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긴 침묵)

  파이 파텔 : “그래서 내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드나요?”

  오카모토 : “아니, 마음에 들었습니다. 안 그런가, 아츠로? 당신의 이야기를 오래오래 기억할 거예요.”

  치바 : “그럴 겁니다.”

  (침묵)

  오카모토 : “한데 우리가 조사를 해야 돼서,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를 원하신다?”

  “저…… 그건 아니고.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군요.”

  “뭔가 말하면, 어쨌건 이야기가 되지 않나요?”

  “저…… 영어에서는 그렇겠지요. 일본어로 이야기라 하면 ‘창작’의 요소가 들어가게 돼요. 우리는 창작을 원하지 않아요. 영어로 ‘직설적인 사실’만 원하죠.”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저…….”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하! 하! 하! 정말 똑똑하군요, 파텔.”

  치바 :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나도 몰라.”

  파이 파텔 : “현실을 반영하는 언어를 원하나요?”


  “그래요.”

  “현실에 반하지 않는 언어요?”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호랑이는 현실에 반하지 않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이제 호랑이 이야기는 그만해요.”

  “두 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겠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말이에요.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당신들은 무덤덤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붙박이장 같은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는 사실적인 이야기.”

  “저…….”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를 기다리죠.”

  “네!”

  “호랑이나 오랑우탄이 안 나오는.”

  “맞아요.”

  “하이에나나 얼룩말이 안 나오는 이야기."

1977년 7월 2일에 침몰한 배에서 탈출해 1978년 2월 14일 멕시코 해안에 도착할 때까지 227일 동안 인도 소년 피신 몰리토 파텔이 살아낸 해양 모험담. 

영화를 보고 한참만에 소설을 읽었다. 스펙터클한 영상이 압도할지라도 영화가 다 담지 못하는 매력이 역시 글에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날렵한 호랑이도, 좁디좁은 구명보트도, 바다도 눈부시게 거기 있었다. 이 모험을 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즐겼고, 오랑우탄과 하이에나와 얼룩말이 어머니와 프랑스 요리사와 선원으로 바뀌는 대목에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영화가 담지 않은 혹은 못한 명장면도 발견했다. 영양실조에 눈먼 호랑이와 파이가 조난 당해 떠돌던 또 다른 눈먼 자를 잡아먹는 환상적인 이야기. 이 장면은 파이가 요리사를 죽이고 먹는 장면을 우화처럼 나타낸 것처럼 보인다. 공포와 절망감을 극복하지 못할 때 동물적 본능은 우리의 이성보다 종교보다 빠르고 강하다. 본능조차 우리가 가고자 하고 믿고자 하는 방향 아니던가. 파이는 종교가 빛이라고 생각했고 빛을 만끽하듯 모든 종교를 다 받아들였던 아이였다. 채식주의자였지만 거북을 어떻게 먹어야 가장 효과적일지 고심해야 했고 시간을 정해 예배를 올리고 리처드 파커를 보살폈다. 이율배반일까. 마침내 지상에 도착했을 때 혼자가 되고 호랑이가 사라지고 나자 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나는 안간힘을 쓰다가 모래사장에서 쓰려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완전히 혼자였다. 가족도 없는데 이제 리처드 파커도 없이 혼자가 되어버렸다. 신마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신도 없었다. 보드랍고, 단단하고, 드넓은 이 해변은 신의 뺨 같았고, 내가 거기 있자 어디선가 두 눈이 기쁨으로 번득이고 입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몇 시간 후, 나와 같은 종족이 날 발견했다."

살아남은 파이가 동물학자이자 종교학자가 된 건 인간이 양극단 사이에서 평생 살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인간은 권태와 공포를 벗어날 수 없고 이성의 힘 없이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바다에서든 육지에서든 우주에서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고 이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 삶이다. 호랑이는 냉혈한 프랑스 요리사이자 무시무시한 생존본능이면서 동시에 파이가 이성을 잃지 않도록 하는 파수꾼이기도 했다. 우리는 타인에게 더없는 맹수이자 지옥일 수도 있고 구원자이자 천국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날씨보다 더 변화무쌍한 게 사람 맘이라 모두가 이리도 힘들다. 궂은 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다소 희망일까. 순수한 아이로서 신을 받아들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불행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참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다. 그런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수수께끼로 남기면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할수록 사라진 리처드 파커의 뒷모습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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