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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오신 날 전 날 저녁 나는 수능만점의대생 살인자 뉴스를 클릭하게 되었다. 평소라면 그냥 제목만 읽고 저런 범죄가 있군. 역시 인간세상이야 하고 넘겼을 것인데 '왜'인지 클릭을 해서 보게 되었다. 해당 뉴스의 연관 영상으로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이 있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여동생은 그것이 알고싶다류의 사건사고살인범죄를 좋아한다.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날은 '왜'인지 모르게 범죄살인 사건 이야기에서 귀를 뗄 수가 없었다. 유튜브는 휴대폰을 금방 과부하시키기 때문에 나는 팟캐스트로 듣기로 했다. 그런데 팟캐스트에는 없고 팟빵에만 있었다. 그래서 팟빵을 다운받고 회원 가입을 하고 본격적으로 한국살인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수능만점의대생 살인자(2024. 5월), 5선 국회의원 아들 살인자(2023.12월), 서초동 일가족 살인사건 살인자(2015. 1월) 이런 살인자들도 있으니 가난이나 무지도 살인의 원인이 아니다. 다만 가난이나 무지라는 환경에 있는 살인자는 살인 상황에 더 많이 더 쉽게 놓인다고 볼 수 있겠다.


살인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 살다가 살인을 해야 자신의 기분이 해소될 상황에 놓이게 되면 주저 없이 살인을 저지른다고 난 생각한다. 수능만점의대생 살인자와 분당 서현역 칼부림 살인자(2023.8월) 두 살인자 사이에 뭔 차이가 있겠나? 의대생도 공부 못했으면 서현역 살인자처럼 묻지 마 칼부림했을 거고 서현역 살인자도 공부 잘해서 의대 갔으면 여자친구가 자기 말 거역했다는 이유로 찔러 죽였겠지. 


뭐 따지고 보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은 긴 세월 인간의 생존 필살기였을 텐데. 영화 <듄 2>만 해도 마지막 장면은 폴(티모시 샬라메)과 로타의 일대일 살인 대결이고, 폴이 칼로 로타의 목을 땄나, 심장을 찔렀나로 끝이 나는데. 주위에는 그 살인 대결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무예로서의 살인과 범죄로서의 살인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은 지녀야겠지만, 내 말은 천재 예술가가 자연의 섭리에 의해 태어나듯, 살인자도 자연의 섭리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런 살인자도 같은 인간의 꼴을 하고 있기에 인권을 인정해주고 사형을 시키지 못하는 게 것이 인간의 비극이라면 비극. 


살인자로 태어나서 사람을 죽이고 무기징역으로 목숨만 건지고 사느니(물론 살인자들은 목숨이 삶의 전부이기에 만족하겠지만) 나는 살인자와 살인당하는 자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후자를 택할 것이다. 남을 죽이면서까지 살아야할 가치가 있나 이 세상이?? 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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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일본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한국에 개봉하는 일본영화들은 인디도 아니고 오락상업도 아니고 1990년대 KBS2에서 방영하던 드라마게임 같단 말이지. 영화와 드라마 사이 어디쯤. 막 각본가 시험에 합격한 이들의 인턴쉽 같은. 

평론가들의 평이 매우 좋았음에도 불구하고(평론가의 평과 나의 영화 취향은 다르기에) 별 기대 없이 봤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본영화는 이제 이제 시시해 별점 6점이 최선이야 생각했던 나를 놀라 자빠지게 했다.

모든 장면이 거의 완벽하게 다 아름다웠다. 사소한데 흥미진진하고. 심지어 스릴러??

<드라이브 마이카>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이브 마이카>를 보면서도 보고 나서도 '아... 역시 천재다 천재.'라는 생각만 했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주기적으로 천재들은 태어나는구나. 같은 교복을 입어도 다른 교복인 것 처럼 하이패션인 것처럼 굉장히 세련되게 입은 급우를 본 듯한 기분. 러닝타임 179분!! 이 패기는 어쩔 건가. 이 179분은 드라이브, 연극연습으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다. 대사와 화면 둘 다 완벽하다. 이런 영화가 있을 수 있나? 특별한 플롯 없이 179분을 흥미진진하게 끌고 나가다니!! 뭐, 원작이 무라카미 하루키이긴 하지만. 하루키도 이 영화보고 놀라 자빠졌을 거 같다. 청출어람데스네 하면서!! 

<드라이브 마이카>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친하지 않은(직업으로서의 동료일 뿐인) 두 사람이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한담으로 시작해서 내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는 한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적인 이야기고, <드라이브 마이카>는 더 무거운 인생사에 대한 고백이다. 사실 나는 인생사에 대한 무거운 고백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

**다희와 만나고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대화가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독백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기 방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애초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말도.

**괜찮아요. 제가 오늘은 피곤해서....

다희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서운하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나, 상처받았다, 예전의 다희라면 그렇게 말했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 묻곤 하니까. 그러나 어떤 기대도,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 잠근다. 다희에게 그녀는 더는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일 년 / 최은영>

나는 <드라이브 마이카>의 홋카이도행 드라이브에서 차 안 대화 같은 건 부담스럽다. 그런 인생사 고백은 듣고 싶지 않달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의 대화 정도가 적당하다. 이 회사에 오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 소개팅 어플에서의 만남은 어땠는지 사소한 사생활 이야기 정도는 감당가능하나 '내 아내에겐 남자가 많았다.'라는 고백의 대답으로 '내가 엄마를 죽였어요.' 같은 것은 역시 상당히 부담스럽지 않을까. 이 대화를 했다고 치자. 그다음 스텝은? 서로의 내밀한 인생사 고백을 나눈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절친베프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그 고백을 나누기 전처럼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사이여야 할까? 

요즘 나는 시간을 메우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한 대화조차도 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 궁금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도 없으며, 할 말 도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서재에서 일기로 모조리다 다 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해소해 버리면 충분하기도 하고. 최은영의 단편 <일 년>과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카>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내가 더 이상 타인과의 한담조차도 바라지 않는 인간이 되었음에 관한 글(일기)만 쓰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이걸 쓸 시간(틈)을 확보하는 것에 한 달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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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8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5-19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4.3.27.개봉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이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가 화재였을 당시 보러 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 그게 싫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타이틀로 하는 건 왠지 엄마찬스 같았다. 반칙 같았다. 그래서 보지 않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왜 보러 갔을까 싶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 <오키쿠와 세계>와 상영 시간이 앞 뒤로 있어서 간 걸음에 봤다. 


영화에 대한 감상 이전에 감독에 대한 감상 먼저 하자. 천...재!!!!! 다!!!!!!!!!!!!!!!!

몰라봬서 죄송하옵니다. 

영화에 대한 평은 그저 한 마디 아! 름! 답! 다!!!!!!!!!!

장작 패는 장면도 아름답고, 국수 먹는 장면도 아름답고, 운전하는 장면도 아름답다.


개인적 취향으로 맘에 들었던 장면은 기획사의 두 직원이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하던 장면. 이 부분만 편집해서 보고 또 보고 하고 싶었다. 이런 한담 좋지. 하지만 현실에선 불가능이지 않을까?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중 <일 년>이 떠올랐다.



<오키쿠와 세계> 2024.2.21.개봉. 감독 사카모토 준지

아주 오래전 BIFF에서 사카모토 준지의 <얼굴>을 봤다. 이 영화보다 6~7년 쯤 뒤에 만들어진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극장에서 보면서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얼굴>의 여주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데도 불구하고 자력으로 일어선다.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오키쿠와 세계>는 두 번째로 본 사카모토 준지 영화다. 이 영화 역시도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 오키쿠는 훌륭한 여성이다!


ps. 이 영화 개봉을 통해서 안 건데, 봉준호랑 사카모토 준지는 친하다고 한다. ㅎ 사카모토 준지 내한 GV에 진행을 맡은 봉준호 감독!



<키메라> 2024.4.3.개봉 감독: 알리체 로르와커

<행복한 라짜로> 2019.6.20 이후 처음 개봉한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내 최애 영화 리스트에 있는 영화다. 그리고 이 감독도 천재다! 

큰 기대를 품고 극장에 갔고 그 기대를 여한이 없이 즐겼다. 집에 와서는 여운을 더 길게 뽑고 싶어서 <행복한 라짜로>를 봤다. (4월 28일에 왓챠서비스에서 종료됨 ㅠㅠ 다시 돌아와.)

내가 보기엔 <행복한 라짜로>도 <키메라>도 SF장르로 분류할 수 있을 거 같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이걸 영화로 이토록 자연스럽게 잘 표현할 수 있는 거지?


ps. 영화 <혹성탈출 3>을 아직 보러 가지 않았는데, CG 범벅인 헐리웃 금수저 영화는 가급적 덜 보고 싶달까. 하지만 <혹성탈출>은 1, 2 편 다 봤기에 3편도 봐야 한다는 왠지 모를 스티커 모으기 심리가 작동 중...



<바람의 세월> 2024. 4.3.개봉 감독 김환태, 문종택.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

"지금 이 발표자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나로선 세월호 관련 영화를 보는 것이 최선. 작게나마 관객수에 +1을 하는 것으로 내 마음을 실천해 봤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그 이상의 수고를 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 일단 스트레스받는다. 이런 참사가 발생했다는 자체가, 아직도 진상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고 이 참사를 단순한 사고일 뿐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모두 스트레스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몫 / 최은영>


더 정확히 말하면 정의로움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순간 정의로움을 버리는 인간들. 정의로움이 자신에게 득이 될 경우에만 정의로움을 지키는 인간들. (이미 <상실의 시대>에 언급되었던. 대학 붕괴를 외치며 데모를 했지만, 퇴학 위기가 닥치자 아닥하고 수업에 참여하던 정의를 외치던 작자들을 보고 열받은 와타나베의 출석 침묵 ㅋㅋㅋㅋㅋ)

그래서 애초에 나는 '정의로움'은 멀리 하고 살았다. '정의'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싫어서.


음...그리고 희영같이 지나친 사람도 난 별로다. 인간은 살기 위해 사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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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즈&이어즈>를 보고 있다. 재미있게 본 드라마였고, 길지 않은 6부작이었기에 내용을 대체로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어긋나 있었고, 어떤 건 완벽하게 누락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배서니가 야매 시술을 받아서 안구적출을 당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배서니의 친구가 당한 일이었고, 빅토르는 보트피플로 망명에 성공했다고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대니얼이 죽은 장면에서 깜짝 놀랐다. 대니얼의 사망은 내 기억 속에서는 완벽히 지워져 있었다. 또한 배서니가 절반쯤 IT휴먼이 되는 수술을 받은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이 전혀 없었다.


5부에서 배서니는 IT휴먼이 되는 수술을 받는다. 두 안구를 적출하고 그곳에 안구 모양의 렌즈를 넣었다. 뇌에도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칩을 넣어서 컴퓨터의 CPU처럼 멀티 태스킹이 가능해진다. 즉 유튜브를 보면서, 이메일을 읽고, 동시에 메시지를 작성할 수 있는 뭐 그런 식. 열 손가락에는 키보드를 이식했기에 물리적 키보드가 필요 없다. 머리에서 생각한 것만으로 전화를 걸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 베서니가 이 수술을 받는 년도는 아마도 2028년?


내가 어렸을 때는 책이 귀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인 위인전 전집 64권을 읽고 또 읽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고려의 마지막 왕자 마의 태자가 목숨을 건지기 위해 깊은 산속에 숨어 들어가서 칡, 마 같은 뿌리 식물을 채집해서 먹는 장면에서 울었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그 누구도 그 곳에 그 책이 아직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낡은 책들, 교실 구석에 있던 반공문고(반공교육은 없어졌지만 그 흔적은 흉터처럼 남아 있던 교실)까지 죄다 읽었다. 비디오를 빌리면 반드시 2번 이상 보고 반납했고, 책대여점에서 대하소설 따위를 빌려 읽었다. 초중고 시절에 내가 구입한 책은 최소 2번 넘게 읽었고, 영화잡지는 광고 글자까지 하나하나 다 읽었다. 가끔 구입한 노래 테이프, 더 가끔 구입하던 CD는 또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요즘은 음악, 영화, 책이 너무 흔하고 너무 많다. 회사에도 신간 책이 넘치고, 집 옆에 도서관도 생겼고, 또 내가 구입하는 책까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 영화는 또 어떤가. OTT의 대홍수!! 음악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하찮은 뇌로는 다 감당할 수 없다. 배서니처럼 뇌에 칩을 때려 박지 않는 한 감상하고 망각하고, 감상하고 망각하고 하는 수밖에 없다.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는 먹방 유튜버처럼. 


감상이 다 뭔가. 내가 쓴 일기마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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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사회심리학자인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어린이와 10대 사이에서 불안이 크게 증가한 이유 중 하나가 놀이의 박탈이라고 주장한다. 어린이는 놀이를 할 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습득한다 아이들에게서 이러한 도전을 박탈하면, 자라면서 공황 상태에 빠지고 자신이 상황에 대처할 수 없다고 느낄 때가 많을 것이다. 아이들은 유능하다거나, 어른의 지도 없이 일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지 못하다. 하이트는 이것이 불안이 증폭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불안할 때 집중력이 나빠진다는 강력한 과학적 증거가 있다.

<도둑맞은 집중력 14장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감금된 아이들>


이 무슨 진화심리학 같은 개소리인가. 결과적 현상을 두고서 원인을 추리 짜깁기해서 그럴싸하게 씨부리는 거 딱 질색.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정서적으로 부모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으나 놀이의 기회를 박탈당한 요즘 아이들

vs

매 끼니를 걱정하고, 늘 굶주리고, 제대로 씻지 못하고, 동생을 돌보는 보모로서의 방과 후 시간, 부모의 부부싸움과 폭력, 심지어 매질, 부모의 방임으로 인해 어부지리적으로 주어지는 놀이시간을 가지는 과거의 아이(<나의 눈부신 친구>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하다 못해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그 시절이 좋나?) 


과거의 아이들이 요즘 아이들보다 불안이 적었다고?? 더 불안했을 거 같은데?


영양실조와 절대적 굶주림 vs 영양과잉으로 인한 비만과 당뇨

가축으로서의 자녀 vs 애완으로서의 자녀


인간이 중용을 할 수 있는 정신력(자제력)을 지녔다면 참으로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홍수 아니면 가뭄, 변비 아니면 설사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것 같다.


문명의 진화(정확히는 변화)는 젠가 같은 것. 아래 블록을 빼내어 위로 올라가지만(이게 진보?) 위로 올라갈수록 위태로워지는 법.


현재도 별로지만 같은 이유로 과거도 별로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이 요즘 아이들의 어린 시절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각각의 시대가 장점과 단점이 있는 것이고, 둘 중 어느 것이라도 해도 살기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의 14장 같은 식의 생각들은 다음(아랫) 세대의 능력은 하대하고 오직 자신이 살아온 시대만 좋았다고 하는 꼰대 같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다. 당신 눈에는 요즘 아이들이 바보로 보이나? 다 각자 자기 시대에 맞게 적응해서 살아내는 법을 터득해서 살아낸다. 걱정하지 마라. 놀이를 많이 하고 신체활동도 많이한 어린 시절을 보낸 현 시대의 노인들은 그러면 왜 그 모양 그 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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