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의 글
휴먼카인드, 인류 역사 톺아보기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생명다양성재단 대표

이 책의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스스로 거침없이 "이 책은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에서 경쟁보다 협력과 연대가 더 중요했다고?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성선설-성악설 논쟁을 이렇게 단칼에 끝내 버리다니? 20세기를 거치며 거의 모든 학문 분야가 앞다퉈 끌어안은 홉스를 버리고 ‘철 지난’ 루소를 지지하다니?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설계해줄 유일한 수단이라고 단언한다.
무례할 만치 대담한 그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그동안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배우고 믿어왔던 많은 설명, 실험, 개념, 이론 등을 여지없이 뒤엎어버린다. 그의 연구 전략은 한마디로 ‘문헌 톺아보기’다. 그는 언제나 최초의 문헌이나 실험 기록을 찾아 나선다. 그의 톺아보기로 우리는 그동안 우리 역사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곡해가 많았는지 알게 된다. 이스터섬에 얽힌 수수께끼의 본질을 풀어헤치는 과정은 역사 탐구의 진수를 보여준다.
다만 진화론에 대한 그의 평가는 다소 섭섭하다. 《이기적 유전자》로 대표되는 진화론적 인간 본성은 언뜻 우울해 보이지만 조금만 더 톺아보면 절대로 경쟁 만능에 그치지 않는다. ‘생존 투쟁struggle for existence’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찰스 다윈도 깊이 읽어보면 자연 선택의 메커니즘으로 오로지 경쟁만 강조하지 않는다. 《인간의 유래》(1871)에 이르면 더욱 확연해지지만 이미 《종의 기원》(1859)에서도 경쟁 못지않게 협력의 중요성이 곳곳에서 읽힌다. 침팬지의 육식 행동을 처음으로 관찰해 세상을 놀라게 한 제인 구달도 그의 저서 《인간의 그늘에서》를 통해 연대와 희망을 얘기한다. 진화생물학과 생태학은 생물이란 모름지기 협력하는 존재임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
브레흐만은 자본주의 체제에 공산주의적 요소가 가득 차 있음을 관찰해 냈다. 인류학에서 말하는 ‘일상적 공산주의everyday communism’가 저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식탁 건너편에 있는 소금을 가지러 일어서지 않는다. 그저 "소금 좀 건네주세요"라고 말하면 누구든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소금을 건네준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천거한다. 저자도 동의하리라 믿는다. 아침 신문을 읽거나 저녁 뉴스를 시청하노라면 우리 사회는 당장이라도 붕괴할 듯 보인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모두에게 생애 최악의 해였던 2020년 ‘사랑의 열매’ 모금액이 8462억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필요하지 않으면 절대 선행을 행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인간 본성에는 선한 내재적 동기가 존재한다.
지금 시판되고 있는 《이기적 유전자》 띠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 추천의 말이 걸려 있다. "한 권의 책 때문에 인생관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내게는 《이기적 유전자》가 바로 그런 책이다." 브레흐만에게 한 친구가 《휴먼카인드》를 쓰며 인생관이 바뀌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그렇다’ 이다.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학문에 입문한 나는 훗날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를 집필한다. 내게 《휴먼카인드》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로 이어주는 완벽한 길잡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 책을 읽고 우리 모두 보다 따뜻한 사람으로 거듭나 보다 훈훈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다.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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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언어나 문자의 매개에 의존하지 않는 직접 체험주의
‘진리의 세계는 각자의 깨달음을 통한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 언어나 문자로서는 보여 주거나 전해 줄 수가 없다.’라는 의미의 불립문자나 교외별전이란 주장은 잘 알려져 있는 선불교의 슬로건이다.
이를 언어나 문자의 설명으로는 할 수 없다는 의미로 언전불급이라고도 하며, 물의 차고 더운 맛은 물을 마셔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의미로 냉난자지라고도 말하고 있다.
즉, 불법은 자기의 몸으로 직접 수행하여 체험을 통해서 각자가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선의 문헌은 조사들의 이러한 생생한 수행과 체험의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임제록」에 임제 선사는 자기의 수행생활과 경력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여러분! 출가 수행자는 먼저 도를 배우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산승도 지난날 일찍이 율장 공부에 전심하기도 하고 경전이나 논서의 연구에 전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률론 삼장이 모두 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약과 같은 것이며, 언어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단번에 경전을 뿌리치고 곧바로 선의 수행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훌륭한 스승과 도반들을 만나게 되어 비로소 도의 안목을 분명히 할 수 있게 되어 이제 천하 선사들의 견해를 바로 볼 수 있고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면서부터 곧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몸으로 참구하고 연마하여 수없이 많은 좌선의 수행을 반복하여 어느 날 갑자기 깨닫고 알게 된 것이다.

임제가 주장하고 있는 체구연마는 경률론으로 표현된 언어 문자에서 벗어나 각자가 직접 선 수행을 통하여 불법을 깨닫게 된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처럼 선의 본질은 언어 문자의 경전이나 과학적인 지식, 대상적인 인식이나 분석적인 판단에 의하지 않고 직접 체험적인 직관지, 반야의 지혜로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직관적인 지혜나 반야의 지혜는 임제가 주장하는 불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이며 진정한 견해인 것이다.
상대적이고 분별·차별의 2원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근원적이며 직관적인 지혜로 자기를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직관적인 지혜는 우리들 각자의 불성에 구족되어 있는 붓다와 똑같은 지혜를 선의 수행과 실천을 통하여 자각과 깨달음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즉, 이성에 대한 인식을 지식이라고 한다면 좌선의 실천으로 체득한 직관은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은 똑같은 차원에서 서로 상대를 공격하는 관계가 아니다. 믿음은 지식의 한계성을 보완하고, 지식은 믿음의 독단을 수정하는 것으로 양자는 상호 보완의 기능을 갖는다.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사실 진리에 대한 의심 없는 확인이며 철저한 확신인 것이다. 따라서 ‘신(新)은 힘이다.’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한편 신(信)은 맹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양의성은 충분히 자각하고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체험적이고 직관적인 지혜는 구체적인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지혜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선의 직접체험주의는 이러한 확신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 P293

이처럼 선의 실천과 수행이란 불교의 정신이나 실천 방법을 알고 있고 외우고 있는 그 지식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정신과 실천 방법을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과 인격과 정신으로 만들어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삶인 것이다.
경전이나 선지식의 지시를 받는 등, 비록 간접 경험을 통해서 어떤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자기가 몸으로 직접 실천하고, 또 지혜롭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인 것이다. - P297

1. 생물을 죽이는 짓에서 떠나는 일
2.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짓에서 떠나는 일
3. 갖가지 애욕의 사된 행에서 떠나는 일
<이상은 신업(身業)>
4. 거짓말에서 떠나는 일
5. 중상하는 말에서 떠나는 일
6. 욕말에서 떠나는 일
7. 아첨과 수다 떠는 말에서 떠나는 일
<이상은 어업(語業)>
8. 탐욕에서 떠나는 일
9. 증오에서 떠나는 일
10. 바른 견해를 가지는 일
<이상은 의업(意業)> - P304

시[布施]는 지계와 더불어 초기 경전에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윤리 덕목으로 그 정신적 기반은 4무량심이다. 이는 ‘남’이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위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남은 나의 생존 경쟁적 적대자가 아니라 나의 안락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반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사랑한다면 그 이상으로 남을 또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불교에서는 ‘자(慈, maitri)’라고 부르는데, 원어의 뜻은 우정(友情)이란 말이다. 남을 나의 진정한 친우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랑에는 남의 괴로움을 나의 괴로움처럼 슬퍼하고, 남의 즐거움을 나의 즐거움처럼 기뻐하고, 남이 비록 나의 뜻을 몰라 주어도 평정을 잃지 않는 마음이 뒤따를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우정·슬픔·기쁨·평정의 4가지 마음은 특정한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고 일체 중생들에게 확대되어야 한다.
보시는 바로 이러한 4무량심의 바탕이 되는 사랑의 외적 표현이다. 일체 중생을 진정한 친우로 보고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그와 함께 사랑스러운 말을 하고, 이익을 주며, 함께 일하는 행동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가 되겠다. - P314

이처럼 깨침은 나와 남, 나와 대상세계를 나누던 ‘나다’하는 벽이 깨져서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조사들은 그 깨진 세계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하늘과 땅이 나와 더불어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다.

나와 남, 나와 다른 생명 및 우주와 한 몸을 이룬 소식이다. 이 둘이 아닌 진리가 바로 불교의 사상적 기초이며, 따라서 그 진리에 눈뜨자는 것이 다름 아닌 불교인 것이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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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뜨고 싶었던가? L의 몸을 떠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미처 예기치 못했던 진실이 드러나리라 믿었던가? 그것을 내 손으로 거머쥘 수 있으리라 여겼던가? 오산이었다.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오싹하고 꺼림칙한 탈 한 조각이 남았을 뿐이었다. - P270

이따금 나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왜?’라는 단말마의 물음을 들이댔을 때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진짜를 보고 싶다면 결국, 심연 앞에 서는 일만이 남는 것 아닐까. 그 텅 빈 심연 속에서 대체 어떤 대답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일까. 언젠가 H를 다시 만난다면 그녀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 P271

"껍질?"
E가 하이 톤으로 되물었다.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껍데기와 껍질이 어떻게 다른지, 예전에 국어 시간에 배웠던 것 혹시 생각나요?"
"……글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감은 분병히 다르게 들리는군요."
"껍데기는 조개나 게, 거북이처럼 단단한 걸 말해요. 하지만 껍질은 내용물에 완전히 엉겨 있죠. 사과나 배, 고양이와 개, 그리고 사람처럼."
그녀의 은밀한 시선이 탁자에 놓인 흰 석고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저 딱딱한 물건은 껍데기였으며, 껍질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문을 닫을까요?"
습기찬 바람이 세차게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아뇨. 좋은데요."
그녀의 갈색 머리칼이 고요히 팔락거렸다. - P285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불분명했다. 진실로 잔인한 것은 흥분이나 격노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이 순간만큼 그것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 P307

나는 문득 그녀의 왼손이 자신의 허리 뒤로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았다.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잡자 그녀는 소스라쳤다.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내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왼주먹은 몇 시간 전에 석고를 바르려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구역질을 느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그 쓸쓸한 미식거림을, 시큼한 침이 고여오는 혀뿌리 아래로 눌렀다. 삶의 껍데기 위에서, 심연의 껍데기 위에서 우리들은 곡예하듯 탈을 쓰고 살아간다. 때로 증오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울부짖는다. 이 모든 것이 곡예이며, 우리는 다만 병들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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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소식, 지은이와 관련된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보호사와 작업반들이 한 팀이 돼서 저지른 짓이었다. 희생자는 지은이 한 사람이 아니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 여자애들이 돌아가며 당했다. 이는 내부 밀고자의 진술이었다. 일을 벌인 작업반들 중 하나가 먼죄부를 약속받고 모조리 불었다고 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긴 했지만 병원 측의 조처는 신통할 게 없었다. 지은이는 모처에서 낙태수술을 받고 인근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일의 중심에 있던 보호사는 시말서를 썼고 작업반이 여자로 교체된 게 전부였다. 렉터 박사는 소문 차단에만 열정을 쏟았다. - P281

"지금 어느 정도나 볼 수 있는데?"
"반경 20도쯤 될까 말까 해."
기억을 더듬어봤다. 직경 20도 이하가 되면 법정 실명상태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실명까지 직경 10도가 남았다는 얘기였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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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리꼬프는 여느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진지하고 당당하게 행동했으며, 벌을 받고 난 후에 감옥에 돌아와서는 한번도 그곳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듯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죄수들은 그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다. 꿀리꼬프는 어디에서나 항상 처신을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은 이제 그를 존경하지 않게 되었고, 어째서인지 친구처럼 허물없이 그를 대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탈옥이 실패로 끝난 다음 꿀리꼬프의 명성은 심하게 실추되었던 것이다. 성공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도 많은 것을 의미했다……. - P247

그리고 이 벽 속에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서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이제는 모든 것을 말해야만 한다. 실로 이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갔다. 그것도 변칙적이고 불법적이며 되돌릴 수 없이 파멸해 갔다. 하지만 누구의 죄란 말인가?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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