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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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부분은 77페이지다. 물론 나는 술책을 동원하고 있다. 이 글에서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일단 발음되고 쓰이면, 출구와 비상구를 메워버리고 확실성이라 불리는 창살을 창에서 떼어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크라폴레트crapoleette'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사초 바네티 사건과 이민 문제의 중심 요소일 뿐 실제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이 단어에는 희망이 있다. 익숙해진 일상적 의미가 없으므로 뭔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공백이 그런 기회를 줄 것이므로 나는 이 책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

 

*사초 바네티 사건 : 1920년 미국 보스턴에서 강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 이탈리아인 사초와 반체티가 가난하고 급진적인 신념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사건.

 

p118-119

 

 

이따금 상당히 강렬한 고통이 찾아오는 일이 계속되었다. 크리스티안센 박사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불안이었지만 그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알리에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탁자, 벽에게 다가가 그것들을 쓰다듬곤 했다. 그것ㄷ르이 일상적이고 익숙해진 착한 개들이라는 것, 내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한테 납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형태가 사람의 부재를 표상하는 듯 했기 때문에 의자들은 특히 나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p 131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망ㄹ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두렵다. 내무부 장관이 두렵다. 내무부 장관은 종국에는 사람의 내면까지 알아내는 법이니까.

 

p137

 

아자르, 다른 변호사를 찾다보시오. 나는 이 일에서 손을 떼겠소. 당신이 이미 나에게 말한 걸 살펴봅시다. 예의 약국에 폭탄을 떨어뜨린 것도 당신의 소행이고, 서른두 건의 노인 폭행 사건을 저지른 사람도 당신이오. 당신의 진짜 이름은 하밀 라자이고, 신원 미상의 신부를 낙태시켰으며, 포주이자 비밀경찰이오. 바로 당신이 벤 바르카이자 CIA 요원이자 KGB요원이오. 지금 말한 그 새끼 고양이 거늘 제외한다 해도 말이오. 혹시 원자폭탄도 당신 소행 아니오?

 

p138

 

할아버지는 자기 아내가 유태인이라서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코사크이이긴 했지만 반 유태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아내를 싫어한 것은 자신이 그녀를 학대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내에 대한 학대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원한도 심해졌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심리 아니겠는가.

 

p150

 

나는 비단뱀이 되었다가 그 다음에는 어딘가에 덜 소속되기 위해 책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장악하고 저작권을 챙겼다. 내 안에는 서로 싸우는 두 사람, 내가 아닌 인물과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죄의식은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며 줄곧 나를 압박했고, 주위에서는 일상성과 익숙함이 계속되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좀 더 멀어지기 위해 날마다 나 아닌 존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p 154

 

변호사는 네개가 된 내 눈 사이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게는 눈이 둘 뿐이다. 하나는 나를 감추기 위한 것이고 하나는 나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상태가 좋지 앟을 때면 내 눈은 50쌍이 된다. 그래서 도처에 있는 익숙함과 일상을 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p186

 

로맹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해
에밀 아자르가 되어 쓴 자기앞의 생으로 큰 상도 받았다. 

왜 이렇게 했을까, 라는 질문으로 두 세명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전혀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낸 의견이 이미 굳혀진 자신의 네임밸류와 이미지를 깨고 자유롭게 쓰고 싶은 작품을 쓰기 위해, 였다.

아마도 소설가의 고민이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일반인의 상상이라고 생각된다.

 

가면의 생은 에밀 아자르 장편소설이라는 저자명과 장르를 달고 있으나 ... 로맹가리의 이야기이고 자전적인 수필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이 책은 소설가의 각오나 빵굽는 타자기보다 가장 소설가의 고민이 제대로 담겨있다.

읽는 내내 우리는 숨기고 무시하고 감추고 살 뿐 로맹가리가 했던 고민들을 약소하게든 거대하게든 소유하고 있으며 애써 사회에 맞춰가려고 할 뿐이지 언제든 순식간에 정신병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초반에는 정말 미쳤구나, 정신병자의 독백이라는 생각이 들다가 중반으로 갈수록 공감을, 결론으로 갈수록 로맹가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논리적으로 인간을 파헤쳐야 하는 소설가의 예민함이 필수가 아닌 직장인이라 멀쩡할 뿐이라는 그런 생각.

 

그리고 삶에 가장 위로와 치료가 되는 것은 정신병자들의 회고록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은, 일관적인 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내 안의 수많은 모습들을 통일되게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을 쏟고 있는가에 대한 것들은.

 

나이가 들면 잠 대신 잡생각들이 덮쳐온다고 한다.

내 한 생애 동안 저지른 일들과

남에게 준 상처와

나답지 않게 행동했던 것들과

나이들며 변하는 가치관들과의 괴리와

기억하는 어린시절 등은

노인이 된 나를 얼마나 괴롭힐 것인가.

얼마나 반성을 요하며 괴롭힐 것인가.

 

일말의 양심에 거리낄 것 없이

추후 맞다고 옳았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살면 좋겠지만

힘들어보인다.

 

자기 자신을 올곧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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