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아마 이 책을 펼쳐보게 된 독자 중에 아따리라는 이름을 알고 있거나 들어보기라도 한 사람은 머리카락만큼 많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머리카락만큼 많진 않은 독자들, 저와 마찬가지로 아따리 씨라는 한 인간에게 개인적인, 의학적인, 문학사적인, 성적인 기타 등등 호기심을 갖고 있음이 분명한 독자들을 대신해 그동안 아따리 씨의 이름이 잊혀진 데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분노에 무슨 근거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성급하신 독자여. 똥을 싸기도 전에 똥을 치울 수 있겠습니까. 똥싸는 도중에 그리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니 미리부터 코를 들이막지 마시고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단 하나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실은 제가 살아오면서 한번도 설사를 한 적이 없기에 이번에도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느리게 길게 끊김없게. 저는 만약 가정을 이루게 되면 이를 가훈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사실 이 문구를 모토로 해서 저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있다면 아마도 저에게 표를 던져주신 바로 그 한 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단 한 표를 얻었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육십구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억오천만의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 그 사람이 저의 이야기에 공감해 표를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기적적인 일입니다. 사억오천만 모두의 표를 얻는 것보다도 더 기적적인 일입니다. 님이여. 당신은 제 반쪽, 제 쌍둥이 자매입니다. 저는 형제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기만적인 단어는 아예 혀에 달라붙지 않도록 사지를 토막내 아무도 살지 않는 땅속 깊숙히 묻어버려야 합니다. 아따리 신이시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만적인 단어를 위해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까. 제게 말해주소서. 창검과 형제를 노래하노라.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딴 소리만 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독자분들께서 따끔하게 한마디씩 던져주셔도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니 맘 편하게 호통이든 칭찬이든 아무때나 추임새를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글을 쓴다는 것만큼 외로운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오백페이지나 되는 글을 쓴 사람들은 그 외로움이 꼬박 오백페이지를 채울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던 그런 외로운 이들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그렇게 가련한 존재로 만드실 작정입니까. 제가 당신께 뭐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원수도 사랑하는 판인데 저를 사랑하는 데엔 뭐 그닥 큰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무쪼록 제가 오백페이지 아니 백페이지를 써야만 할 정도로 외롭진 않은 사람이란 걸 증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이제 진짜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습니다. 저의 모토에 대해선 이미 말씀 드렸으니 다시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뭐 선거 때면 늘 하던 것과 같이 저도 토론회라는 데 참석했는데 저같이 초라한 존재가 사람들 눈에 들어올리 있겠습니까. 세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저는 아따리 씨생각에 푹 잠겨있었습니다. 진작에 자리를 뜨지 않았던 건 세 시간 조용히 버티기만 해도 자그마치 백만원이나 되는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돈으로 다섯권의 책을 살 계획이었습니다: 둘한테 알리기에리(또깝치오, 1433, 피렌체), 아따리 씨는 없다(프리드리히 니책, 1899, 라이프치히), 세르반테스와 산초 판사의 모험(똥키웠대, 1662, 바야돌리드), 뒤로 하는 즐거움(배를램, 1878, 빠리), 앙띠 아따리투스(와따리-가따리, 1969, 빠리). 그런데 세 시간이 지나고 눈을 떠보니 제 앞에 엉덩이 모양으로 접힌 종이조각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종이가 빨간색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아예 신경도 안 쓰고 그냥 버렸을 겁니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제겐 빨간색으로 된 것만 좋아하는 괴벽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빨간색이 좋아진다, 는 격언이 있기도 하지만 이 괴벽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빨간색 물이 아니면 세수도 못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러 버렸습니다. 제가 만약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간다면 아마 '온 세상을 빨강으로'를 모토로 정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이를 펴보았더니 깨알같은 글씨가 한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굉장히 아름답고 섬세한 글씨였습니다. 그보다 더 환상적인 글씨는 그전에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뭐라고 쓰여있었는지 궁금해하시는 독자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종이에 쓰여진 내용을 온전하게 그대로 여러분께 전해드리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바로 어제 집에 도둑이 들어와 이 종이의 반쪽을 훔쳐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소문으로만 듣던 반쪽 도둑이 제 집을 친히 방문하셨던 겁니다. 이 반쪽 도둑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난잡하기 이를데 없는 이 책이 수십년 후에 혹은 아따리 귀신의 축복으로 수백년 후까지 읽히리라는 칼라하리 사막의 모래알 하나같은 소망으로 반쪽도둑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두는 게 옳을 듯 싶습니다. 왠만하면 코웃음보다는 간웃음이나 십이지장웃음같이 제가 듣거나 볼 수 없는 방식으로 비웃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라고 자존심이 없겠습니까. 명성에 대한 허영심이 없겠습니까. 혹 모르는 일입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백년 후의 독자가 제 책의 정당한 가치를 평가해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아 어쩌면 당신이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백과사전을 통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이 백년후까지 살아남을 정도면 누군가 친절하게 반쪽도둑에 대한 주석을 달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제가 반쪽도둑에 대한 설명을 첨가하는 건 종이를 메꾸기 위한 잔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니 반쪽도둑은 뭐든 반쪽만 훔쳐가는 도둑이라는 동어반복적인 설명만 드리고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이의 반쪽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사실 저는 그 종이에 쓰여진 내용을 똑같이는 아니더래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 옮겨쓸 수는 있습니다. 고대 이오니아 반도에 살던 한 철학자가 비통하게 뇌까렸던 것처럼 이데아를 복사한 것을 다시 복사한 것보다는 한 단계 차원이 높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도 작가로서의 원칙이란 게 있습니다. 바로 자료는 자료 그대로 옮겨야 한다, 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이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저는 다른 위대한 작가들이 쓴 모든 글을 바로 제가, 이 본인이 쓴 것이라고 우길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됩니다. 또 다른 위대한 작가들이 쓰지도 않은 것을 제가 맘대로 쓰고 그 사람들이 썼다고 우길 수 있는 권리도 갖게 됩니다. 이는 자료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독자의 게으름을 악용하여 독자를 우롱하는 짓밖에 더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남들이 모르는 자료를 찾았다고 하는, 여러분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읽어본 적 없는 작가를 들먹이는 모든 작가를 한번쯤 의심해보셔야 합니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의심없는 독자가 되기 위해선 세상 모든 걸 다 읽어봐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없이 읽기 위해서는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 모든 책을 다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제 대통령 선거 출마는 저에게도 너무나 지루한 사건이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자꾸만 그 얘길 하다보면 이상한 곳으로 새나가니 말입니다. 다음 장에 반쪽만 남은 그 종이를 그대로 첨부하고 이제 대통령 선거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약속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페이퍼에 연재될 이야기는, andalucia에서, 나의 선배, 친구, 동지, 선생인 어떤 사람^^이 연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ㅎㅎ 제 홈이 하도 심심하다 보니. (요즘 석사논문 최종 수정 작업 중이라서 암담합니다;;; ) 좋은 글을 소개라도 할 겸 연재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