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귀신 숙제 귀신 - 생활, 보리어린이 19 보리 어린이 이호철 선생님이 가르친 어린이 시집 19
이호철 엮음 / 보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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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독서관련 공부하면서 이호철 선생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살아 있는 교실> <비 오는 날 일하는 소> <공부는 왜 해야 하노>에서 보여주듯이 '삶을 표현하는 살아있는 시, 감동을 나타내는 시'  즉 글에 삶이 녹아 있는가? 삶에서 우러난 느낌이 제 것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강조해서 강의가 참 와 닿았다. 이 시집도 작가가 가르쳤던 농촌 아이들의 삶의 모습을 나타낸 생생한 시들을 모아 놓았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릴적 농촌 풍경이 아스라히 떠오른다. 고향이 시골인지라 수박농사를 지었고 주말이면 고랑 사이에 널려 있는 수박을 운반하거나, 그늘에 앉아 산더미같이 쌓인 수박을 초록빛이 선명해지도 광택나게 닦던 생각,  초등학교 저학년때 키우던 염소가 사라져서 가족이 온 동네를 찾아다니던 추억들이 이 시들과 오버랩 되었다.

물론 아직도 농촌에는 바쁜 일손을 도와 직접 밭일을 하거나, 늘 밭에 나갔다가 저녁에야 돌아오시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허전해 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엄마

학교에 갔다 와 밥그릇 들고
담 너머 저 쪽
들판을 바라보니
우리 마늘밭에 엄마 혼자
땀을 닦아 가면서
밭을 매고 있네.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어휴우
한숨을 내쉬고
풀뿌리의 흙을 툴툴 털며
한 곳에 모아가며
어정어정 앞으로 기어가네.
아고 언제 다 맬꼬
또 한숨을 쉬네.

엄마는 아직도
점심을 안 먹었구나.
얼른 밥을 갖고 뛰어갔다.
주르르 땀방울이 맺힌 엄마 얼굴
정순이 왔구나
웃으며 반기는 얼굴.
엄마는 밥을 꿀꺽꿀꺽
김치 먹고 시그럽다고
눈을 찡그린다.

엄마와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또 밭을 맨다.

이 시는 20년전 6학년 아이가 쓴것이지만 내 어릴적 풍경과 유사해서 정감있다. 밥도 굶고 밭일을 하고 계신 엄마를 보면서 급한 마음에 뛰어가는 정순이의 안타까운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시를 읽는 맛이 난다.

화장실 청소

아이들은 화장실 청소를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냄새난다
이거 어떻게 하노
니가 다 해라, 한다.
나는 버럭 화가 났다.
그러면
청소하는 일은 천하다고
똥 푸는 일은 더럽다고
의사 되고
판검사 되고
국회의원 되면
누가 청소하고
누가 똥 푸는데?
그러면 가만 놔 도라!

모두 쓰레기더미 속에서
똥더미 속에서나
살아봐라!
그러면서 나는 혼자
청소를 열심히 했다.

참 생각이 깊은 아이이다. 화장실 청소하면서 이런 대견한 생각을 하다니.  물론 이 아이 엄마가 들으면 소상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이 시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할듯.

잔소리

집에서 엄마가
공부해라
숙제해라
방 좀 치워라
텔레비젼만 볼 거냐?

학교에선 교감 선생님이
복도에선 손잡고 다니지 말고
한 줄로 다니라
운동장이 왜 이렇게 지저분해
청소 좀 해라
교실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다 옳은 말이지만
늘 하는 그 말이 그 말
잔소리할 땐
새들도 한쪽에 가만히 숨고
나뭇잎도 가만히 있다.

그렇지만 아무도 없으면
나무는 나무끼리 떠들고
우리는 우리끼리
떠들고 까불고
운동장엔 꼬맹이들이
제멋대로 놀고 있다.

잔소리는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내 하게되고 후회하고 많은 고질병. 엄마인 나도 잔소리가 듣기 싫으면서 아이들에게 끝없이 되풀이 하게 된다. '새 들도 숨고, 나뭇잎도 가만히 있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인가. 오늘부터라도 잔소리좀 줄이자!

시를 읽으면서 참 즐거웠다. 아이들다운 살아있는 표현에 웃음이 났고, 자주 나오는 사투리 읽는 맛도 고소했다. 시를 어떻게 써야 할까?는 막연한 숙제. 아이들에게 이 책 보여주고 이렇게 쓰면 어떨까? 하면 '이쯤이야 나도' 하면서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동을 주는 시, 살아있는 시'에 대한  표현이 가장 명확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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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5-2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비 오는 날 일하는 소> 읽고 한동안 가슴이 찡했던 경험이 있어요. 동시라고 우습게 봤다가 감동 한방 먹었죠. ^^

hnine 2006-05-25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른인 우리들은 이렇게 감동받는데, 정작 보림이 나이의 어린이들은 어떻게 느낄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2008-12-12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6-05-25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넘 당황스럽네요. 그냥 즐겁게 지냅시다....
그때 피골이 상접했던 저는...푸근한 아줌마가 되어 있습니다.
알라디너로 알콩달콩 재밌게 대화 나누자구요~~~~

세실 2006-05-25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어머어머 님도 그 시를 읽으셨다구요??
이렇게 따뜻한 맘을 가진 야클님을 츠녀들은 왜 모르는거얌...

hnine님. 보림이 처음에는 별 관심 없더니, 나중에는 재미있어 합니다. 그리고 제가 동시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해주니 "엄마 그럼 이 동시집에 나오는 시 하루에 한편씩 암기할까?" 하네요. 엄마의 마음을 꿰뚫고 있습니다.
사투리를 재미있어 합니다.

전호인 2006-05-25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초보이니 만큼 많이 오셔서 도움도 주시구려.
큰아이가 저희 아들녀석과 같은 학년이네여. ㅎㅎㅎ
세실님의 서재에서 같은 책으로 추천 많이 받아야 겠슴다.
아들녀석이 책귀신이거든여.
너무 편독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암튼 책을 넘 좋아하니까 좋긴 합니다.
고맙습니다.

세실 2006-05-25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그러시군요. 저도 95년에 결혼했습니다.
책귀신이라니 행복한 고민이시군요~~
역사책을 열심히 읽다보면 다른 책도 관심을 갖을터이니 넘 걱정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