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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츄 -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고양이 그림책 암실문고
발튀스.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윤석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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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리 소장하고 싶은 암실문고 시리즈 중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발튀스 조합을 만났다. 릴케는 이름만 알고, 발튀스는 초면. 무지한 게 부끄럽지만, 앎의 기쁨을 느낄 수 있어 좋을 때도 있다. ^^;;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고양이 그림책,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이 책은 물성이 참말 좋아서 고양이 러버들에게 선물하기도 좋은 책이다. 겉커버, 속커버 두가지인데 둘 다 내 취향. 겉 커버는 갱지 느낌, 속커버는 터콰이즈! 얇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커버가 단단하여 만졌을 때 느낌이 좋다. 보관하기도 좋을 듯.



암실 문고는 서로 다른 색깔의 어둠을 하나씩 담아 서가에 꽂아 두는 작업입니다.


이 책은 어떤 어둠을 담아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발튀스가 13세에 출간한 이 책은 40편의 고양이 그림을 담고 있다. 10살에 만난 고양이 미추와의 추억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소년의 그림들. 실제 그림 사이즈 그대로 만들었다고 하니, 참 작은 종이에 그려낸 그림들이고 검은색만 사용한 드로잉인데 그림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훌륭하다, 고 감탄했다! 재능을 알아볼 줄 아는 릴케와 한 집에서 살았던 것이 발튀스의 행운이렸다. 게다가 릴케가 쓴 서문을 읽고 - 그림을 보고 - 이현아님의 해설을 읽고 난 다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림을 다시 보면 또 다르게 보이는 매직. 발튀스의 인생에서 유년기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왜 그렇게 그리워하는 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른 암실 문고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제목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발튀스의 어둠은 상대적으로 빛이 많이 드는 어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봤다.


고양이 미추는 결국 자유를 찾아 떠나는데, 발튀스가 느낀 상실감은 당연히 어마어마할 터...! 마지막 장면이 짠한 발튀스 앞에 닥친 이 사태에 대해 릴케는 상실과 소유로 풀어낸다. 상실은 소유의 끝이며 소유를 확인시켜주는 제 2의 소유일 뿐이라고... 이렇게 상실과 소유를 가르쳐 줄 어른이 가까운 곁에 있다는 것 역시도 발튀스의 행운이지 싶었다. 이현아 님의 말처럼.


발튀스는 유년기에 겪은 상실을 기록하고 애도할 수 있는 드문 행운을 거머쥐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사건이었다. 드로잉집의 서문을 쓴 릴케는 발튀스의 삶을 예견이라도 한 듯 말했다. "발튀스는 그의 꿈에 머물 것이고, 모든 현실을 자신의 창조적 필요에 맞게 변형할 겁니다" 그의 유년은 상실의 까만 심연을 들여다봐 주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111-112)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유년, 유년의 기억. 충만하게 보낸 유년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발튀스. 릴케와 함께한 그의 유년시절이 어땠을지, 이 책을 보며 더듬더듬 그려본다. 릴케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피붙이도 아닌 발튀스 형제가 학업을 이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심지어 발튀스에게는 인생의 문을 열어준 사람. 이 두 예술가의 만남과 성장이 따뜻했다. 


1차 세계대전의 시대를 살아가며 고된 삶을 살았으나 언제나 함께했던 고양이 미추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은 책, 더불어 릴케의 서문으로 더 인상 깊었던 책이었다. 발튀스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고 깜짝 놀랐지만... ^^;; 이 책만큼은, 상실에 대해 따뜻하고 소년스럽게 이야기하는 발튀스를 만날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고양이 그림책, 집사님들께, 고양이 러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도서제공 #을유문화사 #출판사로부터도서를제공받아작성되었습니다

인생+고양이

장담하건대, 이 둘의 합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건 매우 슬픈 일입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건 나쁜 일을 당하거나, 어딘가가 부러지거나, 결국엔 늙고 쇠락한다고 가정하는 것이죠. 하지만 ‘고양이를 잃어버린다‘라는 표현은 절대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고양이를, 살아있는 생명체를, 하나의 생명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하나의 생명체를 잃어 버리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

그건 바로 죽음이에요 - P19

발튀스는 유년기에 겪은 상실을 기록하고 애도할 수 있는 드문 행운을 거머쥐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사건이었다. 드로잉집의 서문을 쓴 릴케는 발튀스의 삶을 예견이라도 한 듯 말했다. "발튀스는 그의 꿈에 머물 것이고, 모든 현실을 자신의 창조적 필요에 맞게 변형할 겁니다" 그의 유년은 상실의 까만 심연을 들여다봐 주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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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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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누군가에게서 미움을 받았던 기억. 
내가 아이들을 휘두르는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달라졌을, 받지 않았을 것 같은, 그런 미움.
그 사실을 알아서 더 괴로었던 바로 그 기억.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해서 더 힘들었던, 그리고 그걸 알고 괴롭혔던 그 아이. 
 
이 책의 앙테크리스티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게도 있다. 그런 사람. 물론, 그게 가능한 건 학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자아이들만 가득했던 바로 그 여자 고등학교에서 나는 또 다른 여자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 이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 같다. 다각도로 생각해보면 그 빛나는 여자아이에 비해 나는 별볼일 없었기 때문에? 단지 내가 그 아이의 절친이라는 게 질투나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복잡했던 시기였다. 단짝이라는 그 이상한 개념. 사춘기 시절의 여고생들의 감정은 얼마나 이상하고 불안정했던가.  

늘 독특한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아멜리 노통브답게 얼마나 이상한지. 지금은 다 먼 얘기같은 그 감정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anti - christ 라는 앙테크리스타답게 이 책의 '적'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춘채로 주인공을 괴롭힌다. 그렇잖아도 나쁜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상황이 더 악화된대도 내 편이 그녀 편보다 많을 것이므로, 맘껏 괴롭혀도 되는 그런 주인공을 모두에게서 고립시킨다. 재미나게도, 그게 세상 이치인 것 같다. 약자일수록 더 괴롭히고, 강자에게는 벌벌 떠는 그런게 세상인 것 같다.  

"거짓말을 오직 나를 짓밟으려는 목적에 이용하지만 않았더라면 내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타의 문제는 힘의 관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나는 지배자니 피지배자니 하는 이야기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분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게 남자건 여자건 친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우정이라는 고귀한 이름이 쌍방의 동의가 없는 모호한 예속관계나 의도된 모욕, 항구적인 쿠테타, 역겨운 굴종, 심지어 희생양을 만드는 행태들에까지 결부되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자주 보았다.  

...  

그런 우정을 나는 원치 않았다. 우정에 조금이라도 비열한 마음이나 경쟁심이 일말의 부러움이나 한치의 의혹이 깃들면 나는 그 우정을 발로 차버렸다. "  

p165 주인공의 독백  

모든 사실은 밝혀지고 주인공은 보호받는다. 그러나, 그걸로 끝일까. 그거면 된걸까? 이 책의 결말은 흥미롭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영향 받고, 영향을 미친다. 주인공으로 인해 크리스타의 외면은 큰 변화를 맞게 되지만, 그녀의 내면은? 알 수 없다.  

친구가 되기 5분전이 중학생들 수준에 맞춘 우정을 예시를 통해 보여준다면 이 책은 좀 더 어른스럽게 우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속내를 파헤친다. 겉과 속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 뭐가 진짜고 거짓인가. 실은 우리들 모두 한번은 저질렀고 저지르고 있으며 당해봤던 이야기를. 강약만 다를 뿐.  

재밌었다. 그리고 처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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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뻐?
도리스 되리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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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검은 그물 스타킹을 신은 여자와  
중남미 여류 작가들의 단편을 묶은 책이 떠오르는 여성 필독서.  

소설의 도입부는 반드시 흥미로워야 한다, 라는 소설작법의 예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서두. 그리고 흘러가는 감정선. 화자는 여성. 등장인물은 남성. 여성의 마음을 끊임없이 뒤흔들어놓는 남성은 마치 적처럼 느껴지고 어떤 관계든 만나게 되는 여성은 동지처럼 느껴진다.  

바꾸고 싶고 달라지고 싶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그러기 쉽지 않고 ㅁ차마 포맷할 수 없는 인생 때문에 괴롭고, 그러나 동지를 만나고 ... 또 의외로 쉽게 버릴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 만난 그 사람은 또 반대의 입장에 서기도 하고 ...

남성/여성의 정치적인 우위, 관계, 같은 여성과의 우위... 모두가 알고 있고 모르고 싶은 일들을 세심하게 파내어 하나하나 읊어준다. 인종문제까지도. 그리고 이것은 현실.  

내가 살아온 30년간의 시간을 되돌아봤다. 아주 어릴적부터 하나하나. 내가 훔쳤던 친구의 바비인형 신발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다. 인종도 나라도 대륙도 다른 도리스 되리와 나는, 그녀가 그리는 주인공들과 나는 어쩌면 이렇게 닮아있는지. 각 단편들의 주인공 심리가 전부 이해되고 전부 겪었던 것 같고, 겪게 될 것 같고, 하나하나 체크할 수 있는 리스트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니핑크의 따뜻한 색감을 잊을 수가 없는데.  도리스 되리는 천재.

초파우에서 온 착한 카르마   
아니타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아니타 옆에는 창백한 금발의 남자가 서있었다. 사진이 찢겨나가, 남자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아니타는 샤를로테의 배에 얼굴을 묻고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그리고 잠시 후 아니타는 고개를 들어 샤를로테를 바라보았다.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트리니다드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지금 죽어서 누워있다. 나는 아직 젊고 예쁘다. 벌거벗은 몸 역시 아직 날씬하다. 백화점 화장품 코너의 직원처럼 생긴 두 여자가 내 몸에 붕대를 감는다. 숨도 못 쉴만큼 단단히. 나는 헉헉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겉으로는 사람 좋고 소탈해 보이려고 꽤나 애를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전의 우리 엄마보다 더 까탈스러워.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만족하지 않아. 내가 부엌을 치우고 나면 나중에  그녀가 다시 한번 치워. 내가 식탁을 차리면 그녀가 포크와 칼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 빵을사오면 또 잘못 사왔다고 투덜거리지. " 
p39

오른쪽 위에는 해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세 가지 물건을 훔쳤다. 여덟살 때 바비인형의 분홍색 하이힐 한 켤레를 훔쳤고, 열 여덟살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만든 특이한 공예품 하나를 훔쳤다. 그리고 스물세 살 때, 나는 한 남자를 훔쳤다. 그는 아내가 있는 남자였다.

홍 부인에게 새 신을  
그날 밤 우린 둘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등을 돌린 채 거리를 두고 누워서 서로의 몸이 닿지 않게 조심한다. 나는 가만히 두 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방 안은 조용하고 어둡다. 도시에 있을 때면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이 적막함이 늘 그리웠다.

누구세요? 
스물다섯번째 생일에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나는 란츠베르크 오스트 인터체인지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옆 수풀에서 다시 나오면서 나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몸을 축 늘어드린 채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주름진 손등 위로 파리가 기어다녓다.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죽은 사람이 두려웠다. 그들의 냄새가 두려웠다.

쉭세 
데이브는 옆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저 머리칼, 윤기가 흐르는 숱 많은 검은 머리칼,... 남자의 머리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머리칼, 그 머리칼만 보고 잇어도 우나는 무릎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흔들렸다. "나의 아름다운 데이브... 내 곁에 남아있을 거지, 언제까지나?  
... 모르겠어 ...

월요일의 호밀빵  
내가 뉴욕을 떠난 것은 이십년  전이었다. 친구 베스의 장례를 치르고 난 직후였다. 베스는 정확히 새천년이 되는 바로 그 시각, 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날 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시 그녀는 마흔 살이었고, 우리는 동갑이었다.

캐시미어 
처음 서로 알게 되었을 때 우린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곤 했다. 나는 그 사랑에 취해버렸고 나 스스로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토록 나를 좋아하는거지? 이 무지막짛한 비곗덩어리인 나를? 그는 뚱뚱한 내 몸을 정말로 좋아했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동안은, 오직 그 동안만은 나는 내 몸에 대해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그와 사랑을 나눌 때면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다. 나로서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감각의 제국  
호텔 방값 역시 내가 지불할 것이다. 그는 빈털터리니까. 그는 아직 학생이다. 이 어리고 미숙한 남자아이에게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절망스럽다. 그리고 행복하다. 나는 얼굴 가득 환하게 웃는다. 동시에 나는 흐느낀다. 정말 끔찍한 상태이다. 온갖 상반된 감정들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러다가 미치치나 않을까 두렵다.


"부부간의 증오... 그게 어떤 건지 알아요? 그건 아주 특별한 종류의 증오에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죠. 난 부부사이에서 왜 살인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오히려 더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게 신기할 뿐이에요. 하지만 정작 문제는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따위가 아니에요. 가장 끔찍한 건 그런 살해욕을 느끼고 나서, 또 금세 새로 구입할 자동차의 색깔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과 다투고, 함께 잠을 자고, 뭐 먹고 싶냐고 묻고 하는 ...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 일관성없는 생각과 행동, 그건 정말 못 참겠어요. 정말 끔찍해요."    

"사람들이 화해를 하는 건 더 이상 그 사람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미워하는 것이 너무나 피곤해서죠. 그렇지 않다곤 말하지 마세요."

신부 
나는 혼자 고메라의 해변에 앉아있었어요. 그는 수영을 하고 있었구요. 사실 그는 물 속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는데 ... 물이 너무 차가웠거든요. 하지만 그런 그를 내가 놀렸어요. 그리고,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가끔 난 정말 미쳐버리곤 해요. 집에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녹음된 앤서링 머신 테이프를 가지고 있어요.

원더나이프  
그날은 5월 5일이었다.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죽여 가만가만 그의 방으로 들어갔ㄷ다. 그의 사무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카펫에 하이힐이 푹푹 박혔다. 갑자기 완전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는 옷을 모두 벗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를 사랑해줘..." 그가 말했다.

저 세상
나를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는다. 금세 기억의 고통,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고통이 녹색의 금속성 액체처럼 혈관을 타고 흐른다. 그 사람의 혀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의 혀에서 어렴풋이 피냄새가 난다.  

내 친구 
친구는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나느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유리창이 모두 검게 칠해져 있었다. 한참 동안 벨이 울린 후에야 친구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집 안은 폐허나 다름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모든 물건에 검은 색 레커를 칠해놓았다. 그의 양복, 텔레비전, 그의 책들, 심지어 자신이 사다놓은 요구르트까지 검게 칠해져 있었다. 카를이 가장 좋아하는 요구르트였다.

금붕어 
그녀는 엎드린 채 어항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기묘한 기하학적 형상의 빨간 두 생명체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움직였다. 불룩 튀어나온 금붕어의 눈이 갑자기 그녀에게 바싹 다가왔다 멀어졌다. 흔들리는 물 속에서 햇빛이 춤을 추고 따스한 바람이 창가의 커튼을 펄럭였다.

나 이뻐?  
그가 내 몸을 만지는 동안 내 눈은 날아가는 새들을 좆는다. 그의 손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진다. 그의 손이 갑자기 팬티 안으로 쑥 들어온다. 나는 물고기라도 잡듯 빠른 동작으로  그의 손을 잡는다'.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Please, please, you're so beatiful. you're driving me crazy ... " "forty eight dollars" 그가 콘솔박스 위에 지폐 몇장을 올려놓으며 낄낄거린다. "네 마음은 얼마지?"

만나
짐의 목소리의 떨림이 전해진다. 그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나는 남편의 셔츠 단추를 풀고 눈을 감은 채 그의 가슴에 잎을 맞춘다. 내 몸이 녹아 없어지는 기분. 내 머리칼 사이로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내 옷 속으로 들어온 짐의 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몸은 긴장하고 있다. 그의 살갗 냄새가 난다 .그 냄새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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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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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부분은 77페이지다. 물론 나는 술책을 동원하고 있다. 이 글에서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일단 발음되고 쓰이면, 출구와 비상구를 메워버리고 확실성이라 불리는 창살을 창에서 떼어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크라폴레트crapoleette'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사초 바네티 사건과 이민 문제의 중심 요소일 뿐 실제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이 단어에는 희망이 있다. 익숙해진 일상적 의미가 없으므로 뭔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공백이 그런 기회를 줄 것이므로 나는 이 책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

 

*사초 바네티 사건 : 1920년 미국 보스턴에서 강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이탈리아인 사초와 반체티가 가난하고 급진적인 신념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사건.

 

p118-119

 

 

이따금 상당히 강렬한 고통이 찾아오는 일이 계속되었다. 크리스티안센 박사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불안이었지만 그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알리에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탁자, 벽에게 다가가 그것들을 쓰다듬곤 했다. 그것ㄷ르이 일상적이고 익숙해진 착한 개들이라는 것, 내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한테 납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형태가 사람의 부재를 표상하는 듯 했기 때문에 의자들은 특히 나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p 131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망ㄹ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두렵다. 내무부 장관이 두렵다. 내무부 장관은 종국에는 사람의 내면까지 알아내는 법이니까.

 

p137

 

아자르, 다른 변호사를 찾다보시오. 나는 이 일에서 손을 떼겠소. 당신이 이미 나에게 말한 걸 살펴봅시다. 예의 약국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도 당신의 소행이고, 서른두 건의 노인 폭행 사건을 저지른 사람도 당신이오. 당신의 진짜 이름은 하밀 라자이고, 신원 미상의 신부를 낙태시켰으며, 포주이자 비밀경찰이오. 바로 당신이 벤 바르카이자 CIA 요원이자 KGB요원이오. 지금 말한 그 새끼 고양이 거늘 제외한다 해도 말이오. 혹시 원자폭탄도 당신 소행 아니오?

 

p138

 

할아버지는 자기 아내가 유태인이라서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코사크이이긴 했지만 반 유태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아내를 싫어한 것은 자신이 그녀를 학대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내에 대한 학대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원한도 심해졌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심리 아니겠는가.

 

p150

 

나는 비단뱀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어딘가에 덜 소속되기 위해 책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장악하고 저작권을 챙겼다. 내 안에는 서로 싸우는 두 사람, 내가 아닌 인물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죄의식은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줄곧 나를 압박했고, 주위에서는 일상성과 익숙함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날마다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p 154

 

변호사는 네개가 된 내 눈 사이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게는 눈이 둘 뿐이다. 하나는 나를 감추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나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상태가 좋지 앟을 때면 내 눈은 50쌍이 된다. 그래서 도처에 있는 익숙함과 일상을 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p186

 

로맹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해
에밀 아자르가 되어 쓴 자기앞의 생으로 큰 상도 받았다. 

왜 이렇게 했을까, 라는 질문으로 두 세명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전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낸 의견이 이미 굳혀진 자신의 네임밸류와 이미지를 깨고 자유롭게 쓰고 싶은 작품을 쓰기 위해, 였다.

아마도 소설가의 고민이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일반인의 상상이라고 생각된다.

 

가면의 생은 에밀 아자르 장편소설이라는 저자명과 장르를 달고 있으나 ... 로맹가리의 이야기이고 자전적인 수필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이 책은 소설가의 각오나 빵굽는 타자기보다 가장 소설가의 고민이 제대로 담겨있다.

읽는 내내 우리는 숨기고 무시하고 감추고 살 뿐 로맹가리가 했던 고민들을 약소하게든 거대하게든 소유하고 있으며 애써 사회에 맞춰가려고 할 뿐이지 언제든 순식간에 정신병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초반에는 정말 미쳤구나, 정신병자의 독백이라는 생각이 들다가 중반으로 갈수록 공감을, 결론으로 갈수록 로맹가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논리적으로 인간을 파헤쳐야 하는 소설가의 예민함이 필수가 아닌 직장인이라 멀쩡할 뿐이라는 그런 생각.

 

그리고 삶에 가장 위로와 치료가 되는 것은 정신병자들의 회고록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은, 일관적인 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내 안의 수많은 모습들을 통일되게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쏟고 있는가에 대한 것들은.

 

나이가 들면 잠 대신 잡생각들이 덮쳐온다고 한다.

내 한 생애 동안 저지른 일들과

남에게 준 상처와

나답지 않게 행동했던 것들과

나이들며 변하는 가치관들과의 괴리와

기억하는 어린시절 등은

노인이 된 나를 얼마나 괴롭힐 것인가.

얼마나 반성을 요하며 괴롭힐 것인가.

 

일말의 양심에 거리낄 것 없이

추후 맞다고 옳았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살면 좋겠지만

힘들어보인다.

 

자기 자신을 올곧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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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약속
로맹 가리 지음, 심민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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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갈망이 내 아들로서의 애정에 그 고통스런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자람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나는 그것에 파묻혀 갔던 것이다. 마침내 문학적 창조가 내게, 그것이 진정성을 갖는 위대한 순간이면 항상 그러한 바, 즉 견딜 수 없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허구요, 살아 남기 위해 영혼을 회복시키는 방법이 될 때까지.  

눈을 감고 옆으로 기울인 그 잿빛 얼굴, 가슴 위에 얹은 그 손을 보았을 때, 처음으로, 삶이란 신용할 만한 유혹인가 하는 의문이 불현듯 떠올랐었다. 그 질문의 답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아마도 나의 생존 본능이 불러 준 답이었기 때문이리라.  

164p
 

이렇다 할 문학적 영향을 받지 않고, 본능적으로 나는 유머라는 것을 발견해내었다. 현실이 우리를 찍어 넘어뜨리는 바로 그 순간에도 현실에서 뇌관을 제거해 버릴 수 있는 완전히 만족스럽고 능란한 방법 말이다. 유머는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나의 우정어린 동료였다. 진정으로 적들을 이겨 낼 수 있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유머의 덕분이었다. 누구도 내게서 그 무기를 떼어 놓을 수 없었다. 또한 나는 기꺼이, 그 무기가 내 자신을 향하게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나'나 '자아'를 통해 그 유머가 바로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유머는 존엄성의 선언이요, 자기에게 닥친 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의 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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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인즉 '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자아'를 과녁으로 삼지 않으며, 다만 그것을 뛰어넘는다. 인간 조건의 덧없는 모든 육화물들을 통해 내가 공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인간 조건 자체에 대하여서인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위의 오해만큼 내게 끊임없은 고독의 원천이 되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유머라는 우정의 손을, 그 방면에서는 펭귄의 팔만한 팔도 못 가진 사람들에게 내미는 일만큼 사람을 외롭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150p
 

사랑스런 지중해여! 삶에 대해 너무도 부드러운 너의 라틴적 지혜는 얼마나 내게 너그럽고 다정하였으며, 또한 너의 관심어린 늙은 눈은 얼마나 너그럽게 내 청춘의 이마를 지켜보았던가! 나는 네 기슭으로 돌아간다. 작은 배들이 지는 해를 그물에 담아 돌아오는 곳. 나는 그 자갈들 위에서 행복하였다.  

156p
 

1. 맹모삼천지교가 따로없는 로맹가리의 어머니.
2. 외아들과 홀어머니라는 관계
3.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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