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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건 슬픔이 됩니다
히토쓰바시대학교 사회학부 가토 게이키 세미나 지음, 김혜영 옮김, 가토 게이키 감수 / 해피북스투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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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했던 큰 고민이 있었다.


일본 망가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개봉하고 우리집 녀석은 그 작품을 보지 않았음에도 영화의 OST를, 대사를 따라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짱구, 도라에몽 등 고전들에도 욕심을 내고 음악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게 아닌가!국내 아이돌에도 무관심하던 녀석이 갑자기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가까운 이웃나라이자 참 먼나라인 일본. 노 재팬 불매운동을 겪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이러한 관심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변화는 친구들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반 친구들과 유튜브를 통해 관련 컨텐츠를 많이 접하고 있다는 게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아, 이게 맞나. 일본 문화가 개방된 것이 1998년이었다. 우리와 일본 사이에 흐르는 넓고도 깊은 과거사의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거늘, 급류에 휩쓸린 것처럼 빠른 속도로 빠져드는 녀석의 관심에 당황했었다. 아니 얘네는 뭘 제대로 알고나 이러는 걸까? 이거 괜찮나? 아니 그러는 나는 어떤데? 유니클로는 불매하면서 닌텐도 게임은 하고있는 나는? 애니와 일본 작가의 책을 보고있는 나는?


고민은 아직도 현재 진행중이다. 그런 와중에 마침 제안을 받았으니... 일본 대학생들이 세미나를 통해 공부하고, 토론하고, 직접 쓴 한일 역사에 대한 책이라지뭔가! 한국엔 반일 정서가 일본에는 반한 정서가 암암리에 흐르고 있다고 기사에 등장하는 가운데 과연 그들은 무어라 하는지 궁금했다. 문화와 역사 사이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그들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대학생들은 괜찮을까, 부모들의 반대는 없었을까, 사회에서 지탄받지는 않았을까 그들의 안위가 염려되는 가운데... 이 책은 히토쓰바시 대학교 사회학부의 가토 게이키 교수의 세미나 팀이 썼다. 읽어 내려갈수록 녀석과 꼭 이 책을 공유하고 싶단 생각을 했더랬다. 나도 이렇게까지 정리된 위안부, 노동착취,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몰랐다. 그저 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일본 애니와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역사를 녀석이 제대로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하려나 궁금해지는 마음. 


이런 세미나에 참여하게 된 학생들의 계기도 이 책에 나오는데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참여한 학생들도 있지만 세미나에서 운영하는 한국방문 프로그램의 금액이 저렴해서... 인 이유도 있다! ㅋㅋ 그러나, 그런 프로그램의 주제가 무려 "위안부" 라능.... 그리고 시작이야 어찌되었건 이들은 이 방문과 한국 대학생들과의 만남, 토론을 통해 위안부를 알고 역사를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우와. 부끄럽지만 나도 잘 몰랐던 역사와 일본이 한국에 끼친 영향들을 자세히 알게됐다. 더불어 일본 기성세대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워온 것들이 반일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배워왔으니. 게다가 이 대학생들이 부모=기성세대와 겪는 갈등은 지금 우리집 녀석과 나(=기성세대)의 갈등과 동일하다는 깨달음을 얻고 강한 현타가 왔더랬다. 녀석의 세대와 우리 세대는 출발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려 우리는 일본문화 금지세대였음을... 일본 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반발심이 아직도 내재되어있음을 알았으니, 녀석이 일본문화사랑에 손사래치는 우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단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녀석은 이제 식민통치시절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접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문화에 대해 타국가의 문화 대비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냥 재밌고, 좋으면 좋다 말하는 것. 녀석에게도 문화는 별개로 읽히는 것이며 영웅이나 봉오동 전투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가깝게 역사를 대하지는 않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제대로 아는 것의 힘은 비단 일본의 젊은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닌 듯 싶다. 우리가 겪은 일은 두 나라가 각각 다르게 겪은 일이 아니라 두 나라가 같이 겪은 하나의 역사였다.


이 책을 쓴 일본 대학생들의 고민 시작점이 나와 같음에, 그리하여 끝점도 같을 수 있음에 희망을 가져본다. 기성 세대들이 물러나고 나면 우리 사이의 깊고도 깊은 강을 건널 다리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이상하고 요상한 상태말고, 아프더라도 제대로 마주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나 역시 우리 이야기를 우선 제대로 알고, 해결을 위해 할 수 있는 액션을 한다면 이 찝찝하고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본에 출간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문화와 역사 정치는 별개가 아니라는 것. 혐오와 반대를 넘어 제대로 알고 인정하고 사죄하여 대화를 시작해보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한국어로 번역되며 한국의 독자들을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일본 젊은이들이 던지는 이 질문들은 정작 우리 역사에 무지한 한국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질문이 아닐까. 우리가 함께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닐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열심히 읽고 쓴 생각입니다.

물론 모든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요즘은 한국 문화를 좋아하면서 한국에 호감이 생긴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 사람 중에는 한일관계가 악화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과 다시 사이가 좋아지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한‘이든 ‘친한‘이든 일본인이 한국인과 역사 인식이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공통된 역사 인식을 공유하지 않는 한, 한국인과 일본인이 허물없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닐까. 역사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 ‘친한‘이었던 사람이 감자기 ‘반한‘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한국인 유학생은 그 틈새에 있다. - P29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될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 정부나 대부분의 일본인이 생각하는 ‘사죄 및 해결과 피해자와 지원단체가 생각하는 ‘사죄 및 해결‘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일본에는 문언상으로 사죄하고 이 이상 문제화하지 않는 것이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피해자와 지원단체가 생각하는 ‘사죄‘란 일단 일본 정부가 구체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국가 범죄임을 전제로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를 표명한 뒤 그것이 진심임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국가가 배상할 것. 나아가 진상규명, 역사 교육 등의 재발 방지책을 시행하는 후속 조치를 포함한 ‘사죄‘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해결이란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는 것이다. 가역적 이지 않아야 비로소 ‘해결‘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일 합의‘는 이와는 정반대 지점에 서있다. - P49

일본 정부는 패전 후에도 여전히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뜻을 내비치지 않고 있으며, 그 사이에 피해자들은 인권을 회복하지 못한 채 나이 들어가고 있다. 자결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일본이 만들어낸 식민지 조선의 사회 분열은, 현재도 남북분단이라는 형태로 조선인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123~126쪽 참조). 그리고 일본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지금도 심각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고 있다. 한류스타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호소하는 행위는 우리에게도 아주 의미있는 일 아닐까. 반일이라고 매도하지 말고 일단 멈취 서서 그들의 생각에 귀 기울여보자. 그렇게 하면 좋아하는 사람의 팬을 그만둘 필요도, 못 본 척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P83

하지만 악행을 방치한 것과 과거에 직접 악행을 저지른 것, 이 두 가지가 과연 어느 정도나 다른 것일까.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나는 누군가를 발판 삼아 이룬 사회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 누군가란 재일조선인 등 일본 사회의 소수집단이고,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국가들에 일본이 저지른 가해 행위의 피해자들이며, 전 세계 식민주의. 인종주의. 젠더차별과 계급차별의 피해자들이다. 우리의 삶은 분명히 그들 위에 존재해 왔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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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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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서른에 가까워질수록, 내가 '서른이 되면'하고 가졌던 꿈과 희망들은 다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체감한다. 서른이 되면 난 안정된 직장과 안정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지혜가 있고 사람을 잘 대할 수 있고 어떤 상황이든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무르익은 사람, 이 되어있을 줄 알았다. 평균수명이 길어져서 그런지, 내 주위의 그 어느 누구도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었다고 해서 안정되어있지는 않더라. 우리는 전반적으로 계속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에 태어났나보다.

스무살 도쿄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서른 후반이 되어도 스무살 같겠구나. 나의 이십대는 끝나지 않겠구나. 6개의 챕터로 나눠 다무라 히사오의 20대를 그려내는 동안 나는 두가지가 떠올랐다. 1. 그래도 남들처럼 살았구나 (연애의 경험 횟수는 빼고) 2. 나이가 들면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될까.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다무라 히사오의 20대를 시기별로 구분해 적고있는 책이 스무살 도쿄다. 1978년과 1979년의 순서가 바뀌어 있는 걸 제외하면 이 책은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따르고 있다. 나고야에서 태어나 도쿄로 온 19살, 짧게 끝나버린 대학생활, 빨리 시작된 직장생활, 회사를 그만두고 맘맞는 사람들과 차린 회사, 알아가는 사회생활. 히사오는 남들이 30대 초반까지 가서야 느낄 감정들을 좀 미리 느낀다는 생각은 든다. 경험이 빡셀수록, 얻는 것은 많다, 라는 걸 다시금 실감한다.

이 책의 미덕은 스무살의 타지에서 살고있는 자취생이 챙겨야 할 것들을 빼놓지 않고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십대와는 다를 것이다. 고향이 주는 의미, 부모님이 하는 잔소리와 바람,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비중, 친구와 고향친구의 차이, 회사 동료와 커리어의 무게까지도. 지루하게 설명하지 않고 에피소드를 통해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오쿠다히데오. 시간을 넘나들지만 그 시간에 그 분위기, 바로 내가 겪었던 것처럼 회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 야, 전차 끊겼어. " 똑같이 시계를 쳐다보던 선배 하나가 좋아 죽겠다는 듯 말했고, 일동으로부터 "아휴~"하는 자포자기적인 한숨이 새어나왔다.
- p9

그보다 누구에게 허락받을 것도 없이 자유롭게 외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통통 튀었다. 오늘, 정말로 나의 독립이 시작된 것이다.
...
그치지 않는 박수와 환성 속에서 히사오는 도쿄의 밤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켰다.
-p139

여섯개의 에피소드들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나고야올림픽, 1981년 9월 30일 편이다. 히사오가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어느정도 위치에 올라, 어린 나이에 후배를 거느리게 된 이후의 일이다. 사장도 무섭지 않고, 회사의 유력자와도 편한 위치가 된, 일도 익숙해지고 인정도 받고 있고. 일할 기분도 나고, 가장 열심히 일하고 있기도 한, 그런 날의 이야기다.

아주 익숙한 기분, 나는 아직 뭣도 아닌데 뭔가 할 줄 안다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우습게 보는 그런 오만함도 이십대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삼십대에 그런 걸 안 할줄 아는가, 우리는 아마 끊임없이 오만할 것이다. 더불어, 코가 납작하게 깨질일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20대는 그렇게 쉽게 실망하고 쉽게 의기양양해지며 멋도 몰라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고 잘난 줄 안다. 그러다 무너지는 사건 하나에 무릎 꿇고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 내가 이 자리에 있었지, 하고 깨닫기도 하고.그러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생각하고 그래도 세상에 찌들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결국 다시 돌아갈 길이더래도.

모든건, 순수의 이름으로 세상에 덜 찌들었다는 명목하에  아름다워 보인다.

이 책에서 오쿠다 히데오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은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도쿄는 좋은 곳이야, 꺼억." 아저씨가 딸꾹질을 했다. "뭔가 되어보겠다고 벅찬 꿈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지." 아저씨는 컵의 술을 뚝뚝 흘리더니 그 젖은 손을 쓱쓱 핥아 먹었다.
 ...
"젋다는 건 특권이야. 자네들은 얼마든지 실패해도 괜찮다는 특권을 가졌어. 근데 평론가라는 건 본인은 실패를 안 하는 일이잖아? 그러니 안 된다는 거야."
-p137

이제 반년 남짓 남았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덤벼들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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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가방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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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림사의 추천 책. 선생님의 가방, 이라는 제목에다가 청소년 서적을 취급하는 편집자의 추천이라, 처음에는 선생님의 가방에 얽혀있는 교훈적인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 이건 연애소설이었다. 그것도 무려 30대 후반의 여성과 60대 후반의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어머, 깜짝이야!

이 책은 무척 독특하다. 첫 챕터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 나쓰메 소세키의 담담한 문체가 생각났다. 자조적이면서도 담담한 어조. 자신의 내면을 담담하게 읊조려 가거나, 제 3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을 담담하게 지켜보거나. 담담한데, 담고 있는 건 격렬하다. 솔직하고 격렬하다. 꼭 그 느낌이다.

이 책의 화자는 주인공 중 하나인 30대 후반의 여성이다. 30대 후반의 독신여성 - 입밖으로 소리를 내어 발음해봐도 많은 게 느껴진다. 일본이라고 우리나라에서 30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가볍겠는가. 30대 여성이라는 건 그 나이에 맞는 행동규범이라는게 있는 법이고, 이 주인공은 '독신'이다.

어느 술집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걸 들은 주인공 화자는 돌아본다. 그랬더니, 한참 나이가 드신,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는 옛 선생님이 않아계신다. 선생님은 심지어 내 이름도 알고 있는데 나는 얼굴도 가물하다.  그렇게 술잔을 한두잔 기울이고, 한두번 더 만나고, 결국 그 술집에서 약속도 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사제지간이 된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선생님은 나이가 있고 죽음도 두렵다. 화자가 여자다보니 선생님의 마음이  대폭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며 여성 입장에서의 복잡한 감성이 그려진다. 연애는 참 힘들지. 늘 불안하고 확인할 수 없는 마음에 조바심내야 한다. 주인공 화자가 후반에 갈수록 중얼거리게 되는 말,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로 표현되는 그 마음, 표현이 격하지 않지만 충분히 공감이 간다. 나도, 그랬으니까.


이렇게도 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도시에 있을 때는 언제나 혼자, 가끔씩 선생님과 둘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는 커다란 생물만 살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 있을 때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수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게 틀림없다. 선생님과 나, 딱 둘뿐이었게 아니다. 술집만 하더라도 언제나 선생님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거기엔 사토루 상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낯익은 손님들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살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P64
 


술집 주인과 함께 선생님과 함께 버섯을 따러 가서 화자가 느끼는 이 부분에 절절히 공감했다. 아마도 그 공간이 술집이고, 내 연애도 그렇게 종종 술집에서 이뤄지고, 나도 이렇게 적진 못했지만 어느정도 인식하고 있던 느낌이기 때문이었을까.

 

저녁무렵까지 방에 있었다. 책을 뒤적여 가며 멍하니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졸음이 와서 한 삼십 분 자기도 했다. 잠이 깨서 커튼을 젖혀 보니 완전히 어두워져 있다. 달력 위에서는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은 해가 짧다. 동지 무렵의, 쫒기듯 짧은 해 쪽이 차라리 맘 편하다. 어차피 금세 져 버릴 것이라 생각하면, 해질 무렵의 어쩐지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느낌의 엷은 어둠에도 마음의 준비를 할 할 수가 있다. 아직 안 질 거야, 아직 좀 남았어 ... 요즈음처럼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다 허방을 짚게 된다.아, 해가 졌네, 하는 다음 찰나엔 마음속에 절절하게 불안이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길에 나와 살아있는 것이 나만은 아니라는 것을, 살아서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졌따. 하지만 길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만으로는 그런 걸 확인할 도리가 없다.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게 된다. 


바로 그럴 때 선생님과 딱, 마주친 것이다.

P94-95
 

이런게 일본 소설의 단점이라고 흔히들 사람들이 말하는 부분일지 모르겠다. 얼마나 소소한가, 그리고 얼마나 공감이 되는지. 일요일 저녁, 혼자 사는 사람들은 다 알거다. 오후만 있는 일요일 저녁은 얼마나 불안한지. 그래서 나도 밖에 나와 본 경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왔다는 기분만 가지고 돌아가기에 방은 또 얼마나 적적한지. 이렇게 소소한 느낌, 30대 후반의 독신여성의 심리를 딱 짚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20대 후반의 여성도 이렇게 쓸쓸하니.


나는 언덕길을 결연히 내려갔다. 석양이 지금이라도 당장 바다에 가라앉을 듯하다. 샌들이 유난히 달각거려서 거슬렸다. 온 섬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갈매기 울음소리도 성가시다. 이 여행을 위해 새로 맞춘 원피스 허리가 너무 조인다. 큼직한 샌들의 고리에 닿아 발등이 쓰리다. 해변에도 길에도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쓸쓸하다. 개똥 같은 선생님이 내 뒤를 안 좆아오니 얄밉다. 


어차피 내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거지. 이렇게 낯선 섬에서,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저 선생님과 어긋나 낯선 길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러간다. 이렇게 된 바에야, 술이나 마시자. 
 

P176 


와 이쯤되니 정말 이건 내 일기를 읽고 있는 듯 하다. 기대하고, 실망한다. 그리고 자조감에 젖어 '개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알듯말듯한 그 사람의 속내를 알려고 하는 대신에 할 수 있는 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단문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묘사는 정말 소세키를 보는 것 같다.

유독 이 소설이 소세키의 글처럼 느껴지는 건 그 '고루함'에 있다. 화자가 선생님에게 '고루하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고루한게 좋다'며 받아친다. 두 사람의 나이도 나이겠지만 느끼는 감정들은 참말로 고루하다. 핸드폰도 없고 혹시나 만나질까 해서 밤길을 서성인다. 집앞에 가서 소리도 들어보고 문 앞에서 몹시도 망설인다. 아마 요즘엔 이런 연애, 아무도 안할지도 모른다. 요즘  씌여지는 연애소설은 첫 만남에서 어느 방으론가 가겠지. 할리퀸 소설이 아니더래도 그게 요즘 스타일인지도 모르겠다. 고루하고 답답한, 그래서 더 소중하고 아끼게 되는 그런 감정. 서서히 나도 모르는채, 그렇게 달궈지는 감정까지도. 별거 아니면 그만두면 되고, 별거라면 아껴서 키우면 되고. 소중한 씨앗을 다루듯, 그런 연애 감정은 정말 고루한 일이 되어버렸다.

림사의 추천작은 언제나 훌륭하다. 이책도 어젯밤 - 오늘 아침 사이에 다 읽어버렸다. 짧고 잘 읽혀지는 건 요즘 스타일인데 담고 있는 내용은 옛날 스타일이다.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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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에 사는 사람들 - 무한카논 1부 무한카논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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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다 마사히코.
곰이 좋아하는 작가라며 본인도 읽지 않은 책을 덥썩 빌려주었다.

연작인데, 이 책이 1권,
2번째가 아름다운 혼, 3번째가 이투루프의 사랑.

이 뭐랄까... 요즘 읽던 책들과 상당히 다른, 오페라 나비부인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연애 연작소설이다. 할리퀸 이후로 연애 소설을 찾아가며 읽질 않아서 아주 새로웠다. 또한 진부했다. 또한 비현실적이었다.

작가 후기를 인용해보자.



그리고 마침내 나만이 쓸 수 있는 사랑을 발견했다. 가장 위험하고 감미로우며 그려내기가 어려운 사랑이다. 만약 그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역사는 전혀 다른 미래를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랑이다. 나는 그런 사랑을 20세기 백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꽃피워보자고 계획했다. 나는 20세기를 기댈 곳 없는 연인들의 희로애락을 통해 드러낼 생각이었다.
물론 곧바로 집필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화자를 설정하고, 사랑과 연애에 얽힌 감정을 모두 수집해야 했다. 무수한 세부를 모아 음미하고 끼워 맞춰 갈고닦아야 했다. 하기야 잊힌 사랑에는 자료도 증거물도 없다. 그것을 발굴하는 작업은 소설가가 감각을 총동원해야만 가능해진다. 나는 이 작품에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부었다. 소설이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것이야말로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다.

p516-517 작가후기 중에서
말 그대로 이 책은 한 가문과 그에 얽힌 다른 가문의 세기에 걸친 연애 스토리다. 가족사와 남다른 성격은 피에 담아 물려지는지, 한많은 자식은 또 한많은 자식을 키워낸다. 그리고 그 남다름은 자유와 그에 동반하는 괴로움과 불안정을 가져온다. 그렇게 한 세상 살아내는 이야기다.

시대가 20세기다 보니,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 주변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2차대전이 막 끝난 후 등장하는 맥아더 장군과 미군이 도쿄를 점령하던 시절의 묘사는 아사다지로의 지하철을 떠올리게 하며 실제로 지하철의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 영화는 '지하철을 타고'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아사다 지로의 또 다른, 책을 떠올리게 했는데 ... 아사다 지로도 그러고보면 그 시절 일본의 모습에서 많이 소재를 찾았구나 싶다. 그만큼 역동적인 시기였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 역시도 그 역동적인 시기에 걸출한 문학인들이 등장했던 걸 보면 문학과 힘들고 어려운 시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인 것도 같다. 그 어려움이 장작이 되어 글과 예술을 탄생시켰으리라. 그 어려움이 불러낸 감정들이 말이다.
 
작가의 이 표현이 마음에 남았다.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그런 임무를 완수할 자신감도 기술도 없었지만 JB는 미국도 일본도 배신하지 않는다는 자기만의 맹세를 한 후에 명령에 따랐다. 1930년의 일이다. 각국은 군축으로 기울고, 뉴욕의 공황이 세계각지로 파급되었다. 아티스트들의 움직임이 왕성하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자유의 활로를 찾는 유행이 퍼졌다. 앞날을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서 사람들은 과연 무엇에 의지할까? 국가가 시시콜콜 관리하는 거짓 자유를 획득한 시민들은 자신을 방기하듯 에로스에 물들었다. 이런 시대를 건실하게 사는 것은 손해였다."

-p269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됐다고 하는 시마다 마사히코. 2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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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유
이시다 이라.이사카 고타로 외 지음, 신유희 옮김 / 해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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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책을 읽으면서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있거들랑 한쪽 귀퉁이를 접어 표시하는 버릇이 있다. 심지어는 빌린 책도 그러는데 -죄송합니다 - 이 책도 빌린 책이기는 하지만 대체, 한장도 귀퉁이를 접을 구석이 없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 멘트가 없이 물 흐르듯 사건을 통해 이야기를 잘 끌어갔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또 다시 말하면 기억에 남는 부분이 하나도 없이 그저 평범하기만 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책은 어느 쪽일까.

이 책은 분명 현재 한국에서 잘 나간다는 여섯 작가가 쓴 책이다. 이사카 고타로는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로, 아주 인상깊었던 책 마왕을 쓴 작가다. 두번째 이시다 이라는 내게 '렌트'로, 그리고 유명한 작품으로는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로 유명한 작가다. 세번째 이치카와 다쿠치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많이 알려져있다. 네번째 작가인 나가타 에이이치와 다섯번째 나카무라 고는 별로 많이 알려진 작가는 아닌 듯 하다. 여섯번째 작가인 혼다 다카요시는 fine days로 연애 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한다. (작가 소개에)

이 책은 아마 정작 책 내용보다도 책을 구입한 Y여사의 구입기가 더 기억에 남을 듯 하다. 달달한 책을 찾던 그녀는 결국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이렇게 독후감을 적었다. 어쩌면 나는 연애란 달달한 것만 생각했던 게 아니냐고. 연애는 꼭 그런게 아닌데, 라고 말이지.

연애 소설의 정의는 어떻게 내려야 할까? 연애에 대해 다루면 다 연애소설일까? 연애는 어디에서든 한다. 드라마들에서는 의학 드라마든 검찰 드라마든 전부 연애는 끼어있다. 드라마일 수록 그게 강한 것은 대중은 모두 분홍빛이든 검은색이든 남자와 여자가 좋았다 싫었다 하는 그 과정이 재미있기 때문인걸까. 만약, 메인 스토리든 곁다리 스토리든 연애가 조금이라도 끼어있다면 그것은 연애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에서 연애는 다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정말 둘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도 있고 연애는 곁다리로, 우정이 중심인 것 같은 스토리도 있다. 여섯작가의 개성이 다르듯, 정말 하나같이 다른 연애 이야기다. '이 연애소설이 대단하다' 라는 일본의 연말 시상식 같은 List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니, 분명 대중에게 소구하는 감성과 인정받을 연애 소설 단편 모음집이긴 한 것 같다. 그런데, 어쩜 이렇게 그냥 지나치기만 하는 스토리일까.

연애는 그 표면만 슬쩍 훑고 정작 연애가 아닌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나마 남녀의 그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달콤한 감정에 제대로 맞서고 있는 것은 이시다 이라의 마법의 버튼 정도? 너무나 쿨하게 헤어지고 담담하게 지난일을 회상하며 그랬다면 이랬을까?의 상황설정이 너무도 진부했던 혼다 다카요시의 side walk talk . 말 그대로 감정을 슬쩍 훑고 지나가는 느낌으로 일본인답다, 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 소설이었다.

연애를 한다면, 정말 힘들게 해야 좋은 순간이 훨씬 더 짜릿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지고 볶고 매일 싸우고 또 매일 화해하고. 적어도 그것이 억지가 아니라면 그 솔직함이 서로의 관계를 더 발전시키는 매개체가 될 것임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서로를 대할 때 그 관계는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그런 연애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어찌보면 열정이 없는 관계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얼마나 알고 또 서로의 감정에 얼마나 마주하고 있는가, 싶은 느낌. 감정과 감정이 부딪히는데 너무나 이성적인 것도 말이 안된다고 본다. 또 사랑이라는 감정은 얼마나 한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드는가. 아무리 안정적인 심성의 사람도 그 마법에 걸리는 순간, 이성을 잃고 날뛰게 되는 것을. 그렇게 둘이 만나서 어떻게 아무일 없이 평화로울 수가 있겠는가. 이 책의 너무도 얌전한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이야기들이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남자들은 무디고 더디다. 여자들이 감정을 날카롭게 훑고 갈 동안, 남자들은 표면과 껍데기 및 큰 그림을 그리는 듯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이렇게 단조롭고 무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애를 하는 동안 이렇게 다른 곳을 보고 있을 수 있는 것도, 남자들이 대체로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마법의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오른쪽 버튼을 누르면 투명인간이 되고, 왼쪽 버튼을 누르면 돌이 되는…….

도쿄에서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바쁘게 움직인다. 서로 버튼을 눌러 사라지기도 하고 돌이 되기도 한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되면 이 거리도 훨씬 조용해질 텐데.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실연의 슬픔도 투과되어 가벼워지고, 혼자 우는 모습을 남들에게 들킬 일도 없겠지. 돌이 되면 가만히 굳은 채로 슬픔을 결정화시켜 마음 깊숙이 가라앉힐 수 있으련만.
하지만 우리에게 마법의 버튼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너를 기다린다.

―<마법의 버튼>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시다 이라의 마법의 버튼. 나와 내 남자친구의 이야기와 비슷해서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 이 구절은 정말 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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