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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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한때 '내려놓음'이라는 주제에 깊이 빠져서 이용규 목사의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종교와 신앙을 조금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중 특히 마음에 든 부분은 신의 '예비하심'이었다. 말하자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그 일을 신이 예비하셨기 때문으로 그 일은 고난일 수도 기쁨일 수도 있으며, 신은 그러한 예비하심으로 신의 어린 양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이후로 종교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를 읽으면서 자주 '신의 예비하심'과 '인간의 운명'이라는 말들을 떠올렸다. 이것이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 종교적으로 보면 신의 영역에 속해있지만 또 전적으로 과학의 영역에서 발생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복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제'인간이 아니라 복제'인간'이라는 점이다.  

(스포일러 주의)
소설 전반을 정리하자면 복제인간들을 학습시키는 헤일셤에서 유년(그들에게도 유년이 있다면)을 보낸 캐시를 화자로 내세워, 캐시와 그 주변인물들인 루스와 토미, 루시 선생님과 에밀리 선생님, 마담, 코티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큰 틀이고 소설을 이끄는 문제적인 지점은 복제 인간의 '장기 기증'이다. 그러니까 장기 기증을 위해 복제된 그들이 한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살아가고 싶어도 애당초 그들에게 부여된 '장기 기증'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타의에 의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그들 사이에서 떠도는 희망적인 소문조차 그러한 죽음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대책(저항이나 내란)이 아니라 그것을 조금 미룰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얼마나 절망에 익숙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우리는 절망적이야, 라고 단언하지 않는다. 다만 캐시와 토미의 사례를 통해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으며, 그것이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여리고 예민하며 뛰어난 것이리라 예상할 수 있다.   

일단 정리를 했지만 이 소설은 복제라는 SF적인 요소나 그에 따른 일반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마무리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소설은 예정된 미래, 곧 그 미래와 동의어라고 볼 수 있는 '공포와 슬픔' 앞에서조차 삶을 포기할 줄 모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보다 인간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복제라는 미지의 소재에 천착하지 않으며(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뒷부분으로 가면서 드러나는 헤일셤과 마담의 존재에서 서스펜스가 약하다) 오직 인간에 대해,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음의 사소함과 미묘함에 대해 쓰고 있다. 그것은 곧 나에게도 있는 것, 너에게도 있는 것, 공통의 경험으로 묶인 인류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밥을 먹으려고 늘어선 식당의 긴 줄 안에 서 있을 때 그러한 시끄러움과 산만함 속에서 오히려 (아무도 없는 방 한 구석의 집중과 고요보다) 상대방의 비밀을 끌어내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주변 세상을 겁내고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를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독자를 두 번 세 번 돌아보게 하고 두 번 세 번 뜨끔하게 만들면서 나아간다. (아마도 좋은 작가가 때때로 독자에게 힘든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르겠다.)

 네버 렛 미 고. 
가고 싶지 않을 때, 
그것은 이 곳을 떠나고 싶지 않는 것과 그 곳만큼은 가고 싶지 않다는 두 가지 경우를 갖는다. 어느 쪽이 더 불행하고 덜 불행한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는 떠나고 싶지 않은 '이곳'을 가졌고 누군가는 가닿고 싶지 않은 '저곳'을 가졌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자의 경우가 훨씬 인간적인 선택 사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이곳을 떠난 이후에 또 다른 '이곳'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고 싶지 않은 그곳으로 나를 보낸다면, 나는 오직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갈 뿐이다. 그래서 네버 렛 미 고. 그러나 여기에는 인정이 없다. 소설 속 루스와 토미, 캐시는 그곳으로 갔거나 아직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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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유곤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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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연작 소설집  

이 책은 열다섯 살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기억이 난다. 정말 또렷하게. 왜냐하면 읽고 기분이 나빠서 다시는 이런 책 읽지 말자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거의 10년 만에 다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다시 읽는다고는 하지만 '다시 읽고 있구나' 하고 느낄 만큼 기억나는 것도 없다. 정말 아무 것도. 참 신기한 건 대학에 들어와서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나 렉싱턴의 유령을 읽고 하루키를 좋아하게 되었고-그때까지도 내가 중학생 때 읽은 책의 작가가 하루키인 줄 몰랐다- 이제 하루키 소설을 읽고 한동안 우울하고 침침하던 그 기분을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저 내가 소설이라고는 교과서에 실려 토막난 것들 말고 읽은 적이 없는 그때 하루키를 읽고 그런 기분이 들었지, 하고 추억할 뿐이다.(추억?) 

어쨌든 이번에 이 소설집을 다시 읽고 나의 어린 시절 독서감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예전에 헤르만 헤세를 읽고 자주 감탄했는데 지금은 뭔가 너무 거창해서 읽기에 부담스럽다고 할까, 뭐 그런 경험과 비슷하게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십년 전의 감상과는 전혀 판이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말 좋다. 

고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마지막에 실린 하루키의 인터뷰는 이 소설집의 정점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었는지 책 테두리가 하얗게 닳아져 아주 헌 책이 되어 있었지만, 그런 낡고 초라한 책의 장정마저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음. 이렇게 책 자체에 감동하는 것도 오랜만의 일인 것 같다. 

여섯 개의 단편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벌꿀 파이>였다. 벌꿀이 많은 마사키치 곰과 연어가 많은 동키치 곰의 우정 이야기를 보면서 근래에 보기 드문 훈훈한 우정이라는 생각도 들고, 소설가 쥰페이와 사요코의 오랜 시간에 걸친 조용한 애정도 정말이지 근래에 보기 드문 훈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꿈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며 시간이 지날수록 작가로서의 위치를 다져가는 쥰페이의 모습도 좋았고, 그런 쥰페이를 보면서 나 역시 내가 바라는 것을 잃지 않고 시간이 허락치 않아도 조금씩 꾸준히 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나면 상당히 건전한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데, 그것은 그의 소설이 밝고 희망적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초라한 삶이더라도 마음으로 깊이 그 삶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이 말이 초라한 삶만 줄창 써댄다는 뜻은 아니다..) 

실은 열다섯 살때 이 소설집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세 개의 단편을 보고 '더 읽으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음. <벌꿀 파이>까지 읽었다면 생각이 좀 달라졌을까? 가끔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가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는데, 꼭 상상의 끝에서 나는 모든 것이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해버린다. <벌꿀 파이>까지 바득바득 읽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다. 그때 열다섯 살의 나는 거기까지였던 거니까. 지금의 내가 아직 여기까지인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그때와 지금의 내가 다르듯, 앞으로의 나도 지금의 나와는 (아주 조금이라도 발전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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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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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일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뒤로 두번째다.  그 전에는 <소설의 기술>을 수업 교재로 읽고, 나중에 모임을 만들어 그 책으로 소설 작법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느낀 것이지만 쿤데라가 쓰는 글은 언제나 '탁월'한 점이 있다(밑줄을 긋지 않고 넘어가기가 힘들다). 이번에 읽은 <농담>은 책의 귀퉁이를 너무 많이 접어야 해서,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나는 새 책이 볼품없이 더러워지는 꼴을 보지 못하는데(그래서 좋은 구절은 표시해 두었다가 옮겨 적는데) 예외적으로 쿤데라의 책을 읽을 때면 귀퉁이를 여러 번 접을 뿐 아니라 색펜으로 밑줄을 긋고 단상을 책 한 구석에 써놓기까지 한다. 결국 책은 엉망이 되고, 나는 더러워진 책을 보면서 어쩔 수 없지 나중에 한 권 더 사야지 하며 마음을 정리한다. 

전에 읽은 쿤데라의 책들도 그렇고, 이번에 읽은 <농담>도 그렇고 나는 쿤데라의 책을 한 번에 읽지 못했다. 그러니까 책을 읽으려고 집어든 당시에는 거기에 온전히 정신을 쏟아부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저 눈으로 글자를 훑으며 겉돌았다. <농담>은 몇 달 전에 사십여 쪽을 읽고 놔두었다가 이번에 다시 읽기 시작한 거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처음 열 몇 장을 읽다가 못 읽고 일 년이 지나서야 다시 읽었다. 징크스라기보다 그 당시에는 아직 쿤데라의 책을 받아들일만큼의 역량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책을 읽을 때 그에 걸맞은 소화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나는 쿤데라의 책을 통해 깨달았다. 그와 관련하여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연애를 한 이후였다(연애를 하기 전까지는 쿤데라가 읽히지 않았다. 더 빨리 시작했다면 좋았을 걸). 나는 연애를 하는 사람, 그리고 연애를 하고 난 사람이 연애를 하기 전과 상당히 다른 걸 발견할 때가 종종 있는데, 다른 사람의 삶에 별 관심없던 사람도 연애를 하고 나면 상대에 대한 '이해력'이랄까 그런게 생기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어떤 소설은 독자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만으로도 읽을 수 있게 되어 있지만 반면 어떤 소설은 독자가 삶에서 치러낸 경험,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 속에 섞이는 즐거움과 고통 이후에야 읽히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쿤데라의 소설은 후자에 속한다. 사람 속을 꿰뚫는 쿤데라의 문장을 보며 이게 '말'이 아니라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게 누군가의 직접적인 목소리였다면 내가 그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웠을지 (또 얼마나 경탄했을지)...책을 덮으면 이 문장들을 숨길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읽는 이의 연애가 가혹하면 가혹할수록(그래서 더 예민해질수록) 쿤데라의 소설이 뼈에 박히는 그런 것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나는 뭐 비교적 평탄하고 행복한 연애였지만)  

<농담>도 그렇다. 간략히 하자면 이건 '(거대한)농담'과 '사회주의'와 '음악'과 '종교'와 '관계'와 '복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것들과 별 상관도 없이(아니면 그것이야말로 이 모든 것의 중심인 양)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루드빅에게서 나의 지나간 연애를 발견했다. 루드빅이 루치에의 '고요' 속에 믿고 있던 이미지, 일상적인 평화와 차분하고 영롱한 기운 같은 것이 결국 루드빅 자신이 만들어낸 오해임을 스스로 깨닫는 순간  '나는 그녀의 존재를 오로지(청년기의 자아중심주의에 빠져 있었던 탓에) 나에게로(나의 고독, 나의 예속, 애정과 사랑에 대한 나의 욕구로) 곧바로 향해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였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내가 체험한 상황의 기능에 불과했다. 내 삶의 이 구체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모든 것,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모습은 모두 간과되었던 것이다.(343)'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내 머리속에 지난 저녁식사때 들은 한 가지 소식이 떠올랐고 내가 얼마간은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저녁 식사 중에 나는 2년 전 헤어진 사람에게 새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내려앉았다. 정말로 가슴 언저리가 아팠다. 물론 나도 그 사이 다른 사람을 만났었다. 하지만 그것이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파장을 일으킬까 하는 생각조차 없었다.(파장이 일어났는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누구를 만났다 혹은 사귄다'는 단편적인 소식으로 헤어진 상대를 상처입힐 수도 있음을 깊이 헤아린 적이 없었다. 상처는 생겨버린 뒤에 깨닫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아주 나중에 내가 이 글을 다시 읽으면 잊을 수 있었던 어떤 것을 또 한 번 떠올리게 될까 두려워 그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어쨌든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 2년 동안 내 안에서 그의 존재가 상당히 오해된 채로 (환상적으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이제 현실이 되었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단어가 좀 더 확고해졌다. 만약 <농담>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마음의 정리는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나는 빠른 마음의 정리가 결코 좋다고 생각지 않는다. 누군가 대신 생각해주고 길을 터주고 마음이 아플 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 아주 효율적이지만, 그 효율성 때문에 나는 거기에 반항감이 생기곤 했다. 나는 이런 반항감이 나를 '바보'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때는 책이 싫다. 쿤데라 같은 작가도 너무 치밀해서 무섭다. 그렇지만 이런 저항이나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누구한테 배웠겠는가.  

솔직히 나는 이 책을 팔십여 쪽 남겨두고 이 리뷰를 쓰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 쓰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아서 조급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이 리뷰를 쓰게 만든 사람은 루드빅이 아니라 코스트카이다. 코스트카,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하는 루드빅을 마음 깊이 비난하는 코스트카의 이야기를 읽으며, 정작 루드빅을 용서하지 못하는 코스트카의 괴로움을 보며, 누군가가 미워서 괴로움 속에 살던 내 모습이 떠올랐고, 좋아하는 마음이든 싫어하는 마음이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말이 맞긴 맞지만(그래서 나도 사랑이든 미움이든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지만) 그건 마치 물에 녹은 설탕가루와 같아서 어느 날 물이 증발되면 유리그릇 바닥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걸 발견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설탕가루. 쿤데라의 소설이 자꾸 그걸 꺼내보이게 해서 마음이 편치 못하다. 하지만 리뷰를 쓴 뒤 다시 읽게 될 <농담>의 남은 팔십여 쪽에 얼마나 많은 귀퉁이가 접혀 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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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2-1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래 전 <참을 수 없는...>을 겨우 다 읽었는데 뭔 말인지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주위 다른 사람들은 좋다고 그러고. 그때 얼마나 말을 아꼈던지. 무식이 탄로날까 봐.
지금 다시 읽으면 토끼님 같은 느낌을 갖게 되려나요?
나중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농단도 같이...축하해요.^^

김토끼 2010-03-30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렇게 부르는 게 맞나요?) 어쨌든 스텔라님 댓글을 지금에서야 확인했네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2월달에 마이리뷰에 올랐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정말..뒤늦게 알았지만 아주 기쁘네요. 저도 예전에 쿤데라 소설이 너무 재미없고 지루해서 '아아. 왜 다들 쿤데라를 좋아하는 거지? 도대체 모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거야. 으으.' 했던 적이 있어요.(물론 저도 앞에서는 말도 못하고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는..) 하지만 세월(?)이란 게 뭔지 ㅎㅎ 우연히 다시 읽어보니 읽어지더라고요. 스텔라님도 저처럼 다시 읽어보시면 '와. 이렇게 좋은 구절이 있네'하실 거예요. 특히 실연의 후폭풍 속에서 읽으면 왠지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하하.

지야 2010-06-04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 읽고 김토끼님께 반했다는. ㅎ 중간의 연애 이야기는 정말 탁월하네요. 공감!

김토끼 2010-06-06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했! 감사합니다 ㅠ '중간의 연애 이야기'는 다시 읽어보니 부끄럽다는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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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기 기억 중 하나는 부활절 때 어머니가 나를 양 위에 태우고 '스스로 재물이 된 어린양'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일요일마다 감자를 곁들여 양고기를 먹었다. -16쪽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16번, 카르파티아 산맥의 부줄 족이었다. 이들은 잘라서 버린 머리카락을 쥐가 가져다 둥지로 만들면 머리카락의 주인에게 두통이 생긴다고 믿는다. 그 둥지가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은 미칠 확률이 높아진다.-17쪽

맥시 볼은 큰 가게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집 옷은 쌌지만 오래 가지 않는 데다 산업용 접착제 냄새가 났다. 자포자기한 사람들, 조심성 없는 사람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토요일 아침마다 그 가게에 모여들어 서로 다투듯 물건을 집어 들고 가격을 깎느라 실랑이를 벌였다. -19쪽

두 사람은 함께 만화방을 했고, 수요일에 내가 만화책을 빌리러 가면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주기도 했다. 나는 두 사람을 무척 좋아해 어머니에게도 그들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하루는 그 두 아주머니가 내게 바닷가에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집으로 달려가서 그 얘기를 재잘거리며 새 부삽을 사려고 바삐 저금통을 비우는데 어머니가 단호하게, 여지없이 "안 돼."라고 말했다. 난 왜 안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어머니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갈 수 없다고 말하러 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22쪽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내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할렐루야 거인'이었다. 키가 2미터가 넘어 괴물로 불렸던 남자가 독실한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1미터 90센티미터로 줄었다는 내용이었다.-23쪽

"여자 애들은 뭐든 미리 준비해야 하는 법이야."-37쪽

한편 내 공부는 계속됐다. 원예학, 민달팽이로 인한 정원의 해충 문제, 그리고 어머니가 갖고 있는 씨앗 목록에 대해 배웠고, 역사가 계시록에 나오는 에언대로 흐른다는 것과 어머니가 주마다 받아 보는 <명백한 진리>라는 잡지의 내용을 이해해 갔다.-39쪽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우체국으로 갔다. 그리고 펜을 들고 어린이 부양자 지원금 신청 용지 뒷면에다 이렇게 썼다.

주스버리 양,
저 하나도 안 들려요.
-50쪽

"한쪽을 이해하고 싶다면, 양쪽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거야."-62쪽

베티 아줌마가 나아지자 우리는 모두 해변으로 간증하러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습니다. 나는 탬버린을 쳤고 엘시 노리스는 자신의 아코디언을 켰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 아이가 우리를 향해 모래를 던졌고, 그때부터 아코디언에서 높은 바 음이 나오지 않게 됐습니다. 우리는 가을에 잡동사니 바자 세일을 열어 수익금을 아코디언 수선 비용에 쓸 것입니다.-71쪽

그날 이후로,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피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몹시 슬펐을 것이다.-80쪽

"단지 선생님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에요."-81쪽

"이 과일 케이크는 말이다."
엘시가 중간 중간 케이크 조각을 삼키며 흔들었다.
"먹을 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먹어 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84쪽

나는 당장 일에 착수했다. 그동안 어머니와 이다 그리고 메이는 경마 승자를 맞추는 용지를 작성하고 홀릭스를 마셨다. 난 일이 싫지 않았다. 잔에 침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더욱이 일하는 동안 생선 가게와 멜라니를 생각할 수 있었다.-143쪽

어머니는 예전에 고집이 센 아가씨였고, 파리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다. 당시로서는 아주 과감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셍 제르망 거리에 살며 크루아상을 즐겼고 청결하게 살았다. 그때는 주님과 함께하지 않았지만 수준 높은 삶이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날, 어머니는 강을 향해 걷다가 경고도 없이 피에르를 만났다. 아니, 차라리 피에르가 자전거에서 뛰어내려 양파를 건네면서 어머니를 그가 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렀다고 해야겠다.
"당연히 나는 우쭐해졌다."-151쪽

"가서 커피 좀 마시자.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는 거야."-178쪽

'만약 그들이 내 악마를 손에 넣고자 한다면 나부터 손에 넣어야 할걸.'-183쪽

멜라니는 평온했다. 소로 변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평온했다. 난 너무도 화가 나서 멜라니와 대화해 보려 했지만 그녀는 다른 곳에 머리를 두고 온 것 같았다. 그녀는 나에게 별일 없냐고 물을 뿐이었다.
"무슨 일?"
멜라니가 얼굴을 붉혔다.-209쪽

"이제 내가 너에게 경고를 하겠노라."
발로 땅을 구르며 여왕이 외쳤다.
"너와 너의 머리 둘 중에 하나는 제거되어야 한다."-213쪽

어머니는 하얀 장미에 빨간 칠을 하고 이제 장미가 빨갛게 자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나가야겠다. 난 내 집안에 마귀를 들일 수 없어."-228쪽

사실 나는 죽도록 두려웠다.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날 돌봐 주었던 선생님과 살까 했다. 지금껏 나는 토요일마다 아이스크림 차를 운전했다. 이제는 일요일에도 일할 것이고, 최대한 그 선생님에게 많은 돈을 드리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곳은 음산했지만, 여기보다 음산하지는 않다. 나는 강아지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냥 책과 찻장에 있는 악기들, 그리고 그 위에 성경책을 얹어 가져왔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과일 가게에서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오렌지, 과즙이 풍부한 이스라엘 오렌지, 무르익은 세빌리아 오렌지.
"과일 가게 일은 하지 말자."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먼저 정육점 일을 할 거야."-229쪽

그녀는 배에 오르고 다른 쪽으로 항해할 것이다. 돛이 움직이고 태양이 떠오른다. 이제 그녀의 주위에는 물 외에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는 되돌아갈 수 없다.-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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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stle 2010-01-2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도서관에 앉아 몇장 읽어봤는데 재밌더라. 나오기 싫었다는..
 
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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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나는 병적으로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 대한 생각은 거의 안 하고 나 아닌 사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내 눈에 밟히는 사람. 밟힌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 눈이 그 사람을 티 나지 않게 밟고 지나가는 거다. 하지만 티 안 나게 밟을 수는 없지. 어떤 식으로든 그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이라는 거, 말하자면 쓸쓸함 같은 거다.  

풀이 눕는다를 읽고 내가 왜 여기에 공감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 대한 의심, 아니 의심이라기보다 난 아직도 이런 사람인가에 대한 실망, 그리고 기쁨이 뒤따랐다. 실망하고 기뻤다는 게 말이 안 될 수 있지만, '내가 아직 이걸 잃지 않았다니'와 '아직 난 이런 사람이구나. 아직도. 아아-이런.'은 동시적으로 아이러니하게 일어나야한다. 그게 더 맞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이 언제나 명확하게 a 아니면 b여야 한다면 솔직히 말해 책을 읽을 필요도 쓸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뭔가 나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풀이 눕는다를 읽으면서 책 속으로 쑥 빨려들어가 '난 변치 않는 건가, 씨z' '내 욕이 나랑 어울리지 않는 것도 그런 건가' 했다. 

이 소설은 장편치고 이야기가 단순하다. 하지만 흐름이 좋고 욕과 마리화나와 죽음과 짜증의 안배가 적절하다. 참말이지 청춘은 가난해서 슬프고 슬퍼서 가난하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 비슷한 것도 아니고 완전 똑같은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는 게 때론 신기하고 때론 지긋지긋하다. 다른 미래라는 게 있긴 있는 걸까?  

풀과 '나'(화자)는 둘이서 행복하지만 둘이서만 살 수는 없으니까, 타협(세상과의?) 혹은 비극 중에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비극을 선택해서 비극적이 되었고 (아마 타협을 선택했으면 타협적이 되었겠지) 여튼 그랬던 거다. 나는 둘이 헤어졌을 때 풀이 "너도 날 버리는 거잖아. 마찬가지야" 하며 소리칠 때 정말 마음이 아팠다. 그게 '나(화자)'가 스스로도 풀을 버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풀이 저렇게 다 토해내 말하는데도 거기에 부딪쳐 할 말이 없는 상태가 된 거다. '나'는 아무때나 풀을 두고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맘 편하게 풀하고 지냈던 거니까 '나'는 풀에게 상처 준 '나'가 무서웠을 거다. 그래서 풀을 다시 만나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겠지. 그래서 이건 정말 슬픈 소설이다.   

책을 읽고 곧바로 리뷰를 써서 그런지 아직도 책 속에 있는 것 같고, 태양 아래 파도에 휩쓸리다가 이제 물가에 쓰러져 닿은 것 같다. 헤엄치지도 않았는데 여기까지 와버려서 좀 당황스럽다고 할까. 미나는 아직 안 읽었는데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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