간 동안) 재활용할 자원도 의지도 없는 사회 폐기물들을 계속 배출하는 한, 계속 돌려야 하는 정화 및 치유 시설 말이다. 하긴 복지국가라는 것을, 예외들을 처리하고 규범에서 이탈하는 것을 사전에 막으며 그래도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그 영향력을 최소화시키는 하나의 장치로 보는 데는 일반적인 합의가 있었다. 규범 그 자체는 이의제기를 할 수 없는, 자본과 노동의 일대일의 직접적인 상호 결합이었고, 모든 중대하고 어려운 사회 현안들은 그러한 결속의 틀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진보의 구호만 있었나? 아니 미루기도 있었어!

(p251) 근대 사회의 기초가 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근대적 방식을 가능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만드는 태도/행동의 가르침은 만족의 지연(필요 혹은 욕망의 충족, 즐거운 경험과 여흥의 순간의 지연)이었다. 미루기가 근대의 무대(혹은 근대적 무대라고 제시된 곳)에 진입한 것도 이런 체현 속에서였다. 막스 베버가 설명하듯, 볼거리가 가득하고 독창적인 근대의 발명품들이 한편으로는 자본 축적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의 윤리의 확산과 침투로 귀결된 것은 바로 서두름과 조급함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특정한 지연 때문이었다. 더 나아지려는 욕망이 이러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라는 경고가 그러한 노력이 예기치 못할 결과를 향하도록 이끌었고, 나중에 이는 성장, 발전, 가속화, 말하자면 근대 사회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 유대(紐帶)의 병리성 - 미래는 병리를 동반한다

(p256) 변덕스러움, 불안정성, 진입의 용이성은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삶의 조건들의 특색이다. 프랑스 이론가들은 불안정성을 말하고, 독일 이론가들은 불확정성위험사회를, 이탈리아 이론가들은 불안을, 영국 이론가들은 불안정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전세계에서 다양한 형태와 이름으로 경험되는 인간 곤경의 동일한 측면, 특히나 지구상에서 고도로 발전되고 풍요로운 지역에서 무기력과 의기소침이 야기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개념들이 파악하고 명확히 발언하고자 하는 현상은 (지위와 자격과 생계의) 불안정과 (이것들이 지속되고 미래에도 안정적일지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일신상의, 우리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 즉 소유물, 이웃, 지역사회의) 불안함을 결합한 것이다.

 

 

 

 

 

[5장 공동체]

 

§ "민족주의는 거슬리는 애국심이고, 애국심은 선호되는 민족주의이다." - 홉스

(p279)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구분해주는 기준이, 그것이 드러나거나 감춰지길 바라는 우리의 열망이나 그것들을 인정하거나 거부할 때 느끼는 부끄러움 혹은 양심의 가책이 어느 만큼인가 정도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릴 이유가 있긴 하다. 이름이 다르니 차이가 있는 것이고, 그 차이는 주로 수사적인 것이므로 거론되는 현상의 실제 내용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논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성이나 감정들, 그것들만 없다면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들을 어떻게 논하는가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공존의 상태에 영향을 가하는 중요한 요인은 우리가 그에 대한 감정들을 서술할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그 감정과 감정의 본질, 그로 인한 행동과 정치적 결과이다.

 

 

§§ '짐 보관소'의 잠깐모임 사회 혹은 '카니발'의 화약고 사회 - 문제는 내버려두고 보복당할 위험이 없는 희생양 고르기

통합진보당 해체 이후 이제 다음 적은 누구인가?

얼마나 더 많은 찌라시들이 필요한가?

촛불집회는 언제까지 모였다 흩어지기만 반복해야 하는가?

우리가 모이는 곳은 정확히 어디인가?

(p307) 화약고 사회에는 반드시 폭력이 태어나야만 하고 그것이 계속 살아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사회에는 생존을 위협할 적, 집단적으로 처형하고 고문하고 절단시킬 적, 만일 전투에서 지게 될 경우, 상대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을 인류를 저버린 범죄의 방관자로 선포하고 기소하고 처벌받도록 하기 위한 적이 반드시 필요하다.

 

 

(p309)르네 지라르 "전쟁 포로, 노예, 파르마코스(고대 그리스에서 공동체에 큰 재앙이나 위기가 닥쳤을 떄 정화의식을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된 사람)와 같이 사회의 바깥이나 주변부에 위치한 존재들  (……) 도시의 다른 거주자들과 연결되는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거나 공유할 수 없는, 외부나 변경 지역에 사는 개인들. 외국인 내지는 적으로서의 그들의 위상, 그들의 노예근성, 그것도 아니면 그저 그들의 나이 때문에 이들 미래의 희생양들은 그 공동체에 완전히 통합되지 못한다."

 

(p318) '카니발 공동체들'은 현재 논의되고 있는 공동체들에게 적합한 또 다른 이름이다. 결국 그러한 공동체들은 매일의 고립적 투쟁이 주는 고민들로부터, 자신들의 힘든 문제들을 자력으로 해결하도록 설득당하거나 강요당하는 피곤한 법률상 개인의 처지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화약고 공동체들은 나날의 고독이 주는 단조로움을 날려버리는 사건들, 카니발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억눌린 울적함을 해소하고 이들 축제의 가담자들이 흥청망청 술자리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돌라가야만 할 일상을 좀더 잘 버티게끔 해주는 사건들이다. 그리하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음울한 사색이 낳은 철학처럼 그들은 '매사를 그냥 그대로'(즉, 상처 입은 희생자들이나 '간접적 사상자들'이 될 운명을 가까스로 모면한 이들의 도덕적 상흔을 별로 고려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p319) 짐 보관소/카니발 동동체 들이 지닌 한 가지 효과는, 이것들이 흉내내고 있고(오도하는 방식으로) 맨 처음부터 복제하거나 만들어보겠다고 약속한 '진짜'(즉, 포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공동체로 모아지는 것을 제법 효과적으로 피해간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미처 분출되지 못한 사회성의 충동들을 집약하는 대신 분산시킴으로써, 극히 어쩌다 한 번씩 드물게 일어나는 조화롭고도 합심을 이룬 집단적 행동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그러나 허망하게 구제책을 찾으면서 고독을 영구화하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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