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뻐?
도리스 되리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검은 그물 스타킹을 신은 여자와  
중남미 여류 작가들의 단편을 묶은 책이 떠오르는 여성 필독서.  

소설의 도입부는 반드시 흥미로워야 한다, 라는 소설작법의 예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서두. 그리고 흘러가는 감정선. 화자는 여성. 등장인물은 남성. 여성의 마음을 끊임없이 뒤흔들어놓는 남성은 마치 적처럼 느껴지고 어떤 관계든 만나게 되는 여성은 동지처럼 느껴진다.  

바꾸고 싶고 달라지고 싶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그러기 쉽지 않고 ㅁ차마 포맷할 수 없는 인생 때문에 괴롭고, 그러나 동지를 만나고 ... 또 의외로 쉽게 버릴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 만난 그 사람은 또 반대의 입장에 서기도 하고 ...

남성/여성의 정치적인 우위, 관계, 같은 여성과의 우위... 모두가 알고 있고 모르고 싶은 일들을 세심하게 파내어 하나하나 읊어준다. 인종문제까지도. 그리고 이것은 현실.  

내가 살아온 30년간의 시간을 되돌아봤다. 아주 어릴적부터 하나하나. 내가 훔쳤던 친구의 바비인형 신발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다. 인종도 나라도 대륙도 다른 도리스 되리와 나는, 그녀가 그리는 주인공들과 나는 어쩌면 이렇게 닮아있는지. 각 단편들의 주인공 심리가 전부 이해되고 전부 겪었던 것 같고, 겪게 될 것 같고, 하나하나 체크할 수 있는 리스트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니핑크의 따뜻한 색감을 잊을 수가 없는데.  도리스 되리는 천재.

초파우에서 온 착한 카르마   
아니타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거기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아니타 옆에는 창백한 금발의 남자가 서있었다. 사진이 찢겨나가, 남자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아니타는 샤를로테의 배에 얼굴을 묻고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그리고 잠시 후 아니타는 고개를 들어 샤를로테를 바라보았다. 눈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트리니다드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지금 죽어서 누워있다. 나는 아직 젊고 예쁘다. 벌거벗은 몸 역시 아직 날씬하다. 백화점 화장품 코너의 직원처럼 생긴 두 여자가 내 몸에 붕대를 감는다. 숨도 못 쉴만큼 단단히. 나는 헉헉 숨을 몰아쉰다.  

 "그리고 겉으로는 사람 좋고 소탈해 보이려고 꽤나 애를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생전의 우리 엄마보다 더 까탈스러워.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만족하지 않아. 내가 부엌을 치우고 나면 나중에  그녀가 다시 한번 치워. 내가 식탁을 차리면 그녀가 포크와 칼을 다시 가지런히 정리해. 빵을사오면 또 잘못 사왔다고 투덜거리지. " 
p39

오른쪽 위에는 해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세 가지 물건을 훔쳤다. 여덟살 때 바비인형의 분홍색 하이힐 한 켤레를 훔쳤고, 열 여덟살 때 가장 친한 친구가 만든 특이한 공예품 하나를 훔쳤다. 그리고 스물세 살 때, 나는 한 남자를 훔쳤다. 그는 아내가 있는 남자였다.

홍 부인에게 새 신을  
그날 밤 우린 둘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등을 돌린 채 거리를 두고 누워서 서로의 몸이 닿지 않게 조심한다. 나는 가만히 두 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방 안은 조용하고 어둡다. 도시에 있을 때면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이 적막함이 늘 그리웠다.

누구세요? 
스물다섯번째 생일에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나는 란츠베르크 오스트 인터체인지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옆 수풀에서 다시 나오면서 나는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몸을 축 늘어드린 채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주름진 손등 위로 파리가 기어다녓다. 나는 그때까지 한번도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죽은 사람이 두려웠다. 그들의 냄새가 두려웠다.

쉭세 
데이브는 옆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저 머리칼, 윤기가 흐르는 숱 많은 검은 머리칼,... 남자의 머리칼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운 머리칼, 그 머리칼만 보고 잇어도 우나는 무릎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흔들렸다. "나의 아름다운 데이브... 내 곁에 남아있을 거지, 언제까지나?  
... 모르겠어 ...

월요일의 호밀빵  
내가 뉴욕을 떠난 것은 이십년  전이었다. 친구 베스의 장례를 치르고 난 직후였다. 베스는 정확히 새천년이 되는 바로 그 시각, 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날 밤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시 그녀는 마흔 살이었고, 우리는 동갑이었다.

캐시미어 
처음 서로 알게 되었을 때 우린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곤 했다. 나는 그 사랑에 취해버렸고 나 스스로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토록 나를 좋아하는거지? 이 무지막짛한 비곗덩어리인 나를? 그는 뚱뚱한 내 몸을 정말로 좋아했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동안은, 오직 그 동안만은 나는 내 몸에 대해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그와 사랑을 나눌 때면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다. 나로서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감각의 제국  
호텔 방값 역시 내가 지불할 것이다. 그는 빈털터리니까. 그는 아직 학생이다. 이 어리고 미숙한 남자아이에게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절망스럽다. 그리고 행복하다. 나는 얼굴 가득 환하게 웃는다. 동시에 나는 흐느낀다. 정말 끔찍한 상태이다. 온갖 상반된 감정들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러다가 미치치나 않을까 두렵다.


"부부간의 증오... 그게 어떤 건지 알아요? 그건 아주 특별한 종류의 증오에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죠. 난 부부사이에서 왜 살인이 일어나는지, 충분히 이해해요. 오히려 더 자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게 신기할 뿐이에요. 하지만 정작 문제는 상대방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따위가 아니에요. 가장 끔찍한 건 그런 살해욕을 느끼고 나서, 또 금세 새로 구입할 자동차의 색깔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아이들과 다투고, 함께 잠을 자고, 뭐 먹고 싶냐고 묻고 하는 ... 그런 상황이에요. 그런 일관성없는 생각과 행동, 그건 정말 못 참겠어요. 정말 끔찍해요."    

"사람들이 화해를 하는 건 더 이상 그 사람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미워하는 것이 너무나 피곤해서죠. 그렇지 않다곤 말하지 마세요."

신부 
나는 혼자 고메라의 해변에 앉아있었어요. 그는 수영을 하고 있었구요. 사실 그는 물 속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는데 ... 물이 너무 차가웠거든요. 하지만 그런 그를 내가 놀렸어요. 그리고,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가끔 난 정말 미쳐버리곤 해요. 집에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녹음된 앤서링 머신 테이프를 가지고 있어요.

원더나이프  
그날은 5월 5일이었다.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죽여 가만가만 그의 방으로 들어갔ㄷ다. 그의 사무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카펫에 하이힐이 푹푹 박혔다. 갑자기 완전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는 옷을 모두 벗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를 사랑해줘..." 그가 말했다.

저 세상
나를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는다. 금세 기억의 고통,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 고통이 녹색의 금속성 액체처럼 혈관을 타고 흐른다. 그 사람의 혀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의 혀에서 어렴풋이 피냄새가 난다.  

내 친구 
친구는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나느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유리창이 모두 검게 칠해져 있었다. 한참 동안 벨이 울린 후에야 친구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집 안은 폐허나 다름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모든 물건에 검은 색 레커를 칠해놓았다. 그의 양복, 텔레비전, 그의 책들, 심지어 자신이 사다놓은 요구르트까지 검게 칠해져 있었다. 카를이 가장 좋아하는 요구르트였다.

금붕어 
그녀는 엎드린 채 어항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기묘한 기하학적 형상의 빨간 두 생명체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움직였다. 불룩 튀어나온 금붕어의 눈이 갑자기 그녀에게 바싹 다가왔다 멀어졌다. 흔들리는 물 속에서 햇빛이 춤을 추고 따스한 바람이 창가의 커튼을 펄럭였다.

나 이뻐?  
그가 내 몸을 만지는 동안 내 눈은 날아가는 새들을 좆는다. 그의 손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진다. 그의 손이 갑자기 팬티 안으로 쑥 들어온다. 나는 물고기라도 잡듯 빠른 동작으로  그의 손을 잡는다'.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Please, please, you're so beatiful. you're driving me crazy ... " "forty eight dollars" 그가 콘솔박스 위에 지폐 몇장을 올려놓으며 낄낄거린다. "네 마음은 얼마지?"

만나
짐의 목소리의 떨림이 전해진다. 그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나는 남편의 셔츠 단추를 풀고 눈을 감은 채 그의 가슴에 잎을 맞춘다. 내 몸이 녹아 없어지는 기분. 내 머리칼 사이로 그의 숨결이 느껴진다. 내 옷 속으로 들어온 짐의 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의 몸은 긴장하고 있다. 그의 살갗 냄새가 난다 .그 냄새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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