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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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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앞에 놓인 사람의 운명은, 책으로 가는 문을 발견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영영 문틈조차 보지 못하느냐로 결정된다. 그 문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서가가 가득 차있어도 그 문을 통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책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아마도 그건 내가 책으로 가는 문을 발견해본 운명이기 때문에 알아보는 것일 테다. 내가 그 문을 발견한 것은 책에 대한 아무런 욕심도 없던 시절이었다.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책으로 가는 문을 통해 들어가면 책을 '보는'일은 사라지고 책을 '느끼는'일만이 남게 되므로, 책을 봐야지, 봐야지 하고 거듭 강조할수록 책과 교감하는 그 문은 희미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책으로 가는 문보다 책 언저리에서 맴돌며 책의 효용을 따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 나에게 도착한 알라딘의 선물. 이 하얀 책이 다시 책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면 좋을 텐데.

 

 

미야자키 하야오,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애니메이션에 빠져 있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원령공주와 나우시카에 사로잡혀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날씬하고 용감한 그녀들에게, 여자 아이들은 어릴 적 보던 세일러문이나 천사소녀 네티와 영 다른 우아한 그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 나올 때마다 행복한 마음으로 극장으로 갔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이것이 '어린이'를 위한 '만화'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린이만을 위한 만화가 아니었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에세이 <책으로 가는 문>을 읽으면서 비로소 알아챈 건, 순전히 그는 그 자신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가 하는 점이었다. 그 안에는 내성적이지만 상상속에서 끝없이 용감해지는 어린아이가 있어서, 그 아이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책을 썼던 건 아닌가.

 

 

미야자키는 이와나미 소년문고 50선을 추천한다. 사실 이 중에는 읽지 않은 책, 앞으로 읽어보리라 마음 먹은 책도 포함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직장동료를 친구에게 소개팅 시켜주는 것과 같은 걸까. 나 역시 읽지 않은 책을 먼저 사랑해버리는 경우가 잦다. 모든 것을 안다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의 50선은 다분히 인간적인 선택일지도. 이 중에는 그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것도 있다. 오래 전 착상만 하고 키우지 못한 <마루 밑 바로우어즈>가 <마루 밑 아리에티>로 탄생한 비화도 들을 수 있다.

 

 

"곧바로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될 수 있는 책은 좀처럼 없습니다.

그런데 평생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어렵겠다고 생각한 작품이었는데 '지금이라면 될지도 몰라'하는 시기가 오는 일도 있습니다. 수십 년에 한 번뿐인 바로 그 기회이지요.

<마루 밑 바로우어즈>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이제 어른들 아니 인간들이 마치 세계에 대해 무력한, 소인 같은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07쪽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그냥 '지금이라면 될지도 몰라'하는 시기가 꼭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인생에 몇 번 찾아오지 하면서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나간 일들이 떠오른다. 사실 이 책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자꾸 지나간 것들을 끌어당긴다. 이 할아버지가 정교하게 과거를 기획하고 상상하고 그려내서 사람들에게 마법을 거는 일이, 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책과 관련된 여느 에세이와 달리 책 읽기 자체를 강조하지 않는 느긋한 분위기가 어느새 마음을 여유롭게 만든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아무리 유명한 고전이라 해도 나와 맞지 않아, 읽을 수가 없어,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도, 이렇게 말하는 할아버지를 상상해보라. 얼마나 기분 좋은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무릎을 꿇고 앉은 듯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만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나 자신이 해부되는 것 같아서 읽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느낌이었지요.

필독서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비슷한 경험이 몇 차례 있었고, 결국 저는 어른들 소설에 맞지 않는 사람임을 절감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잔혹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린이문학 쪽이 훨씬 더 기질에 맞았던 것입니다.

82쪽

 

 

일본 저자들이 보여주는 이 '포기하는 매력'을 발견할 때면, 나는 갑자기 행복해진다. 지금 나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을 보편적인 가치에 얽매여서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문득 깨닫기 때문이다. 꼭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다. 필독서 따위 안 맞으면 못 읽는 거고, 두어 번 먹어봤는데 도저히 못 먹겠으면 그 다음부터는 안 먹어도 되는 것이다. 몇 마디 했는데 안 맞아서 다음에 만나기 싫은 사람이면 되도록 안 만나도록 하고, 느낌 좋은 사람이면 더 자주 연락해서 그 사람을 보는데 시간을 더 보내면 되지 않나, 이런 단순한 해답을 얻곤 한다. 그래서 책읽기 따위 강요하지 않는 멋진 어른이 되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된다. 어쩌면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작가들이 이런 식의 '포기'에 익숙한 건 그들의 지질학적인 운명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는 포기할 수 없는 한 가지를 놓치지 않는다.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142쪽

 

 

역시 이것,

그런 책을 또 하나 만났으니 기쁘다. 나에게는 평생을 걸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데, '역시 이것'이라 할 만한 책들로 책장을 채우고, '역시 이것'이라 할 만한 옷들로 옷장을 채우고, '역시 이것'이라 할 만한 사람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고, '역시 이것'이라 할 만한 글을 써보는 것이다. 아마도 이 책도 '역시 이것'이라 할 만한 책으로 책장에 있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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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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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라고? 9월 신간 추천할 때, 이 책은 정말 안중에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원’이라는 목가적인 단어가 어쩐지 나와 동떨어진 기분, 게다가 저자는 헤르만 헤세였다. <데미안>을 읽고 황홀경에 빠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사고, <황야의 이리>를 샀다. 그러나 둘 다 읽다 말았고, 그 사이 헤르만 헤세라는 독일인과 나는 한 때 열렬했으나-물론 한 쪽에서만- 급히 사랑이 식어버린 관계처럼 느껴졌다. 열렬하면 간혹 애증으로 변하는데, 이 열정은 증오로도 다정함으로도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기 에세이 신간으로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선정되었을 때도 가만히 책을 들여다보며 저 노랑 표지 가운데 휴지를 줍는 포즈로 무를 뽑고 있는 신사가 아마도 헤세인가 보다, 하며 딴청을 피웠다.

 

읽다보면 헤세가 정원을 가꾸는 작가인지 글을 쓰는 정원사인지 헛갈릴 때가 있다. 그래서 작가로서의 헤르만 헤세를 잠시 잊었다. 데미안도 잊고, 읽지 못하고 항상 죄책감에 시달렸던 다른 두 권의 소설도 잊었다. 그냥 나는 읽었다. 여름목련나무와 난쟁이 분재에 대해 읽고, 이 사람은 여름목련나무처럼 화려하지만 덧없을지도, 저 사람은 난쟁이 분재처럼 단조롭지만 견고할지도, 하며 이 대립적인 식물들을 끝없이 되새겼다. 목련의 하얗고 푸르스름한 잎을 ‘창백하다’고 표현할 때 탐스럽지만 가까이 보면 추위로 몸을 웅크린 목련 꽃이 떠올랐다. 또 바싹 마른 꽃잎을 ‘호소하듯 슬픈 빛을 띤 붉은 잿빛’이라고 하면 건조한 방안에 장작처럼 마른 장미의 검은 꽃잎이 생생했다. 목가적이지 않더라도, 아주 도시적이고 현대적이라도 오래도록 꽃을 보면 그 창백하거나 슬픈 빛깔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 즈음 생각되자 헤세가 정원을 가꾸는 작가인지 글을 쓰는 정원사인지 구분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사려 깊은 관찰자일 뿐이다. 그가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기계성은 아마도 그와 같은 관찰자의 시선을 거두어 가는 것에 대한 우려이지 않았을까.

 

정원에서 꽃을 보고 나무를 보고 나비를 보는 이야기도 있지만, 미래사회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어두움에 대한 맹렬한 불안을 숨기지 않는 이 대문호의 걱정을 줄줄 읽고 있으면 너무 많은 생각이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류차원에서 걱정하기 시작하면 걱정이 끝도 없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의무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헤르만 헤세에 대한 애정이 툭 끊겨버린 시점에 나는 그 거대한 걱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소시민적인 삶을 탐하면서 그가 쓴 글들을 어떤 우연으로 다시 읽게 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전쟁이라는 우울한 상황에 지지 않고 오래도록 단순한 삶을 지속하며 생의 기쁨을 발견하고자 애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해준 것이 감사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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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책이 내게 말을 걸어 왔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 어느 책방에 머물러 있던 청춘의 글씨들
윤성근 엮음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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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돌아보니 친구가 몇 없다. 아니면 친구에 대한 정의가 너무 엄격한 사람일지 모르겠다. 다른 데는 허술하면서 친구에 대한 잣대만큼은 완벽주의인 걸까. 이런 경우-타인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고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보통 책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라고 말하게 되는 것 같다. 책이란 단순히 활자의 모음이 아니다. 어떤 문장은 불현듯 나타나 오래도록 표현하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를 적확하게 표현한다. 그런 책을 만나면 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신기한 건 그런 사랑을 해본 사람은, 자신과 닮은 경험을 한 사람을 금방 알아차린다는 점이다.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쓴, 아마도 인생의 많은 시간을 책에 할애했을 저자는 그런 사람들의 기록을 모아 책을 만들었다. 친구가 별로 없고 책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또 하나의 친구가 생긴 것이다. 



청춘은 같은 방식으로 되는 걸까



  책이 진행되는 형식은 특별할 것이 없다. 헌책에서 발견한 메모가 있고 저자의 주석이 붙는다. 어떤 책인지 밝히고, 될 수 있으면 책의 제목, 저자, 출판사, 출간년도를 표시한다. 누군가는 시를 베끼고, 처지를 적고, 편지를 쓰고, 고백을 하고, 철학적 의견을 털어놓는다. 70년대부터 90년대 대학시절을 보냈을 이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 역시 대학 다닐 때 책 앞 장 여백에 감상 젖은 말들을 써놓곤 했다. 심지어 빌린 책에 낙서를 끄적여 반납한 적도 있었다. 청춘은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는 걸까. 책을 펼칠 때마다 내가 끼적거렸던 그 낙서들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는데-몇 장는 찢어 버렸다-, 어쩌면 청춘을 청춘답게 지나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간 들떴다. 그러다 문득 마음을 한 동안 쥐고 놓지 않았던 문장을 만났다.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에 대답할 수 없어서(43)

_대답 대신 한 권의 책을 사다



  이 메모만이 책에서 유일하게 도서 미상으로 표시되어 있다.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없고 오직 메모만 남았다. 책에 게재될 수 없는 탈락조건에도 실린 까닭은 '메모의 내용이 눈부셔서'였다. 이 말만큼 딱 맞는 말도 없었다. 정말 한 동안 책을 붙잡고 생각하게 됐다. 그 대답을 구구절절 옮겨놓지 않는 태도가 아름다웠다. 수려한 표현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소박한 말로 자신을 절반쯤 숨기는 사람. 이 조용하고 단순한 문장에 숙연해졌다. 정말이지 요즘 나는 자신을 드러내려 아등바등일 뿐, 숨기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지금과 다른 건 그 시절을 살았던 청춘들은 저마다의 존재에 대해서 더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것이다. 자격증 개수나 토익점수보다 자신과 사회의 존재에 대한 탐구가 언제나 먼저였다.(133)



  사실 이 책은 말하자면 자의식에 대한 편집에 다름 아닐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설령 몇 줄의 메모일지라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 짧은 글들은 요즘 볼 수 있는 SNS의 자의식 과잉과 사뭇 다르다. 저자의 선별이 훌륭했던 까닭도 있을 것이다. 또 책이라는 전제조건이 있기에 더 견고한 의식을 발견하게 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이것들이 모두 지나간 것들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일 수 있다. 그 중 어떤 근거라도 이 기록들 하나하나가 마음에 콕 와닿는 동일한 결과를 낸다. 결국 그 훌륭한 책들도 누구 인생의 배경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조용하다. 한편으로 배경이 된 그 책들에 감사하게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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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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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간 <7년의 밤>은 그야말로 '핫'한 소설이었다. 정유정의 신작 <28>이 나오자 사그라들었던 인기가 다시 치솟았다. 서점에 가면 <28>옆에 <7년의 밤>이 쌓여 있었다. 읽고 싶다는 생각보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두껍고, 가장 빨리 읽은 책이다. 하나의 결정적 사건에서 시작되어 이야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과정을 이토록 치밀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 번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는 소설이다. 나도 모르게 백 페이지가 넘어가 있을 때는, 나 자신이 그렇게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아니다. 깨닫고 보니 소설이 압도적인 것이다. 독자를 압도할 수 있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에는 늘 일장일단이 있다. 읽고 있는 동안 독서 감각이 최고조에 달한다는 것, 그러나 읽은 후에 아주 개운하다. 뭔가를 생각하려해도 머리가 깨끗하다. 소설이 모든 걸 다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건 순전히 개인의 취향 탓일 수 있다. 나는 섬약한 인간이라 너무 큰 이야기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작은 이야기들이 얽히고 설킨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솔직한 반응은 이렇다. <7년의 밤>에 온 신경이 휩쓸렸다. 잠들기 전에 읽으면 꿈을 꿀 것 같아서, 아침에 일어나면 읽었다. 최현수가 너무 불쌍하고 지독해서 마음이 쓰였다. 한 불우한 인간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이만큼 철저히 보여주는 소설도 없을 것이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취재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첫 예감은 맞았다.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읽어야 해서 읽은 소설이라는 것. 소설에 쏟은 작가의 공력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오직 작가라는 타이틀 아래 문장적 감각만으로 소설을 써나가는 작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작가란 존재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7년의 밤>을 다 읽고 <28>을 읽으려다 첫 장을 읽고 그냥 뒀다. 아직은 <7년의 밤>을 보낼 수 없다. 밀어닥치듯 읽어서 소설이 소설을 밀어내지 않도록 얼마간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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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5분 정리의 힘 - 삶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공간, 시간, 인맥 정리법
윤선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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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에 여름 휴가 였다. 어디 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집에만 있었다. 남들은 그게 휴가냐고 하는데, 나한테는 그게 휴가가 맞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아마도 지난 2년 간 가장 소망한 일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지키지 못했다. 책이나 읽자고 고른 <하루 15분 정리의 힘>(이하 <하루 정리>)때문에 휴가 내내 '정리'만 했다.

 

사실 난 정리를 좋아한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걸 좋아한다. 왜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고,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친구 집에 놀러가면 인형놀이하다가 친구방 정리하고 그랬다. 혼돈계, 복잡계가 눈 앞에 선연한데 도저히 가만히 둘 수 없다. 그렇다고 정리의 '달인'이 될 만큼 특별한 정리법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또 움직이는 것이 '정리의 힘'이었다.

 

이런 내가 '정리법'에 눈을 뜬 계기는 대학시절에 읽은 '아무 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란 책이었다. 제목만으로도 강력했다. 그때의 나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고 먼지를 닦는 일만이 '정리'라고 생각했다. 한 번 수중에 들어온 물건을 버린다는 건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책은 일단은 '버리라'고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내용이 집을 아홉 분할하면 각 구역마다 관장하는 기운이 있는데 가령 어느 한 쪽이 잡동사니로 막히면 건강이나 돈을 잃을 수 있다는 등 미신적인 부분이었다. 바로 그 부분에 설득당해서 집 안에 있는 것들을 버리고 또 버렸던 기억이 난다. 정말로 많이 버렸고, 심지어 버려서는 안 될 것들도 버린 뒤에 후회하기도 했다.(추억의 물건은 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버린 뒤에 느낀 '홀가분함'. 그 뒤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지만 '물건을 갖고 싶다' 즉 견물생심에서 상당히 벗어났다고 할까.(그렇지만 갖고 싶은 것들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무소유 정신은 아니지만, 소유욕을 줄이면서 정말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중요하다. 결국 '버리는 과정'은 진짜 원하는 것에 '집중'하기 위한 작업일 것이다. 이번 기회에 <하루 정리>를 읽으면서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버림'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진 까닭은, 지금의 나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건 내가 원하던 삶의 방식이 아니다, 라며 매일 투덜거리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왜 투덜이가 되었지? 이런 나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지? 그때 돌아본 서재와 옷장과 서랍과 책상의 쌓여있는 물건들, 물론 정리벽 때문에 곱게 쌓여있지만 너무 많게 느껴지는 물건들을 보자 갑갑했다.

 

그때부터 아무 생각없이(정신을 차려보니) 정리를 시작했다. 그야말로 대대적인 작업이었다. 더이상 풀지 않을 영어 문제집(토익책)과 몇 년 동안 입지 않은 옷, 쓰지 않은 노트, 메모지, 펜, 샘플로 받은 화장품 등등.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무엇을 버릴 지 떠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 것도 없는 방에 몇 권의 책과 단순한 옷 몇 벌과 스탠드 아래 노트북만 놓인 채 가벼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를 꿈꾸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모습이 내가 원하는 것인가? 이건 거의 승려인데.(무소유 쩌는) 불심이나 도심을 닦을 마음은 전혀 없지만, 거의 아무 것도 갖지 않은 상태가 많은 것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는 상태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휴가가 끝난 지금까지도 나는 무엇을 버릴 지 의식하고 있다. 저번 주말에는 버리지 못하던 잡지 몇 권을 청산했다. (좋아하는 기사만 스크랩) 그래도 여전히 잡지들이 남아있다. 사실 <하루 정리>에는 정리에 관한 여러 방법이 들어 있는데, 내가 귀퉁이를 접어 놓고 반복해 읽은 부분은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삶을 남의 것으로 만들지 말자. 삶을 정리하여 비우고, 나눈 자리에 진짜 소중한 것들을 새로 채워가자(120)-이다. '진짜 소중한 것으로 채우기' 삶이 한 번뿐이라면 그럴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선택으로 채워진 공간을 비울 때 오는 조용한 쾌감도 느껴볼 만 하다. 한동안 나는 많은 물건을 의식적으로 대할 것 같다. 피곤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좋다. 나중에 빈 공간을 다시 채울 때는 정말로 좋아하는 것들이 거기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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