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는 봄
양석일 지음, 김응교 옮김 / 산책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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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시 봄은 왔지만, 진정한 봄, 햇살 가득 찬 그 따뜻한 봄은 아직인 듯하다. 이 봄, 온 만물의 기지개를 켜듯, 이젠 집단적 망각 속에서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다시 오는 봄> 신간 소설을 통해 접했을 때, ‘종군 위안부’를 다룬 일본소설이란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무척이나 호기심이 일었다. 작가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어 그저 일본인의 시각에서 쓰인 소설이 번역된 걸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오는 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학창시절엔 ‘정신대’라는 세 글자는 그저 ‘정, 신, 대’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낡은 흑백 사진 속 임신한 한 위안부의 모습만이 각인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지나간 역사 속 수많은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무지했다. 그저 ‘당했다’는 집단적 피해의식만이 깊이 뿌리내렸을 뿐, 그 실체에 접근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가끔씩 뉴스를 접할 때도, 순간 너나없이 들끓다 사그라지는 가벼운 감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거 별 의식 없이 주입된, 자각한 적 없는 역사였다.

 

그런데 <다시 오는 봄>을 통해 역사적 실체에 다가갔다. 그 참혹함에 까무러쳤다. 난 너무도 순진했던 것이다. 비로소 지금껏 외면했던, 교과서 틀 속에 갇혀있던 진실이 봉인 해제 되었다. ‘잊어버리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일, 그래도 잊어버리고 싶은 것, 기억하는 걸 견딜 수 없어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의 실체를 온몸의 세포들이 고스란히 느껴버렸고, 몸서리치며 벌벌 떨었다. 나는 ‘순화’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부하고 싶고, 객관화하려 노력해도, 순화가 느끼는 절망,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전히 내 것이 되어버렸다.

 

식민지 조선, 가난한 소작인의 딸로 태어나, 돈을 벌 수 있다는 순사의 말에 속아 난징으로 끌려갔다. 집단적 강간으로 시작된 첫날부터 수없이 되풀이되는 성노예의 삶, 그렇게 난징에서 동남아시아의 어느 곳, 어느 곳으로 끌려 다녔던 순화의 8년의 시간 속에서 위안부의 삶이 오롯이 드러났다. 아무런 여과 없이 기록된 하나의 ‘증언소설’로써 <다시 오는 봄>은 허구가 아니다. 실재했던 현실 속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어떤 묵직한 덩어리들이 꾸역꾸역 치밀어 오른다.

 

‘순화’를 통해 수많은 위안부들의 삶, 그 치욕적 역사의 현장에서 또 다른 진실과 마주했다. <다시 오는 봄>은 위안부의 실체적 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국가폭력과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전쟁’과 ‘국가폭력’이 우리들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도록 황폐화시킬 수 있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몸서리 쳐지도록 알아버렸다. 아니 지금껏 읽고, 봤던 그 어떤 이야기보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며칠을 두고 천천히 읽으면서, 수시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생각에서 길을 잃을까봐 두렵고, 나를 잠식한 어떤 힘에 굴복한 채 아무런 자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무섬증이 일었다. 비인간적 폭력을 자행했던 수많은 사람들, 삶과 죽음의 경계해서 외줄 타는, 죽음의 극단에 내몰린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인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써의 삶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적 이데올로기, 그 국가폭력에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현장을 목도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지난 역사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순간 그 어딘가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반인륜적 폭력인 것이다.

 

소설 <다시 오는 봄>을 통해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을 그저 재미삼아 있던 내겐 충격 그 이상이었고, 작가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며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이 지닌, 가공할 수 없는 무한한 힘에 압도당했다. 두려움에 떨다 감각이 마비되고 또다시 외면하기 전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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