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코엘료 소설 중 읽어본 것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11분> 두 권이지만 두 권을 읽고 느낀 느낌은 클라이막스로 가기전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해서 뒷심(?)이 부족하고 왠지 뻔한 결말로 간다는 느낌과 '여성의 생각를 남성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여주인공들에 대해 과도한 애정을 보이고 있는 작가는 여주인공들을  정신병원, 또는 사창가와 같은 개골창에 쳐박아놓고도 안쓰러운 나머지 그곳을 탈출시키면서 남자들을 하나씩 붙여주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새출발을 시키는데 전력투구를 한다. 이미 고딩이 때 봤던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서부터 시작해서 최근까지의 트렌드 드라마 속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신데렐라 이야기'의 변주, "그래서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것이 아마도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생각을 잘 아는 남성작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회 속에서 '여성'이란 이름과 함께 내려지는 현실의 굴레를 깨닫고 저항하는 여주인공의 의식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주인공들이  현실의 굴레와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사건으로 '죽음'과 '섹스'와 같은 파격적인 소재를 가져온 것도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베로니카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죽기로 결심한 것은 너무나도 지극히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에 지쳐서였다.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에게는 그 배부른 것처럼 보이는 문제가 가장 풀기 힘든 숙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한웅큼의 수면제를 집어삼키기에 이른다. 그런데, 죽기 직전 뱃속에서 수면제가 녹는 동안 신문기사 속에서  '슬로베니아는 어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쓴 기사를 보게 되고 슬로베니아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그녀가 살고 있는 곳)도 모를 것이란 것에 분노를 느껴 장문의 항의 편지를 쓰고 정신을 잃는다.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속에서 세상의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작은 나라의 수도에 사는 한 여인의 죽음은  그냥 묻혀지나갈 수 있는 평범한 일이 되어버렸다.  거대해진 세상, 뭔지 모르지만 하여튼 복잡하고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 속에서 이젠 '인간의 죽음'마져도 그 의미를 잃어버린 채 신문의 부고기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익명성 속에 자신이 묻히는 것을 방관하는 여성이 아니었으며, 코엘료는 그녀의 그런 근성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를 살려준다. 물론 그가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수면제의 부작용으로 그녀의 심장은 7일 후에는 영원히 멎도록 시한폭탄 장치를 한 채, 정신병원에서 그녀를 깨워주었으니까.

코엘료 자신이 예전 주체 못하는 예술가의 기질 때문에 세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정신병원의 분위기를 잘 잡아내었다. 나또한 정신과 실습을 돌 때 정신과 병동에서 환자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잘 안다. 그들은 사회 속에서 겪게 되는 많은 스트레스와 규율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막아내려고 용을 쓰다가 지쳐 버린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콜중독, 우울증, 정신분열증, 섭식 장애, 강박장애, 자살시도 등등으로 정신과를 방문하고 치료및 재활을 받고 있다. 사회가 주는 스트레스의 심각성은 뇌에서 분비되는 여러가지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까지 변화시킨다. 사회의 틀에 자신을 맞추어서 살아가려고 아무리 용을 써도  잘 안되는 지경에 와버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괴롭히는 것들과 잠시 떨어져 있도록 그들을 보호해 주는 곳, 변화된 뇌의 기능을 되살려줄 수 있는 치료약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곳,  닫혀버린 그들의 마음을 다시 열고 사회가 주는 여러가지 자극들을 스스로 조절하고 견딜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안식처가 필요한데, 사회의 시선은 그들에게 잠시동안의 안식처가 되는 정신병원을 다녔다는 기록 하나만으로도 또 차갑게 변한다. 이것이 정신병을 앓고 있는 이들의 이중고다.

베로니카 또한 정신병원에 대한 사회의 선입견을 그대로 가진 채 시한부 생명을 가지고 정신병원에서 깨어났다. 앞으로 7일. 그녀는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아졌다. 사회에서는 자살시도를 한 자신을 미쳤다고 정신병원으로 보냈지만 자신은 아무래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이 되므로. 그녀는 용기를 내어 모험을 하기로 하고 미친 사람들에게 직접 뭐가 미친 것인지 물어본다. 

"미친 사람이란 자기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야. 정신분열증 환자, 성격 이상자, 편집광처럼 말이야. 다시 말해 뭇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지. 하지만, 시간도 공간도 없고 그 둘의 결합만 있다고 믿었던 아인슈타인, 또는 대양 저 너머에 절벽이 아니라 다른 대륙이 있다고 확신했던 콜럼버스, 또는 인간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장담했던 에드먼드 힐러리, 또는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해냈고 다른 시대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다녔던 비틀스, 아마 너도 이미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을 거야.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 역시 그들 자신의 세계속에서 살았어."

이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제드카였다. 그녀는 정신병원 '빌레트' 에 들어와 광기의 세계가 제공하는 자유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짊어져야 할 책임도, 먹고살기 위해 싸울 필요도, 반복적이고 권태로운 활동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과 싸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정신병원에 들어오자마자 급속하게 증상은 좋아지지만 거기에 머물고 싶다는 나쁜 생각이 들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퇴원을 준비 중이었다.  그 편함과 그 속에서 주어지는 자유 때문에 자꾸만 정신병원에 머물러 있으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는 정신병원이 '잠시동안의 안식처'란 사실과 세상 속에서도 자유롭게 자신의 광기를 독창성으로 바꾸며 살 수 있는데 굳이 '빌레트'에 머무를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한편,베로니카는 광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사회에서는 아무도 이야기 해주지 않았던 것의 해답을 찾게 된다.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들었던 것,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그녀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피아노 연주, 춤, 남자와의 사랑 등등)을 자꾸만 포기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삶의 낙을 빼앗아 갔다는 것과 그것이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깨달음은 너무 늦게 왔다. 제드카처럼 퇴원을 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엔 그녀의 삶은 이제 며칠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정신병원의 광기가 주는 자유로움 속에서 그녀는 그녀의 목숨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늦은 밤, 좋아하는 피아노를 마음껏 치고, 그 피아노 연주를 좋아해서 열심히 듣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인 '에뒤아르'에게 자신이 자위하며 기뻐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과 그녀를 기쁘게 하는 성(性). 모두다 자연스럽고 그녀를 순간순간 살아있게 느끼게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직업이 아니라 결혼할 남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의 하나로 생각하라는 어머니의 말과  성(性)이란 부분에 있어서는 여성이기 때문에 수동적이어야 하고 상대에 맞추어 기쁜 척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굴레가 되어 그녀를 옥죄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정신분열증 환자인 '에뒤아르'는 화가가 되어서 멋진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과 외교관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부모의 강압적인 기대 속에서 결국 미쳐버린 인물인데 그의 모습은 솔직히 현실감이 없다. 아무리 삶이 얼마남지 않은 한 여인이 그의 앞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보여줄 정도로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할지라도 여태껏 부모님을 피해 정신병원에 안주하고자 했던 그가 왜 갑자기 그녀와 함께 정신병원을 탈출해 포기했던 그림을 그리고자 마음먹었냐는 거다.  죽음 앞에서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그녀의 광기에 그도 여태껏 포기했던 예술에 대한 광기를 불 붙여 보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인가?

그러나, 코엘료는 소설 속에서 '노트르담'이라는 한 부인이 살아있는 뱀을 밟고 있는 성화(聖畵) 속의 의미 -이제 내가 너희에게 발로 뱀을 밟을 권능을 주었노니(....) 그 무엇도 너희를 해할 수 없으리라.누가복음 10장 19절-를 통해 남자와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친 짓은 바로 사랑이며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다. 사랑에 미친 두 남녀라면 죽음이든, 질병이든, 정신병원의 안락함이든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탈출할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그들을 억압하던 세상의 굴레를 사랑의 광기로 헤쳐나가면 그들이 행복할꺼라 믿고 싶었던 것일테고.

그의 결론에 반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얼마남지 않았다면....'이라는 극단적인 상상력을 통해  남들이 옳다고 하는 세상의 틀 속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활력이 되는 광기'를 보여준 코엘료. 그의 소설을 끝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삶에는 많은 길이 있고 그 길마다 유혹이 있으나 너무 빠져들지 않고 적당히 즐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당의정이 되지 않겠냐고."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5-04-18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영세명이 '베로니카'입니다.
물론, 전 가늘고 길게 살 생각입니다만.
근데, 두개씩이나 연이어 올리시다니요?
코엘료가 딥다 좋아하겠는걸요..아주 새로운 느낌입니다.^^
제가 새롭다고만 말만하고 간다면 서운하실까봐 추천도 당연히 했습니다.

클레어 2005-04-19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는 글을 평가받기 위한 곳이기 때문에 추천도 글을 보시고 하시면 된답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평가에 여러가지 개인감정이 끼어들기 때문에 평가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좋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말해주시는 편이 더 발전에 도움에 될 거 같거든요. (요상하게도 당근보다 채찍을 좋아하는 성미인지라..흐흐~)
파란여우님의 리뷰도 이글을 쓰기전에 읽었답니다. 열린 공간으로 정신병동을 봐주신 것도 혜안이란 생각이 들었답니다. '베로니카'라는 영세명이 파란여우님께도 내려진다는 것도 리뷰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카톨릭과는 영 관계없는 삶을 사는 저인지라 어떤 성녀인지 잘 모르겠더군요. (혹시 기회가 되면 알려주시렵니까?)
리뷰를 두개 올린 것이 아니라, 밑줄 긋기 하나, 리뷰 하나 였는데 밑줄긋기에서 저에게 느낌으로 다가온 말을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리뷰와 함께 올렸습니다.
혼란스러움이 있었다면 다음에는 분리를 해야겠군요.

파란여우 2005-04-2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로니카-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
로마군의 살벌한 눈치 속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수건을 꺼내어
예수의 지치고 절망스런 얼굴을 닦아 주었던 여인네입니다.
위험을 무릎쓰고 자신의 의지를 꺽임없이 누군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 아, 그거이 물론 3류 양아치인 저에게는 당연히(!!)없습죠.^^

클레어 2005-04-2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용감한 여인네가 베로니카였군요. 어쩐지 ..흐흐~
3류 양아치의 범주에서는 훨 벗어나신 파란여우님. 겸손도 자만이라고 하더군요. 여우님의 글은 양아치만큼 직설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무대뽀적이지도 않고, 많은 여운을 주는 글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흐흐~

딸기 2005-07-07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오스, 글 이제야 읽었어. 멋지다. 네 글은 항상 멋져.
채찍질을 해달라고, 쉭~ 찰싹!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난 믿지 않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이해해야만 해. 불의 ,탐욕, 비참함, 고독일 뿐인 이러한 혼돈을 창조한 건 바로 신 자신이잖아. 신의 의도는 훌륭한 것이었겠지만 결과는 형편없어.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보다 일찍 이 세상을 떠나기를 갈망한 피조물들에게 관대함을 보여야 해. 아니, 오히려 우리가 이 땅을 거쳐가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할지도 몰라.-P19쪽

이 아름다운 광경도 머잖아 독창성을 모조리 상실하고 모든 것이 반복되는, 전날이나 다음날이나 다를 게 없는 존재의 비극이 되어버릴 테니까.-P21쪽

그녀가 삶이 자연스레 강요한 것을 결국 받아들이고 만 것은 그녀 자신이 모든 것을 `그딴 바보짓`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춘기 시절, 그녀는 뭔가를 선택하기에는 아직 때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었을 때는, 뭔가를 바꾸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고 체념했다. 지금까지 무엇 하느라 내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거지?-P67쪽

미쳤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해. 마치 네가 낯선 나라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지. 너는 모든 것을 보고, 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식하지만 너 자신을 설명할 수도 도움을 구할 수도 없어. 그 나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건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느껴본 거예요.

우린 모두 미친 사람들이야,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p92쪽

교육은 우리에게 오로지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갈등을 피하라고 가르친다. 베로니카는 모든 것을, 특히 자기 속의 수없이 많은 베로니카들, 매력적이고, 끼로 넘치고, 호기심 많고, 용기 있고, 언제든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베로니카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온 삶의 방식을 증오했다.-P100쪽

자기만의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현실이란 게 도대체 뭐죠?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거라고 여기는 거야. 반드시 최선의 것이나 가장 논리적인 것이어야 하는 건 아냐. 집단적인 욕망에 딱 들어맞으면 되는 거지. 내가 지금 목에 매고 있는 게 뭐지?

넥타이요

그래. 넥타이야! 네 대답은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정상적인 사람의 대답이지. 하지만 미친 사람은, 복잡한 방식으로 매달려 있는, 우스꽝스럽고 아무 쓰잘 데 없는 알록달록한 천조각이라고 말할 거야. 숨쉬기 어렵게 만들고 머리의 움직임을 방해할테니, 정신을 딴 데 팔며 환풍기 곁을 지나가다가 이 조그만 천조각 때문에 질식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말야.
만약 미친사람이 넥타이는 무엇에 쓰는 거냐고 묻는다면, 난 아무 쓸모도 없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거야. 노예처럼 일하는 사람이나 힘과 거만함의 상징이 되어버려 이젠 장식적인 역할도 못 하니까. 쓸모가 있을 때는, 집에 들어가서 그걸 풀어버릴 때뿐이지. 해방감을 주니까. 뭔가 구속에서 벗어난 것 같고. 그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 안도감으로 넥타이의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냐구? 아니지. 그렇지만, 미친 사람과 정상인을 놓고 내가 목에 매고 있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넥타이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정상인으로 간주될 거야. 중요한 건 옳은 답이 아니라 남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답이니까.-P126-12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술로 보는 20세기 - 학고재신서 19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선생님께 이 책을 선물받고 무려 4일에 걸쳐서 읽었다. 역사..역사...역사!!! (으아악!!!) 이렇게 비명을 지르는 것은 제대로 된 역사서를 읽었던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요즘 열린우리당에서 왕따당하고 있는 유시민씨가 예전에 썼던 "꺼꾸로 읽는 세계사"(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유시민씨를 거의 하늘처럼 존경했었는데, 작년부터 영...아니올씨다.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정치인들이여!! 당신들에 대한 지지도는 이렇게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잘 좀 해라!! 잘 좀 해!!)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된 책들 몇 권, 근현대사에 대해서 약간 찝쩍거린 것 말고는 맘 잡고 정리하면서 읽었던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쉽게 풀자면 인간들이 살아온 이야기이다. '인간의 삶만큼 드라마틱한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와같은 역사에 대한 풀이는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다. 그러나, 역사서만 보면 숨이 턱하니 막힌다. 왜냐구?  첫째. 사관(史觀)이란 부분에 대해 우리나라 국정교과서를 보면 모두다 일률적이라 대충 참고서에서 중요하다고 찝어놓은 부분만 요약해서 집중 공부하고 연대만 달달 외우면 좋은 점수를 받는 시스템으로 공부를 해왔다. 그런데, 이런 식의 공부라는 것은 인간의 다양한 삶을 크고 넓게 바라보며 인간의 질곡과 비약발전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되는 근원적인 힘을 찾고,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갖도록 하는 역사공부의 원래 목적과는 영 상관이 없는 행위라 혜안이고 나발이고 가지기도 전에 역사는 참고서 가지고 암기하는 것이상 깊이있게 공부할 수 있는 경험을 갖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 역사책들을 살펴보면 너무 두껍고 재미없게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쪽으로 책읽기가 단련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전공이 완전 반대이다 보니 두껍고 잘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하품하기 일쑤인데다 용어조차 잘 모르는 것들이 나오면 참고 보기 보다는 던져버리는 쪽이다. 그러다 보니 역사쪽과는 거의 빠이빠이~ 수준인 천착한 지식수준을 가지고 있게 되어 버렸다.   덕분에 이책을 보면서도 '또다시 나에게 역사에 대한 컴플렉스를 심어주고 벽장에 처박히는 책이 될 것인가?'란 생각을 잠시하며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그 걱정은 부질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20세기라고 하면 인류역사상 가장 격변기를 자처하는 시대. 그 시대의 복잡함과 혼란스러움은 어떤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 복잡한 20세기 사건들과 사상들, 그리고 변화를 이주헌 선생은 ' 미술'이라는 장르를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도구로 내세워서 어렵고 딱딱하게 보일 수 있는 역사를 시각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저 머리 속에 주입시키는 역사가 아니라 20세기라는 거대한 인간의 역사의 물결 속에서 생산된 여러가지 상황과 문화등을 미술을 통해 보여주면서 직접 그 시대에 살았던 작가들의 작품과 작품 속에 들어있는 시대정신과 독자를 만나도록 주선해 준 것이다. 즉, 근대와 현대를 잇는 20세기의 산물들을 도시, 성상품화, 혁명, 팝 문화, 매스 미디어, 전쟁, 여러가지 갈등(대공황등의 경제적 갈등, 인권에 대한 정치적 갈등, 인종 갈등, 제 3세계의 갈등), 사상, 여성운동, 일상의 모습의 변화, 영화, 테크노피아, 환경문제,총 12가지 장르로 구분해 보여주면서도 각 주제에 대해 단순히 20세기의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주제에 대해 고대, 중세의 역사들도 예로 들어 보여줌으로써 좀더 그문제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꼼꼼함까지 보여주어 책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이주헌 선생도 미술을 통한 접근법을 구사하게 된 배경을 책 머리에다 이렇게 적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 조명이 기왕의 접근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 시대의 정서적 흐름을 좇는 데 무척 유리하다는 사실을 우선 꼽을 수 잇겠다. 그러니까 활자 기록에 의존하는 방식 일반이 그렇듯 사실을 나열하고 그것이 끼친 영향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만을 보여주는것과 달리, 미술작품을 통한 접근은 특정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당대인들의 보편적인 느낌과 정서, 그리고 그 반응을 생생히 드러낸다. 그만큼 뜨거운 현실 인식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의 전개 과정은 다른 감정의 궤적과 만나면서 복합적인 맥락을 형성하게 되는데, 활자를 통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이런 부분이 미술작품들 사이에서는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중략)

한편 미술을 그 전체적인 소재로 한 만큼 이 책은 20세기 미술의 흐름을 살펴보는 책으로서의 기능도 갖는다. 비록 전통적인 양식사의 관례를 따르지 않았지만, 20세기 미술의 주요한 관심이 책갈피 이곳저곳 묻어 있다. 특히 사람살이의 관심과 끈끈히 이어져 있는 부분이 집중적으로 조명됐기 때문에 쉽게 편하게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접근해 드러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두마리 토끼(역사와 미술)을 한꺼번에 일반인들이 잡는 것이 가능하겠냐마는 그의 노력 덕분에 재미있게 20세기 근현대사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현대미술의 제작배경과 그 철학을 알게 되었음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역사와 미술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도록 흥미를 유발시켜주는 책으로 아주 마음에 든다.

공부라는 것은 성취동기가 있을 때 잘된다고 한다. 성취동기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남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서 자기의 능력을 한번 빛내 보겠다 .' 뭐 이런 목적을 가지고 공부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고 '공부하니깐 너무 재미있어요.'라는 자발적인 즐거움에서 공부를 하는 이들도 있다. 독학자가 공부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공부라는 것이 항상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지겨울 때도 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때에는 여태껏 공부하던 자신의 패턴을 버리기가 무척 힘들어서 지겨워도 꾸역꾸역 해야 한다. 그러나,  재미있게 공부하는 다른 방법을 알게 되면 그 때부터 다시 공부는 재미있어진다.  누가 그러지 않았는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라고. 이 말을 한 사람도 혼자서 독학으로 공부했던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도 잘 되지 않는 공부의 벽에 부딪혔을 때 슬기롭게 그 벽을 넘어갈 수 있는 스승을 바라며 꾸준히 꾸역꾸역 공부한 후 터득한 말일 터라 쉽게 따라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좋은 책, 좋은 스승을 만나서 그와 같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배우고 익히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어쨋든 이 책덕분에 근현대사에 대해 다시 도전해보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5-04-01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클레어 2005-04-0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언제든 환영입니다. :)

2005-04-02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인간이라 - 우리로서는 물론 이의가 전혀 없고말고. 언젠간 인간이 될 게 아닌가! 좀더 참고 좀더 버텨야 해. 1만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잖아. 이 친구들아. 기다릴 줄 알아야 해. 뭐니뭐니 해도 크게 보고, 지질학적 시대 단위로 시간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고,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네. 그러면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지. 인간의 시대가 올 때 그 자리에 남아 있기만 하면 되는 거야. 지금으로서는 자취와 몽상과 예감뿐이지만 - 지금 인간은 그 자신의 선구자일 뿐.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사샤 치포츠킨, [달빛 산책] 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문장은 이 책의 가장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글이다.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란 책을 어제, 오늘 읽고 가장 마음에 든 문장이었고, 로맹 가리의 생각이 집약된 문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맹 가리의 글을 읽다보면 왠지 미셸 푸코(Michell Foucault :1926-1984)와 비슷한 냄새가 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사고의 고고학이 잘 보여주듯 인간은 최근의 발견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인간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는 자일 것이다." 라고 말한 푸코는 지난 150여 년간 인간이 어떠하다! 라고 규정해온 지식체계의 총체, 혹은 앎의 단층(에피스테메)이 새것으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와 비슷한 내용을 로맹 가리도 사샤 치포츠킨의 글을 인용하며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로맹 가리와 푸코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그려낸 15편의 단편들은 이 시대(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마치 카메라 앵글로 보여주듯 다루고 있다. 그 내용들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 꼬리, 코를 주무르며 코끼리의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모두 다른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카메라 앵글이 파악한 인간의 군상은 여태껏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인간의 모습과는 다른, 기묘한 모습의 인간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로맹 가리의 상상력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에 깔려있는 기본적인 생각과 정의와 이론들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틀어지고 꼬여져 묘한 모습을 나타내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읽는 사람들을 당황시키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스스로 꺼내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전쟁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유태계 프랑스인인 그는 이 단편 속에서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서 그 전쟁 속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 예로 단편 [어떤 휴머니스트]에서 '칼'은 나찌의 눈을 피해 어떤 누구보다도 자신이 신뢰하는 하인부부에게 자신의 재산을 잠시 맡아달라고 하고는 집의 지하실에 숨어들게 된다. 전쟁 중 그의 재산을 관리하고 그에게 꼬박꼬박 음식과 함께 바깥의 상황을 알려주던 하인부부의 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지만 그들이 그에게 제공해주는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짓말에 그가 계속 속아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집 지하실에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쇠약해지는 그는 하인부부의 한결같은 충성심에 감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바깥에서 책을 읽으며 지켜보는 독자들은 그의 재산을 모두 집어삼킨 채 호화로운 생활을 보내는 그 하인부부를 보면서 그의 어리석음과 하인부부의 '휴머니즘'의 이중성에 대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보다 더 심한 충격을 받고 싶다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글루크만'이란 인물을 보도록 하자. 수용소에서 나치 친위대 지휘관이었던 '슐체'에게 매일 고문을 당하다가 도망쳐 나온 그는 안데스 산맥의 꼭대기에서 라마 몰이꾼으로 15년을 숨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우연히 같은 수용소에 있었던 다른 친구에게 발견되어서 재봉사로 일하게 되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밤마실을 다니게 된다. 그것도 음식이 잔뜩 든 바구니를 들고서. 친구는 그의 기행이 궁금해서 어느날 밤, 그의 뒤를 밟게 되었고 어떤 집 지하실에서 '글루크만'을 고문하던 '슐체'에게 술을 따르고 음식을 주고 있는 '글루크만'을 보고는 충격을 받게 된다. 도데체 왜 그와 같은 괴물에게 음식과 술을 주고 있나? 라는 질문이 머리속을 관통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글루크만'은 친구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가 다음 번엔 잘해준다고 약속했다네!" 전쟁이 끝난지 15년이 지난 후에도 이 사나이를 따라다니는 악몽과 같은 기억과 전쟁속에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해야했던 비굴한 모습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글루크만'을 따라다니고 있다. 오! 이 사나이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새들이 왜 페루에 와서 죽는지를 인간이 파악할 수 없듯 인간또한 인간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DNA가 모두 밝혀지고 인간의 체성분 하나하나가 과학의 힘으로 낱낱히 해부된다고 해서 인간은 인간을 알 수 있을까?도대체 인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로맹 가리는 이와 같은 자신의 생각을 15편의 짧고 재미있는 단편들 속에다 집약해 놓고 마지막 편인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이 있으라]를 통해 그로테스크한 인류의 미래의 모습(유익한 방사선으로 지표면과 대기가 비옥해진 덕택에 인류는 생물학적 침체기를 벗어나게 된 거란다. 그후 여러 차례의 가속화된 진화를 겪게 되었지. 돌연변이라고 불리는 그런 진화로 인해 우리의 모습이 바뀌고 다양해지고 ..[P254])을 내보이면서 현재 찬미되고 있는 과학과 이성에 대해 "아버지 시대의 인류는 이제 끝나버렸소.[P268]"라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한다.  

인간의 역사가 여태껏 지각변동을 겪듯 급작스런 변화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놀라울만치 예리한 눈으로 파악한 로맹 가리는 미래의 인간들에게 어리석고 비열하며 전쟁과 광기와 소외에 흔들리는 선구자적 인간(여기서 의미하는 선구자라는 것은 앞서 살았던 인간이란 뜻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으로 비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위대한 작가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의 인간들을 위해 진실로 선구자(者)가 되라'고 말해주는 작가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디아의 정원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13
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그림, 이복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안녕! 리디아!  어린이책을 볼 때마다 난 내 나이의 벽을 넘지 못한다. 그 속에서 같이 호흡하고 하려면 너의 또래가 되어야 할텐데 너의 생각과 웃음을 함께 공명하기에는 나는 나이 먹어 버렸다.  그래도 서평의 형식을 빌어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너의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생각, "순수하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란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한복판, 걸을 때마다 퉁~퉁~ 소리가 날 것 같은 철제 계단을 오르고 올라 옥상에 숨겨진 너의 비밀정원에서 환하게 웃으며 모종삽과 키 큰 해바라기 화분을 들고 서서는 넌, "어서오세요~"라고 나에게 말을 걸어 주었지.  지인이 건네준 책 표지에서 널 처음 보고는 나도 그 철제 계단을 밟고 퉁퉁~ 소리를 내며 그 옥상으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단다.  예전 우리집도 옥상이 있었거든. 아주 아주 오래된 2층집인데 계단은 나선형 철제 계단이었고, 그 계단을 밟고 올라서서  세탁기에서 막 꺼낸 뽀얀 빨래들을 몇 줄 안되는 빨래줄에다가 널곤 했었어. 여름철이 되면 하얀 구름들이 피어오르고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빨래들이 나부낄 때, 옥상의 한 켠 모서리에 누워서 바람을 느끼곤 했었지.  거기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소원을 비는 종이학을 동생들을 패가면서 잔뜩 접어선 유치하기 짝이없는 소원들을 빌면서  공중에다 뿌리곤 했었어. 학들은 날지 못하고 밤하늘 창공을 가르며 곤두박질쳤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달님과 별님들을 바라보고 또 옥상에 누워 있곤 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몇 개 사라져 버린 종이학을 보면서 소원을 싣고 하늘로 날아올랐을 거란 생각으로 마음이 들떠 하루종일 깔깔~웃곤 했었어.

옥상...나에게 옥상은 그런 곳이었어. 벼락치는 날에는 번개를 보기 위해 올라가고, 백과사전에서 봤던 별자리들을 하나하나 맞추어 보던 곳. 그런 옥상에서 뭔가 깜찍한 일을 벌이고 있는 널 보면서 갑자기 나도 옥상이 그리워지지 뭐니.. 옥상!! 고소공포증 때문에 아래 내려다 보는 것을 끔찍해하면서도 가끔 도망치고 싶을 때 찾던 그 옥상 말이야..도시 속에도 그런 곳이 있어. 너도 알지? 리디아?  비밀스럽고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나만의 공간, 나의 비밀장소, 나의 유토피아, 나의 천국 말이야. 

리디아! 난 어려워진 살림살이 때문에 사랑하는 부모님과 할머니와 긴 포옹을 나눈 후 헤어져서 도시의 거대한 플랫폼에 도착해 서 있는, 조그마한 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외삼촌에 대한 단서라고는 엄마와 같은 모습의 코를 가진 남자라는 것 뿐이었고, 작은 너에게 도시는 너무나도 커 보였어. 두렵지 않았니? 결코 웃지 않는 외삼촌에게 가방을 넘기는 너의 모습은 왠지 두려워 보이기도 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단다. 그런데, 넌 용감하게 도시를 둘러봤고 집집마다 화분이 놓여있다는 것을 발견해 내곤 "내가 일할 이 골목에 빛이 내리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어. 오~ 리디아! 나는 너의 말을 듣고 무척 부끄러워졌다. 나의 눈으로는 도시속에서 그런 빛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 어쩌면 나이 들어버린 만큼 내 눈에는 더께가 씌어져 버린 모양이다. 무표정으로 내 주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도, 그들도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치고 만다. 새벽녘 집 주위에서 울려퍼지는 오토바이들의 경적소리 "빠라빠라빠라밤"이나 이웃집에서 큰 소리로 싸우는 소리는 귀를 막으면 그 뿐, 내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런 나에게 이 도시 속에서 '빛을 찾는다.'라는 일은  도시속에서 따스함을 찾는 일만큼 어려운 일일 거 같다. 어쩌면 도시의 차가움은 내가 걸어 잠근 마음의 문 때문이겠지만 말이지. 

리디아!  작은 소녀, 리디아! 넌 용감하게 도시속에서 살아가더구나.  외삼촌의 빵집에서 빵을 반죽하고 네가 아는 꽃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네가 좋아하는 꽃을 여기저기 심으며 빛을 기다리지 않고 만들어 가면서 말이지. 너의 순수함, 너의 꽃에 대한 아름다운 애정은 이웃들까지 전염시켜서 너에게 꽃을 심을 화분과 그릇을 주며 널 '원예사 아가씨'라고 부르게 했고, 도시는 더이상 크고 낯선 도시가 아니라 리디아의 꽃이 피어 있어 누구나가 꽃향기를 맡고 행복해 하는 도시로 변해 있더구나.  어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리디아, 넌 해낸거야!  그런 일을 해내고도 넌, 그 도시에서 웃지 않는 오직 한사람, 너의 외삼촌을 위해서 옥상에다가 외삼촌을 초대하는 파티를 벌여 외삼촌을 불러 들였어.. 어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그런 파티였고, 아름다운 파티였다.  

리디아! 그렇게 도시를, 사람들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다시 시골마을로 돌아가게 된 너의 모습을 보면서 난 세상에서 임무를 끝낸 천사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았어. 그 커다란 외삼촌을 작은 두팔을 벌려서 꼭 안아주는 너. 그리고, 그런 소중한 너를 기차 플랫폼에서 꼭 끌어안고 있는 외삼촌은 아마 결코 서로를 잊지 못할테지..그리고, 네가 만들어준 작은 기억들을 기억하며 도시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꽃을 키워갈거라 생각해.

리디아! 순수함을 잃어버린 나또한 마음의 문을 열어 내 마음의 꽃밭을 용감히 가꾸어 가면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이 조금은 좋아질까? 나이만 먹고 의심만 많아져 버린 나지만, 너의 웃음과 네 순수함이 만들어 놓은 그림책 속 아름다운 세상을 믿어보기로 했다. 순수한 너의 눈에 비쳤던 그 빛, 그리고 그 빛을 믿고 열심히 만들어 갔던 너의 발자취의 진실함이 그걸 증명해주었으니까. 물론 네가 외삼촌에게서 따뜻한 미소와 포옹을 받을 때까지 오랜시간을 기다렸듯이 결코 빨리 이루어지거나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테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이루어질거란 작은 희망을 품게 된 것은 네가 나에게 보여준 빛이다.

리디아! 작은 천사! 파라다이스를 보여준 소녀야! 안녕! 이 안녕은 이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안녕이다. 안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