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만으로 몇 년의 유예기간이 있긴 하지만(그 동안은 조금 그 안에서 머물고 싶지만), 엄연히 마흔이라는 숫자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으니까 도리어 돋을새김처럼 보인다. 한 해 한 해 나는 조금씩 달라진다. 뒤로 가기도 하고 "절대!"라고 외쳤던 성역 따위는 오만이었다는 것도 배워간다. 어떤 이념이나 이상을 자신감 있게 외치고 그 안의 모든 항목들을 한 치도 틀리지 않게 사수할 수 없음에 때로 좌절한다. 말하여지는 것보다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려 하지만 그 막간에 때로 시선이 간다. 그리고 솔직히 나 자신한테는 더 많이 실망한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만 하는 일들,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한 층 한 층 더 쌓이며 견고해짊을 때로 느낀다. 이러한 점에서 조로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지만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없다. 듣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브람스의 무엇을, 바흐의 어떤 음악을, 누가 연주할 때 가장 뭉클한 지 자신감 있게 얘기하지 못할 정도로 돌아서면 그 세세한 사항들을 다 잊어버린다. 오자와 세이지도 하루키가 이야기했기에 그렇구나, 했던 정도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빈국립오페라하우스 음악감독을 역임한 그는 영어가 서툰 일본인이었다는 한계를 성실성과 재능으로 극복한 노장 지휘자다. 노년에 이르러 암투병의 좌초에 걸리기는 했지만 쉬엄쉬엄 그 난관을 잘 이겨나가며 후계자 양성에도 힘을 쏟고 나날이 조금씩 더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키는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지하고 겸허한 인터뷰어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한다.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진지함과 예리함의 폭이 넓고 깊어 오자와 세이지와의 이야기가 더없이 부드럽게 흘러간다. 스스로를 지칭한 '문외한'이라는 말은 이러한 지점에서 쓰일 단어는 아닌 듯하다. 주로 하루키의 집에서 실제 화제에 오른 음악을 틀어 놓고 들으며 음악가와 작가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는 사실 대단한 것들이 아닌데도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처럼 "듣는 사람을 흠칫하게 하는 절실함이, 반짝이는 빛처럼 아무렇지 않게 흩뿌려져 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오자와 세이지의 부지휘자 시절의 레너드 번스타인과의 일화들, 구스타프 말러 등 시간대, 음악, 사람이 구심점이 되어 이야기가 오고가지만 한결 같은 오자와 세이지의 담담하고 차분한 이야기와 하루키의 상대적으로 더 젊고 호기심이 많아 예리하게 과거의 추억을 환기하는 역할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특히나 롤이라는 스위스의 소도시에서 오자와 세이지가 신진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주관한 세미나의 풍경을 그린 대목은 하루키의 짦은 이야기처럼 그의 언어와 관찰력이 조응하며 간결하고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는다. 젊고 다듬어지지 않은 현악기 연주자들의 오케스트라 연습 참관 대목은 기회만 된다면 나도 그러한 기회를 얻고 싶을 만큼 찬란하다. '좋은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동행한 작가는 아직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그 과정을 이끌고 가는 노장은 나날이 그 되어가는 과정에 동행하며 '거친 어제'들이 쌓여 빛나는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음을 체현한다.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늙어가는 모습과그것을 언어화할 수 있는 자리에 동행하게 되는 작가의 시간들도 참으로 부러웠다. 그 둘에게는 '나이듦'이 쇠락이 아니라 어떤 되어가는 과정의 시간의 누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때 무책임하게 징징대며 그만 둔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었다.(지금은 아쉽게도 잠시 그만둔 상태) 그만둔 지점에서 한참이라 다시 뒤로 물러나 시작했지만 다시 그 지점 근처나마 비교적 짧은 시간에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나 치기 싫었던 피아노가 이제는 길어진 손가락과 공명하여 나오는 음들을 하나 하나 들을 때마다 왠지 뭉클했다. 작은 몸짓, 페달에 닿지도 않았던 발들, 암보라는 게 대체 뭔지도 모르는 채 그냥 기계적으로 눌러댔던 음계들이 레가토로 들려주는 음악은 시간의 낙차를 가로질러 과거의 어린 마음을 생생하게 불러왔다. 왠지 눈물이 자꾸 났다. 그때 다 완성시키지 못한 음악들을 이제 다시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 한정없이 내 앞에 그득 쌓였을 것만 같은 시간들이 한정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흩어져 사라져 가는 그 선율들을 더욱 농밀하게 한다. 어떤 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이러한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때로 아직도 시작할 수 있음을 상기한다.
노인이 될 준비를 하는 사람은 솔직히 낯설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잘 늙어가는 이들은 그러했다. 60대가 되어 가까스로 첼로다운 음을 내게 된 그녀는 50대에 제대로 그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흔세 살에 발레를 시작한 사람은 쉰 살이 넘어서 복근을 가지게 됐다. 다들 느지막하게 시작한 것들도 꾸준히 계속하니 취미와 관심사를 넘어서는 지점을 통과하고 삶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스스럼없이 나이듦을, 노화를 이야기하고 심지어 더 나이들었을 때의 삶을 준비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노화, 노인, 죽음이라는 화제 앞에서 머뭇대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지금 여기에서의 풍조를 돌아보게 했다. 힘이 빠져 더이상 지금 여기 같은 삶을 누릴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가감없이 한다. 젊음과 보여지는 아름다움과 에너지만을 찬양하는 풍조에서 사실 필멸의 존재의 실재는 설 곳이 없다. 외면하고 구태여 주목하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들에 사실은 '진짜'가 있을 수도 있는데... 분명 쉽지 않겠지만 또 확실히 통과해야 하는 지점이다. 피할 수가 없다. 아직은 많은 의무와 책임감이 난무하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나로서는 시간의 흐름이 홀가분함을 통과할 때 어떤 느낌일 지가 궁금하고 기대된다. 조금 정갈해 질런지, 정돈된 모습일지 등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