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이 영화를 봤냐하면,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이다. 어린 시절 속삭이는 말도 멀리서 듣는 소머즈, 필요하면 갑자기 멀리있는 걸 보고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달리는 육백만불의 사나이, 그리고 평소에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위기가 닥치면 빙글빙글 회전해서 옷을 갈아입고 위기에서 사람들을 구출해주는 원더 우먼까지... 냉전 시대에 외화시리즈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 세계에서 절대 선을 행하는 원탑 영웅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어렸던 나는 초능력이라는 매력에 빠져들었다. 신처럼 초능력을 가진, 어찌보면 가부장적 지배 논리를 훈육하기 위한 시리즈들이었다. 커서 생각하니. 그래서 원탑 영웅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초능력은 더더욱...

2. 그럼에도 <원더 우먼>은 냉큼 보러 갔는데 음...내가 알고 있는 원더 우먼이 아니었다.-.- 아마존에서 흙으로 빚어서 생명을 불어넣어 태어난 줄 아는 신과 인간의 피조물로 헤라클레스 여자 버전쯤? 원더 우먼이 아주 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단점이 더 눈에 들어온다. 먼저 좋게 말하면 세속의 때가 안 묻었고 나쁘게 말하면 물정 모르다. 인간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고 자신의 믿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절대 선은 절대 악과 비슷한 점이 있다. 방독면을 뚫는 독가스를 만드는 박사 역시 절대 악에 대한 혹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추진력이다. '절대'라는 건 인간계에서는 위험한 일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를 없애겠다는 의지로 원더 우먼은 또 다른 인간(영화 속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징집당했을 어린 독일군)을 죽이는 일을 선이라는 이름으로 행한다.

아마존에서 이탈해서 도시로 나와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옷가게에 가서 벌어지는 짧막한 대화는 젠더 정체성에 대한 유머가 있는데, 나는 이 유머가 썩 좋진 않다. 원더 우먼이 젠더 정체성에 대해 알고 나오는 게 아니라 아이같은 순진함에서 나와서 오히려 남성의 시선처럼 느꼈다.

건장한 여신의 뒤를 따라 올망졸망한 남자들이 뒤를 쭐래쭐래 따라서 최전선으로 향한다. 나는 성별을 떠나 이렇게 초능력을 지닌 원탑 히어로에 의존하는 영화는 인간 세계의 부정성만을 보여준다는 생각에 썩 통쾌하지 않다. 많은 여자들이 이 장면에서 쾌감을 느끼려나? 문제 해결은 한 사람의 지도로 되는 게 아니라 협의와 협력, 양보와 타협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현대인같으려나...배경은 원시와 1차 세계대전이거늘.

3. 헐리우드 영화답게 권선징악의 결말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와 대결할 때 소중한 이(인간)를 잃었을 때 원더 우먼은 아레스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다. 분노는 결국 자기 파괴적이다. 파괴적 악에 분노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 악을 없애는 힘을 얻는다. 미국 지배 이념인 바이블의 훈육 논리다. 이렇게 간단한 패러다임으로 헐리우드는, 원더 우먼은 관객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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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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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빠가 뭘 물었다. 대답을 했는데 못 알아들으셨다. 귀가 잘 안들려서 데시벨을 올려야하는데 다시 말하려니 짜증이 나서 대답 대신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고 쏘아붙였다. 아빠는 "나도 젊을 때 있었어, 못 알아들었으면 열 번이라도 다시 말해줘야지 왜 짜증을 내. 부모는 자식이 뭘 몰라 물으면 열 번이라도 다시 설명해주는데 자식은 한 번만 더 물어도 짜증을 내"라고 하시면서.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알지...하는 마무리를 하셨다. 순간 아빠한테 엄청 미안했다. 다시 말하는 게 뭐가 힘든 일이라고 짜증을 냈는지 .어릴 때 뿐 아니라 불과 두 달 전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아빠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 과자, 빵 등 주전부리를 사들고 매일 병원에 오셔서 내 머릿맡에 잠깐씩 앉아있다 가셨는데...

이 소설집을 읽으니까 아빠 생각이 난다. 부제가 가족소설이다. 말 그대로 이기호 작가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썼다. <갈팡질팡하다 이럴 줄 알았다>의 서문을 보면 불안을 씨앗 삼아 글을 쓰는 청년이었는데 이제는 세 아이의 아빠이다. 작가답게 세심하고 때론 소심하다. 문득 이런 사람을 배우자로 두는 아내도 작가 못지않게 세심할 거 같다. 실제로 작가는 아내의 육아 지옥에 물리적으로 많은 도움은 못 줘도 정신적으로는 그 고통을 분담하고 땡땡이 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반성이 깔려있어서 작가의 아내는 그래도 다른 아내들보다 행복할 거 같다는 생각이.

이기호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주변인들이고 희화한다. 희화화가 자칫 타자화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데 이기호 작가의 인물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처구니없는 유머 속에 따뜻한 인간애를 전해준다. 사실 어찌보면 상황이나 처지를 180도 바꾸는 일은 현실에서는 많이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입장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현실은 희망적이기도 하고 절망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행복은 마음에 있다는 말이 나온거고.

"세 아이 모두 학원은 다니고 있지 않지만, 합기도 체육관과 동네 카페 2층에서 한 선생님이 자원봉사 형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자소학' 교실만큼은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다. 아이 친구들 역시 모두 함께하는데, 그러니까 이 동네 아이들은 낮에는 무술을 연마하고 저녁에는 '소학'을 읽는, 겉모습만큼은 무슨 나라를 구할 아이들처럼 보이기도 한다(나라를 구하기 이전에 제발 발이라도 스스로 잘 닦고 잤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246쪽

책장을 덮기 전 에필로그에 쓰여진 말인데 다시 한 번 빵 터졌다. 시선의 힘이다. 소심하지만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가진 작가의 눈으로 보는 일상혈투를 읽은 후 심장이 따뜻해진다. 

오늘 아빠는 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셨다. 지금쯤 오랜만에 만난 동생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계시겠지. 이 책을 읽으니 아빠가 어릴 때 품에 안고 잠을 재워주던 생각이 난다. 아이를 키우는 이들은 거꾸로 아이를 재우던 때가 생각날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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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몹시 고파서 여행 기분을 느껴보려고 파리가 배경인 영화를 봤다. 두 감독이 주인공인 영화인데 색감이 텁텁한 입안을 화하게 해주는 민트처럼, 안구정화를 해준다. 여주인공 피오나는 쨍한 그린 스웨터와 역시 그린 계열의 치마를 입고 빨간 배낭을 메고 파리에 입성한다. 이런 색감마저도 귀엽고 스토리도 귀엽다. 양로원에 가기 싫은 과거 무용수였던 이모나 조카한테 SOS를 보낸다. 피오나는 이모를 지켜주러 파리에 오지만 첫날부터 자신도 못 지키는 소동이 벌어진다. 노숙자 돔은 피오나가 곤경을 겪었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고, 피오나가 물속에 빠지면서 잃어버린 배낭을 건지면서 피오나의 삶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결론은 정말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러브 스토리이다.

러브 스토리는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난다는 결론은 이미 정해져있지만 그 과정을 묘사하는 방식에 따라 흥행이 갈린다. 이 영화가 러브 스토리를 전개하는 묘사 방식은 동화적이고 슬랩스틱 코미디다. 고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보면 재밌다.

오프닝에서 완전 뿜었고 영화 전개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된다. 이모와 어린 피오나는 남극과 비슷한 눈보라 속에 서 있고 이모는 피오나한테 파리로 간다고 말한다. 피오나는 이렇게 추운 곳에서 살고 있다. 성인이 된 피오나는 작은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자락이 오른쪽에서 들어오며 사무실에 앉아있는 인물들이 모두 팔을 허공으로 들고 흔든다. 이 장면을 본 순간 뭘 말하는지 몰랐다. 잠시 후 동료 한 명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면서 이들의 팔이 내려간다. 아...이런 슬랩스틱이라니. 눈보라의 세기를 팔의 움직으로 표현하다니. 너무 웃겼다. 또 하나 재밌는 장면은 피오나와 돔이 서로 각자의 집에서 자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꿈을 꾸는 장면을 한 화면에 배치했고 둘을 분명이 다른 곳에 두었지만 음악에 맞춰 서로의 꿈을 꾸면서 자그마한 춤(?)을 추는데 따로 또같이 느낌을 주는데 엄청 구엽다.

<아멜리에>서 아멜리에가 영화 분위기 전반을 지배했듯이 피오나 고든이 갖는 톡특한 이미지도 영화에서 한 몫한다. 일단 영화보고 여행 욕구는 최대한 좀 눌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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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 순수한 이타주의를 실행할 수 없다고 믿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타주의는 어떤 추진력에서 지속될 수 있는데 다르덴 형제가 <언노운 걸>에서 제시하는 건 죄책감이다. 죄책감이나 수치는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하게 하는 중요한 감정이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 수치심과 죄책감이 없는 대통령을 봤었고 일반적 감정이 없을 때, 그 파장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주는지 경험했다.

이 영화에서 평범한 여의사는 주변 환경이 열악한 병원에서 임시로 일하기로 한다.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보면 사회적 약자들이다. 불법이주노동자부터 정부보조금이 필요한 독거노인, 한부모가정의 가장 등.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고 젊은 여의사는 임시로 병원을 지킨다. 아마도 다른 가능성을 말하진 않아도 계속 있지는 않을 걸 암시한다. 하지만 한 사건이 여의사의 생각을 바꿔놓는다.

신원을 모르는 한 불법이민 소녀의 죽음이다. 병원근무시간이 끝난 후 소녀는 병원 벨을 누르지만 여의사는 진료시간이 끝났는데 찾아왔으므로 문을 열어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날, 소녀는 죽는다. 문만 열어줬다면 소녀가 죽지 않았을 거란 죄책감에 여의사는 소녀의 이름을 찾아나선다. 그러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여의사의 세계관의 변화이다.

소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소녀를 보거나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모두 죄책감에서 여의사한테 진실 조각을 말한다. 사실 이런 부분은 영화적 판타지, 혹은 다르덴 형제가 제시하는 판타지다. 현실은 죄책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도 많다. 죄책감이란 잘못을 인정해야 생기는데 잘못에 대한 기준 자체가 도덕적이길 기대하기 점점 어려운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게 현실아닌가. 영화에서 소녀의 친언니조차도 소녀의 존재를 개인적 욕망으로 부정하는 게 현실이다.

아무튼 소녀를 목격한 소년, 그리고 소녀의 죽음과 직접 관련있는 소년의 아버지가 모두 여의사에게 고해성사를 하듯이 진실을 말하는 건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였다. 여의사는 정말 객관적 태도로 사람과 행동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본인들이 어떤 판단을 결정하게 한다. 다르덴 형제의 인물이 고상한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여의사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있는 태도를 갖춘 의사로 변해간다. 왕진을 다니는 조그만 지역사회에서 의사의 일은 아픈 부위만이 아니라 환자의 살아가는 방식에도 개입할 수 밖에 없다. 걷는 게 불편한 할머니의 가방을 들어준다든지, 당뇨합병증으로 발바닥이 부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사회보장카드 충전을 위해 센터에 전화를 해준다든지...이런 삶의 태로를 학습해가는 걸 보여주는 영화여서 왠지 성장영화로 느껴진다.

박근혜 공판 라이브를 잠깐 봤다. 올림머리의 안녕이 몹시 궁금했는데;;; 큰 핀을 이용한 약식 스타일을 보니 그녀도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생각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탄핵 수 자택으로 들어갈 때조차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죄책감 혹은 수치심을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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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일기 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박술 옮김 / 읻다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
작년 독립출판마켓인 세종예술시장소소에서 출간된 줄 알게 된 책. 이 인기없는 번역서를 출판한 '읻다'청년들을 좀 소개하면 이렇다. "노동 공유를 기반으로 기획된 출판 프로젝트 "읻다"는 20-30대 출판인들이며 아직 알려지지 않는 고전 또는 재조명할 가치가 있는 텍스트를 직접 번역해 출간하고 있습니다."


'괄호 시리즈'로 책을 낼 있는데 눈이 반짝이게 할 고전들, 하지만 아무도 손 안대는 고전들. 로베르 데스노스의 <애도를 위한 애도/자유 또는 사랑>이 출판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2.

비트겐슈타인이 1차세계대전에 참전 중에 쓴 일기모음집이다. 편집상 특이한 건 왼쪽 페이지는 사적 일기고 오른쪽 페이지는 사유 일기다. 책을 펼치면 사적 일기와 사유 일기를 동시에 읽게 되는데 사유 일기를 읽는데 사적 일기가 은근히 힘이 된다.

3.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논리성으로 현상의 본질을 꿰뚫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그럼 비트겐슈타인은 이걸 몰랐나...그럴리가. 그는 현상의 본질에 접근하는 법으로 언어 논리란 수단을 택했고 그 수단의 모순과 불완전성을 통해 본질에 다가가는 방법을 취했다.

"언어는 세계와 내적 관계들을 맺고 있으며, 그러기에 언어와 이 관계들이 사실들의 논리적 가능성을 결정한다. 우리에게 유의미한 기호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구조물과 특정한 내적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기호와 관계는 지칭 대상의 논리 형식을 일의적으로 결정한다. "(15.4.25. 243쪽)

어떤 현상(이 책에서는 영상이란 단어를 사용)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문장으로 재현하면 현상의 본질에 다가간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참인 문장과 부정인 문장에 대한 가치 판단도 무의미해진다. 부정 혹은 거짓 문장이 되려면 참이란 전제가 필요한데 이 전제 자체가 참인가에 대한 끝없는 고민. 머리 아팠겠어..;; 사적 일기를 보면 전시 중이라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 하에 놓여있고, 초반에는 정신에 의지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신을 찾는 변화가 있다. 결국 인간의 나약함은 초인적 혹은 상상에 기댈 수 밖에 없게 만드나...

4.
언어 자체가 하나의 확고한 철학적 준거틀이 되는데, 깊은 회의를 느끼면서도 언어에 집착해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양가성. 비트겐슈타인은 함수와 변수만을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언어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언어는 무척 매력적이다. 모사한 문장 자체를 해부하면 거대한 심연이 펼쳐지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가 아니라 수학적 기호를 사유 수단으로 택했다면 어땠을까. 명쾌한 답을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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