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기생충 연구가면서 칼럼니스트인 서민 교수의 글을 몇 번 접했는데 `이 짧은 글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기사를 통해 `서민적 글쓰기`(생각정원 펴냄)를 알게 되고, 평소 부족한 집중력을 부여잡고 이틀에 걸쳐 읽어봤습니다. 곳곳에 흥미를 유발하는 부분이 숨겨져 있더군요.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했다. 글쓰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지만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실천으로 옮긴 지각생이다. (중략) 가랑비에 옷 젖듯이, 글쓰기는 아주 조금씩 좋아졌다. 더불어 어린 시절 그늘진 생각들은 글쓰기의 좋은 소재로 바뀌어갔다. 글쓰기가 삶을 바꿀 수도 있다.
27쪽 `나는 쓰면서 생각했다`에서

저자는 10년의 지옥 훈련을 거치면서 글쓰기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이 책에 썼는데 얼마나 노력하고 도전했기에 지금의 경지까지 오른 걸까요?

얼굴도 몸도 안 된다고 스스로 밝힌 저자는 글쓰기로 스스로 단련한 내용을 이 책 곳곳에 담았습니다. 경험을 통해 글 실력을 키웠다는데 `글쓰기 지옥훈련의 방법`이란 글에 나온 단락별 제목을 옮겨볼까요?

1. 노트와 연필을 끼고 살다.
2. 블로그라서 외롭지 않다.
3. 신문을 통해 세상을 보다.
4. 일기와 감상문은 글을 잘 쓰는 지름길이다.

그 다음 장인 `블로그에서 갈고 닦다.`에서 본격적인 비법을 전합니다.

우선 하루에 두 편 이상 글을 썼던 게 비결이었다. 워낙 그런 훈련을 많이 한 덕분에 이제 두 편 정도의 글감을 찾는 건 일도 아니었다.
(중략)
두 번째 이유로 쉬운 글쓰기를 들 수 있다. 책을 많이 읽은 분들은 당연히 나보다 글을 잘 썼다.
(중략)
하지만 누가 뭐래도 성공비결의 핵심은 유머였다. 책벌레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그분들의 글은 논리정연하고 날카롭긴 해도, 유머가 부족하다. 반면 글에 유머를 넣는 훈련을 줄기차게 해온 나는 어느 정도 유머러스한 글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됐다.
135~136쪽에서

이 책은 PART 1 `나는 쓰면서 성장한다`와 PART 2 `어떻게 쓸 것인가`로 나뉩니다. PART 1이 저자의 경험 속에 글쓰기 비법을 담았다면, PART 2는 전문적인 단계로 나간답니다. 글쓰기를 더 잘 써보고 싶은 분들께 딱이죠?

쉽게, 재미있게 나가는 서민 교수의 이 책도 집중하며 읽으면 더 재미있고 알차게 배울 수 있답니다. 도서관에 빌려 읽었는데, 소장해서 더 읽을 생각에 직접 샀습니다.

어떠신가요? 읽을 마음이 생기시나요? 서민 교수가 쓴 `서민적 글쓰기`, 서민뿐 아니라 많은 계층에서 사랑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종교가 창피하다」, 「맨얼굴의 예수」 저자
벙커1 교회 설교자

사람들이 ‘목사 아들 돼지’라 말하는 시사평론가 김용민에 대한 종교관련 이력입니다. 직장이었던 극동방송, 기독교TV에서 나온 뒤 자신이 믿었던 기독교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그 덕에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죠. 그가 세 번째로 쓴 책 『살찐 로마서 고쳐 읽기』(이리 펴냄)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수차례 인용된 신약성경 중 ‘로마서’ 때문에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진 사도 바울의 본래 의도를 찾아보자는 거죠.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책 내용을 인용하면서 생각을 담은 건데 부족하다 느끼신다면 양해바랍니다.

당시 유대민족 상당수는 자력 즉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의 법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자력에 의한 구원이 가능하다함은 구원의 유일한 주체자가 신만이 아니라는 오만이었다. 바울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그 구원의 은총에는 비유대인에게 총체적으로 `기회의 평등`이 부여됐다고 주창한 것이다.
121쪽 `신앙은 주체를 만든다`에서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은 하느님께 선택받았고, 가까이 가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레 이방민족을 배제했죠. 바울이 누구든 하느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며 앞에 언급한 `기회의 평등`을 주창한 거라고 저자는 분석했습니다.

성서적 권력관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세속통치자가 있는 서열화 구조 속에서 완성된다. 요컨대 로마서 13장도 포괄하는 `세상 권력자`는 하느님의 신임을 받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성서 구절은 피권력자가 아닌 세상 권력자를 향한 메시지가 돼야 한다. 피권력자는 그 권력자가 하늘의 뜻을 잘 수행하고 있는 가를 따져야 할 테고, 무조건적 복종여부는 차후의 문제가 될 것이다.
175쪽 `모든 권력에 복종하리니`에서

로마서 13장 1~7절은 수많은 독재자가 지배하던 시절, 교회가 이들을 두둔하고 복종하자는 의미로 인용했습니다. 저자는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당시 정권들과 결탁했던 우리나라의 근본주의 신학이 가진 논리 속 문제점을 비판하려고 관련 서적들을 인용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절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라는 구절은 보다 세심하게 콘텍스트를 살펴야 한다.
167쪽에서

이 책에서 인용한 구절을 보면 복종해야 할 자가 `하느님의 임명을 받은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권위를 남용해 약자의 생명과 행복을 빼앗는 학정을 행할 경우 때에 따라서는 크롬웰과 같이, 워싱턴과 같이 반항의 깃발을 듣고 혁명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이 나오게 된 배경이 있지만, 말그대로 지배자가 누구든 무조건 복종하라는 건 아니라 말하죠.

제가 처음부터 쭉 읽어보면서 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관심,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라는 호기심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한 번만 읽기에 아쉽고 익히기 어렵다는 거죠. 그럼에도 이 책을 보려 했던 건 어쩌면 기존에 알고 있던 성경 속 말씀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겠죠? 권한다는 말은 못하지만 충분히 읽을 만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박석무 엮음 / 창비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간 유배지에서 두 아들과 둘째 형,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배움의 미덕을 강조하고 삶의 지혜를 전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편지를 엮어 만든 책이 바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사무 편역, 창비 펴냄)입니다. 1979년 출간한 뒤 35년 넘는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이 읽었습니다. 왜 유명한 책인지 책 내용을 인용하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밤낮으로 빌고 원하는 것은 오직 문장(다산의 둘째 아들 학유의 아명)이 열심히 독서하는 일뿐이다. 문장이 능히 선비의 마음씨를 갖게 된다면야 내가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 부지런히 책을 읽어 이 아비의 간절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어깨가 저려서 다 쓰지 못하고 이만 줄인다.

- '귀양길에 올라서'에서 (33)

 

1부는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2부는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 3부는 '둘째 형님께 보낸 편지', 4부는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로 이루어졌습니다. 읽으면서 흥미를 느낀 내용도 있었지만, 약간 지루했던 내용도 있었습니다. 제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겠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비스듬히 드러눕고 옆으로 비딱하게 서고,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때문에 몸을 움직이는 것, 말을 하는 것, 얼굴 빛을 바르게 하는 것, 이 세가지가 학문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한 일이다. 이 세가지가 학문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이 세가지도 못하면서 다른 일에 힘쓴다면, 비록 하늘의 이치에 통달하고 재주가 있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 할 지라도 결국은 발꿈치를 땅에 붙이고 바로 설 수 없어 어긋난 말씨, 잘못된 행동, 도적질, 대악, 이단이나 잡술 등으로 흘러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먼저 모범을 보이거라'에서 (71)

 

그렇지만 차근차근 읽으면서 기억할 만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맹자는 "대체를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지만 소체를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어 금수에 가까워진다"라고 하였다. 만약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데에만 뜻을 두고서 편안히 즐기다가 세상을 마치려 한다면 죽어서 시체가 식기도 전에 벌써 이름이 없어질 것이니, 이는 금수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같이 살기를 원할텐가?

-'윤종문에게 당부한다'에서 (283)

 

많은 내용이 있지만 역량이 부족한 탓에 제대로 설명하기가 힘드네요. 이 책을 끼며 조금씩 배워 나가야겠습니다. 왜 베스트셀러인지 알만하군요. 많은 걸 깨닫게 해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칼의 노래', 산문 ' 풍경과 상처' 등을 남기며 자연과 삶을 말하는 작가 김훈, 2015년 절판된 저서 속 글들에 최근 쓴 글들을 넣고 다듬어 하나의 책을 냈습니다. 바로 '김훈 산문의 정수'라 홍보하는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문학동네 펴냄)입니다.

 

이 책은 오래전에 절판된 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나무, 2002),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나무, 2003), '바다의 기별'(생각의나무, 2008)에 실린 글의 일부와 그후에 새로 쓴 글을 합쳐서 엮었다.

이 책의 출간으로, 앞에 적은 세 권의 책과 거기에 남은 글들은 모두 버린다.

-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처음 출시할 때, 출판사의 마케팅 논란으로 크게 알려졌습니다. 예약 구매를 하면 김훈의 친팔 사인이 적힌 책표지, 1인분 양은냄비, 김훈이 좋아하는 '신라면' 한 봉지를 준다고 했죠. 저도 김훈의 신간에 대한 기대와 사은품을 받고 싶다는 마음에 샀습니다. 그러다 논란이 되자 출판사에서 얼른 사은품을 바꾸었지요. 그래도 책 속 글이 어떤지 직접 읽어봐야 알겠죠?

 

"먹고 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 보는 비애"라는 광고 문구가 말해주듯 '먹는다'라는 사람의 욕구와 자연의 흐름이 김훈 본인의 필체를 만나 자연스럽게 담겼습니다. 비록 전에 쓴 글들을 많이 가져왔지만 저처럼 김훈의 작품을 접하지 못한 사람에게 새롭게 김훈의 세계로 가는 계기가 되었죠.

 

미사여구, 어려운 표현, 공격적인 서술이 적지만 담백하게 읽는 느낌이랄까요?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 16~17'라면을 끓이며'에서

 

이 책속에 담긴 김훈의 글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기도 하지만 훈훈함, 익숙함도 같이 느끼게 됩니다. 쉽게 썼는데 읽을 때 복잡 미묘하지요.

 

세월호가 기울고 뒤집히고 가라앉을 때 배에 갇힌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러한 방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고유한 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 물이 차오르는구나, 이제 죽어야겠다, 라면서 죽은 사람이 있을 것인가.

- 159'세월호'에서

 

내 몸이 허락할 때, 나는 내 맘에 드는 글을 쓸 수가 있고 내 몸이 허락하지 않는 글을 나는 쓸 수가 없다. 지우개는 그래서 내 평생의 필기도구다. 지우개가 없는 글쓰기를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지워야만 쓸 수 있고, 지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므로 나는 겨우 두어줄 씩 쓸 수 있다. 그래서 원고를 몇 장 쓰고 나면 내 손은 새까맣게 더러워진다.

- 268'1'에서

 

거창하게 쓸 필요 없지만, 단순하게 쓰기에 아까운 김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여러분도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산드로브나 알렉시예비치는 여러 지역 신문사, 문학 예술 잡지 '네만'의 기자로 일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소련-아프간 전쟁, 소련 붕괴 등 큼직한 사건마다 목격자들과 인터뷰하며 실상을 낱낱이 기록했지요.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김은혜 옮김, 새잎 옮김)1986426, 우크라이나에 있던 체르노빌 원전 4호기가 폭발하는 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의 유가족, 목격자들의 증언을 담은 인터뷰집입니다. 당시 사고에서 원전이 있는 우크라아나와 러시아도 피해를 입었지만 인근 국가인 벨라루스의 70%가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거기다 벨라루스는 농업국가여서 피해를 입은 정도가 어마어마했죠.

 

체르노빌 사고 피해에 대해 당시 소련 정부는 어떻게든 숨기거나 축소하기 바빴습니다. 피해지역 수습에 참여한 사람에게 주 보호장비도 열악했고, 심지어 한 두 종류 씩 빠지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뒤부터 지금까지 생긴 여러 사고, 참사의 선배격이었습니다.

 

나는 체르노빌을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체르노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선 지식이다. 왜냐하면 체르노빌로 인해 사람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던 방식과 갈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9'저자의 독백 인터뷰'에서

 

이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은 곁에 있던 혹은 알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유전자 손상 등 많은 부상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피해는 신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심각했죠.

 

현실과 비현실에서 동시에 살아간다. 어디가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일어서서 창가로 간다) 이 동네에는 우리 사람들이 많이 산다. 그래서 체르노빌스카야 거리라고 부른다.

- 52'사람의 외로운 목소리, 하나'에서

 

"체르노빌........ 전쟁 위의 전쟁이었어. 어디에도 구원이 없었어. 땅에도, 물에도, 하늘에도......."

- 79'같이 울고 밥 먹자고 영혼이 하늘에서 부른다'에서

 

이들은 하나같이 '체르노빌레츠'(체르노빌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인생, 나라의 역사가 체르노빌 원전 사고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한거죠.

 

지금 세상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우리 체르노빌레츠와 당신을 포함한 모든 다른 사람들입니다. 눈치채셨습니까? 여기서는 벨라루스 사람이고, 우크라이나 사람이고, 러시아 사람이고 그걸 강조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체르노빌레츠로 부릅니다. "우리는 체르노빌에서 왔습니다." "나는 체르노빌 사람입니다." 마치 우리가 다른 국가인 것처럼. 새로운 민족인 것처럼.......

- 188'두 목소리 : 남자와 여자'에서

 

우리 벨라루스 사람들은 한 번도 영원한 것을 가진 적이 없다. (중략) 그런데 드디어 그 영원이 주어졌다. 우리의 영원은 체르노빌이다. (후략)

- 336~337'벙어리 군인'에서

 

체르노빌 원전 근처에서 피해를 입지만 '체르노빌 사람'이란 이름으로 기피와 멸시를 받은 사람들, 이들은 각자 다르게 말하지만,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부디 자신들과 똑같은 피해를 겪지 말길 바란다.'

 

이 책의 주제가 이렇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소련 정부와 관영 언론도 그랬지만, 이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를 겪은 일본이나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나라도 이를 축소하거나 왜곡하거나 덮으려 했죠. 피해자, 목격자들의 증언이 있는데 말이죠.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을 다루려는 책입니다. 의미있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기록이죠. 저는 당당히 이 책을 좋은 책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