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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은 우울증에 대한 전방위적 조망, 더불어 '우울사회'로 지칭되는 이 시대 기운의 해법 또한 추측해 볼 수 있는 책이다. 17세기 로버트 버튼이 멜랑콜리에 대한 천 년간의 사상을『멜랑콜리의 해부』(국내 미번역)로 정리한 것만큼이나 현대적으로 훌륭히 계승한 책인 것 같다. 저자 자신이 우울증 환자이기도 하지만, 학술적 연구 수집만이 아닌 서아프리카 주술 치료 의식 '은두프'를 받으러 세네갈까지 갈만큼 현대에 통용되고 있는 우울증 치료들을 찾아 직접 체험하며 전한다. 또한 인종별, 나라별, 계층별, 성별, 의약별, 생활 사건, 역사적, 정치적 등 세세한 접근점도 놓치지 않는다.

 

BC 5세기 전 "우울증은 뇌의 질환으로 경구용 치료제를 써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정확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치료 접근에 지지부진했었다는 게 기가 막히고, 현재의 사회적 이론들과 심리치료 방식들이 본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따르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어도 그 양상은 정신생물학과 정신분석학으로 나뉘어 치열히 논쟁 중이라는 것은 우울증의 증상만큼이나 괴리스럽다. 이런 상황을 보자니 인간 이성의 한계인가, 까지 의심될 정도다

 

우울증을 바라본 역사를 보면 그것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온 것일까? 전혀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중세시대 도덕적 박해와 처벌 -> 르네상스 시대의 우울증 미화(일종의 천재병) -> 이성주의 시대(인간의 나약함) -> 18세기 후반 신교 금욕주의(사회의 타락, 귀족병)/낭만주의(직관의 힘) -> 19세기 염세주의/본격적인 뇌 질환으로서의 접근

 

시대에 따라 우울증을 보는 관점이 판이했고, 여전히 우리는 우울증 환자를 기피하거나 불편해하는 거리감을 가지며, 우울증은 자기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의지적 문제라는 편견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앤드류 솔로몬은 동양권에서 특히 이런 편견이 심하다고 한다).

 

우울증을 병으로 인식한 현대는 세로토닌 같은 뇌신경전달물질 등과 우울증의 관련성을 찾아내 각종 치료제를 개발해 내놓고 있다. 이제 그러한 약들을 인류를 위해 잘 활용하고 있을까, 그또한 그렇지가 않다.

 

p497 현재 미국에는 빈곤층의 우울증을 발견하거나 치료하는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이 부재하기 때문에 빈곤층 가운데 지속적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문 형편이다. 저소득층 의료보험 프로그램인 메디케이드 대상자의 경우 광범위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본인이 나서서 권리 주장을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p499 진보적 정치가들은 빈곤층의 불행을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정신 보건상의 개입으로 고쳐질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반면, 우파 정치인들은 그것을 게으름의 결과로 여겨 정신 보건상의 개입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본다. 사실 대다수의 빈곤층에게 그것은 고용의 기회나 일하고자 하는 동기의 부재 때문이라기보다는 노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각한 정신장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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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01년 출간되었는데 위에 제시된 미국시점과 지금 한국 사회 우울증 취약계층의 상황이 다를 바 없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무기력에 빠진 건 모르고, 일자리 창출이나 생활보조비 찔끔 주는 걸로 대책이라 말한다. 불안과 우울이 세대를 거치며 폭력양상화 되고 비관자살, 사망사고가 급격해지고 있는데도 보도 자제를 미봉책으로 삼고 있으니....

 

 

<한낮의 우울>은 우울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과 분야 견문, 사회적 통찰에는 좋은 책이지만 상담치료 같은 효과를 바라는 독자에게는 썩 부합하진 않는다. 극단적인 우울 상태에 있는 독자라면 700 페이지 분량을 읽어내려가다가 더 우울해질 수도 있다;

시급한 우울 처방이 필요한 사람에겐 디어도어 루빈 <절망이 아닌 선택>을 권한다. 아래에 본문을 살짝 소개해본다.

앤드류 솔로몬이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우울증 환자들을 만나러 갔을 때 받아든 고래수프처럼 당신에게도 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ㅡAgalma

 

 

 


 

 

<절망이 아닌 선택> 내용 中

 

 

/자기 파괴를 막아주는 도움/ 

 

어떤 사람이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봐야 한다. 그가 파괴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거의 모든 경우에 이 대상은 자신을 스스로 이상화한 관념에 미치지 못하는 양상들을 종합한 집성체(集成體)이기가 쉽다. 세상에 대한 분노라던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미안함이나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어 분풀이를 하고 싶은 욕구나, 부활에 대한 착각 같은 부수적인 소득을 염두에 둔 다를 동기들과는 상관없이, 거의 언제나 그러하다. 이 얘기는 나중에 ‘도움’과 연관지어 다시 하겠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자기를 증오하는 정서적인 좌절감에 시달리는 대부분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왜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하는 데 대한 당혹감 그리고 자존심의 외곽에 가해지는 모욕감이 인생을 견디기 힘들게 만든다. 500만 달러의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아직도 수중에 300만 달러가 남은 사람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까닭은 그의 자부심 외곽을 이루었던 경영상의 천재성이나 만능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입은 손실은 창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취해야 할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조처를 설명하겠다. 희생자의 성격이나 이른바 ‘장점’에 관해서 얘기해주려는 유혹에 대해서는 지극히 조심해야만 한다. 왜 그런지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얘기하겠다. 그러니까 우선 이렇게 해야 한다.

 

1.어떤 ‘부수적인 소득’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점을 희생자가 이해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2.엉뚱한 ‘자신’이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얘기해줘야 한다. 그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 그를 당황하게 만드는 자신을 말이다. 폭군적인 지배자이자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나로부터, 나를 보호할 자는 오직 바보뿐이다.

3.사람에게는 자아가 여럿이며, 한 자아가 무너지더라도 다른 하나는 살아남지만, 그것은 육체를 죽이지 않았을 때의 얘기임을 납득시켜야 한다.

4.견디기 힘든 정서적 고통은 논리적인 이유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통제가 가능하고, 제거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실질적인 유예(猶豫)희망을 제공해야 한다.

5.우리는 당장 그를 ‘인간화’하고, 인간이란 정말로 무엇인지 현실을 깨우쳐주기 시작해야 한다. 나는 앞에서 (단점과, 한계성 따위의) 인간적인 속성들에 관해서 얘기했지만, 이렇듯 강렬한 절망의 반응에 임했을 때는 우리들의 간섭이 각별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이러한 조처는 자기 수용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자기증오를 크게 희석시키는 자비의 힘을 위한 효과적인 원동력이 된다. 이것이 자기 이상화라는 형태의 간접적인 자기증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영광으로부터 더욱 몰락하는 부수적인 위험을 막아주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에게, 특히 아주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자살하려는 사람들의 경우에, 왜 우리들은 ‘좋은’ 성품을 강조하기를 조심하고, 우선 다섯 단계의 조처부터 충분히 실시해야 하는가? 그 까닭은, 가장 심한 좌절감을 느낄 때, 우리들은 자신에 대한 증오와 가장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래서 우리들의 증오가 정당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철저히 인간적인 단점을 강조함으로써 증오를 정당화하고, 그들이 당연히 그런 인물이 되었어야 한다고 믿게끔 자신을 착각으로 몰아넣었던 이상형과 비교하면서, 실제의 자신이 얼마나 모자라느냐 하는 차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들이 타인들로부터 듣게 되는 얘기의 내용을 동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얼마나 다정다감한 사람이냐는 식의 얘기를 들으면, 좌절한 기분에서는 우리들이 그런 자질이 얼마나 모자라는지를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결과만 가져온다. 나아가서 우리들은 그런 자질들을, 우리들로서는 성취할 능력이 없는 완전하고도 이상적인 순종을 여전히 요구하는 무서운 감독관으로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좋은 성품'들은 채찍을 휘두르는 폭군적인 감독관이 되고, 거기에서의 탈출은 마비시키는 절망감이나 죽음 자체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한낮의 우울>
P201 "연민이 아니라 수고가 치료법이다. 수고는 뿌리 깊은 슬픔의 유일한 근본적 치료법이다." - 샬로트 브론테
P203 "어떤 병에 대한 처방이 여러 가지라면 그 병은 확실한 치료법이 없는 것이다." - 안톤 체호프

<한낮의 우울>
P242 "내가 목발을 짚고 있었다면 가족들이 춤추러 가자고 하지 않겠죠." 가족들이 기분 전환을 시켜 주겠다고 자꾸 나가자고 졸라서 못 견디겠다는 한 여성의 말이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고통이 존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밀로 간직한 채 보이지 않는 휠체어를 타고, 보이지 않는 깁스를 하고 힘겹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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