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가방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소림사의 추천 책. 선생님의 가방, 이라는 제목에다가 청소년 서적을 취급하는 편집자의 추천이라, 처음에는 선생님의 가방에 얽혀있는 교훈적인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 이건 연애소설이었다. 그것도 무려 30대 후반의 여성과 60대 후반의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어머, 깜짝이야!

이 책은 무척 독특하다. 첫 챕터를 읽어 내려가는 순간 나쓰메 소세키의 담담한 문체가 생각났다. 자조적이면서도 담담한 어조. 자신의 내면을 담담하게 읊조려 가거나, 제 3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을 담담하게 지켜보거나. 담담한데, 담고 있는 건 격렬하다. 솔직하고 격렬하다. 꼭 그 느낌이다.

이 책의 화자는 주인공 중 하나인 30대 후반의 여성이다. 30대 후반의 독신여성 - 입밖으로 소리를 내어 발음해봐도 많은 게 느껴진다. 일본이라고 우리나라에서 30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가볍겠는가. 30대 여성이라는 건 그 나이에 맞는 행동규범이라는게 있는 법이고, 이 주인공은 '독신'이다.

어느 술집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는 걸 들은 주인공 화자는 돌아본다. 그랬더니, 한참 나이가 드신,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는 옛 선생님이 않아계신다. 선생님은 심지어 내 이름도 알고 있는데 나는 얼굴도 가물하다.  그렇게 술잔을 한두잔 기울이고, 한두번 더 만나고, 결국 그 술집에서 약속도 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사제지간이 된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선생님은 나이가 있고 죽음도 두렵다. 화자가 여자다보니 선생님의 마음이  대폭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며 여성 입장에서의 복잡한 감성이 그려진다. 연애는 참 힘들지. 늘 불안하고 확인할 수 없는 마음에 조바심내야 한다. 주인공 화자가 후반에 갈수록 중얼거리게 되는 말, '기대하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로 표현되는 그 마음, 표현이 격하지 않지만 충분히 공감이 간다. 나도, 그랬으니까.


이렇게도 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도시에 있을 때는 언제나 혼자, 가끔씩 선생님과 둘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는 커다란 생물만 살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에 있을 때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수많은 생물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게 틀림없다. 선생님과 나, 딱 둘뿐이었게 아니다. 술집만 하더라도 언제나 선생님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거기엔 사토루 상도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낯익은 손님들도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정말로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살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P64
 


술집 주인과 함께 선생님과 함께 버섯을 따러 가서 화자가 느끼는 이 부분에 절절히 공감했다. 아마도 그 공간이 술집이고, 내 연애도 그렇게 종종 술집에서 이뤄지고, 나도 이렇게 적진 못했지만 어느정도 인식하고 있던 느낌이기 때문이었을까.

 

저녁무렵까지 방에 있었다. 책을 뒤적여 가며 멍하니 지냈다. 그러다가 다시 졸음이 와서 한 삼십 분 자기도 했다. 잠이 깨서 커튼을 젖혀 보니 완전히 어두워져 있다. 달력 위에서는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은 해가 짧다. 동지 무렵의, 쫒기듯 짧은 해 쪽이 차라리 맘 편하다. 어차피 금세 져 버릴 것이라 생각하면, 해질 무렵의 어쩐지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느낌의 엷은 어둠에도 마음의 준비를 할 할 수가 있다. 아직 안 질 거야, 아직 좀 남았어 ... 요즈음처럼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다 허방을 짚게 된다.아, 해가 졌네, 하는 다음 찰나엔 마음속에 절절하게 불안이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왔다. 길에 나와 살아있는 것이 나만은 아니라는 것을, 살아서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졌따. 하지만 길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만으로는 그런 걸 확인할 도리가 없다.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아무것도 확인할 수가 없게 된다. 


바로 그럴 때 선생님과 딱, 마주친 것이다.

P94-95
 

이런게 일본 소설의 단점이라고 흔히들 사람들이 말하는 부분일지 모르겠다. 얼마나 소소한가, 그리고 얼마나 공감이 되는지. 일요일 저녁, 혼자 사는 사람들은 다 알거다. 오후만 있는 일요일 저녁은 얼마나 불안한지. 그래서 나도 밖에 나와 본 경험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왔다는 기분만 가지고 돌아가기에 방은 또 얼마나 적적한지. 이렇게 소소한 느낌, 30대 후반의 독신여성의 심리를 딱 짚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작 20대 후반의 여성도 이렇게 쓸쓸하니.


나는 언덕길을 결연히 내려갔다. 석양이 지금이라도 당장 바다에 가라앉을 듯하다. 샌들이 유난히 달각거려서 거슬렸다. 온 섬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갈매기 울음소리도 성가시다. 이 여행을 위해 새로 맞춘 원피스 허리가 너무 조인다. 큼직한 샌들의 고리에 닿아 발등이 쓰리다. 해변에도 길에도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쓸쓸하다. 개똥 같은 선생님이 내 뒤를 안 좆아오니 얄밉다. 


어차피 내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거지. 이렇게 낯선 섬에서,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저 선생님과 어긋나 낯선 길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러간다. 이렇게 된 바에야, 술이나 마시자. 
 

P176 


와 이쯤되니 정말 이건 내 일기를 읽고 있는 듯 하다. 기대하고, 실망한다. 그리고 자조감에 젖어 '개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알듯말듯한 그 사람의 속내를 알려고 하는 대신에 할 수 있는 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단문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묘사는 정말 소세키를 보는 것 같다.

유독 이 소설이 소세키의 글처럼 느껴지는 건 그 '고루함'에 있다. 화자가 선생님에게 '고루하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고루한게 좋다'며 받아친다. 두 사람의 나이도 나이겠지만 느끼는 감정들은 참말로 고루하다. 핸드폰도 없고 혹시나 만나질까 해서 밤길을 서성인다. 집앞에 가서 소리도 들어보고 문 앞에서 몹시도 망설인다. 아마 요즘엔 이런 연애, 아무도 안할지도 모른다. 요즘  씌여지는 연애소설은 첫 만남에서 어느 방으론가 가겠지. 할리퀸 소설이 아니더래도 그게 요즘 스타일인지도 모르겠다. 고루하고 답답한, 그래서 더 소중하고 아끼게 되는 그런 감정. 서서히 나도 모르는채, 그렇게 달궈지는 감정까지도. 별거 아니면 그만두면 되고, 별거라면 아껴서 키우면 되고. 소중한 씨앗을 다루듯, 그런 연애 감정은 정말 고루한 일이 되어버렸다.

림사의 추천작은 언제나 훌륭하다. 이책도 어젯밤 - 오늘 아침 사이에 다 읽어버렸다. 짧고 잘 읽혀지는 건 요즘 스타일인데 담고 있는 내용은 옛날 스타일이다.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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