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의 계절이 오니,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속절없이 가슴을 후려친다. 희고 동그란 얼굴의 두 소녀가 흐드러진 코스모스 속에 서 있는 사진이다. 하늘이 붉은 빛인 걸 보니 해가 저물고 있다. 손을 꼭 잡고 나란히 서서 정면을 응시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하다못해 수줍은 미소조차도 없이 둘은 그렇게 서 있다. 인생에서 가장 혹독했던 시절을 함께했던 동갑내기 친구와. 그러나 지금은 생사도 알지 못한다.
어느 날 저녁 불쑥 사진기를 들고 와서 밖으로 나가자고 재촉을 하던 친구를 따라서 간 곳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등하교 길. 카메라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마냥 곧았다. 고단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던 열다섯의 가을, 집과 가족을 멀리 두고 있는 소녀들에게 계절의 정취 따위가 있을 턱이 없다. 병든 아버지 이야기, 철없는 남동생 이야기 혹은 짝사랑 하던 동네의 오빠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입을 꾹 다문 친구를 따라서 잡초가 우거진 황량한 공터를 향해서 서 보라고 손짓을 하고. 그때는 몰랐는데 우리들이 나눈 대화는 참말과 거짓말이 절반씩 섞인 것이었다. 고달픈 현실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과장과 포장은 필수였다.
멋진 친구였다. 세상의 온갖 사랑이 그녀의 몫인 듯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한밤중에 찾아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집에서 보낸 편지를 읽다가 잠이 들고, 배고플 때를 알아서 먹을 것을 챙겨주고, 순진하게 살면 손해라는 둥의 충고도 거침없이 건넸다. 삶에 대한 그녀의 자세는 치열하고도 전투적이었으며 약자를 배려하는 섬세함까지 갖추었다. 그녀는 나의 요령 없음을, 나약함을 수도 없이 지적하고 나무랬다. 세상을 그렇게 살면 손해라고. 자신의 상처는 보이지 않게 감춰놓고 나를 살피고 돌보기에 바빴다는 것을 그때는 정말 몰랐다. 내 감정을 추스르기도 벅차서 허덕이던 나와는 달리 태엽 감긴 인형처럼 웃고 떠들고 노는 친구가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손을 놓아버린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기이할 정도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에 각인된 이름 세 글자와 동그랗고 하얗던 얼굴은 아직도 선명한데 어째서 마지막 날들에 대해서는 백지상태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