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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평점 :
한때 우리나라에서 2013년 말~2014년 초를 장식했던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안녕들하십니까?’
이런 말을 접하게 되면 다들 이런 답을 했었죠.
‘아니오, 안녕하지 못합니다.’
이런 대자보를 비롯한 사회운동이 대학가를 장식하면서 한때 어려운 시대에도 무관심하다고 여기던 젊은 세대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죠.
그런 가운데 다른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네, 안녕합니다.’
너무 이기적이지 않냐고요? 누가 한 말인지, 왜 안녕한지 모르겠으나 아마 자신이 즐기고 있는 것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왜 이런 말로 시작했느냐? 바로 어려운 시대에도 안녕하다고 말하는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을 이야기할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세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후쿠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민음사 펴냄)’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1990년대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잃어버린 세월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일본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있는데요. 바로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입니다.
자동차, 사치품, 해외여행, 술, 연애, 섹스, 도박에 관심이 없고 돈과 출세에도 관심이 없는 일본 젊은이들을 이르는 말. 득도한 것처럼 욕망을 억제하며 살아가는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2채널에서 탄생한 신조어. `사토리(さとり)`란 `깨닫다`라는 뜻의 `사토루(さとる)`에서 파생된 말인데 마치 모든 것을 깨달은 수도자처럼 현실의 명리에 관심을 끊었다는 의미이다.
- 리그베다 위키 ‘사토리 세대’ 항목에서
최근 우리나라의 한 메이저 언론에서 위에 언급한 사토리 세대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젊은이들을 다루면서 ‘달관세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비슷하다’ 혹은 ‘억지로 붙였다’라는 논란을 떠나 우리나라 젊은이들 중에서도 그런 생활방식이 나타나고 있다는 걸 말하는 것 같습니다.
후쿠이치 노리토시는 그런 젊은이들을 찾아다니며 현상을 분석했고, 나아가 지금까지 나온 일본의 젊은이에 대한 이론을 전부 폐기하게 만듭니다.
노리토시의 사회학적 시대 진단은 간단하다. 첫째, 일본 사회는 절망적이다. 둘째, 일본 사회에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그리고 이 둘은 서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즉, 절망적인 사회 덕택에 개인이 행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p8 오찬호의 해제 ‘일본은 절망적이고 한국은 ‘더’ 절망적이다’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및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의 회생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혁명 역시 그리 원하지 않는다.
- p34 프롤로그 ‘요즘 젊은이는 왜 저항하지 않는가’에서
어찌 보면 일본의 현실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다보니 젊은이들이 오늘을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자인 후쿠이치 노리토시는 이 책에서 젊은이를 규정짓는 이론의 변천사로 출발해(1장), 오늘날 내성적이고 배타적이며 소비를 줄이지만, 사회에 공헌하고 싶어 하며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오늘날 젊은이들을 보여주고(2장), 국가를 향하는 내셔널리즘을 오로지 스포츠 경기에서 국가 대표가 출전할 때 응원해주는 정도로 여기는 모습(3장), 나라를 위해, 사회를 위해 참여하더라도 축제로 여기는 모습(4장),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보여준 모습(5장), 절망 속에서 행복하다 여기는 모습(6장)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 현저하게 눈에 띄는 점은 젊은이들에게 있어 ‘친구’나 ‘동료’의 존재감이 매우 커졌다는 사실이다.
(중략)
딱히 ‘젊은이 문화’라고 지칭할 만한 공통성이 사라진 시대에,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동료’와 함께 지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 p138~140 2장 ‘작은 공동체 안으로 모이는 젊은이들’에서
‘일본’이라는 국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인프라 공급원으로서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결과적으로 폭력의 독점과 징세 기능이라는 국민국가의 역할을 계승하게 된다.
아무리 요즘 젊은이들이 월드컵 시합 때 큰 목소리로 일본을 응원한다고 해도, 그들은 경기가 끝나는 순간 곧바로 “수고했어!”라고 인사를 건네며 방금 전의 영광을 잊는다. 또 아메바 뉴스(일본의 인터넷 뉴스)에서 ‘이성에게 궁금한 점’이라는 게시물을 읽으며 친구와 어울리는 그들은,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자기 몸부터 피할 것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차츰 늘어난다면, 적어도 ‘태도’라는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국제적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감소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 p189 3장 ‘붕괴하는 일본?’에서
그들(일본의 젊은이들)의 사회 활동은 답답함을 달래기 위한 표현이기도 했고, 타자의 승인을 얻기 위한, 즉 ‘마음 둘 곳’을 찾으려는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태양이 내리쬐는 거리를 활보하는 편이 건강에도 훨씬 유익하다. 게다가 공통의 관심거리를 나눌 수 있는 친구까지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 p231~232 4장 ‘일본을 위해 일어서는 젊은이들’에서
물론 일본의 젊은이들이 다 그런 것도 아니고, 일본이 무너지는 건 아니라고 후쿠미치 노리토시는 말합니다. 그저 불안정한 미래보다는 안정적인 오늘을 살기에 행복할 뿐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그대로 살고자 한다면, 저임금에 만족하며 동료들과 일상을 즐기면서 살아가도 무방하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돈이 없더라도 그럭저럭 즐거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다.
- p314 6장 ‘절망의 나라에 사는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이 책의 본문을 언급하면서 꼭 소개하고픈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일본의 젊은이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겁니다. 몇몇 구절을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바꾸어도 잘 맞는다는 점을 오찬호 박사와 후쿠미치 노리토시는 말하고 있지요.
한국이나 일본이나 ‘성장의 미래’를 지나치게 믿었다. 그래서 성장이 멈칫거릴 때, 개인이 보호될 수 있는 장치 마련에 관심이 없었다. 민주주의가 평가 절하된 결과, ‘개인의 삶’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노동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 p10 오찬호의 해제 ‘일본은 절망적이고 한국은 ‘더’ 절망적이다’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양국의 공통점을 다수 발견하게 될 것이다. 취업 때문에 괴로워하는 젊은이들이라든가,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 생활하는 젊은이들이 증가하고 있다든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저출산 문제 등 한국과 일본 사회는 서로 공통된 문제를 안고 있다.
- p19 한국어판 서문 ‘2시간 30분의 거리’에서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이 모두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경제 성장을 위해 더 빨리 달려온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더 힘들 수 있다고 말하지요.
조지 오웰이 『1984』에서 표현한 방식을 따르자면, 한국 사회는 ‘더블 플러스’로 절망적이다. 그래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생존에 대한 집착이 다른 나라에 비해 ‘더블 플러스’로 강하다. 여기에 ‘푸념적 행복’이 들어설 공간은 없다.
- p11 오찬호의 해제 ‘일본은 절망적이고 한국은 ‘더’ 절망적이다’에서
한국은 일본에 비해 ‘젊은’ 나라이기도 하다. 평균 연력만 봐도 일본은 ‘약 45세’인데 반해 한국은 ‘약 38세’다. 양국 모두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 문제에 직면해 있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한국은 ‘젊은 인구’가 일본보다 많다.
- p19 한국어판 서문 ‘2시간 30분의 거리’에서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를 연구하는 책이지만 동시에 우리나라 젊은이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해보게 하는 오묘한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읽기는 약간 어렵지만, 오늘날 일본에 대한 흥미를 느낄 수 있다면 읽기 수월한 책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