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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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언어의 그물코는 듬성해서 때로 많은 것을 놓치고 현실과 유리된다. 그 지점부터 이야기는 공허해진다.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를 원하지 않게 된다면 때로 현실이 이야기보다 더 지루하고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도 이어져 나가고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면서도 그 사슬 고리를 결코 끊어버리지 않는다는 엄혹한 진리를 이야기가 외면했다는 것을 간파하게 되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거나 만만한 게 아니다.

 

하지만 윌리엄 트레버는 달랐다. 그의 이야기는 그런 우리 청자들의 갈급함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대응한다. 그의 이야기는 삶과 철저히 닮아 있으면서도 삶을 함부로 폄하하거나 유치하게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제 할 말을 다 하고 제 갈 길을 유유히 간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읽다가 멈춘다면 반칙 같다. 그의 이야기를 읽는 행위 자체가 삶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첫 이야기의 첫 문장은 수수께끼 같다. "바이얼릿은 피아노 조율사가 젊은 시절에 결혼했다. 벨은 그가 늙었을 때 결혼했다." 다시 돌아가 읽는다. 그러다 거의 한 대목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조율사의 아내들>의 이 첫 문장을 이해한다. 늙은 맹인 피아노 조율사는 아내 바이얼릿과 사별한 후 비로소 자신을 내도록 지켜보았던 벨과 재혼한다. 이제 이미 죽어버린 바이얼릿과 살아 있는 벨은 한 남자를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바이얼릿은 남편에게 세상을 묘사하는 눈의 역할을 맡아 세상 그 자체의 인상을 자신의 눈과 언어로 만들어 조율사에게 각인시켜 놓는다. 맹인이 보는 세상은 아내 바이얼릿이 묘사한 그것이었다. 벨은 그러한 세상에 대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섭섭하고 괴로운 일이다. 남편은 죽은 아내의 눈으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는 벨을 아프게 한다. 트레버의 위트는 날카롭다. "살아 있는 사람이 늘 이기는 법"이라는 그의 말은 벨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다. 덧붙이는 이야기는 더 젊은 더 나은 시절의 남편을 소유했던 전처 바이올렛의 이점이니 말이다. 그래서 아내들은 비로소 동등해지는 것일까.

 

트레버의 노부부들에게는 찬란한 시절, 어려운 시간들을 통과한 삶의 동지애적 유대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웬만한 일에는 놀라거나 낙담하지 않는다. 하나뿐인 아들이 동성애자로 나이 든 남자가 남겨준 재산으로 먹고 살며 자신의 생일날에도 건달 같은 친구를 대신 보내 부모가 아끼는 물건들을 훔쳐가더라도 <티머시의 생일>, 딸이 아버지의 늙고 무능력한 한량 친구와 사랑에 빠져도 <데이미언과 결혼하기>, 그들은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슴앓이는 해봐야 소용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기력한 체념과도 또 다르다. 교통사고처럼 벌어지는 비보들 앞에서 시간과 세월의 무게는 때로 지혜가 된다. 아등바등 안달하고 이미 일어나버린 일들을 뒤집어 보려 억지로 삶과 겨루려 하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것에는 그들이 낳았지만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식이 포함된다.

 

실연하고 어린 시절 묵었던 숙소 '펜시오네 체사리나'에 홀로 체류하게 된 젊은 해리엇 <비온뒤> 도 남편의 외도를 눈치챘지만 그가 어쩌면 낳아 올지도 모를 혼외 자식이 성장하는 미래를 그려보며 저녁을 준비하는 중년의 레스웨스 부인 <하루> 도 고통스러운 상실과 결핍에 압도되는 대신 묵묵히 평범한 하루로 돌아오고 내일로 걸어들어간다. 현실의 엄혹한 진실의 핵에 가 닿을 때 비수처럼 찌르는 그 칼끝도 결국은 살아내는 일 앞에서 무뎌지는 것임을 트레버는 담담히 변주한다.

 

사는 것은 때로 비루하고 치사하고 비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결국은 그것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임을 윌리엄 트레버의 결곡하고 간명한 음성으로 듣는 일은 그러한 삶의 막간을 채우는 아름답게 채우는 일이다. 충분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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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6-17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별 다섯을 던지시다니
읽고싶어지네요^^

blanca 2016-06-17 15:00   좋아요 0 | URL
이것은 정말 너무 좋더라고요.^^ 제가 단편의 정점은 카버,체호프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트레버로 바꾸렵니다.

시이소오 2016-06-17 15:48   좋아요 0 | URL
저역시 단편의 정점은 카버,체홉이라고 여겼는데요. 우와,읽고시포라ㅎ ㅎ

단발머리 2016-06-1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트레버라는 작가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예요.
정영목 번역자님이 더 눈에 띄네요. (우리의 필립 로스^^)
진짜 별 다섯인가요?
그럼 저도..... ㅎㅎㅎㅎ

blanca 2016-06-17 15:01   좋아요 0 | URL
영미권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작가인데 우리나라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로 알아요. 저도 처음 만났는데 과장 좀 해서 너무 놀라웠어요. 저도 좋아하는 번역가인데 이번 책에는 몇 가지 아쉬운 대목이 있어요. 직역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트레버의 문장 자체가 그런 것인지 몇 번을 되풀이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양철나무꾼 2016-06-18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추천인데다가 정영목 님의 번역이라니, 저도 당근 장바구니로 직행입니다.
정영목 님이라면 꼼꼼한 번역으로 출판가에서 소문이 자자하다죠.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출판사 사장님께서 이분이랑 작업을 해봤는데,
좀 대충 빨리 하자고 해도, 시종일관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신답니다.
덕분에 제가 아는 사장님도, 그때 이분도 주머니가 아주 홀쭉하셨다는데...지금은 어떠시려나 모르겠네요~^^

이런 분들의 처우가 개선 되어야, 우리나라 출판, 번역 계의 앞날이 밝을텐데 말이죠~--;

blanca 2016-06-18 13:45   좋아요 0 | URL
아, 트레버 할아버지 아직 생존해 계신다고 하네요. 필립 로스와 더불어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라는 전범이 되어 줄 것 같아요. 이야기와 관련된 사람들이 좀 경제적으로 너무 시달리지 않아서 쓰고 번역하고 노래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으면 합니다.

자목련 2016-06-2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려고 곁에 둔 책인데, 더 빨리 읽게 만드는 리뷰네요.

blanca 2016-06-21 17:11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은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이런 작가라니, 정말 어디 숨어 있다 이제 나오셨는지... 그런데 이미 충분히 유명한 작가였더라고요.

Jeanne_Hebuterne 2016-07-04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즈음 제가 사는 곳에서는 앤 타일러와 줄리언 반스라는 대가들의 신작이 나와 꼭 잔칫날 같아요. 앤 타일러는 작년 이맘때 푸른 실타래를 내고서 한동안 신작이 없을 것으로 알았는데 지난주에 한 권이 출간되어 얼른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그 필력이 마치 이런 것은 수천 번도 더 써보았다는 양 당당하게 스타일을 유지해서 역시나, 싶어요. 우디 알렌, 앤 타일러, 줄리언 반스, 필립 로스(더이상 신작을 쓰지 않지만..) 이 작가들의 글을 천천히 읽고 있어요. 이 책 다음에 무엇을 읽을까, 생각해 봤는데 블랑카 님의 리뷰에 아마존과 동네 서점을 뒤적일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blanca 2016-07-04 08:25   좋아요 0 | URL
저는 앤 타일러는 못 읽어봤는데 좋은지 궁금하네요. 아, 전 우디 알렌의 영화도 너무 좋아요! 쟌느님, 혹시 <블루 자스민> 보셨어요? 필립 로스는 대중 강연도 안 한다고 선언했다는데 왜 그런지 이야기 좀 들어보고 싶어요. (마치 아는 사람처럼 ) 쟌느님 어디 사시는 지 궁금하네요. 어디 살아도 잔느님 계신 곳은 여기보다 한뼘 쯤 더 근사해 보인다고요.^^;;

Jeanne_Hebuterne 2016-07-07 22:00   좋아요 0 | URL
blanca님, 앤 타일러는 제게는 미국의 박완서 같은 느낌이에요. 두 사람 다 수다를 뼈대를 가진 이야기로, 옛시절의 향수와 그분들이 살았던 무섭게 추운 겨울, 숨막히게 더운 여름을 생동감 있게 살려내곤 하거든요. 박완서의 글을 읽으면 늘 창밖 어딘가에 찹쌀떡이나 군밤장수가 있을 것만 같고, 앤 타일러를 읽으면 음악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 트럭이 지나가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해요.
블루 자스민, 봤지요! 기본 아이템은 좋은 걸로 살수록 좋다는 교훈(샤넬 트위드 자켓을 야무지게도 돌려 입더라고요 호호)은 둘째치고, 우디 알렌 특유의 인물을 수렁에 빠져들게 하는 개미지옥같은 솜씨라니...젊은 시절 순이와의 스캔들에 대해 물어보니, 미국인들도 난감해 하더라고요. 그래, 정말 미친짓이었지..관계도 깨어버리고 여간해서는 벌일 수 없는 짓이었잖아? 용서받아선 안될 일이었어. 그런데 그게 또, 그래도 우디 알렌이잖아? 어쩌겠어. 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 양반의 세계가 얼마나 독보적인지가 보이더라고요. 스캔들과 영화라는 작업의 접점보다는, 한 개인의 스타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장난꾸러기 같은 그의 영화가 정말 좋아요. 히힛

제가 사는 곳은요, 길에 사슴도 다니고 아이스크림 트럭도 다녀요. 스컹크, 너구리, 엄마 사슴, 아기 사슴, 고양이도 길에서 봤지 뭐여요. 햇빛이 타들어가고 밤은 서늘하죠. 그치만 언제나 일상은 무채색이고 반짝임은 찰나같아요. 잘 지내고 계시죠, 그리운 블랑카님? 늘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6-07-08 16:16   좋아요 0 | URL
호옥시...텍사스 주 오스틴 아닌가요? 두근두근 ㅋㅋ 아, 쟌느님이 박완서에 비유해 주시니 앤 타일러의 색깔이 확 와닿으면서 빨리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자냥 2016-07-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오히려 번역이 별로인 것 같더군요. 트레버 팬이 되셨다면 이 책보다는 현대문학 세계단편 15번째 <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을 추천합니다. 저는 현대문학 버전으로 트레버를 먼저 만나고 최근에 이 책을 읽었는데....<비 온 뒤>에서는 이상하게 문장이 읭? 스러운 부분이 많더라고요.

blanca 2016-07-23 19:34   좋아요 0 | URL
아, 잠자냥님, 꼭 읽어볼게요. 안 그래도 장바구니에 넣어놓고 있었는데 곧 주문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