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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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 여름, 대만을 떠나 일본으로 향하던 네덜란드 선박이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에 표류해 왔다. 후일 ‘하멜 표류기’를 써 서구세계에 한국의 존재를 알린 하멜 일행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최초의 네덜란드인은 아니다. 그들보다 26년 전 조선에 표류해와 아예 눌러 앉은 얀 얀스 벨테브레(한국명 박연)가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네덜란드인 방문자다. 올해는 하멜 일행이 한국에 당도한지 3백50주년이 되는 해로,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은 2003년을 ‘하멜의 해’로 정했다.

한국과 네덜란드의 인연은 각별하다. 이 나라는 월드컵 4강 신화를 남긴 히딩크의 나라로 한국인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에는 연이은 노동파업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네덜란드 모델이 떠오르면서 또 다시 주목받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네덜란드는 여전히 낯선 나라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덕무는 “그들은 눈이 깊고 코가 길며 머리카락이 모두 붉고 발길이가 1척 2촌인데, 항상 개처럼 한발을 든 채 오줌을 누며, 서양의 예수교를 배워 이를 믿는다”고 말했는데, 현재 우리의 인식 역시 이같은 편견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이곳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서울대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의 네덜란드 역사 문화기행이다. 저자는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네덜란드의 현재(1부)와 역사적 형성(2부)을 소개한다. 서구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으로 비 서구 사회를 그려냈다면, 비 서구 사회는 그 역편향인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이거나 반대로 맹목적 서구 추종에 빠지곤 했다. 이 책은 타문화 소개서들이 빠지기 쉬운 이같은 ‘편향’에서 벗어난 보기 드문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타자는 숭배와 저항의 대상이 아닌,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던가.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네덜란드는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일단 서로 협력해야 했다. 그들의 ‘사회적 합의’의 토대는 이같은 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자본과 노동간의 대타협이 이뤄지고, 우파 정당인 자유당과 좌파 정당인 노동당의 ‘자주색 연정’이 출범한 나라. 국가 주도형 경제성장을 뜻하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이 한계에 다다른 지금, 한국 사회가 네덜란드를 주목하는 것도 ‘사회적 합의’의 정신 때문이다. 동성애자 등 소수자에 대한 관용도 타산지석이 될 만하다.

독일·프랑스·영국 등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조건에서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들었던 이 나라의 사례는 미·일·중·러의 틈바구니에서 독자적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우리에게 쓸모있는 참고가 될 것이다. 프랑스인 데카르트와 영국인 로크는 이곳에 머물며 대작들을 펴냈고, 탈근대 철학의 시조가 된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철학적 사유를 살찌웠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국가적 자존심은 그 나라의 문화적 역량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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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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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시>는 시(예술)의 연원과 형식에 대한 사유로 보인다. 그것은 중년, 노년이 되어서도 ‘문학소녀/청년’이고자 하는 ‘시 동호회’의 속물적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다른 ‘고통과 상처’에 대한 이해와 깊은 교감이 필요하다는 전언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문학소녀 양미자는 자살한 여중생의 내면과 고통을 알기 위해 그녀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그러한 공감의 회로를 알지 못하는 것은 시 이전(以前), 예술 이전이다. 영화의 첫 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흐르는 강물, 어린 여중생의 고통을 받아 안은 저 자연은, 그렇게 두개의 상처를 잇고 포개며 시를 만들어 낸다. 하나의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창동은 그렇게 그만의 예술철학을 드러내는데, 서울 근교의 그저 그렇고 그런 삶들 속에서도 시가 예비되어 있음을, 미만하여 있음을 느릿한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박민규의 <죽은 왕비를 위한 파반느>(예담)을 일주일 동안 느릿느릿 읽었다. 느릿느릿 읽은 것은 이 소설이 튼튼하고 박진감 넘치는 서사가 부재하기 때문이고, 아무렇게나, 아무곳이나 펼쳐 읽기 시작해도 무방한 에세이적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이야기. 여주인공이 늘 미인이었던 모든 소설의 관습적 클리쉐를 전복시키는 연애담. 스무살의 푸른 청춘들이 만나고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박민규스럽지 않은(?) 감성적이고 여성적인 문체로 보여주는 것. 여기서도 ‘사랑’의 탄생은 고통에 대한 이해이자 교감이며, 그것의 연대다. 개인이 가진 내밀한 상처를 앎이 없이 어떻게 사랑이, 시가 가능하겠는가.

박민규를 별로 좋아하지도, 읽지도 않았다. 서너 개의 단편을 보고 나서 나는 그가 내 독서관습을 거스르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매우 보수적인 독서관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위 말하듯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그에 대한 평가부터가 탐탁지 않았다. 정교하고 단단한 서사, 완미한 문체, 밀도 높은 서사와 같은 19세기 소설적 취향을 가진 내게 박민규는 별 선호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이 인터넷 연재물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불규칙한 행갈이와 단락구분이 주는 불편함은 독서관습을 심하게 거슬렀다. 스크롤의 압박도 없는 종이 책에 이 무슨 해괴한 실험인가.

소설속의 시간은 중고교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와 나는 거의 동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모양이다. 프로야구, 조다쉬 청바지, 나이키, 비틀즈, 아하, 영웅본색, 이선희 이런 80년대의 문화적 아이콘들이 곳곳에서 상기되며 개발연대의 막바지였던 지방 소도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 소설이 가버린 스무살 청춘을 회억하며, 순정했던 연애, 그 순금(純金)의 시간을 풋풋하게 불러오듯이, 잠시 옛적의 기억에 젖어 묵은 일들을 떠올렸다. 오래되어야 금이 되고, 더 오래되어야 순금이 되듯이, 기억은 묵어야 온전히 제 빛깔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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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추억 - 선을 넘어 길을 만들다
김연철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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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철의 <냉전의 추억>(후마니타스)를 읽은 건 꼭 천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겨레21>에 연재됐을 당시부터 김연철의 글을 흥미롭게 보았던 처지라 작년 6월 이 책이 나왔을 때 반가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바로 샀다. 1년 여 묵어 있던 이 책에 다시 손을 댔을 때, 마침 우리 사회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전쟁이 뭐 별것이겠는가. 휴전선에서 대북 확성기에 대고 선전방송을 해대고, 거기에 열받은 북한이 조준사격을 하고 우리가 대응사격을 한다면 그게 바로 국지전이고 전쟁 아니겠는가. 김연철이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8월의 포성>(평민사)은 그런 ‘우연’이 만들어낸 1차대전이라는 대참사를 기록한 책이다.


바바라 터크만의 <8월의 포성>
<냉전의 추억>은 남북관계 혹은 남북교류에 관한 역사에세이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진행된 남북간 대화, 교류, 협력, 협상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자 평가다. 이 책으로 보건대 확실히 남북관계는 간헐적인 퇴행에도 불구하고 교류와 협력의 확대라는 방향으로 진전돼 왔다. 김연철은 이런 관점을 오롯하게 드러낸다. 북한이 핵개발을 했던 노무현 정부 시대에도, 심지어 전두환 정부 시절 아웅산 테러 이후에도 남북관계는 더디지만 조금씩 진전돼 왔다. 대결과 긴장의 시대에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가는 것은 불가피한 세계사적 진보다. 백낙청의 말을 빌면, 분단체제는 남북간의 적대적 상호의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흔들려” 왔던 것이다.


김연철은 현재의 남북관계를 ‘햇볕정책에서 달빛정책’으로 퇴행했다고 말한다. 삼성경제연구소와 고려대 연구교수,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 등 기업과 정부, 학계를 두루 거친 그의 눈에 비친 현재는 그렇다. 하지만, ‘흔들리는 분단체제’에 대한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북관계는 꼭 10년 전으로 퇴행했다. 현재의 긴장과 대결국면은 1994년 1차 북핵위기 때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때 그 시절의 ‘올드보이’들이 다시 등장한 것도 그렇고, 남북관계의 ‘평화적 관리’에 실패하고 있는 점도 똑같다. 대체 이상우, 유종하 같은 사람이 언젯적 사람들인가. 북한에 대한 조갑제식의 인식으로 남북 평화프로세스를 풀어갈 수 있을까. 박정희, 전두환보다 더 퇴행적이었던 YS의 대북강경 노선과 그 주도자들이 10년 후에 재등장했다는 역사의 비극이자 희극이다.

보수정부가 들어섰을 때 적어도 남북관계에서만큼은 진보정부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진보정부가 남북화해를 추진할 때마다 불거졌던 남남갈등이나 대북퍼주기 논란은 한결 줄어들 것이라 판단했다. 보수여론의 발목잡기에 엉거주춤했던 진보정부보다 보수정부가 더 몸 가볍게 남북화해를 추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기대감이 있었다. ‘비핵개방3000’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더 많은 대북지원 내용을 담고 있다. 보수정부 역시 ‘대북 퍼주기’를 할 진대, 적어도 이 정부 이후로는 소모적인 대북 퍼주기 논란은 수그러들 것이라 전망했다. 역사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진전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물론, 현실은 이런 기대를 처절하게 배반하고 말았다.

<냉전의 추억>에는 현실에 대한 시적 인식과 산문적 인식이 교차한다. 이산가족, ‘관제’ 간첩 사건에 대한 글들은 분단이 만들어낸 비극을 시적으로 드러낸다. 남북협상과 북미관계사를 검토하는 글은 현실에 대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 빛난다. “한반도 평화는 남북미 관계가 선순환을 이룰 때 가능하다”거나 “서해가 한반도 문제를 푸는 열쇠다”라는 진단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의 역사적 시간과 북미관계의 역사적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본격화하자 강경파인 부시가 등장하고, 부시가 일방주의에서 다자주의로 변화하자마자 한반도에서는 냉전적인 보수정부가 들어선다. 그 와중에 한반도 평화는 퇴행과 좌절을 반복하고.

김연철은 “남북한 주도의 한반도 문제해결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남북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리는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과 대화가 되지 않는 남한을 6자회담 테이블에 불러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나서서 직접적인 북미대화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 아닌가. 1994년 1차 핵위기 당시 제네바합의 때가 그랬다. 미국과 북한이 협상해서 타결안을 내고, 우리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경수로 비용을 감당했던 것. 그토록 강조하는 6자회담의 진전을 위해서라도 남북관계는 협상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대로 가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조차 남의 손에 맡기는 꼴이 될 것이다.

김연철은 오늘자 한겨레 칼럼에서 “대한민국의 어떤 정부도 한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를 포기한 적이 없다”며 “전쟁불사 패러다임은 원조 보수정권에서도 볼 수 없는 말 그대로 ‘뉴라이트’의 특이한 인식일 뿐”이라 비판한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23234.html) 이 ‘특이한 인식’이 냉전반공주의와 결합하여 ‘북풍’이 몰아치는 형국이다. 나는 김연철의 이 책이 많이 팔려 많은 사람들이 맹목과 무지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다. 좀더 차분히 남북관계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천안함 사태는 우리 안의 ‘냉전반공주의’가 여전히 강고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가까스로 화해와 협력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2년 만에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토대가 허약했던 것이다. 냉전반공주의의 ‘체제’와 ‘무의식’을 걷어 내기에는 지난 50년 반공국가주의가 너무 강력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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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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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영화를 공부하는 후배 한 녀석이 물었다. “형, 심수봉 노래의 비밀이 뭔지 아세요?” 그와 나는 주책 맞게도,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심수봉의 열렬한 팬이다. “심수봉은 그대, 당신이라고 하지 않고 항상 ‘여자’라고 말한다는 거예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나는 여자이니까’ 등등의 노래를 떠올려 보니, 그래, 맞다. 심수봉은 대상이 모호한 그대, 그녀, 그 라고 하지 않고 남자/여자를 말한다. 심수봉 노래속의 ‘여자’는 사랑에 달뜨고 몸살이 나며, 질투하고 욕망하는,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의 ‘여자’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고 정직하게 내보이는 ‘여자’. 이게 남근적 시선이라고? 그래도 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수컷’이거나 ‘암컷’이다. 중간이거나 초월은 없다.

최영미의 시는 바로 그런 ‘여자’의 시다. 오랜 만에 그녀의 시집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을 사서 군밤 까먹듯 읽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도 그녀는 사랑하는/사랑했던/사랑하고픈 여자임을 표나게 보여줬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그렇다. “무릇 여자로 태어나 노래하는 것들/홀로 달콤하며 홀로 아프고/홀로 뜨거운 것들의 운명은 변하지 않았다”(‘2007년의 사포’)라니, 이건 그녀에게 불가피하게 수락해야할 ‘운명’인 모양이다. 이 운명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러나, 심각하지 않다. 관음증의 그것처럼 음습하지도 않고 차라리 유쾌하다. 그녀의 시는 자주 스무살 무렵의 시간대로 회귀하는데, 그런 시를 읽을 때면 나 역시 그맘 때로 돌아가 그녀의 문장 속에 내 삶을  뒤섞곤 한다. 이것도 바르트적인 의미의 “쓰여지는 텍스트”인 것인가. 그녀의 시는 내게 ‘마들렌 과자’인가. 

최영미의 사랑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가 휘젓고 다닌 구석구석이/흉터와 무늬가 되어/그가 일으킨 물결 밑에/꼼짝않고 얼어붙어/비가 와도 나는 흐르지 못한다.”(‘ love of my life?’) 몸에 각인된 흉터와 무늬. 불쑥불쑥 현재의 삶으로 틈입하여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드는 몸의 기억들. 그런데, 이상도 하여라. 그녀는 흉터와 무늬를 남겼던 사랑의 역사를 다시 반복하기를 꿈꾸고 있으니, “이대로 세차게 흔들리다/누군가의 가슴바닥에/훅, 떨어졌으면...”(‘11월의 낙엽’). 그녀에게 사랑은, 몸으로 욕망하는 사랑은, 존재의 법칙이자 이유(raison d'etre)인 모양이다. 그녀는 “좋아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독약이라도 마다 않는”(‘그여자’) 여자였을 것이며, “날마다 찾아오는 쾌락을/잘게 부수어/구멍으로 밀어 넣는다/싱싱한 고기의 피묻은 입술(‘가장 쉬운 길’)로 살과 피를 먹고 살아야만 비로소 살아가는 힘을 얻는 여자.

이 정직하고 싱싱한 욕정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몸이 벌써 그걸 먼저 알아챈다. “젊어서는 쳐다보기도 역겨웠던/선홍빛 냄새가 향기로워/가까이 코를 갖다댄다//그렇게 학대했는데도/내 몸의 시계는 멈추지 않았다”(‘중년의 기쁨’) 이런 몸적 인식은 역사의 진보에도 적용이 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몸의 변화이자 그 변화에 대한 인식이다. 가령, 이런 ‘아줌마스러운’ 인식(?)은 즐겁다. “유모차 부대를 호위하는 청년들이 어찌나 멋있던지!/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역사는 이렇게 진보하는 거야”(‘2008년 6월 서울’) 남자 몸의 품종개량의 역사가 곧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다. 이건 ‘여자’로서의 자각이 아니라면 쉽게 보이지 않을 터. 꽃미남에 열광하는 이 중년 여자의 욕망은 별로 추해보이지 않는데, 그건 생기로 발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잘 알려진 축구광이자 호나우디뉴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몸의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여자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자 다시 사랑할 순간이다. “너를 보기 전에 나는/내가 얼마나 아름다움에 굶주렸는지를 몰랐다/너의 풍부한 표정, 입가의 사소한 움직임을/놓치지 않으려 눈을 반짝이다.../누워 쓰러지기 전에 나는/내가 얼마나 피곤한지 알지 못한다”(‘일상의 법칙’) 굶주렸으니 채워져야 하고, 채워지지 않으면 그것은 죽음이다. 욕망하는 존재, 욕망하는 여자. 욕망이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중년의 나이를 쓸쓸하게 확인하는데, 그것은 죽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빨 빠진 늙은이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겠지/욕망이 지나간 구멍으로 바람이 들락거리겠지, ‘온종일 집에서’) 김지하의 말을 비틀어 말하자면, 사랑이 아니면 자살이다. “겉은 멀쩡하고 속은 화산이 타고 남은/재에 묻힌, 그녀는 날마다 자살을 꿈꾼다”(‘어떤 동문회’)

유예된 욕망, 채워지지 않는 사랑이므로 그녀는 반생은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 않은 삶”이다. 떠돌이의 삶이므로 연애와 사랑으로 충만했던 과거를 회고할 도리 밖에 없다.(“이 남자에서 저 여자로 옮기며/나도 모르게 빠져간 젊음/후회할 시간도 모자라네, ‘여기에서 저기로’) 혹은 립스틱 짙게 바르고, 탐욕스럽게 몸을 갈구하는 육식동물로서 살아가던지, 


그것을 하지 않고
팔 년만에 돌아온 봄이었다.  


금욕에 길들여진 정갈한 방.
화분에 물을 주고 밖을 내다 보니
벌레처럼 들끓는 봄볕
범람하는 꽃가루 때문인가  


쉽게 행복해지기를 거부하던 육체가
바위처럼 뻣뻣해진 가슴 열고,
뜨거웠던 용암의 분화구를 추억한다.  


사교계의 꽃이 되고 싶지 않아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가
길게 누워 봄을 앓는다  


소문만 무성했지 자신을 불사르지 못한 

 생애의 마지막 연기를 준비하며
옷을 갈아입고 립스틱을 칠한다.
(취미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겠지?)  

 

질겨진 가죽에 향수를 바르면
육식동물이 될까?
- 4월은 잔인한 달  


이 시집의 발문은 그녀의 첫 시집을 두고 “욕정을 사랑으로 은폐함이 없이 성에 직핍한 그녀의 대담성에 독자들, 특히 남성들은 혼비백산하였다”는 최원식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혼비백산은 너스레일 것이다. 현실원칙의 제어를 받지 않은 쾌락원칙의 솔직한 토로는 혼비백산하게 만들지 않고, 은밀한 공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은밀한 이유는 추상과 논리를 경유하지 않고 남자-여자를 잇는 사적인 회로를 거치기 때문이다. 시를 쓰느라 낑낑대며 언어를 메치고 되치며 은유와 상징의 좁고 복잡한 우회로를 통과하는 건 때로 시에 대한 매혹을 반감시킨다.  

 

반성(reflexive)이 지나치면 요상한 시가 되기도 한다. 그녀의 시를 읽으며 이제 막 중년으로 접어든 여자의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을 마주하는 건, 내 안의 그것을 일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로 인하여 잃어버린 생기를 되찾고 “마지막 연애의 상상”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최영미 시를 보며 그런 몽상에 잠시 젖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눈을 들어보니 시커먼 사내들이 튀어나온 배를 흔들며 지나가고, 숙취로 얼굴이 벌건 아저씨들이 이빨을 쑤시고 앉아 있다니. 허망하여라, 내 우울한 몽상이여, 5월 한낮의 백일몽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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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5-14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말이우, 형은 날 것 그대로의 욕망에 충실하신지?

어디(?)에 쏠려야할 욕망이 모조리 상반신 끝으로 전이돼 버린 건 아닌가...

책으로만 발산되는 건 아닌지...

모든사이 2010-05-1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어? ㅎㅎㅎ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 글로벌 시대, 치열했던 한중일 관계사 400년
오카모토 다카시 지음, 강진아 옮김 / 소와당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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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다카시의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은 김홍집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김홍집은 25세때 과거에 급제해  영의정에 오른 정치가이자 구한말 대외교섭의 최고책임자였던 인물. 갑오개혁을 비롯한 근대개혁을 이끌었던 핵심인물이었던 그는 1896년 아관파천으로 4차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면서 광화문 한복판에서 군중에게 몰매를 맞아 죽었다. 오카모토는 그가 죽어가면서 “천명(天命)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고종을 비롯한 친러파의 반발과 갑오개혁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겹치면서 그의 목숨과 함께 그가 추구한 근대개혁은 좌절되고 말았다. 군중이 던진 돌이 그의 몸을 부수었어도 그는 다만 자신의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창밖으로 한눈에 보이는 광화문이 새삼 달라보였다. 불과 백여년 전에 이곳에서 성난 군중들은 내각의 최고 책임자를 돌로 쳐 죽였다. 충성스런 경찰이 없어서였을까. 백여년이 지난 뒤 국정최고 책임자는 '산성'을 쌓아 군중의 접근을 막았지만, 그때는 산성도 경찰벽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외침도 없이 “천명”으로 알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쯤 되면 거의 영화의 한 장면이다. 풍운의 한 시대를 살았던 재상/근대개혁가/조선의 대표적 외교관이 역사의 풍랑을 운명으로 여기고 죽어가는 모습. 그가 살았던 1842년부터 1896년의 시대야말로 그 이후의 한반도 역사를 결정지은 최대의 역사시간이었다. 동시에 일본의 메이지 유신(1868)과 중국의 아편전쟁(1840)이 열어젖힌 동아시아 근대의 최대 격변기였다. 세종대왕 상이 흉물스럽게 들어선 저 광화문 광장 한복판 어디쯤, 성난 군중의 분노와 김홍집의 외마디가 묻혀있을 수도 모를 일.

오카모토가 김홍집 죽음을 불러낸 까닭은 그의 죽음이 일본과 청을 오가며 ‘독립 자주’를 관철시키려 했던 대외적 노선의 좌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김홍집은 “독립이 환상인 이유를 조선의 입장에서 가장 잘 알고 있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청의 대조선 정책을 지지하고 일본의 갑오개혁에 협력했던 것이다... 김홍집의 사업은 어느 것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 끝에서 그는 더 이상 뜻을 얻을 수 없다고 체념하고 스스로 생애의 막을 내렸다. 그것은 역시 비극이라고 할 것이다.”(p. 256)

성리학의 명분론이 지배하는 조선사회에서 국제관계에 대한 ‘리얼리즘의 시각’은 관철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리얼리스트’였던 김홍집은 대내외적으로 그의 리얼리즘을 실현시킬 토대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조선적 현실주의 노선의 죽음이기도 한 것. 오카모토의 책은 김홍집 개인의 죽음을 통해 당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세력관계를 해명하고, 조선과 중국, 일본, 그리고 영국 등의 국가들이 의해 추구되었던 ‘독립 자주 노선, 혹은 조선 중립화론’의 형성과 좌절을 설명하려는 시도다. 주변 강대국과 외세가 조선의 운명을 두고 벌였던 도박과 논쟁의 변천사다.

명청 시대 이래 조선의 대외관계는 사대교린(事大交鄰)이었다. 사대교린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속국 자주’라는 모순적인 관계규정을 낳았다. 속국자주는 현실적으로 ‘조공체제’라는 모습으로 외화된다. '상국' 중국과 '속국' 조선, 그리고 여기에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개혁에 성공한 일본이 부상하면서 한중일의 근대 동아시아 삼국지가 전개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3국지가 아니라 약소국 조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중국과 일본의 각축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속국자주는 ‘독립 자주’로 극복되어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여기서 ‘독립’은 청과의 관계에서 명분으로나 실질로나 독자적인 주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일전쟁 직전 조선의 군사적 공백(중일양군의 철수에 따른)과 중국과 일본의 ‘세력균형’은 청과의 오랜 관계를 벗고 ‘독립’으로, 나아가 자주의 길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일의 세력이 팽팽하게 균형상태를 유지하고 지속되어야만 조선의 독립 자주는 가능했다. 김홍집의 노력은 바로 이같은 노선을 향한 전략적 선택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독립 자주’는 주체의 역량보다는 ‘세력균형’의 산물인 것이다. 

대한제국의 성립 역시 사학계 일부에서 말하는 대로, 자주적 개혁군주로서의 고종의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 청일전쟁 패배로 청이 조선에서 물러간 뒤 러시아가 일본과 세력균형을 이루는 또다른 주체로 등장한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이 만들어낸 '힘의 공백'의 필연적 산물이다. 청이 물러난 뒤에야 고종은 비로소 ‘조선의 자주국임’을 대외적으로 선언할 수 있었다. 오카모토의 말을 빌면, “속국자주를 독립 자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자주를 성립시키는 세력균형은 그대로 보지하면서도 청의 속방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독립은 청을 포함한 조선을 둘러싼 외세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청일전쟁 이전의 ‘자주’는 국제적 세력균형은 갖추었으나 독립에 있어 각국의 승인을 받지 못했던 것. 그래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속국 자주’ 시절의 대외조약을 폐기하고(청의 세력이 쇠퇴했으므로) 새로운 조약관계를 수립하려 했다. 한반도 주변 국가들이 참여하는 북핵폐기의 국제 공조 프로세스인 '6자회담'의 원형적인 형태인 셈이다.

청일전쟁 '전야'와  더불어 러일전쟁 직전의 상황 역시 독립자주의 또다른 기회였다. 청이 물러간 자리를 대신한 러시아는 이제 일본과 조선을 둘러싼 새로운 세력균형을 형성했다. 이즈음 한국의 중립화론이 등장한다. 1894년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선을 1) 독립국화 2) 보호국화 3) 청일 양국 정부에 의한 상호승인(태국의 경우?) 4) 중립국화(스위스, 벨기에)라는 네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외교정략론에서도 조선에 대해 중립화 구상안이 유력하게 제시된 바 있다. 물론 그 이후의 역사는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로 뒤결되었다. 초기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조선중립화론은 세력균형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지고 만다.

 

대외적인 세력균형을 깨뜨린 것은 러시아의 남하(여순, 대련 조차)로 벌어진 국제관계의 악화. 영국은 여우처럼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세력으로 청을 선택하더니, 청이 몰락하자 이제 일본을 선택한다. (영일동맹) 국내적으로는 아관파천으로 인해 친러파가 등장하면서 중립화 구상은 현실적 동력을 상실한다. 러시아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중립화 구상을 폐기하고 조선 진출을 가속화하게 된다. 이 둘 사이의 충돌, 러일전쟁은 그러한 움직임을 최종적으로 완결한, 사실상 조선을 둘러싼 그 이후의 질서를 완결한 역사적 사건이다.  


아관파천으로 인한 4차 김홍집 내각의 붕괴. 김홍집은 타살당하고, 재무장관 어윤중은 도망중 살해당하고, 외무장관 김윤식은 체포되어 유배당하면서 온건개화파는 궤멸된다. 남은 것은 친러파 관료. 그러니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한 뒤 조선의 개혁주체는 남았을 리가 없었던 것. 오카모토는 이들 온건개화파의 좌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청이나 일본 혹은 열강의 특정 일개국가와 걸핏하면 일방적으로 결탁하려고 하는 당파 사이에 서서 항상 극단적인 움직임을 억제하고,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배려하면서도, 지나친 압력에는 결코 굴하지 않는, 이른바 절도를 지닌 균형자(balancer)였다. 그들의 역할과 존재는 청일전쟁 이전에 조선의 ‘속국 자주’ 및 그것이 가져온 세력균형을 체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224)

늘 그렇듯이 조선말기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더구나 근대초기의 식민화 과정을 공부하는 것은 아주 씁쓸하고 우울한 경험이다. 오카모토의 시각은 새롭고 신선하지만  또다른 우울의 목록을 추가한다. 일본과 중국이라는, 그리고 근대 이후로는 미국과 소련(러시아)라는 또다른 ‘외세’가 개입하고 간섭하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살길은 주체적 노력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는 사실의 확인은 독하게 쓰다. 한반도는 속국자주의 현대판인 한미동맹이 작동하고 있으며, 청일전쟁 직전의 상황처럼 ‘6자회담’과 같은 국제적 공조가 오히려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다. 과거의 청일․러일의 세력균형이 현대에 와서 미(일) vs. 중(러)의 세력균형으로 치환되고 있는 셈이다. 자주적 통일은 이러한 역사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될까.  


김홍집이라는 인물을 새삼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우유부단한 정치가, 친일관료 쯤으로 알고 있던 그의 대외 노선은 노무현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떠올리게도 했다. 오카모토가 김홍집 세력을 balancer로 규정했을 때, 그 균형자는 노무현의 시각과 거의 일치한다. 19세기 영국이 그러했듯이 '패권국가에 의한 균형'이 아닌 조정과 타협의 주도자로서의 균형자 말이다. 저자의 서술은 국내 사학자들의 춘추필법 혹은 열혈 민족주의와는 다르게 대단히 실증적이고 담담하다. 실증은 당대 중국과 일본의 외교문서와 사료에 충실하다는 의미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대목도 여럿이나 대체로 이 단명한 시대에 관한 역사상을 그려보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고 명쾌하다. 책을 산 지는 한달이 넘은 듯한데, 지난주에야 책장을 덮었다. 5년여 계속된 동아시아 근대사 공부의 한 줄기를 끝낸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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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10-04-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모든사이 2010-04-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