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 예술사 이야기 지식전람회 21
조중걸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키치란 무엇인가?>에서 아브라함 몰르는 키치에 대하여 '인간 존재 방식의 한 유형으로 키치를 이해하는 것이 키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했다. 키치를 사전적 의미인 '저급한 싸구려 예술품','이발소그림'에서 존재 조건으로 급상승 시킨 것이다. 그런 신분상승이 있었다고 키치가 싸구려의 옷을 훌훌 벗어 던지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몰르의 키치에 대한 지적은 작품이라는 대상에만 한정되어 있는 상식적 '키치'를 재전유하는 것이다. '키치가 존재 조건'이라는 것은 '그건 키치적이야' 라고 말하는 주체 역시 일정정도 '키치'라는 조건에서 벗어 나지 못한 다는 뜻이다. 마치 '키치 근본주의'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지적처럼 앎의 시작은 그런 존재 조건에 대한 각성부터 일 지도 모른다.

"키치는 어떤 세계관에 의해 뒷받침된 미학,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어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밀란 쿤데라)

다른 이들도 많이 그런 것 같던데 나 역시 '키치'라는 말을 밀란 쿤데라의 세계적 베스트셀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아름다움>에서 처음 만났다. 이미 십 여년전 일이어서 정확히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쿤데라가 거의 한 챕터를 자신의 '키치론' 에 할애하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먼저 '키치'란 무엇인가? 내가 그동안 기억하는 가장 짧고 확실한 키치에 대한 서술은 "키치적 인간의,키치적 작품에 대한 요구' 이다. 이것은 아브라함 몰르의 인식론과 같은 지평이다. 수용자와 대상 사이에 상호관계와 그것의 외연화에 시각을 맞춘 것이다.

"키치는 하나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태도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작품으로서의 키치보다는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의 태도와 작품과 맺는 그의 심적 관계가 오히려 키치의 본질이다."

<키치,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 저자 역시 이같은 방식을 취한다. 저자는 우선 예술의 양식을 3가지로 구분한다. 쾌락과 배설 욕구에 호소하는 통속 예술, 수용자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수예술, 그리고 자기만족을 통해 환상을 창조하는 키치이다.

키치가 현 존재의 삶의 양식이라는 것은 두가지 토양을 갖는다. 하나는 '신'의 부재가 선언된 근대성에 있다. 이성을 댓가로 자연에서 소외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허공에 색칠을 해야만 했다. 키치는 진실에 대한 절망적 요구를 거짓된 답변으로 응한다.

키치의 출발은 산업혁명 이후 불어난 프티부르주아적 소비주의와 깊은 관려이 있다. 근본적으로 키치는 노동의 소외를 소비를 통해 만회하려는 자본주의적 형식에서 시작한다. 고된 노동을 한 노동자에게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것은 통속 예술이지 많은 시간과 경험을 요구하는 순수예술은 아니었다. 통속 예술은 합목적적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여 소비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잉여가 존재한다.  좀 더 교육받은 자들의 문화적 소비는 일종의 차별화를 요구한다.

"키치는 민주적이고 중간적이고 조촐한 것,즉 프티 부르주아적인 것이다. 키치는 단지 숫자만을 고려하며,절대 다수의 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민주적,공리적 예술 양식이다." " 사물에 대한 키치적 이념은 행복의 반예술이다. 키치는 위장된 예술로서 진정한 예술을 소멸시키고 그 속물근성으로 사용가치마저 전락시킨다.이러한 키치의 주요 고객은 중산층이다. "

나는 '정치미학'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사회 진보 내에서의 '키치적인 정치 미학'이 반드시 논의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소박,조촐한,자기만족적 진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센티멘털에 의한 정치 아닌가 하는 점을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잃을 것이 없으면 문제될 것 없는 진보' , ' 내 지붕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유토피아도 허용할 수 있는 진보'. 슬라보예 지젝은 그런 키치적인 '정치 미학'을 두고 '휴가 기간 중에 하는 좌파'라는 말로 비꼬았다. 쉽게 말하면 정치적 이념의 토대가 분명히 자유주의적 개량주의 지평에 서 있는데 실제로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아나키즘'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본다. 마르크스가 비판하기도 했던 '하부구조'가 빠진, '과학성'이 결여된 즐거운 '혁명' 상상이다. 나 역시 가끔 그런다. 그리고 이런 질문도 해본다.'이것은 키치적이 아닌가?" 현재로서 나의 답은 그것은 '키치적'이다. 지젝은 <혁명이 다가온다> 서문에서 예를 들었듯이 '월스트리트에서도 <자본론>을 즐겨 읽는다' 는 것은 혁명적 사상 또한 키치적으로 탈취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키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위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 여물통이 외양간에 있으면 키치가 아니지만 식당 한 구석에 박혀 있으면 키치가 된다. 월스트리트 증권맨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 변혁 사상의 핵심이 아니라 '키치적 요구' 정도 였을 것이다.

 키치는 우동 먹은 포만감에 기생한다. 곧 꺼져 버리고 마는 밀가루 국수 처럼 작품 자체와 소통하지 못하고 자신의 환상과 소통하며 비위를 맞추는 태도와 결합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키치적 감상자들에게 예술은 자기 센티멘털리즘을 위한 하나의 기회일 뿐이다....키치는 통속적인 예술에 있어서의 단순한 감상보다는 훨씬 더 증대된  반성적인 거리를 가진다.그러나 그 반성적 거리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지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자신에게로 집중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의 존재 조건을 어떡게 전복시킬 것인가가 남는다.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에서는 인상주의를 시작으로 예술사에서 키치를 전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소개한다. 그런 실천작업들 속에서 전복가능태의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상주의의 주관성의 소멸은 표현주의와 기능주의에 와서 진화한다.표현주의에서는 정신의 자발성과 이념을 추가하여 키치를 넘어서려고 한다.기능주의적 입장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이라는 목적론적인 유용성을 강조하여 키치적 너덜거림을 업앤다. 다다이즘은 키피를 적으로 규정하고 달콤한 쾌락 대신 혐오를 선택했다. 미적 혐오를 통해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역설적인 방식이다. 아방가르드 미학을 옹호했던 수잔 손택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선보였던 '캠프'라는 개념은 이런 '혐오의 미학'이 대중화 또는 유희화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저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키치적 해체를 위한 실천들을 엿본다.  모더니즘이 가진 절대성과 내재적 통일성을 그리스 플라톤 시대로의 회귀로 본다.그리고 메타 픽션이라는 형태의 자기부정을 통해 가공의 세계를 만들고 '창조와 삭제'의 놀이를 통해 키치를 극보하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나보코프,마르케스, 바셀미, 존 파울즈 등의 작품들을 통해 환각과 유희를 통한 자기구원에 열중인 포스트모던 소설들을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것이 '키치'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 실험을 극으로 밀고 가서 삭제하거나 놀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지극히 키치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존재 양식으로 피할 수 없는 키치에 대한 유희적 탈출방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키치를 해체할 수 있는 방법을 고급 예술의 창조성 안에서 찾고 있는 인상이 강하다. 처음부터 '예술천하삼분지계' 를 해버린 상황에서 키치를 극복하는 방식이 통속 예술에서 찾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키치에 대한 자기 인식과 그를 해체하고자 하는 현대 예술의 미학에 대한 거리감을 좁힐 필요가 있다. 저자가 '시대착오적'인 모든 예술은 '키치'라고 저자가 말한 이유는 과거의 미술이 결코 수준이 낮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들의 달콤,상쾌한 접근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요한다는 것으로 읽혀야 한다. 즉 현대 예술은 난해하다고 고개를 돌리고 허구한 날 고흐나 르느와르가 주는 '자기감동'에 묶여 있으면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는 고흐나 고갱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많은 사고와 감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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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5-02 23:00   좋아요 0 | URL
한국 문화로 치자면... 궁중화가에 상대되는 민화가 키치고,
정악에 상대되던 민속극, 판소리 등이 키치였고,
광대들에 의해 전승되던 온갖 놀음들이 키치문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우리집 거실에도 제가 그린 키치가 한편 있습니다. ㅎㅎㅎ

드팀전 2008-05-04 21:55   좋아요 0 | URL
그런 개념은 아닌 듯 합니다.키치라는 문화적 현상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는 미적 개념이기 때문에 전자본주의적 단계에 무조건적으로 적용해서는 곤란합니다.키치는 다분히 근대적 개념으로 접근해야될 듯 합니다.
글샘님이 쓰신 개념은 귀족 예술/민중 예술이라는 역사적 개념에 가까와 보이는군요.오히려 그런 개념을 적용하자면 그것은 키치가 아니라 대중예술의 성격과 유사해 보입니다.

비로그인 2008-05-02 23:03   좋아요 0 | URL
예술이 뭔데
詩가 뭔데
지가 무슨 예술이라고

어느 시인이 자신의 시에 그러셨다 하시니
여기다 한 표 던집니다

드팀전 2008-05-04 15:32   좋아요 0 | URL
예술의 자기부정 정신이 키치를 드러내고 탈출하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인상주의나 표현주의 그리고 다다같은 것들은 역사적으로 한 시대의 주류적 예술이 담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 시대에 필요한 '부정의 정신'은 무엇일까 라는 겁니다.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삶,예술,가치들의 문법들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것이겠지요.

비로그인 2008-05-05 09:04   좋아요 0 | URL
너머 어려우믄 무서와서
도망가고 자퍼져요
어려우믄 무서와요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Art Travel 1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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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그 때 그 나라는 '소련'이라고 불리웠다. 그 나라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바로 그 때다.전 세계를 붉은 물결로 만들 야욕도,지구를 몇 번 파괴할 핵무기의 공포도 그 때보다 강하지 않았다.

영화 <백야>에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만남.

왜 나에게 이러한 야생마들이 주어졌을까?
끝까지 못살았고, 나는 마지막까지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나는 말들을 노래하리라. 못 다한 노래를 부르리라.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야생마>

 지축을 찢으며 허공을 나는 바리시니코프라는 '시각'이미지와 갈라진 땅을 타고 흐르는 '비소츠키'의 '청각 이미지'가 텅빈 무대 위에서 서로 뒤엉켰다. 죽음을 앞둔 수컷 사마귀의 사랑처럼 두 가지 이미지는 투쟁하고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물론 이들에 대해 알게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으니까....하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는 어린 마음에 빗금을 그었다.

'아...저런 것.내가 아는 그 부드러운 선율들과 흥쾌한 분위기와 다른...그것이.... 있었구나.'

 나이가 들면서 음풍농월하다 보면 '러시아 예술'을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은 서울역에 내리면 대우빌딩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그런데 '러시아 미술'은 이상하게 낯설다. 이 책의 저자 이주헌도' 러시아 음악과 문학이 비교적 체계적인 방식으로 한국에 소개된것에 비해 미술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한다. 물론 러시아 전문가들의 입장에서는 음악도 문학도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이겠지만 장르적으로 보면 미술이 더 소외받은 듯 한 것 사실이다.

나만 하더라도 러시아 작가와 음악가에 대해 적어 보라면 그래도 몇 명 적을 수 있을 듯 했다. 그런데 미술가라고 하면 두 세명 안팎이었다.(이 책을 봐도 몇 명 더 기입하긴 쉽진않다.러시아의 '..스키' "...초프' 들은 한 두번 들어서 이름 적어내기 쉽지 않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은 하얀 눈위에서 더 선명한 핏자국처럼 러시아 미술의 큰 족적들을 따라간다. 대중적인 글쓰기로 인기가 있는 이주헌은 러시아라는 비행기의 쌍발 엔진인 샹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두 곳 미술관을 중심으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여행을 시작한다. 러시아가 혁명 이후 미술작품들을 국유화하면서 이 두 곳에 집중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일정에 제한을 받는 여행객들에게는 역사의 상흔이 오히려 도움이된 아이러니이다.

이 책에서는 서유럽 미술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는 러시아 미술의 특징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여기는 러시아가 역사와 종교면에서 서유럽의 전통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비잔틴에 영향을 받은 러시아 정교, 벨에포크 시대에도 강력하게 존재했던 차르 통치,그리고 비참함을 견뎌야 했던 러시아 민중의 삶,나폴레옹과의 애국전쟁에서의 승리....러시아 예술은 서유럽의 문화에의 편입과 슬라브의 독자성 사이에서 풍부한 문화적 경험을 갖게된다.

이 책에서는 러시아의 이콘화,장르화,종교화,풍경화,초상화 등이 소개된다. 대제목을 장르별로 구분하고 그 안에서 작가별로 작품을 소개한다.

나의 눈길을 오래 잡아 두었던 작품들은 일랴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자포로지예 카자흐>콘스탄틴 플라비츠키의 <타라카노바의 황녀>,알렉산드르 베네치아노프의 <봄의 들판>,미하일 브루벨의 <앉아있는 악마>니콜라이 게의 <무엇이 진리인가?>,바실리 페로프의 <수도원의 식당> 등이었다.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에서는 러시아 미술만 다루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미술관을 찾아가는 형식을 띠고 있기때문에 러시아가 콜렉션한 서유럽의 작품들도 소개가 되고 있다. 대략 책의 3분의 1정도는 거기에 할애하고 있다. 기획의도가 있기는 했겠지만 차라리 러시아 미술로만 한정시키는 것이 낫지 않았나 싶다. 물론 덕분에 루벤스의 <로마의 자비>나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같은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지만 날이다.

러시아 작품들을 만나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미술과 삶이 서로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를 응시하며 또는 서로를 고발하며서도 따뜻하게 서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서점에서 이 책을 고르면서 이진숙의 <러시아 미술사>와 무게질을 했다. 최근에 머리를 많이 움직이게 하는 책을 보다보니 쉬어가는 요량으로 고르겠다는 취지였기에 부피가 좀 더 가벼운 책을 골랐다. 그런데 결국 <러시아 미술사>도 구매하고 말았다. 뒤에  산 책은 대충 훑어보았는데 일단 중복되는 내용들이 꽤나 있다. 한 쪽에 빠진 그림이 다른 한 쪽에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일랴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러시아 미술사>는 장르를 구분하되 작가와 연계하는 방식으로 즉 사조와 작가를 최대한 가깝게 연결하는 방식으로 서술해 놓은 듯 하다. 그리고 20세기 러시아 미술에 대해서도 조금 더 할애한다. 대신 이주헌은 러시아에가서 만날 수 있는 서유럽작품들을 더 소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러시아 미술에 푹빠졌다.그와 더불어 내가 가고 싶은 도시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수직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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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3-21 21:30   좋아요 0 | URL
러시아 애호가가 한분 느셨네요.^^

드팀전 2008-03-21 23:52   좋아요 0 | URL
로쟈님 애호가(?)이기도 해요

비로그인 2008-11-01 11:26   좋아요 0 | URL
저는 칸딘스키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로 인해 러시아 예술을 평생 사랑할 것 같습니다. 생각난김에 두 인물의 기록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봐야겠네요~

드팀전 2008-11-01 14:58   좋아요 0 | URL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예전에 즐겨(?)봤지요.
 
반 고흐 효과 - 무명 화가에서 문화 아이콘으로
나탈리 에니크 지음, 이세진 옮김 / 아트북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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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겨울 바람은 차가왔다.귀없는 남자의 그림을 보기 위해 귀 달린 남녀노소는 양 손으로 귀를 가려야만 했다.친절한 매표소 직원의 말을 되뇌이며 시계를 줄 곧 봐야 했다.

 "지금 티켓팅하시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미술관 입구에 다가가는 느린 움직임이라도 없었다면 언덕 위의 1시간은 고문이었을 것이다.고흐를 만나는 길은 고행의 길이었다.사행천의 물줄기처럼 S자로 이어진 도상에서 이런 키치적인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고흐를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그리고 왜 사람들은 고흐에 열광하는가?"

전시회장은 거의 시장이었다.한 걸음 물러서서 볼 수 밖에 없었다.다행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온 키 작은 아이들이 많아서 뒷줄의 불이익은 그다지 없었다.나는 고흐의 몇 몇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그 중에는 고흐의 자화상도 있었다.잠시 동안 그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었다.(이게 나름 뭐 좀 달라 보인다고 했는데..퍽이나 키치적인 발상이다.이 책에서는 작품을 의인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당신을 외면한 다수의 사람과 지금 당신에게 열광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불쌍한 고흐씨"

나탈리 에니히의 <반 고흐 효과>를 읽고 나는 내가 상당히 키치적인 방식으로-마치 나는 조금 더 세련된 듯 했지만 결국엔 별반 다를 것 없는-고흐 전시회를 보고 왔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또한 긴 줄 위에서 서있으며 했던 질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었다.내가 했던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질문,'고흐의 사회적 살해'에 대해서는 유명한 고흐 평론에서 아르토가 이미 던졌던 문제였을 뿐이다.또한 이미 한 세기 이상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공론으로 포장된 것이었다.고흐 전시회가 내게 준 것은 사실 고흐의 그림 보다 그런 '질문'이었고 이 책을 만날 수 있게 해준 행운이었다.만약 내가 이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질문들에 대해 며칠 끙끙거리다 잊었을 것이다.

"샤갈전의 열기와 고흐전의 광분을 '고전 작품의 위대함',또는 '문화 불모지의 한계,대중들의 패거리 정신' 이런 이항적이고 편리한 구분 말고 설명할 길은 없을까?" 하면서 말이다.

나탈리 에니히의 <반고흐 효과>는 고흐의 작품을 미학적으로 설명한다거나 고흐의 미술사적 위치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이것은 아주 잘 씌여진 예술 사회학책이다.미시적이고 분석적이며 또한 논리적이다

이 책이 '고흐 현상'에 대해 던지는 애초의 질문은 길 위에서 했던 내가 했던 질문과 유사하다.저자는 고흐의 작품과 고흐라는 인간이 두가지 차원에서 어떻게 신화의 이름을 얻는지를 하나씩 설명해 나간다.몇 가지 고흐를 둘러싼 상식적인 생각들을 에니히는 '신화의 모티프'라는 개념을 들어 이야기한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몰이해의 모티프'이다.

누구나 고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모티프가 바로 그것이다.그는 동시대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그의 작품은 물론이고 인간 고흐 역시 동시대의 완전한 소외물이었다.즉 '몰이해'되었다는 것.고흐를 위한 최고의 레퀴엠이라고 할 만한 돈 맥클린의 <빈센트>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나는 이제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 알 것 같아요...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지요.어떻게 듣는지도 몰랐지요.하지만 이제는 귀를 기울일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이 곡을 참 좋아하다.하지만 이 곡이야말로 고흐에 대해 축성된 가장 전형적인 신화의 복음성가이다.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고흐에 대한  몰이해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다.물론 그가 동시대에 궁핍했고 그의 작품은 문짝으로 쓰일정도로 천대받았지만 그것은 고흐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고흐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 기간은 불과 10년이다.그 때나 지금이나 젊은 작가에게 당대 대중이 시선을 두는 일은 극히 드물다.만약 고흐가 60-70살까지 살았다면 고흐의 작품은 당대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다.물론 대신 지금처럼 순례객을 몰고 다니는 예술의 성인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또한 지금처럼 한 작품이 천문학적 액수에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최근에 경매에 오른 작품이 800억원이라나.....

고흐 당대와 사후 오래지나지 않아 평단에서는 고흐 작품에 관심을 갖은 전문가층들이 있었다.물론 그들에게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고흐의 독창성이 그들을 매료시켰는데 그것은 전통을 거부하는 모더니스트 비평가와 반아카데미 작가의 밀월 같은 것이다.(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떠올려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들라쿠르와와 쿠르베의 '사실주의'부터 시작된 전통/현대성의 흐름에서 고흐는 '앙뎅팡당'계열로 포함된다.)

'몰이해'의 모티브와 연동되면서도 중요한 개념이 '죄의식의 모티프'이다.저작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예술의 공공선에 이바지하기 위해 독보적인 한 인간이 치른 대가는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빚에 해당한다.그 빚은 작품의 위대함은 물론 극단적인 희생의 성격 때문에 더욱 과중하게 여겨진다".이것은 시간을 거쳐서 대속되어야 하는 인류의 죄의식 같은 것이다.돈 맥클린의 <빈센트>의 주를 이루고 있는 정서.그리고 반 고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가련함 같은 것들이 대속을 위한 토대가 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이 죄의식의 형태는 논리적으로 집단적일 수 없지만 사실상 통상적 생각이라는 집단성을 띠게 된다.이 통상적 생각 혹은 상식이 특별히 고착된 지점에 반 고흐를 놓을 수 있으리라"

 물론 이런 대속에는 증여라는 과정이 필수적이다.고흐의 증여와 인류의 대속 사이에는 시간차이가 발생한다.그리고 이 대속은 만족될 수 없다.

또한 작가는 인간 고흐를 구성하는 과정에 '종교적 모티프'의 이용을 지적한다.그는 고흐 사후 전기작가와 평론가들이 13세기 성인전의 모티프와 유사한 방식으로 고흐의 삶을 목적론적으로 맞추어나가기 시작한다고 말한다.스스로 생각하는 고흐의 이미지상과 이런 단어들 사이의 유사성을 따져본다면 저자의 지적에 수긍할 수 밖에 없다. "도덕적 순결함.비범한 인물,소명의식,고립,반순응성,금욕,실제적 삶의 부적응,자기희생,순교" ...그리스도적인 성인과 고흐의 이미지는 원숭이와 인간의 유전자만큼이나 유사하다.

"소명과 금욕의 성화자라는 모티프와 극단적인 죽음의 순교자라는 모티프에 반고흐의 전설적인 생애에 투사된 그리스도의 모습이 덧붙여진다."

이것은 예술적 탁월성이 종교적 형태의 위대함으로 폭넓게 유도되는 방식을 보여준다.또한 고흐 효과라는 범주가 예술의 영역에서 윤리와 종교의 영역으로 전도되는 과정을 예시하고 있기도 하다.저자는 반 고흐가 현대 예술사에서 위대한 순교자의 존재를 최초로 보여준다라고 말한다.고흐의 사례는 이제 소급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적용된다.그래서 '고흐 이전과 고흐 이후'라는 말도 가능한 것이다.예를 들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드라마에서 흔히 써먹는- 예술가의 이미지.가난하고 힘들지만 맑은 영혼과 자기 완결성의 소명을 띤 이런 예술가들이 실제 사회 영역에서 자기 자리를 얻을 수 터전이 마련된다.

이 책은 예술 사회학 책 답게 여러가지 영역을 넘나든다.예를 들어 고흐의 광기와 작품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심리학과 미학사이를 오고 간다.고흐의 광기를 바라보는 시선,작품과의 연관성들이 시간을 거치면서 어떻게 구성되어 지는 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아마 최근의 분위기는 정신의학적으로는 고흐가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니다..왔다 갔다 했다...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왜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지를 이 책은 또 설명한다.고흐가 완전 미쳐버린다면 고흐의 그림은 그저 미치광이의 그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그렇게 되면 그림의 후광은 없다.결국 고흐의 신화는 정신적 질환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을 극복하여 인류 정신의 완성이라는 영광어린 스토리로 마감되어야만 한다.저자는 이 과정을 이렇게 말한다.

"광기가설로 그를 공통의 인류 밖으로 추방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희생 가설로 그를 영웅시하며 인류공동체 안에 다시 편입시켰던 것이다...거의 독보성은 정상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탈인간화였다.그러나 그의 광기는 예술을 위해 치른 대가였으므로 재인간화가 가능했다." 

이 책은 이 외에도 반 고흐를 둘러싸고 사후 지금까지 발생했던 현상들을 종합한다.그리고 '일탈,혁신,화해,순례'라는 큰 도구를 가지고 그가 어떻게 전설적인 반 고흐가 되는지를 그려내고 있다.하지만 이 책이 고흐를 작품을 깍아내리거나 그의 독창성을 폄하하는 것을 목적으로 씌여 지진 않았다.저자는 고흐의 예술적 독창성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을 무턱대고 매도하지는 않는다.프랑스같은 곳에서는 고흐의 마을로 찾아가는 순례여행도 있다고 하니 사실 '군중성'이라고 더 매도할 수도 잇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반 고흐 효과>를  읽고 나서 오히려 고흐가 더 사랑스럽다.또한 '고흐를 죽인 사람과 길게 늘어선 대중 사이의 괴리감' 역시 많이 해소되었다.고흐에 대한 맹목적 애정이나 대중에 대한 맹목적 부정은 그런 괴리감을 더욱 키울뿐이다.또한 대중의 잘못이 아닌 것을 대중에게 전가하는 것 역시 같은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반 고흐 효과>는 좋은 책이다.분석의 흐름 역시 훌륭하며 논리적이다.문장이 이해가지 않는 어려운 대목들이 중간 중간 많기는 하다.원문자체가 그다지 쉽지 않았다고 하니 번역자만을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중간 중간 글을 놓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은 2% 아쉬움으로 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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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잡아라
마크 카츠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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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처음 전축이 생겼던 날이 기억난다.방 한 면을 가득채울 듯 무척 거대했다.독수리표인지 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데시벨을 나타내는 눈금이 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왔다 갔다 했다.작고 노란 램프에서 불이 들어오면 마치 사람의 눈과 눈썹같아 보였다.그 전축이 어떤 구성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아마 요즘 나오는 컴퍼넌트 정도였을 것이다.당시에 CD는 없었으니까 LP플레이어가 달려있었겠지....그 전축과 관련해서 가장 인상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전축이 우리집 가구가 된 며칠 지난 뒤였다. 아버지가 무언가 꼼지락 꼼지락 거리시더니 마이크를 턱하고 잡으시고 노래를 한곡했다.어떤 곡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맘때 아버지의 18번이 <꽃집의 아가씨> (제목 맞나 모르겠다.)였으니 그 곡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노래를 마치고 잔득 기대감을 심어주고 몇 가자 버튼을 조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무반주로 듣는 '꽃집의 아가씨'

"꽃집에 아가씨는 예뻐요,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분명 이후에 나와 내 동생도 노래를 하고 녹음했을 텐데 그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처음 전축을 통해 흘러나왔던 아버지의 노래와 신기한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준다고 아이들보다 더 들떠 있던 아버지의 모습만 생각난다.

녹음은 통상적으로 '기록'으로 인식되고 받아들여진다.목소리를 기록하고 자연의 음향을 기록한다.녹음은 결국 현실의 소리를 담아서 다시 재생하는 과정을 뜻한다.저자는 이것을 '녹음의 리얼리즘 담론'이라고 말한다.즉 '녹음된 소리란 실제 소리를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다 '라는 지배적인 관념이다.마크 카츠는 10년을 준비한 이 책에서 이 개념이 갖고 있는 다른 측면을 건드린다.바로 녹음된 소리는 녹음이라는 기술을 통해서 조정된 소리라는 것이다.그는 '포노그래프 효과'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녹음의 영향이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이야기하고 있다.다른 말로 하면 녹음이 음악가와 음악듣는 행위,음악 수용자들,그리고 음악 자체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밝히는 것이다.

마크 카츠는 1장에서 녹음과 녹음된 음악의 일관된 특징에 대해 언급한다.2장부터 등장하는 기술변화에 따른 녹음방식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음악환경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기초가 되는 특성들이다.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녹음과 녹음된 음악 속에 사는 현재의 음악팬들이라면 내가 듣는 음악이 어떤 인문학적인 의미를 갖는지 되짚어봄 직하다.

녹음의 유형성..이동성...가시성과 비가시성..반복성...시간 제한...녹음 장비의 수용성...조작성 등이 그 특징이다.짧게 특징만 요약하니 영 재미가 없다.하지만 책에 등장하는 개별 예들을 다 들다가는 오늘 퇴근하기 힘들다.서비스 차원에서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먼저 '조작성' 은 녹음이라는 것이 등장한 후 음악의 접합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접합은 조작의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다.글렌 굴드의 예를 들면 아주 쉽다.글렌 굴드는 녹음에 적극적이었고 녹음기술의 미학적 가치에 대해 실험적인 태도를 취했다.그는 이런 식이다.그가 바흐의 평균율을 녹음한다고 치자. 프렐루드 중 하나를 아주 빠르게 녹음해본다.그리고 다음은 훨씬 느리게 연주한다.이런 식으로 여러가지 테이크를 만든다.그리고 프로듀서와 논의한다. '어떤게 나아?'  이런식으로 곡을 조각 맞추듯 모은다.그가 녹음한 테이크들을 그와 다른 방식으로 모으면 글렌굴드의 또 다른 글렌굴드를 만날 수도 있다.(물론 그의 무덤을 파고 허락을 받아야겠지만.)...조금더 알려진 건 아마 냇 킹 콜과 나탈리 톨의 <언포게터블> 듀엣일 것이다.죽은 아버지의 트랙과 살아 있는 딸의 트랙을 접합한다.라이브에서 천국에 있는 아버지를 불러오지 못하는 한 불가능하지만 녹음의 접합성은 이를 가능케 한다.

녹음의 특성중 '가시성과 비가시성'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리처드 레퍼트의 <소리의 광경>을 인용해보자. "음악소리는 추상적이고 만질수 없으며 덧없기 때문에 즉 듣는 순간 사라지기때문에 음악이 만들어지는 광경을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착 펄만은 '연주를 할 때 청중은 반 만들을뿐 나머지 반은 본다.' 라고 했다..음악이 듣는 것만 있는 것 같지만 시각적인 원체험이 음악에서 무척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특히 음악의 시각적 영향은 템포와 휴지부에 대한 조이기로 녹음에 반영된다.즉 녹음은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라이브처럼 긴 휴지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라이브에서는 잠시 '마'가 뜨는 것도 분위기에 어우러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극적 효과를 줄수 있다.그러나 녹음된 상태의 음악에서 아무런 소리없이 음악이 3-4초가 흘러가면 청취자들은 난감해한다.

녹음은 음악의 보편화를 이루어내었다.음악이 인종,계급,시간,그리고 공간을 넘어갈 수 있게 만든 것이 녹음의 공로이다.(물론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최소한 기술의 발전이 이러한 보편성을 담보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녹음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베토벤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물론 라이브와 녹음이 다른 음악이긴 하지만.) 경상남도 산청 두메 산골에서 어떻게 마일즈 데이비스를 들을 수 있었겠는가?

녹음기술이 음악을 규정한 가장 큰 예가 디스크의 시간에 따라 재즈음악이 녹음된 시기이다.초기 78회전짜리 레코드에는 3분 가량 녹음이 가능했다.현재 디스크의 포맷이 커졌음에도 대중가요가3-5분 선에서 마무리되는 것도 이때부터 시작된 관습으로 본다.초기 재즈 연주자들은 라이브연주에서의 긴 즉흥연주를 레코드에 맞추기 위해 녹음할 때는 대폭줄였다.빅스 바이더는 마치 까라마조프 형재들을 단편으로 압축하라는 주문같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바이올린 비브라토의 변화 역시 녹음과 관련이 깊어보인다.비브라토는 연주자들의 특성이자 연주의 실수를 감추는 역할을 했다.1920년대 이후 신비브라토는 녹음의 특성에 대한 연주자들의 적극적 대응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녹음 장비의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불완전한 조음의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연주자의 몸짓등 특성을 각인하기 위해 비브라토는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이후에 시대적 기술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레코드를 '원료' 로- 그라모폰 무지크,텐테이블리즘,DJ배틀,샘플링 등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단순한 소리를 기록하는 매체가 어떻게 기술발전에 따라 재맥락화되어 가는지 흥미진진하다.부록으로 보태지는 CD에는 해당 녹음들의 기록을 담아서 이해를 돕고 있다.요하힘과 하이페츠의 비브라토가 어떻게 변해가는지,그라모폰무지크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재활용되는지저항적인 포크음악이 어떻게 새플링을 통해 재맥락화되는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MP3와 지적재산권 문제는 한동안 논쟁이 많았던 주제이고 여전히 쟁점이 되는 부분이어서 현재감을 가지고 읽어볼 수 있다.몇 년 전에 나온 책이어서 그 사이의 변화를 조금 못쫓아가는 점은 있지만 말이다.요즘 추세는 음반회사에서 음악파일을 판매하고 CD가진 유형성과 정보,소유가치 등 까지 화일로 제공하고 있다.

저자는 결코 기술결정론자가 아니라고 말한다.중요한 것은 기술의 변화와 인간이 맺는 상화관계에 있다고 결론 맺는다.마크 카츠가 말하는 세가지 결론은 이렇다.

"녹음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라이브 음악과 녹음 음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이용자가 녹음의 가치와 파급효과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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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목소리 2 - 여성 성악가편
유형종 지음 / 시공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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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모섹슈얼이다.이 무슨 충격적인 커밍 아웃이란 말인가? 드디어 드팀전도 청소년기부터 숨겨왔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인가? 그렇다 이 자리는 솔직히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리다.(기자들 다 불러모아..)나는 음악적으로 분명히 호모섹슈얼이다.내 CD 장을 뒤지고 학창 시절 듣던 LP음반을 찾아봐도 여자가수 이름 찾기 힘들다.아이들이 마돈나,신디 로퍼에 열광할 때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얼굴 예쁜 올리비아 뉴튼 존도 콧방귀를 꼇다.하물며 김완선이니 하수빈이니 하는 댄스하는 인형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나의 음악적 정체성은 분명 '남성애호증'이다.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그냥 예전 부터 여자가수보다는 남자가수들의 다이나믹함,호소력들이 마음에 들었다.특히 학창시절 나의 고향인 '락'계는 '마초'들의 천국이었다.머리는 산발을 하고 온몸에 그림도 그리고 무대 위에선 괴성과 폭력이 난무했다.한마디로 그 세계에서는 '기집애'같은 가수는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내 고향이 음악시 락구 여서 그랬는지 그 이후 꽤 어른이 될 때까지 여자 가수들에게 그다지 열광해본 적이 없었다.물론 지금이야 예전처럼 나의 성 정체성이 편벽된 것은 아니다.그러나 결론만 성급히 말하자면  나는 여자 가수들보다 남자 가수들의 목소리를 훨씬 좋아한다.

여자 가수들에게 그다지 큰 애정을 갖고 있지 않던 내게도 정말 혹하게 하는 가수가 몇 명은 있다.'내 마음대로 뽑은 3명의 디바'라고나 할까? '빌리 홀리데이-메르세데스 소사-마리아 칼라스' 이렇게 세 여인이다. 음악 외적으로 이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굴곡 심한 인생이 비슷할 것이다.홀리데이는 창녀 출신에 흑백차별이 심한 시대의 여성흑인이었다.칼라스는 미운 오리새끼에서 화려한 성공,세기의 스캔들과 비참한 몰락,소사는 정치적 이유로 오랜 시간 외국 망명객의 신세였다.음악적으로는 다른 장르에 있었으면서도 공통점이 있다.이들의 목소리는 예쁘지 않다는 것이다.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는 엘라피츠제랄드의 날아갈 듯 한 스캣에 비하면 막걸리통 흔드는 소리다.마리아 칼라스는 가끔 듣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답답한 느낌을 준다.대신 이들의 강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음악적 호소력'이다.자신의 곡을 부른 가수들보다 훨씬 더 곡의 느낌을 살려주는 메르세데스 소사.Gracias a la vida를 부르는 그녀의 음성은 원곡자인 비올레타 파라보다 깊이 숙성된 맛을 준다.그녀가 불렀던 유팡키의 노래곡집들도  숲에 들어가 초록을 부풀리고온 바람처럼 풍요롭다.이 세명의 가수들 중에서 음반이라는 매체적 제약으로 인해 가장 손해보는 사람은 사실 마리아 칼라스이다.그녀가 종사했던 장르가 오페라이다 보니 그녀를 무대에서 분리해서는 가치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물론 홀리데이나 소사 같은 경우도 무대 위의 매력이 대단했을 것이다.손바닥만한 음반은 가늠키 어려운 라이브의 가치가 그것이다.이는 굳이 위의 가수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에 길게 논하지 않겠다.

<불멸의 목소리2>는 아멜리타 갈리 쿠르치로부터 프레데리카 폰 슈타데까지 20세기 활약했던 여성 성악 25명을 다루고 있다.마리아 칼라스는 이중 활약시기로는 중간쯤에 해당한다.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현역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은 가급적 배제했기 때문에 최근 가수들의 행보를 만날 수는 없다.그나마 각 장의 끝부분에 안나 네트레브코,마리아 굴레기나,체칠리아 바르톨리 등을 언급하고 이 있는 것은 다행이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마리아 칼라스의 음색이 언제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사실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다.시원하고 매끄럽게 뽑아주는 가수들의 소리를 듣다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조안 서덜랜드의 리릭 콜로라투라를 듣다보면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선다.(그녀의 딕션은 뭉게지지만..) 젊은 시절 레나타 스코트의 <라트라비아타>음반을 듣다보면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시원하게 노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리아 칼라스보다 어떨 때는 훨씬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몽세라 카바예는 어떤가? 그녀의 우람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메차 보체는 황홀하다.정말 작은 새와 같은 리자 델라 카사,루치아노 폽등의 가벼운 노래를 듣다보면 마리아 칼라스의 뻑뻑함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를 컴필레이션 음반으로 만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그녀의 진가를 알려면 음반 하나를 통째로 들어봐야 한다.실연에서는 엄청 났을 카리스마를 직접 볼 수 없는 상황이 아쉬울 뿐이나 음반 전체를 듣다보면 그녀가 각 캐릭터를 얼마나 잘 소화해내고 있는 지 알 수 있다.

마리아 칼라스말고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단연 몽세라 카바예이다.뚱뚱한 오페라 가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쓰리 테너 중 한 사람인 호세 카레라스와 동향이다.카바예가 끌어주지 않았다면 호세 카레라스가 세계적인 무대에서 이름을 높이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물론 그의 실력이라면 어떻게든 눈에 들었겠지만 말이다.) 몽세라 카바예의 음반 중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아이다>음반은 개인적으로도 최고의 아이다 음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리카르도 무티의 음반이 나오기 전에 최고의 음반이었던 카라얀반과 비교하면 흥미롭다.카라얀-레나타 테발디-카를로스 베르곤치-줄리에타 시묘나토-코닐 맥닐/무티-몽세라 카바예-플라시도 도밍고-피오렌차 코소토-피에로 카푸칠리. 진짜 오페라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은 총동원된 캐스팅이다.마치 매직 존슨이 이끄는 80년대 NBA 올스타팀과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90년대 NBA 올스타팀을 보는 듯 하다.개인적으로는 몽세라 카바예-피오렌차 코소토 라인업이 훨씬 예리하다고 생각한다.(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 같다.)

여성 성악가들을 살펴보다가 요즘 오페라계가 '대형가수'들은 사라지고 '비디오형 가수'들의 전성시대라는 류의 기사가 문득 떠올랐다.아무래도 DVD라는 매체가 확산되다보니 산업변동에 따른 극장계의 변화가 아닌가 싶다.대형 가수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쉽지만 비디오형 가수들이 등장하는 것에 그닥 큰 불만은 없다.오페라 팬들도 뚱뚱하고 나이든 <라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보다는 안젤라 게오르규같은 예쁜 비올레타를 볼 권리(?)가 있으니까 말이다.예전 만큼 다양한 목소리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디오형 가수라는 오페라가수들이 실력이 유난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아직 보수적인 클래식계가 예쁘다고 다 봐줄 정도로 마음이 넓지는 않아보인다.전방위적인 대중문화의 공세 속에서 오페라를 뒤적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생각해본다.그리고 좀 예쁘고 잘생인 오페라가수들이 나와서 인기를 얻고 오페라에 대한 관심도 좀 높여도 되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본다. 

 여자 오페라 가수중 예쁜 3인방 뽑으면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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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1-28 19:02   좋아요 0 | URL
예술적 불륜의 짜릿한 일탈이군요. ㅋㅋ
님의 음악 리뷰를 읽노라면 음악의 세계에 빠지는 일도 아름다운 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일일 듯 합니다.^^

kleinsusun 2007-01-28 19:55   좋아요 0 | URL
음하하...예전에 <카르멘> 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아무리 노래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숨쉴 때 마다 드레스가 터질 것 같은 뚱뚱한 여자가 카르멘을 연기하는 건 내용에 넘 안 어울리지 않나... ㅋㅋ

드팀전 2007-01-28 23:22   좋아요 0 | URL
글샘님>음악이 없었다면 세상이 얼마나 팍팍했을까요...대중가요든 오페라든..
수선님>아무래도 그런 경우 극적 몰입이 떨어지긴 하겠지요.^^ 그래서 어떨때는 음반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시각은 청각에 비해 너무 직접적이어서 상상할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지 않으니까요.

2007-01-29 0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