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의 귀환 - 출판문화의 re-르네상스를 위한 성찰
이용준.김원제.정세일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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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는 서로 마주보고 현존하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 행동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인간은 이제 정보를 또한 현장에 부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남길 수 있게 된다. 그 이래로 사회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면서도 동시에 고독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이 가능케 되었다.”(볼츠)– 63쪽
아이슬란드는 17쪽 이상으로 구성된 간행물을 도서로 인정하고 있고, 덴마크는 60쪽 이상, 그리고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및 모나코는 100쪽 이상의 간행물을 도서로 인정하고 있다. (중략) (유네스코에 따르면) 도서란 “국내에서 출판되어 공중이 이용하는 최소한 49쪽 이상의 인쇄된 비정기간행물”로 정의되고 있다.– 73쪽
도서는 비경합성과 비배제성을 지닌 대표적 공공재이다. 비경합성이란 한 사람이 그 재화를 소비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소비할 몫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으로, 출판물의 경우에도 한 사람이 소비한 후에 다른 사람이 소비하더라도 그 만족감이 줄어들지 않는다. 물론 인쇄 출판물의 경우 이전에 읽은 사람이 종이를 더럽히거나 구겨놓는 등 일부 훼손을 가할 수 있으나, 그로 인해 콘텐츠의 본질적인 가치가 닳지는 않는다. (중략)
비배제성이란 상품이 어떤 사람에게 제공되고 나면 다른 사람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소비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례로 책을 한 사람에게 팔면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도 온전한 가치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책 내용을 무단으로 복제하여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저작권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 80쪽
매절계약이 일반적인 인세를 훨씬 초과하는 고액이라는 등의 증거가 없다면 이는 출판권설정계약 또는 저작권법에 의해 당사자 사이에 특별한 약정이 없는 한 3년간 존속하기 때문에 매절계약일로부터 3년이 경과하면 출판권은 소멸된다는 법원의 판례가 있다. – 125쪽
(독일은) 서점 판매가 54%로 가장 높지만, 출판사들의 직접 판매하는 비중도 약 20%에 이른다. 그리고 독일에서 발행되는 책은 9만여 종에 달하고 있으며, 이 중 약 80% 정도가 신간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프랑스는) 도서의 70% 이상이 소매점을 통해 유통되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는 슈퍼마켓을 통한 도서 판매가 발달되어 있다. 프랑스인들이 구입하는 책 6권 가운데 1권은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 177쪽
영국은 2,500여 개의 출판사가 존재하며, 10여 개의 출판사가 영국 도서 시장의 2/3를 독점하고 있다. 도서 발행 종수는 13만여 종에 이르며, 도서 판매 유통 경로로는 대형체인서점이 가장 높은 점유율(36%)을 나타내나, 최근에 와서는 온라인 서점의 성장세도 두드러진다(16%).(한국콘텐츠진흥원 2010a) – 177-178쪽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 네덜란드 등 많은 유럽 국가들이 종이책과 마찬가지로 전자책도 정가판매제도를 시행하고 있어 전자책과 종이책 간의 가격 차이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 178쪽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
한윤형.최태섭.김정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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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청춘들에게 ‘꿈’을 꾸라고 강요하고, 그 ‘꿈’을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착취한다. 꿈은 자본주의가 청춘에 깔아 놓은 가장 잔인한 덫이다. (엄기호)
– 5쪽
“우리는 ‘굶어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서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라울 바네겜, “일상생활의 혁명”)– 7쪽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야말로,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틀어막고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최태섭)
– 15쪽
‘열정’, ‘젊음’, ‘도전’과 같은 이 행사를 수식하는 단어들의 용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단어들은 행사를 통해 얌전히 ‘길들여’진다. 열정은 넘치지 않아야 하고, 도전은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젊음은 무모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열정의 대상으로 허락되는 것은 더 이상 세계나, 사회, 혹은 타인이 아니다. 오직 나 자신뿐이다. 그래서 심화되는 ‘자기 혹사’의 몸짓들은 ‘치열하게 살지만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는’ 개인들을 양산한다.– 25쪽
당신은 기업에게 나를 고용해 달라고 요구한다. 기업은 주판알을 튕겨 본 후, 당신을 고용하면 오히려 이윤이 줄어든다고 답한다. 당신은 기업의 ‘계산’을 넘어설 수 있는 무언가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이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열정적인 인간’이라 주장한다. 당신은 당신이 기업에 임금의 세 배 이상의 이윤을 가져다줄 수 있는 예외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기업가는 스스로 ‘혁신적 기업가’로 진화하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혁신적 노동자’가 될 것을 요구할 뿐이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만’ 하니까!”
– 34쪽
성공과 실패로 나뉘는 ‘결과’의 힘은 강력하다. 평가는 ‘감시자’의 눈을 내재하게 만든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평가에 응하고, 그것에 목을 맨다. 비싼 돈을 들여 사교육을 받고, 삶의 속도와 방식을 조정하고, 생각하는 방식까지 기꺼이 바꾼다. – 38쪽
(기업의 면접용 채점표) 적응력과 협동심에 가장 큰 배점이 주어진 것을 보면 ‘인성을 채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는다’는 기업들의 설명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인성’은 직장 생활을 무난하게 하고 조직에 헌신하는 미덕을 뜻한다.
– 43쪽
열정은 제도화되었다. 체제는 열정의 분출을 요구하는 다양한 장치들을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열정을 ‘유사 도덕’으로 만들어 내는 일에 성공을 거두었다.
– 46쪽
열정은 어느덧 착취의 언어가 되었다. 이 거친 황소의 체제 안에서 훌륭히 길들여졌다. ‘원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청년’들이 새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체 게바라의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런 가슴 속에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지자.”는 말은 더 좋은 일자리를 얻을 날까지 충실하게 살라는 격언이 되었다. – 47쪽
자부심 없는 사람이나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부르고 노조를 만든다.(이명박 당신 대선 후보, ‘서울 파이낸스 포럼 초청 강연’, 2007년 5월)
– 48쪽
“이거 실화예요. 회사 분위기 안 좋고, 펀딩 안 되고, 뭐 그런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가방 하나 맨 애가 문을 열더니 사무실에 들어왔어요.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영화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돈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라고 외치더라고요. 근데 현실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그런 일에 감동받지 않아요. 그 애를 쳐다보는 스태프들의 심경은, ‘저런 녀석들 때문에 내가 돈도 못 받고......;’ 였죠. 영화판에 애들은 자꾸 들어와요. 정작 끝까지 가는 사람은 잘 없는데, 계속 유입이 돼요.”
– 83쪽
소위 보수적인 조직들이 나름 ‘규모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서 내부적으로는 ‘진보 단체’들보다 훨씬 진보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있다.
– 118쪽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냥 그 자체로 정당한 거지 다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굳이 무엇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설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 121쪽
“‘신지식인’이라고 할 때의 ‘지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의 본질과 작동 원리로서의 진리의 파악이나 추구와는 무관한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성취해 내는 능력을 뜻하며, ‘신지식인’은 진리의 소유나 추구가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거나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더 정확히 말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상품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신지식인’을 대표하는 자는 플라톤이나 노자, 아인슈타인이나 푸코, 교수나 언론인이 아니라 빌 게이츠나 손정의, 주식투자가 솔로스나 수많은 벤처 기업가, 마이클 잭슨이나 만화가, 박찬호, 박세리 등이다.”(박이문, ‘신지식인과 지식인’)
– 173쪽
일찍이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라는 단어는 이미 ‘금지어’였다. 노동은 인민이라는 단어처럼 사회주의적인 의미를 띤 단어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노동자는 근로자로 대체되었으며, 1886년 미국에서 벌어진 총파업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노동절(5월 1일) 역시 근로자의 날(3월 10일)로 바뀌어 불렸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사회학계에서도 ‘계급’이라는 용어는 맑스주의의 산물로 간주되어 탄압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중산층’이라는 말은 이것의 원어인 ‘middle-class’를 ‘중간 계급’으로 번역할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 183쪽
세계화라는 단어는 globalization의 번역어가 아니다. 이 말은 김영삼 정부에서 만들어 낸 ‘조어’로, 정부의 공식 문건에도 ‘segehwa’라고 표기되었던 말이다.
– 183쪽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자본가와 노동 계약을 맺는 게 아니라, 자기 노동력에 대해 스스로 자본가나 투자가가 되어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해, 노동자가 자기 몸과 시간에 대한 ‘경영자’가 되어 상위의 경영자(진짜 경영자)와 노동 계약을 맺는, 이상한 방식으로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바뀌고 있다. (엄기호)
– 185쪽
열정은 본래 대중의 것이었다. 오타쿠와 마니아들은 자발적으로 모였고, 자발적으로 배웠으며, 자발적으로 창작했다. ‘문화 산업’과 ‘벤처 기업’의 등장은 상황을 바꿔 놓았다. 취미가 일로, 일이 취미로 변했다. 열정이 산업의 내부로, 그리고 노동으로 유입됐다. 자본주의는 ‘열정’의 영역에서 새로운 시장과 노동력을 발견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는 말은 이전보다 더한 성실함과 근면함을 요구했다. 열악한 조건도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혹여 불만이라도 토로하는 사람은, 이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에 대하여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 186쪽
복지 제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이 나라에서 ‘자발적으로’ 일하는 이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일도 많이 시키고, 돈도 안 주어도 되는’-착취에 최적화된-상황이 펼쳐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190쪽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소비자로 인식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 218쪽


 
 
 
출판생태계 살리기 - 자기기만과 무기력을 넘어
변정수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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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책의 미래는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독자를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답은 다 나와 있다. 다른 삶에 대한 경험의 폭과 깊이가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결정적이거나 최소한 유력한 요인이라는 믿음, 그렇게 축적된 인문적 교양이 자신이 속한 일상적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존재를 존중받을 수 있는 결정적이거나 최소한 유력한 준거라는 믿음, 다름 아닌 책이 삶의 지혜를 구하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자신의 처지에 대한 판단력을 기르는 데 가장 탁월한 매개라는 믿음을 복원하면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나 누릴 여유가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이며 오히려 대다수가 그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조차 누릴 수 없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꿔나가기 위해서라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자각이 우선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바로 이것이 ‘인문 정신’이다.– 32-33쪽
책은 읽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어야만 굳이 세상에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책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그것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무도 미리 알 수가 없다. 뻔하디 뻔한 얘기로 여겨지겠지만 이것이 출판산업을 붕괴로 치닫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 47쪽
책 한 권의 ‘원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순수하게 그 책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제작비’나 ‘편집비’ 따위가 아니라 실은 일종의 ‘보험료’이다. 애써 만들어낸 책이 결과적으로 팔리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밖에 없는 ‘매몰 비용’이 팔리는 책에 의해 벌충되지 않으면 출판 산업은 지속적인 재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48쪽
인문서 분야에서도 간혹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나오지만, 그 판매량의 대부분이 ‘서가 장식용’이 아니라 ‘독서용’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분야를 불문하고 책들의 외양이 ‘읽기 편하게’보다는 ‘들고 다니거나 꽂아두기에 폼 나게’에 더 치중하는 것이야말로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정직하게 대응한 결과일 것이다. – 58쪽
(2008년 단행본 출판 시장의 전년도 대비 매출 30% 감소) 책이 일종의 생산재라는 교과적인 믿음과는 달리, 대중들에게 책이 선택가능한 소비재 가운데 하나로 기능하고 있음을 여실히 방증한다. 책은 더이상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 언제든 다른 소비재로 대체될 수 있는 ‘즐길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즐길거리’라는 측면에서만 보자면 대체로 가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낡은 문화상품이라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 137쪽
책이 소비재로 기능하는 한, 출판산업에 미래는 없다. ‘많이 팔리는 책’이 꼭 ‘좋은 책’은 아니겠지만 단순히 유익하고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해서 ‘좋은 책’일 수도 없다. 책이 생산재로 기능하는 선순환 구조를 염두에 둔다면, ‘다른 책을 읽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 ‘좋은 책’이다. – 138쪽
한 사람의 독서 체험에서 중요한 것은 결코 ‘무슨 책’들을 읽었는가도 아니고, 무슨 무슨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도 아니다. 다독은 무조건 권장해야 할 일임에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독서 이력을 보여주기 위한 책 읽기란 공허하고 무의미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인생에서 가장 외부 세계의 지적, 정서적 자극에 민감한 성장기의 독서 체험이 이렇듯 ‘내면적 성장’과는 거리가 먼 ‘뽐내기를 통한 점수 따기’로 점철되어서는, ‘좋은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많이 팔리는 책’이기 때문에 더 많이 팔리는 황폐한 출판 시장의 개선을 기대할 수 없다.– 141쪽
출판 매체는 다른 매체들의 대체재가 아니라 보완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책을 읽어야 할 필요, 더 넓게는 매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과 소통할 필요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책을 읽지 않는 대신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유행 상품을 소비하고 인터넷 게임을 즐기며 일상을 영위한다. 그것이 ‘독자들의 변화하는 욕구’의 정체이다. – 14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열 작업을 외주로 진행하는 데에는 또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터이다. 우선 상근 인력을 고용하기에는 작업량이 일정치 않거나 지속적인 작업량 유지가 불투명한 경우이다. 주먹구구 경영의 전형적 사례다. 살얼음판 같은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나,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식의 출판으로는 점점 더 전망이 불확실해지는 악순환에 빠져들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그렇게 자신이 없다면 더 늦기 전에 출판을 접으라고 감히 조언하고 싶다.

정작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비용 면에서 유리하리라는 터무니 없는 착각이다. 상근 인력으로 고용했을 때 지급해야 할 임금보다 외주 작업비가 더 싸게 먹힌다면, 결과적으로 외주 작업자는 상근 편집자로 취업했을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일감이 끊이지 않는다는 요행이 덧붙지 않는다면 생계가 불안정해지는 부담까지 져야 한다. 고도의 정신적 집중을 요구하는 이 일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발상이다. 언감생심 작업의 질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166쪽
아마도 매일 오후 정시 퇴근을 종용하고 휴일에는 쉬라고 입발린 소리를 늘어놓는 사장들과 중간 관리자들만 모르거나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일 게다. 누가 보아도 무리한 작업 일정을 잡아 밤낮없이 매달리지 않으면 도저히 맞출 수 없는 마감을 강요하면서, 근로기준법이 정한 노동시간과 휴일을 지킨다는 선언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사에서 일을 못 하게 하면 집에 일거리를 싸짊어지고 가서라도 일정은 맞추어야 하는 것을. 이거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가.

게다가 이토록 단순한 이치를 내놓고 거스르기가 민망한 줄은 아는지 급기야 점점 더 고약한 방어 논리를 창안해내기에 이른다. 일정을 제대로 못 맞추는 것은 편집자의 무능이며, 무능하면 최소한 성실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성실이란 남들 쉴 때 쉬지 않고 죽도록 일한다는 의미이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성실한 것이 아니라 미련한 것이고, 설령 일부 편집자들이 무능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편집자를 무능하게 만드는 장본인은 미련함을 예찬하는 작자들이다.– 187-188쪽
무리한 일정은 반드시 그 일정을 강행한 사람들을 배반한다는 ‘일정 배반의 법칙’(강무성 전 정신세계사 편집주간이 북에디터 게시판에 올린 글)이 편집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대부분의 편집자들에게 ‘남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 189쪽
모든 기호가 기호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란 어차피 임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의미’란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의 관계망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그러한 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모든 행위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요컨대 모든 문화적 생산물은 그 존재 자체로서 정치적 맥락에 포섭되어 있다. 그 모든 맥락을 무시한 채 문화적 생산물을 가공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뿐더러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 198쪽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서양 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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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조상은 예로부터 전해지는 엄격한 표준에 따라 제작된 반면, 그리스의 조상에는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유가 허용됐다. 한마디로 이집트 조상의 제작 방식이 ‘기술’에 속한다면, 그리스의 그것은 ‘예술’에 속한다. 때문에 그리스의 장인들은-비록 오늘날 예술가들이 누리는 지위에는 못 미쳤겠지만-후세까지 전해지는 명성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차이는 물론 그리스인들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이집트인들이 영원불변하는 내세를 지향했다면, 그리스인들은 변화무쌍한 현세를 긍정했다. 우연적이고 가변적이며 개별적인 감각의 세계를 존중했기에 자세와 각도, 위치에 따른 변화를 묘사하는 것이 또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의 정치 체제와도 관련이 있을 게다. 이집트가 전제군주 사회로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제약했다면, 민주주의를 구현했던 그리스 사회는 성원들 개개인을 존중해주었다. 이것이 예술가 개인의 개성적 표현을 허용하는 양식을 낳았던 것이다. – 30-31쪽
감각적 세계보다 초월적 세계를 중시한 중세에는 예술로 감각적 세계를 재현하기보다는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표현해야 했다. 문제는 그 초월적 빛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신학자들이야 그 아름다움이 ‘초월적’이라는 말로 때우면 그만이었지만, 장인들은 처지가 그렇게 한가롭지 못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빛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야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보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중세의 장인은 그 과제를 재료로 해결했다. 즉 값비싼 재료의 찬란한 색채와 광휘를 그 초월적 빛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중세의 공예는 온통 번쩍이는 황금, 은은하게 비치는 은빛, 형형색색의 보석, 몽환적 효과를 내는 다양한 색깔의 희귀한 염료 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중세의 공예를 뒤덮은 보석과 귀금속은 무엇보다 그 황홀한 빛과 색의 효과로 감각 세계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 66-68쪽
“이 세상에 가시적인 방법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악마의 일일 수도 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82쪽
중세에 세계는 두 겹(내세+현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루터는 더 이상 알레고리로 지시되는 초월적 층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계는 한 겹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서서히 감각적인 현세가 유일한 세계라 믿게 된다. 이에 따라 사물을 초월적 의미와 연결시켰던 중세의 상징적 사유가 물러가고, 그 자리에 사물과 사물의 현실적 연관을 찾는 근대의 인과적 사유가 들어서게 된다.
초월적 층위가 사라지자, 그것을 상징하던 빛나는 재료도 필요 없게 된다. 르네상스의 저자 알베르티는 화가들에게 색과 빛의 효과를 내는 데 값비싼 재료 대신에 물감을 사용하라고 권한다. 이로써 사물과 기호는 분리된다. 이미지와 텍스트 역시 분리되어, 화폭에서 쫓겨난 텍스트는 밖으로 나가 제목이 된다. 실재와 환상도 분리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미 장인들에게 “신이 창조하신 질서대로 그려라.”라고 요구한 바 있다. 판타지의 여름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 83쪽
<<비평의 탄생>>에서 알베르트 드레스드너는 미술비평을 크게 인식과 평가, 영향의 세 측면으로 구별한다. ‘인식’이란 비평의 기술적 측면으로, 작품 자체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가리킨다. ‘평가’란 비평의 평가적 측면으로, 작품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주관적 판단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향’은 비평의 정치적 측면으로, 창작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려는 비평가의 시도를 의미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비평의 최종 목적인지도 모른다. – 273-274쪽


 
 
 

 

누구를 위한 출판인가


출판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다 보니, 출판사에 취업하겠다는 이들을 가장 많이 만나긴 하지만, 드물지 않게 출판사를 ‘창업’해 보겠다는 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내게 찾아오는 사람들만 유독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가운데 출판으로 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개는 그저 좋은 책을 만드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지향을 앞에 내세운다. 그렇다고 그들이 뜻있는 일을 위해서 이슬만 먹고 살 각오를 했다는 뜻도 아닐 터이고, 나아가 손해를 감수할 만큼 대단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니 좋게 봐야, 뜻있는 일도 하면서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고 먹고살 만큼은 돈을 벌고는 싶다는 뜻일 게다. 세상에! 이렇게 순진할 수가. 유감스럽게도 출판은 그런 한가한(?) 일이 못 된다.


한 개인의 야무진 꿈은 어떻게 해서든 말려보거나,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싸게 ‘수업료’를 지불하는 선에서 하루라도 빨리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하는 것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지만, 출판 ‘창업’의 주체가 한 개인이 아니라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라도 출판은 철저하게 공공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라면, 마냥 말릴 일일 수만은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모인 사람들이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라도, 위와 같은 ‘순진한’ 발상으로는 결코 출판 행위를 지속할 수 없다. 의미를 추구하다 보면 (물론 이익이 나면 더 좋겠지만) 투입한 비용만큼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 말 그대로의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게 마련이고, 그에 대처하는 ‘순진하지 않은’ 자세는 결국 둘 중의 하나다. 한 개인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일이라 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집단을 통해 개인의 부담을 분산시키면서 손해를 감수하든가, 그마저 쉽지 않다면 (오히려 개인에게라면 지극히 자명한 귀결이겠지만)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 또는 어떻게든 보! 전해야 할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어도 얼마간은 본디 추구하려 했던 의미의 훼손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가정을 한 가지 해보자. 만일 의미 있는 책을 만들어보자는 좋은 뜻을 모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뜻은 좋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손해가 나서는 안 된다’는 순진한 발상(적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할 수는 없다는 일견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상이라 해도 마찬가지다)에서 뜻을 모은 것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무리 얼마간은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좋은 일이라 해도 과연 얼마만큼의 손해가 감수할 만한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고, 아무리 손해를 줄이기 위해 얼마간은 의미 실현을 유보할 수 있다 해도 과연 어디까지가 양해할 수 있는 수준인지도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다.(애당초 그런 부분까지 정교하게 합의된 사람들끼리만 뜻을 모은다면 그 힘은 매우 미약했을 터이다.) 요컨대 개인이라면 대신 살아줄 수 없는 타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그때그때의 실존적 선택에 지나지 않을 문제가, 근본적으로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는 집단 내부의 이견들 사이에서 일정한 집단의사를 형성해내야 하는 정치적 문제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순수하게 출판‘만’을 위해 뜻을 모은 것이 아니라 출판을 포함하여 훨씬 더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려는 목적에서 모였고, 출판은 단지 더 근본적인 목적을 위한 일종의 ‘수단’일 뿐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불가피하게 마주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문제조차도 언제든 ‘출판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거리들이 널린 마당에 지나치게 소모적인 탁상공론’으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책임’의 이상은 훌륭하지만, 기실 정반대로 ‘공동무책임’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라말출판사의 사례는, 실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고 또는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갈등이 단지 극단적으로 불거져나온 데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순수하게 출판 활동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가운데, 근본적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공공 기금을 종잣돈 삼아 일종의 수단으로서 출판에 접근하는 모든 사회적 노력들에서 크든작든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 문제로 인한 갈등이 표출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사회적 물의로 폭발하느냐 내부에서 (대개는 일시적일망정) 봉합되느냐일 뿐이다. 당사자들 입장에서라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만족스럽지는 못할망정) 더 나은 모습으로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었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달았는지가 가장 아쉬운 대목일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을 세심하게 복기하며 잘잘못을 가리고 앞으로의 교훈을 얻는 일은 외부의 제삼자가 이러쿵저러쿵 떠들 일도 아니고 내게는 그럴만한 깜냥도 없다. 내가 이 글을 통해 제기하려는 주제는 어디서든 있! 수 있는 갈등의 바람직한 대처 방안이 아니라, 가령 왜 그런 갈등이 어디서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문제인지 또는 그것이 불가피하다 해도 꼭 필요한 갈등인지 나아가 최소한 관리가능한 수준에서 이러한 갈등의 소지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은 없을지와 같은 좀더 ‘보편적인’ 지점에 있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특정한 공공적 목적을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 조직이 그 목적을 실현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출판사를 운영하려는 시도를 한사코 말려 왔다. 대신 경영 이념이 건강하고 해당 분야에서 꾸준히 실적을 쌓아온 출판사와 제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최선이라고 조언하곤 했다. 출판의 자유는 국민의 기본권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고려하자면, 나의 이런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내용을 생산하는 데 더 집중해야 할 역량을 경험도 없는 출판사 경영에 분산시키는 것이 과연 출판의 다양성을 위해 바람직한 일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최소한 손해는 나지 않을 시장성이 잠재된 내용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낼 비전이 있다면 그것을 마다할 출판사는 없다는 점에서 애당초 시장성이 불투명한 비전으로 (그것도 소중한 공공 자금으로) 매우 위험한 도박을 하겠다는 뜻이거나, 더러 마주치게 되는 ‘출판사와 나눠야 할 이익’을 아까워하는 태도라 해도 그것이 직접 경영에 나선다면 고스란히(또는 그 이상으로) 출판 경영을 위해 지불해야만 할 비용이라는 준엄한 사실을 간과한 소치! 뿐이며 결국 ‘출판의 전문성’을 깡그리 무시한 무모함이라고 냉정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령 전국국어교사모임 같은 단체는 출판사를 운영하면 안 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다만 조건이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 조건의 구체적인 내용은 윗문단에 다 제시되어 있다. 일정한 규모의 기금을 출연하여 상대적으로 독립된 형태를 취하고 전문성에 기반한 운영의 상대적 자율성을 보장한다면 말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게 기존의 출판사와 제휴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반문한다면 ‘내 말이 그 말’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굳이 말하자면 한 가지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경영진에 대한 인사권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대다수의 구성원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손해나 의미의 훼손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 기존 출판사와 제휴한다 해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제휴를 철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겠지만,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출판사의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한 경영적 판단이 결코 운영 주체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철저하게 전문성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과 비전문가가 경영 책임을 맡는 것은 그 의도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비효율을 초! 래한다는 것이다. (나라말출판사의 사례를 염두에 두자면,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더 있기는 하다. 파산 지경에 이르러 ‘청산’ 절차에 들어간 게 아닌 한, ‘매각’이라는 발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운영 능력이나 의사가 없다면 손을 떼면 그만이지 회사를 팔아넘기거나 문닫을 권리는 없다.)


출판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출판의 본질에 대한 배반이다.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출판을 다른 어떤 사회적 목적(그 목적이 아무리 정의롭고 훌륭한 일일지라도)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도 실은 (대다수의 통념과 달리) 꽤나 위험한 일이다. 적어도 출판을 시장에만 내팽개쳐두고 있는 현재의 출판 환경에서라면 당연히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겠지만, 시장을 넘어선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해도 과연 ‘의미 있는’ 책이란 ‘누구에게’ 의미가 잇다는 뜻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방법은 없다. 아무리 훌륭한 개인이라도 ‘나에게 의미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한 출판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심하게 말해 그건 어쩌면 출판이 아니라 마스터베이션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훌륭한 뜻으로 모인 집단이라 해서 출판의 본질이 달라질까. 개인이건 집단이건 ‘책을 통해 내가(또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한다면 (출판사 경영이 아니라) 저자로서 활동하면 된다. 출판이란 내게(또는 ‘우리에게’라 할지라도) 의미 있는 책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 治볜눙 그지없는 독자들에게 어떤 책이 의미 있을지를 끈질기게 질문하며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게 의미 있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럴 때만 사회적인 가치를 지닌다.


주제넘게 덧붙이자면, 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고 싶은 선생님들의 뜻도 숭고하고, 그래서 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좋은 책을 손수 만들어내시겠다는 뜻도 존경스럽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내용이 정말로 종이에 잉크를 묻혀 내놓을 만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그 일로 밥을 먹는 출판 전문가들에게 맡겨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서운해하실 건 없다. 선생님들이 좋은 책을 골라 읽히시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나아가 더 좋은 책을 손수 만드시려는 노력까지 이어진다면, 전문가의 판단인들 그 도저한 지향을 감히 거스르겠는가. 비단 선생님들만이 아니라, 비슷한 취지에서 출판에 뛰어들기 위해 조직적인 모색을 꾀하는 모든 분들께 드리는 진심어린 충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