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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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웬만하면 참지 않는다. 흥미롭지 않거나 취향이 아니면 초반에서 책을 멈추기로 하고 있다. 나는 더이상 하루 종일 시간이 너무 많아 주체가 안 되던 이십 대가 아니므로 남은 시간을 아껴 써야 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은 팟캐스트에서 알게 됐다. 무언가 진중하고 사려 깊은 느낌의 목소리. 확신에 찬 어조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후로는 오히려 이런 머뭇거림이 때로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요는 초반부의 감정의 과잉이 식상하다는 생각에 멈추려 했던 읽기가 종반부에 와서는 이야기가 끝날까 아쉬워 더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인 포로 경비병의 시선에 대한 묘사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져서 도저히 나아갈 수가 없다. 다 읽기 두려운 이야기. 알기 전과 그 이후의 진실의 무게는 하늘과 땅차이다. 실제 일본인의 포로였던 아버지의 체험이 투영된 호주 작가의 이야기. 아버지의 임종과 이 이야기의 완성은 맞물렸었다 한다. 시작이 이야기의 전부를 이야기해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 읽고 다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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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B. 피터슨은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삶은 원래가 고해'라는 이야기, 소아 관절염으로 고생하며 키운 딸 이야기가 와닿았다. 뭐랄까, 진부하거나 가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언변이 설득력이 있었다.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사변적이지 않고 그것에 따른 해석이나 평가가 고답적이지 않았다. 그의 종교적인 색채나 논쟁적인 발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그의 논쟁적인 입지를 닮았다.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은 기억할 만한 대목이 많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섣부른 이상주의, 기만, 위선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이기심과 권력욕, 악에 대한 시선의 깊이와 명료함도 놀랍다. 한 마디로 낭만을 박살내는 엄중한 태도가 인상적이다. 근래들어 삶에서 중구난방으로 일어났던 각종 유쾌하지 못한 일들이 전혀 개별적이지 않은 보편적인 삶의 속성과 연결되어 있음에 대한 깨달음이 왔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삶의 엄중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미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혼돈을 질서로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낭만이 끝났음을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린 시절의 낭만이 끝났음'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 인정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혼돈과 무질서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고 그것을 뚫고 나아갈 기량이 부족했다. 다소 직설적인 표현이 많아 때로 움찔할 정도다. 하지만 누군가는 옆에서 반드시 이런 조언들을 삶의 길목마다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인간으로서 삶을 산다는 일의 무게, 엄중한 책임은 흔히 쾌락과 편의주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쉽고 즉각적인 쾌락, 보이는 것들의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알곡과 실재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하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방부터 정리하라."는 조언은 나를 저격했다. 


당장 편하자고 갈등 상황을 피하고 문제를 언어화하는 데에 물러서는 자세에 대한 비판도 기억해 둘 만하다. 욕망의 경주장에서 정작 놓치는 것들에 대한 지적과 의식적인 노력과 주의에 대한 각성은 날카롭다. 



아쉬운 점도 있다. 기독교 교리가 절대 해법으로 제시되는 대목과 페미니즘과 성차에 대한 의견은 편향적이라 불편한 부분이다. 많은 이야기를 깊이 있게 하려고 시도하다 제대로 된 완결을 짓지 못하고 성급히 마무리해 버릴 때도 있다. 결함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책인데 장점도 그 만큼 많은 책이라 읽어보면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버릴 건 버리는 비판적인 태도가 필요할 것 같다. 기회가 된다면 유튜브에 저자의 강연이 많으니 같이 찾아 함께 들어보며 읽는 것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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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은 건조하고 멀다. 머리와 가슴은 떨어져 있다. 나만 해도 그렇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앞에서 사근사근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일본인의 간극을 쉽게 메우지 못한다. 일본 문구를 쓴다. 일본인 작가가 쓴 책을 읽고 감동 받는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 사라져 가는 증언자들의 뉴스, 일본 정부의 망언들. 가슴으로 분노하거나 수시로 흥분하지는 않는다. 그랬다.
















<White chrysanthemum>, '하얀 국화' 영국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메리 린 브레트의 첫소설로 제주도의 해녀였던 소녀가 강제로 일본군에 위안부로 끌려가며 헤어지게 되는 자매의 이야기다. 언니 하나는 아직 어린 소녀인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 장교를 유인하게 되고 결국 만주까지 끌려가 정신대에서 일본군들의 성노예로 몸과 마음을 유린당한다. 추상적이고 멀었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은 작가의 펜끝에서 구체적이고 실감어린 증언으로 형상화된다. 


Ten hours a day, six days a week, she services soldiers. She is raped by twenty men a day.

-<white chrysanthemum>


전쟁이라는 폭력과 강압을 용인하는 공간에서는 가장 보호받고 배려받아야 할 약자를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가장 치사하고 비열하게 조준한다. 가장 효율적으로 폭력과 공격성을 발휘하기 위하여 그들을 짓밟고 유린하는 작태는 더없이 역겹다. 현재 진행형으로 언니 하나가 겪는 하루하루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 이건 허구가 아니다. 어쩌면 더한 차마 언어로 살아남지 못한 많은 일들이 그대로 묻혀버렸을 것이다. 살아남은 동생의 시선은 우리 모두의 것을 대변한다. 엄혹한 어두운 시대를 통과한 많은 이들이 죽어간 잊혀간 상처받은 많은 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기억해야 한다. 생존은 어쩌면 비겁하고 이기적인 것과 결별하기 어려운 지대에 걸쳐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끝까지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존엄을 내어주지 않는다. 속수무책으로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피해자적 측면에서도 끝내 결코 저들이 가져갈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묘사에 작가는 공을 들인다. 가족에 대한 사랑, 결국 살아남고야 마는 자존의 힘은 형형하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른다. 언니의 과거와 언니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할머니가 된 동생의 이야기의 끊임없는 순환은 유기적이고 드라마틱하다. 동생은 언니가 어쩌면 꺾여버렸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하나가 집에 결국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삶을 찾는 마지막을 선사한 작가의 바람이 투영된 결말이 아름답다. 도망치기 위하여 돌아가기 위하여 분투하였던 삶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대목은 식민사관에 의해 오도되고 간과되는  우리 민족의 결기를 부각시키는 것 같아 시원하다. 


흐릿했던 사실의 나열을 잘 꿰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일은 그래서 여전히 유의미하다. 이야기의 힘은 이런 것일까? 너무 많은 수치심을 조장하는 상황에서 용기있게 하마터면 묻히고 말았을 진실을 용기 있게 증언한 할머니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감히 짐작해 본다. 그 뒤에서 현재의 가족, 상황 때문에 차마 나설 수 없었던 다수의 그분들의 망설임도 헤아려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 비겁하고 악독한 행태에는 분명 어두운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진실은 결고 언제까지나 자의적으로 가공하거나 덮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남은 자들은 그 청산하지 않은 부채를 떠안고 무겁게 걸어가야 할 것이다. 자신들이 행했던 역사적 만행의 용인은 반드시 화살이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가족을 위해 일하고 사랑하며 일상을 살아나가다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뒤안길에서 죄없이  무명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하얀 국화 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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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만 우리들의 역사를 가졌을 뿐이고, 그 역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그렇다. 우리는 잊힐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며, 아무것도 할수 있는 일은 없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고 심각해 보이며, 버거운 결과로 보이는 것들, 바로 그것들이 잊히는, 더는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우리는 언젠가 엄청나고 중요하게 여겨질 일이나 혹은 보잘것없고 우습게 여겨질 일을 알지 못한다. (중략) 지금 우리가우리의 몫이라고 받아들이는 오늘의 이 삶도 언젠가는 낯설고, 불편하고, 무지하며, 충분히 순수하지 못한 어떤 것으로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가 알겠는가, 온당치 못한 것으로까지 여겨질지도.
- 안톤 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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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도 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긋나버리는 경우가 있다. 세 번 연락할 걸, 두 번으로, 그러다 점차 연락하지 않는 기간, 공유하지 않는 사연들, 떨어져 있는 시공간이 착착 쌓이다 보면 다시 카톡을 보내는 것이 왠지 겸연쩍어지는 시간이 온다. 그리고 관계는 그렇게 끝난다. 예전에는 그런 관계의 단절에 속상해했다. 아쉬워했다면, 이제는 그러한 관계의 소멸에 그냥 수긍하게 된다. 물론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께 했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함께 나누었던 것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겹쳤던 시간은 거기 그대로 고여 있다. 




 

그러기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나는 서서히, 내가 애초에 그리고 싶던 것은 관계의 파탄이나 단절의 순간이 아니라, 어떤 관계가 꽃처럼 피었다가 결국 져버리는 과정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관계의 생로병사 같은 것.

-백수린 <작가노트>


 

















작가 백수린의 '작가노트'에서 내가 찾고 싶었던 그 표현을 마주친다. "관계의 생로병사" 작가는 <시간의 궤적>에서 프랑스에서의 한 '언니'와의 결국 어긋나버린 인연의 궤적을 그려나간다. 한때는 모든 것을 공유했던 사이가 어떻게 소원해지는지 서사는 진폭이 크지 않은데도 살면서 놓치는 자잘한 것들을 낙낙하게 주워담는다. 왠지 아련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백퍼센트 공감하게 된다. 소설이란 이러한 것들을 이렇게 막연히 추측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생생하게 또렷하게 다시 길어올려 삶의 이야기에 통합시킨다. 


종인 선배는 동시녹음기를 어깨에 걸어 메고는 붐 폴을 양손으로 세워 쥐고 미동도 없이 우뚝 섰다. 조연출 누나는 이번에는 검지를 입술에 올리며 조용히 따라붙으라고 손짓했다. 뒤를 돌아보면 역광을 받은 채 빛나는 선배와 그 아래로 붐 폴의 그림자가 더는 늘어날 수 없을 만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나는 수업시간에 주워들은 숭고, 라는 단어마저 떠올려버렸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김봉곤은 이성애자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공감의 영역을 자신의 사랑의 묘사에서 여지없이 찾아낸다. '내'가 사랑에 빠지던 그 순간, 나도 '숭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경외감을 느꼈던 시간을 불러세웠다. 그 시간, 다른 경험치는 그의 언어의 색깔이 소환하는 그 구체적 상황을 넘어서서 각자의 그 시간, 공간을 복기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이 작가는 특별한 얘기를 통해 보편적인 정경을 떠올리게 하는 능력이 있다. 


회상의 대가는 뭐니뭐니도 프루스트다. 그의 묘사는 점묘법이다. 어찌나 치밀한지 어지러울 정도다. 그는 기억을 언어의 그물로 짜 현실로 복원한다. 늙고 죽을 것을 항상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속물성이 그 앞에서는 여지없이 드러나 해체된다. 


















이미 끝나버릴 것을 안다고 해도 그 시간을 현재형으로 사는 회상의 주체인 '나'는 현실을 소용 없는 일들, 허물어져 버리는 것들로 여전히 성실하게 채운다. 끝을 안다고 해서 시작조차 하지 않는 일은 없다. 여전히 욕망하고 시작하고 들뜨고 설레어한다. 다만 화자는 조금 더 알 뿐이다. 약간 더 현명할 뿐이다. 늙음이 가져오는 체념의 정서는 현실에 간섭하지 못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미덕은 그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또 다시 시작한다. 다시 기대한다. 나눈다. 같이 웃는다. 벚꽃처럼 다 질 것을 알지만 그 아름다움에 또 다시 숨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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