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나남창작선 118
이병주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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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되고 있어서일까 나도 정도전에 관한 책을 한 권 읽어 보았고 저자의 책은 아니지만 다른 저자의 <정도전>을 다시 읽어보려고 준비해 놓고 있었는데 정도전하면 그와 비교가 되는 인물로 '정몽주'를 떠올릴 수 있는데 교과서에서 배운 얄팍한 지식밖에 없어서 다른 이도 아니고 저자의 책으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하다보니 지방선거와 맞물리고 감기몸살로 인해 읽고 리뷰를 작성하지 않은 것이 자꾸 늦어지게 되었다. 선거에도 별 관심이 없다가 잠깐 일하게 되어 조금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보수 혹은 진보를 따지지 않고 인물을 보고 평가를 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우린 편가르기를 하면서 인물보다는 다른 것에 더 치중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었다.

 

포은 정몽주의 56년 삶은 그야말로 성,충,정,지,근勤이 함께 어우러진 삶이었다고 보고 있다. 소설은 '화려한 등장이었다'로 하여 그가 과거에 급제하는 이야기부터 시작을 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뱅이 선비가 명문의 자제들을 제치고 과거에 급제를 하였으니 얼마나 많은 관심을 받았을까.19세에 부친상을 당해 조금 늦은 감이 있는 24세에 과거에 급제를 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관심을 받았지만 나라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노가 심하여 조정이 혼란할 시기였기에 그는 나라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명나라에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폭풍우를 만났지만 그의 기지로 인해 다행히 홀로 남아 필문과 필답으로 고려국의 사신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고 초련이라는 여인을 만나기도 하지만 아버지와 딸로서 서로 위로하며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기로 하면서 그녀와 나눈 시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가지가 마르고 잎이 썩는다고 해서 걱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이미 뿌리가 썩어 들어가고 있는데 말이오."

 

그의 이야기는 그가 남긴 몇 편의 한 시와 더불어 더욱 실감 있게 그려지지만 작가의 말처럼 '그의 생애를 재구성하기엔 사료가 너무나 부족하다. 범거할만한 <고려사>는 그이 정적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 중신들이 편찬한 것이어서 어느 정도 그 진실을 믿어야 할지 모르게 되어 있다. 그를 숭앙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바친 찬사는 능히 한우충동할 정도이지만,옛글이 대개 그러하듯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구체성이 결어되어 있다.'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 쓰여지기 때문에 패자라 볼 수 있는 정몽주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듯 한가 보다.그렇기도 하지만 기록에서 정몽주 자신,인간에 대한 기록보다는 사건 기록이 우선이었으니 인간 정몽주를 모두 그려냈다고 하는 것은 진실성이 결여되었다고 불수도 있을텐데 그의 시나 글이 함께 하여 대체로 교과서적인 지식보다는 나았던 것 같다.

 

"그건 서산의 해를 붙들어 동쪽으로 돌리는 것보다도 지난한 일입니다.백성들은 왕에 관한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형편입니다."

 

소설에서는 그가 과거급제부터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기록하고 있다.'정몽주의 죽음은 바로 고려의 종언終焉을 뜻한다.그의 비참한 최후가 있은 지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공양왕이 추방되고 고려는 475년 동안 지탱한 왕조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고려의 멸망과 같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고려의 충신이라 할 수 있었다고 본다면 신흥세력인 이성계를 탓하기 보다는 그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지조를 지키듯 고려의 충신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뿌리를 고려에 두지 않았나싶다.고려가 기울어 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고려를 지키려 했고 자신이 선택한 충에 결코 흔들림없이 없던 그를 정도전이나 이성계 편에서 곱게 볼리는 없었겠지만 그렇게 처참하게 죽여야 했을까싶다.

 

"주인이 없어도 꽃은 피겠지만 주인 없이 핀 꽃은 뜻을 잃는다."

 

저자는 역사의 기록에 더하고 빼기 보다는 그만큼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아니 정몽주란 인물을 더 그려내고 싶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란 인물에 진실성이 결여된다고 볼 수도 있어서 기록된 정몽주만큼 그의 글과 함께 그려냄이 더 다가온 듯 하다.저자의 책은 <지리산>을 읽고 반해 다른 책들도 소장을 하게 되었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풀어내는 역사이야기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부분들인 듯 하여 소설로라도 관심을 가져보는 차원에서 접했지만 이런 책임감 있는 작가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한편으로는 생각을 한다.승자의 입장에서 보는 관점과 패자 입장에서 보는 정몽주에 대한 시선은 다를 것이라 생각을 하지만 우리가 그를 봐야하는 것은 승자도 패자도 아닌 무능력한 왕권 속에서도 자신의 충과 의를 다했으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절개를 지켰다는 것.이 책은 다시 읽어봐야할 듯 하다.너무 시간을 끌며 읽기도 했지만 읽고 바로 저장해두지 않은 것이 흠이 되었다.다음엔 이 책과 함께 저자가 쓴 <정도전>까지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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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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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이란 뒤돌아보면 '시작'이라는 말이 될 수 있다.땅끝마을에 가족나들이를 가서 여기가 끝인가 했는데 뒤돌아보니 다시 시작을 해야할것만 같은 아니 우린 다시 시작을 하고 있었다.두 딸이 혹독한 사춘기를 치루던 대입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부모의 욕심을 내세운 공부의 길을 강요할 것인지 딸들이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게 해야할 것인지 옆지기와 의견차이가 있었다.딸들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살아 왔기 때문에 미래가 안정적이라 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할 수 있는 길로 가길 원하는 것이 부모의 생각이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자신안에 있는 '꿈'을 향한 선택을 하고 싶다고 했다.갈등이 무엇이 필요할까? 본인들이 이미 선택을 했다고 하는데.어쩌면 자신이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보다 어쩌면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꿈을 향해서 갈 수 있는 길로 가라고 했다.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의 미래를 보라고 했는데 처음엔 자존심의 문제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저희들이 선택을 잘했다고 한다.한참 친구들이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모가 등 떠민 곳으로 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한다.그만큼 성장을 했다는 증거일테고 그만큼의 나름 꿈을 찾아가는 길을 찾았다고 본다.늘 내게도 그렇지만 딸들에게도 '가슴 뛰는 일'을 향해 가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가 늘 의문이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길이에요. 저는 길을 좋아해요."

 

<이런 이야기>의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이탈리아 작가이다. 낯설기도 하지만 이탈리아문학작품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읽다보니 빠져든다. '길', 꿈이라 할 수 있는 저마다 가슴에 간직한 '길'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이야기라 할 수 있고 아버지 로베로와 아들 울티모가 자동차와 자동차경주를 할 수 있는 서킷에 대한 꿈을 향하여 나아가는 인생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소설을 읽다보니 흑백영화로 보았던 안소니 홉퀸스 주연의 영화 <길>이 생각나기도 했다. 잠파노와 젤소미나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불협화음에서 잠파노의 잘못인해 젤소미나가 잠파노를 떠나게 되기도 하고 죽음에 이른 후에 그녀가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를 느끼는 영화였었나.젤소미나가 작은 북을 두드리며 걷던 그 길이 소설 속에서 울티모가 상상하는 그 길로 이어지는 느낌은 무엇인지.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다. 아무리 자신 안에 많은 길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현실에 끄집어 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리베로는 자신의 형의 힘든 현실을 보고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하여 과감하게 결정을 내린다.목장의 소를 팔아 버리고 멀리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자동차를 자신 인생안에 들여 놓은 것이다. 그것을 자신 뿐만이 아니라 아들인 울티모와 늘 함께 하지만 울티모는 아빠처럼 자동차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길'에서 자신의 인생을 본다.

 

'그 길들 가운데 하나가 내 아버지를 좌절시킨 날, 나에게서 길들이 사라져버렸어요. 그날 이후로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요.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모호한 형상들뿐이었죠. 삶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려서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한낱 불투명한 안개가 아닌 어떤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거기 카포레토에서 일체의 확신이 멎어버린 공회전 상태,모든 길들의 완전환 소멸을 경험했어요.

 

그들이 사는 곳은 시골이라 할 수 있는 곳이라 자동차를 구경하기 힘든 곳이지만 그래도 리베로는 목장이 있던 곳에 정비소를 차린다.그런 그들에게 백작이 찾아오고 백작은 울티모와 그의 가족을 보고 새로운 희망을 보듯 한다. 백작은 울티모가족에게도 희망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기도 하여 백작과 리베로는 함께 자동차경주에 나가게 된다. 그들이 함께 자동차경주를 나갔던 날은 울티모 엄마가 임신한것을 알게 되었던 날이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하고 그들은 자동차경주에 나서게 된다.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백작이 사고로 죽게 되고 리베로는 살아 남았지만 불구가 된다. 아버지가 소를 팔고 정비소를 차릴 때에도 자동차경주에 나갈 때에도 무언가 희망이 보일 듯 했지만 그들의 희망은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울티모는 카포레토 전투에 나가게 되고 전쟁에서 친구의 배신이며 자신의 꿈과는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을 보게 되고 미국으로 간 그는 엘리자베타와 피아노와 관계된 일을 하며 다닌다. 자동차정비가 아닌 피아노를 조율하고 팔고 꿈과는 먼 일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엘리자베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가 받아 들여지지 않아 떠나게 된다.

 

'내가 늘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부모들에게 자녀들의 꿈을 보는 눈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녀들의 꿈을 보지 못한다. 나쁜 부모라서가 아니라 그냥 보지 못하는 것이다.

 

엘리자베타,그녀는 어린시절에 짝으로 정해지듯 한 인물과 결혼을 하여 부유하게 살지만 남편이 죽고 난 후에 울티모를 찾아 나서게 된다.아니 울티모와 함께 하는 동안 그가 말해주었던 '서킷'에 대한 것을 잊을수가 없다. 그는 분명 자신이 꿈꾸고 설계한 서킷을 꼭 어딘가에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왜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버지와 백작 그리고 자동차경주에 대한 이야기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기도 했지만 울티모는 늘 '길'에 대한 생각과 그림을 늘상 그리고 있었던것을 알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꿈을 어딘가에서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을 한다. 그것이 고향 근처일까 하고 찾아가 보지만 부모님도 그곳을 떠나 살고 있고 자신들과의 꿈에서 멀어져 있지만 리베로는 자동차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울티모는 그녀와 헤어진 후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어릴적 자신의 꿈과 그림을 그리고 난 후 어른이 되서 보면 그 그림의 자신과 비슷하게 닮아 있거나 근접해 있다고 한다. 과정은 어떨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는 자신이 어릴적 그렸던 그 꿈에 비슷하게 다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울티모는 항상 자신만의 '길'을 그리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길' 위에서 있을까?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가볼 만한 길,그녀는 그런 길들 가운데 하나였어요."

 

울티모에게는 그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백작이 남겨준 어마어마한 유산이 있다. 그 유산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면 더 빨리 쉽게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울티모는 그 유산을 건드렸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백작의 아들을 자신의 아우로 받아 들이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서킷을 그에게도 나누어주듯 한다. 그가 서킷을 만들기 위한 과정은 백작의 죽음도 있었고 아버지의 자동차사고 엘리자베타와의 만남과 이별도 있었으며 전쟁도 있었다. 쉽게 자신의 길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에 그는 자신의 길을 분명 수정해 나갔을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남다르게 보았던 길에 대한 애착이 서킷이라는 꿈으로 자리하면서 죽음에 이를수도 있는 전쟁이나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길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서킷을 만들어내고는 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엘리자베타는 그가 만들어 놓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길'을 찾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찾아내지만 흔적이 많이 지워져 있다.하지만 완벽하게 복원을 해 자신이 한번 그 길을 달려본다. 그리곤 그것은 울티모의 길이기 때문에 다시 그 서킷을 부셔버리듯 하다. 타인의 꿈이 자신의 꿈이 될 수 없기도 하지만 그녀가 원한 것은 서킷이 아니라 울티모였다는 것을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된다.

 

"그건 한낱 서킷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에요."

......

"당신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들 가운데 하나를 선물하는 거에요."

 

얼마 살지 않은 삶이지만 지금도 이 길이 내가 꿈꾸던 길인지 잘알지 못한다.그런가하면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빛이 바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자식은 부모의 삶을 보면서 닮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세월이 흐르고 난 후에 알게 된다.리베로와 울티모의 인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이 되어 있고 어느 순간 그들의 삶은 만나는 듯 하다가 다시금 서로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아버지 리베로는 울티모에게 어떤 꿈을 강요하거나 서두르지도 않는다. 자신이 자동차에 심취했듯이 그가 길에 빠져 있음을 알고 있고 엘리자베타와 어긋난 삶이었지만 그들이 서로 좋아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하지만 둘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인생임을 서로는 안다.아버지와 아들의 삶은 서로 다른 듯 하면서도 닮아 있다고 느끼는 것은 왜일까.'인생'과 '꿈' 에 대한 이야기라 볼 수 있는 바리코의 소설은 우리네 삶을 보는 듯 하여 지루하지 않고 낯선 작가이지만 이 작품만으로도 그를 기억할 수 있을 듯 하다. 삶이란 무어라도 딱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자신의 가슴이 뛰는 일을 위하여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어떻게 살아도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누구나 후회를 하게 마련이다.그렇다고 모든 길을 다 가볼 수도 없기도 하지만 쉽게 오른 정상은 또 쉽게 내려오기 마련이기 때문에 한번의 성공보다는 몇 번의 실패를,결과보다 과정을 더 값지게 생각을 하기에 울티모의 길을 더 재밌게 읽지 않았을까.

 

'살아가면 어떻게 평탄한 길만 원할 수 있을까.'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고 본다.반환점에 다가온 나이가 되다보니 친구들과 가끔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돈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긴다면 늘 주머니가 가볍다고 걱정할 것이지만 그와는 조금 거리가 먼 마음에 더 중점을 두고 있어서일까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가고 있지만 늘 무언가 이루려는 꿈은 잃지 말고 살아가자고 생각을 한다. 울티모를 힘든 전쟁 상황에서도 버티어내게 한 것은 가슴에 간직한 '꿈'일 것이다. 자식을 키워 오면서 어느 순간 나 또한 자식에게 부모의 꿈을 강요하며 살아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다행히 딸들은 엄마는 늘 자신들의 편이었다고 말해주는 것이 고맙다. 남들 눈에는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지만 말이다. 늘 자신에게 '내편'이 있고 '내꿈'을 응원해줄 이가 있다면 더 자신감이 생긴다. 비록 울티모가 가족과 가까이 하지는 않았지만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아버지가 혹은 어머니가 자신의 꿈을 응원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부모는 자식의 꿈을 지지만 해줘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한번더 느껴본다.그리고 또 한사람 엘리자베타라는 여인이 그의 꿈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울티모에게는 대단한 응원이다.울티모의 길을 따라가며 잠시나마 내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되는 소설이었다. 지금 제대로 내 길을 가고 있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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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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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길을 가다가 너무도 이쁘게 핀 나팔꽃이 있어 나팔꽃씨를 받아 울집 행운목 화분에 뿌려 두었다.그리곤 잊고 있었는데 싹이 트고 벤자민을 감고 올라가 꽃이 하나 둘 피더니 급기야 씨도 맺고 다른 화분에서도 나팔꽃이 자라는 것이다.그렇게 우연하게 우리집에 온 나팔꽃씨는 그해 뒤로 십여년이 넘게 울집 화분 어딘선가 잊을만 하면 하나 둘 올라와 싹을 틔우고 꽃을 보여준다.고층에 위치한 관계로 실외기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서 핀 나팔꽃이 씨를 맺어 떨어진 것인지 아파트 화단에도 가끔 울집 나팔꽃이 '날 좀 봐줘!' 하고 피기도 한다. 푸른 빛의 울집 나팔꽃,올해는 주인장의 게으름 때문인지 아직 그 싹을 못 보고 있지만 잊을만 하면 언젠가는 다시 핀다.

 

내가 알고 있는 나팔꽃은 푸른빛 아니면 보라색계열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란 나팔꽃' 이 있다면 어떨까? 노란 나팔꽃이 가진 특성을 뺀다면 색으로는 정말 이쁠 듯 하다. 울타리마다 노란 나팔꽃이 핀 것을 상상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런데 '노란 나팔꽃' 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길래 무서운 금단의 꽃,몽환화라 불릴까? 소설은 두개의 프롤로그만으로도 큰 기대감을 불러 일으켜 빨리 그 결말을 맛보고 싶게 만든다. 첫번째 프롤로그에서는 출근시간에 갑자기 일본도를 들고 뛰어 나온 남자의 칼에 평범한 시민들이 죽음을 맞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리고 두번째 프롤로그에서는 매 해 '나팔꽃 축제'를 구경가는 소타네 가족,하지만 소타는 나팔꽃에 흥미도 없고 가기도 싫다. 가기 싫은 축제 구경이라 그런지 양말도 신고 오지 않아 발에 상처가 나게 되고 그 이유로 가족과 떨어져 있다가 한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짧은 첫사랑을 경험하게 된다.그런데 왜 갑자기 그녀는 연락을 끊은 것일까? 아버지의 협박이 있었을까? 아님 다른 이유에서일까?

 

"앞으로는 조심하거라. 세상에는 다른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는 것 같구나.슬픈 얘기지만."

 

아키야마 리노는 거리를 걷다가 그의 사촌 '나오토'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왜 갑자기 그가 죽어야 하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나오토의 가족도 그와 함께 한 멤버들도 그의 죽음을 둘러 싼 이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미궁속으로 빠져든다.그리고 이어진 죽음,리노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살해를 당하게 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집안에 정원에서 꽃을 가꾸는 취미로 살아가고 계신 할아버지,누가 무슨 이유로 그런 할아버지를 죽게 만들었을까? 아키야마 슈지의 죽음은 아무리 조사를 해도 그 끝을 알수 없는 길로 치닫고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는다.그러다 리노가 할아버지 정원에서 화분 하나가 없어진 것을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 할아버지가 '노란 꽃' 이 피었다고 좋아했지만 블로그에는 올리지 못하게 했던 화분, 노란 꽃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것일까? 할아버지는 연구소에서 이런류의 연구를 하던 분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식물'이 죽음에 이르게 했을 것이란 이유가 되지만 노란 꽃의 정체 또한 오리무중이다.

 

슈지 노인의 죽음을 조사하는 하야세,그는 불륜으로 인해 아내와 아들 유카와 떨어져 홀로 지내고 있는데 슈지 노인이 아들의 억울함을 증명해준 적이 있어 그의 죽음에 대한 열쇠를 꼭 풀어야만 한다. 그의 아들은 다른이가 아닌 아빠가 살해범을 잡기를 원한다. 그리고 '노란 꽃' 의 열쇠를 찾으러 다니는 또 한사람 소타의 형 요스케,그는 소타와는 배다른 형이기도 하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형으로 이어진 가업이나 마찬가지인 경찰의 피와 무언가 집안의 비밀을 소타만은 알지 못하게 하며 그만의 조사에 나선다.모두에게 제외 된 인물과 같은 소타와 리노는 한 팀이 되어 그들만의 추리로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조사에 들어간다.정말 노란 꽃이 할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그리고 나오토가 죽은 후에 그룹에 멤버가 된 키보드 '이바 다카미' 그녀는 왜 또 사라진 것이며 살인사건에 그녀는 무슨 이유로 얽힌 것일까.

 

이 소설은 십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왔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에 대한 반감이 소타의 자신의 전공에 대한 상실감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올림픽 후보 선수로까지 나갈 정도의 월등한 수영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감을 잃어 자신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리노를 보노라면 현재의 젊은이들을 보는 듯 하여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소타의 가족의 가족의 비밀과 아픔을 소타에게만은 전해주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을 한다.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든 아픔을 감싸고 나가야 하는 그 시간 속에서 혼자 외톨이처럼 느껴야 했던 소타의 방황은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되고 할아버지 대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비밀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 더 단단해진다.그런가하면 비밀의 여인처럼 숨겨져 있던 '다카미' 또한 가족의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길에 흔들림없이 잘 걸어가고 있다.

 

'생존을 계속하면 허락받은 것일까.있는 것은 있는 대로 둔다는 게 내 생각이야. 거꾸로 말하면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도록 둔다는 거지. 어떤 씨앗이 사라졌다는 것은 사라질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야.노란 나팔꽃이 사라진 것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야.'

 

누구나 힘들면 어디에 기대고 의지하고 싶어진다.그것이 자신을 헤치는 약물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순간의 쾌락으로 자신의 고통을 잊고 삶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이들이 점점 약물에 빠져 들고 자신까지 헤하는 이야기를 가끔 접하기도 하는데 그런 이들에게 몽환화는 음지의 꽃이라 할 수 있다.노란 나팔꽃에 얽힌 역사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에도시대에 가게 되고 그 시간에 얽힌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씨실과 날실로 얽혀 재밋는 그림을 그린다. 서로의 조사 방법은 달랐지만 노란 나팔꽃에 얽혀 있는 이들의 삶을 꿰뚫고 들어가다 만난 진실과 거짓처럼 히가시노 게이고는 또 한번 인간 내면의 그 깊은 바닥을 긇으며 삶의 과정이 어떠해야 하는지,각자의 무게가 다 다른 사람의 무게를 스스로의 힘으로 지고 나가며 이겨 나갈 것을 말하고 있다.버겁다고 내려 놓고 포기 하거나 멈추기엔 아깝고 살아 볼 가치가 있는 삶이다.

 

소설에서 그의 전공이나 취미가 식물학과 어우러져 멋진 그림을 그려낸다.두개의 프롤로그가 왜 필요했는지 하나 하나 장치를 풀어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약물에 의지해 자신을 해하고 타인까지 해하게 된 사회악과 같은 사건과 우연처럼 만났던 인연이 필연처럼 나팔꽃 때문에 다시 만나 지난 날 풀지 못했던 오해의 시간을 원점으로 돌리 듯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서로의 무게만큼 다시 간격을 둔다.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의 작가라 호불호가 나뉘는데 자신의 특기와 전공을 잘 살리면서도 끈기가 있는 작가여서 작품마다 읽게 된다.이 작품 또한 홀로 사는 노인인 아키야마 슈지의 죽음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강도 살인사건으로 볼 수 있는데 노란 나팔꽃이라는 식물이 얽혀 들면서 역사적이면서 소타의 전공이 더해져 원전까지 더해지니 이야기는 더 풍성해지고 노란 꽃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하여 경찰과 요스케 그리고 소타와 리노와 비밀의 여인 다카미까지 모두가 함께 뛰고 있어 잠시도 쉴 틈 없이 읽게 된다.자살사건과 살인사건,노란 꽃의 역사와 비밀 그리고 삶의 무게와 진실이 나팔꽃 덩굴처럼 얽혀 몽환화처럼 피어난다.지금 삶의 무게가 무거워도 기꺼이 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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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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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세간을 떠들썩 하게 만든 '진주 운석' 사건,그로인해 우리나라에서도 운석에 대한 것들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한동안 진주는 운석사냥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그런가하면 운석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또한 이목을 끌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우주에서 떨어진 스톤로또에 대한 사람들이 기대치가 운석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떨어지는 운석에 그것도 자신의 욕실에서 머리에 맞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물론 운석을 발견할 확률보다 더 불가능한 확률일 것이며 이런 경우가 정말 존재할까 싶은 그런일이 소설 속에 그려진다.

 

욕실 천장을 뚫고 날아든 운석을 맞기 전에는 '알렉스 우즈'는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그렇지 않다면 평범하지 않은 소년이었다. 이목이 그렇다는 것이다.그의 엄마는 영혼에서 보내는 메세지를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타로점을 보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며 혼자 힘으로 우즈를 키우고 있다.그에겐 생물학적인 아버지는 거론된 적이 없기도 하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그는 고양이 루시퍼를 언니처럼 여기고 살고 있고 집안에서 생식이 가능한 것은 고양이 루시뿐이다.그 속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소년이 열 살에 욕실천정을 뚫고 날아든 운석에 맞으면서 그의 삶은 180도 변했다고 볼 수 있다. 이주일여 코마 상태에 빠져 있던 그는 천국인지 현세인지 모를 세상을 향해 눈을 뜬다.그것이 운석을 머리에 맞고 이주일이 지나고 난 후이기도 하지만 그의 머리엔 영광의 상흔이 남게 되었다.그로 인해 간질을 앓게 되고 학교에서는 왕따아닌 왕따와 같은 삶을 살게 되기도 하고 간질로 인해 학교를 쉬게 되면서 책과 친하게 되고 과학과 의학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러다 다시 학교에 가게 되지만 그의 무력함은 나아지지 않고 축구부 친구들에게 늘 표적이 되어 힘겨운 학교생활을 이어가던 중에 짖꿎은 축구부친구들의 장난에 피터슨이라는 사람의 온실에 숨어들게 되고 월남전 참전용사이며 숨어 살 듯 하는 피터슨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그래,뇌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한테 그 사람만의 우주를 만들어주지. 우리가 아는 것, 보고 만지는 것, 느끼고 기억하는 것 모두가 뇌 안에 담겨 있어.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한테 만들어준 거야. 뇌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무섭다고 하지.하지만 오히려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까."

 

머리에 운석을 맞고도 살아 남았으니 우즈는 그야말로 지역의 명물중에 주요인물이라 할 수 있다. 외톨이 생활을 하는 피터슨마져 '알렉스 우즈'를 알 정도로 지역에서 그의 사고는 유명세를 타고도 남았다.그런 그가 피터슨의 온실에 뛰어들어 유리도 깨고 온실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발뺌을 한다. 이 소년의 말을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우즈의 엄마는 피터슨에게 우즈의 도덕적이 교육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켜달라고 한다.용서의 의미에서 말이다.그렇게 하여 피터슨과 우즈의 만남은 우연이 필연인 것처럼 연결고리가 이어지게 되었다. 피터슨으로 말할것 같으면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그에게 수렴한듯이 인생 자체가 불행과 같은 사나이다. 아내도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자식도 없다. 월남전으로 입은 피해로 인해 한쪽 다리마져 정상이 아니다.그런 그는 <커트 보네거트>라는 작가를 좋아해서 그가 유기견센터에서 데려 온 개의 이름마져 '커트'다. 커트가 유일한 그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처지에 우즈가 그의 삶에 끼어 든 것이다.월남전에 참전했기 때문에 그는 평화주의자이며 그의 힘이 필요한 곳에 편지를 써서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피터슨이 괴팍한 은둔자라고 한다면 우즈는 운석에 맞고 뇌수술을 거친 후에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 모자란 듯이 바라본다.하지만 가끔 잠깐씩 일어나는 간질증세만 빼고 그는 지극히 정상적이며 또래보다 조금 높은 독서열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운석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운석이 아니었다면 과학과 우주 의학에 관심이 생겼을까.평범한 십대처럼 그도 평범한 십대로서의 관심에 이끌렸을 것이다.그런 그가 운둔자 피터슨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은 많이 변하게 되고 그도 <커트 보네거트>라는 작가에 빠져 '커트 보네거트 세습 교회'라는 독서회도 만들게 되고 불치병에 결려 '자살' 혹은 '안락사'를 하려는 피터슨을 도와 그의 안락사를 도와주게 된다. 이 부분에서는 <미 비포 유>라는 소설을 생각나게 했다.그 소설 또한 평범한 삶을 살던 젊은 사업가가 뜻 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전신마비가 되면서 안락사를 선택하지만 가족의 반대에 부딪히지만 그를 도와준 간호조무사를 통해 안락사를 하게 된다. 자신의 삶이고 죽음인데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안락사를 옹호하는 소설처럼 비취질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이나 <미 비포 유>나 읽다보면 당사자의 선택을 받아 들이고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운석이 집 천장을 부수고 들어오는 건 날마다 있는 일은 아니지."

 

처음엔 운석에 맞은 평범한 십대 소년의 이야기가 그려져서 평범한 아니 환상문학인가 했는데 심오한 뜻을 가진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작가의 처녀작이라는 것에 놀랐다.그런가하면 진주운석 사건이 있었기에 좀더 이야기에 더 빠져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소년 또한 자신에 머리에 떨어진 '금속돌'을 팔았다면 로또를 맞은 것처럼 거금을 손에 쥐어 현재의 삶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하지만 소년은 자신의 운석이 놓여야 할 자리를 잘 알고 박물관에 기증을 한다.자신만의 운석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운석에 맞아 뇌수술을 받고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그는 그만의 긍정의 힘으로 독서에 빠져들게 되고 그의 삶은 우물안과 같은 지구가 아닌 우주를 생각하게 되고 삶과 죽음이 그 끝을 알 수는 없지만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고 시작된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인간의 삶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우주의 삶에서 탄생이 있고 그 끝이 있다. 그렇게 하여 운석이 자신에게 왔듯이 은둔자 피터슨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별 볼일 없는 삶일지 모르지만 그에게 맞는 삶이 있고 죽음이 있음을 죽음을 겪어 본 소년은 알게 된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한 뜻하지 않은 생과 사의 진정성에 피터슨이 선택한 죽음 또한 옳다고 보는 소년 우즈,그의 삶과 우주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저자 때문에 알지 못했던 작가를 한 명 또 알게 되어 그의 작품을 검색해 보고 다음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커트 보네거트> 소설속에서처럼 그의 작품을 가지고 독서회 정도는 가지 않겠지만 한번 읽는다면 우즈처럼 빠져들게 될까? 어떻게 보면 우즈의 엄마가 보는 타로점처럼 우연처럼 뽑아 든 카드가 마법의 세계로 이끌 듯 빠져들며 소설에 집중하게 만든다. 처음 뽑아 든 카드게 불행이었지만 그 끝은 결코 불행이라 할 수 없는 심오한 감동과 여운을 안겨주면서 저자를 기억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과 <미 비포 유>를 함께 읽어보면 더 좋겠고 안락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터슨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생은 책임질 수 없지만 죽음이란 그와는 달라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을 읽으며 한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던 시간을 뒤로 하며 갑자기 내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고 내 삶은 바른 길로 잘 가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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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패키지 - 성공의 세 가지 유전자
에이미 추아.제드 러벤펠드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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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세 가지 유전자'라는 부제로 에이미 추아와 제드 러벤펠드가 쓴 '트리플 패키지',어떤 사람들이 성공을 할까? 성공의 결정적 비밀이 무엇인지 부부가 20여년간 연구로 밝혀낸 글이라 하는데 '성공'이란 정의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의 기준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개개인의 차가 있겠지만 어느 특정 집단이 전체 미국인 평균에 비해 엄청난 성공을 구가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한 것을 예로 든 듯 하다. 인도계 미국인은 평균보다 2배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으며, 이란계, 레바논계, 중국계 역시 고수입을 올리고 있고 지난 30년간 모르몬교는 재계를 주름잡는 리더들을 수없이 배출했다고 한다.유대인의 뛰어난 성취는 잘 알려져 있고 그들은 미국 인구의 2퍼센트지만,대법원 판사의 3분의 1, 토니상 수상자의 3분의 2, 노벨상 수상자의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한다.에미미 추아와 제드 러벤펠드는 부모의 경제력 교육수준,지능,제도 등과 무관하게 높은 학업성취와 물질적 성공을 거두는 그룹들을 분석하여 트리플 패키지를 추출했다.

 

성공을 거두는 그룹에서 찾은 성공 요인으로 '성공한 집단의 세 가지 문화의 힘'을 들고 있다. 그 첫번째로는 '우월 콤플렉스' , 트리플 패키지에서 정의 내리기가 가장 수월한 요소로서, 집단의 특별함, 혹은 우월성에 깊이 내면화된 믿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믿음의 근원은 아주 다양하다.모르몬교도의 경우처럼 민족의 장엄한 역사와 문명에서 비롯된 믿음일 수도 있다.두번째로는 '불안감'을 들고 있는데 불안감은 일종의 불만이라 할 수 있다. 사회에서 자신이 어떤 가지를 지니고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초조함,자신이나 자신이 한 일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근본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이나 근심이다.불안감은 멸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위험하다는 인식,미진한 느낌,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 여러 가지 형태를 띨 수 있다. 세번째로는 '충동 조절', 우리가 생각하는 충동 조절의 의미는 유혹,특히 시련이나 어려운 과제 앞에서 포기하고픈 유혹을 이겨내는 능력이다. 충동 조절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는 없다. 프로이트의 생각대로,문명은 성적이고 공격적인 원시적 본능을 억누르는 것으로 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그렇지만 비교적 관대한 미국이라는 배경에 맞지 않게 어떤 집단들은 유달리 충동 조절을 강조한다.

 

저자 제드 러벤펠드는 <살인의 해석>이란 소설로 재밌게 만났는데 이런 책에서 만나니 반갑기는 한데 이 책이 문제시 된 것은 특정 집단이나 특정 유전자에 국한하였기 때문인 듯 하다. 성공의 요인을 갖춘 특정 유전자나 특정 집단이 있다고 보진 않는다. 성공을 향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가 더 중요하지 어느 집단이나 유전자로 성공을 논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는 듯 하지만 그들이 제시한 '우월 콤플렉스,불안감,충동 조절' 등은 특정인으로 한정하기 보다는 평범한 우리네 삶 속에서도 부딪힐 수 있는 요인들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왜 특정 민족,특정 집단이 더 우수한가?' 라는 그 현상을 파헤쳐 찬반양론으로 들끓게 한 책이라지만 읽어보면 재밌는 부분들도 있고 책의 반 정도가 '주석' 으로 채워져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뭔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책이다.

 

우리는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잘되었다고 하면 성공했다고 한다. 어느 관점에서 성공이라고 해야할까? 부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얼마만큼의 양적 질적 충족을 이루었을 때 성공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성공이란 동전의 양면성과 같은 두얼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분명 성공이란 이름을 얻었을 그 이면에는 내가 이루지 못한 '실패'라는 다른 얼굴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프로이트이 '가보지 못한 길'처럼 내가 가지 않은 길은 실패라고 볼 수 있고 부모의 욕심으로 채워지거나 부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물려 받거나 부모에 의한 성공은 성공이라기 보다는 강요라고 보고 싶다. 자신의 꿈이 없는 성공을 그대로 자신의 것인양 자신에게 걸치고 있는 성공은 글쎄.어릴 때부터 경쟁속에서 일등을 강요받고 성장한 우리 아이들이 '충동 조절'이 부족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과는 다를 것이고 미국사회와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에 무겁게 읽기 보다는 이런 방법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구나 하고 읽었다.

 

생각해보니 우린 누구나 오늘이라는 시간을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은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그날의 성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불행한 것도 아니고 오늘 채우지 못한 것을 내일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는 내일을 보내게 될 것이다. 부모로부터 물려 받거나 유전적인 요인으로 쉽게 성공을 거머쥐기 보다는 자신의 노력으로 값지게 얻은 성공이야말로 더 값지고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쉽게 이룬 것은 의미가 없다. 좀더 힘들고 험난한 과정을 거친 것이야말로 진짜 자신의 성공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특정 집단이나 특정 민족으로 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노벨상을 받거나 아이비리그에 가야만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값진 삶이 얼마나 많은가.나눔을 실천하면서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이들도 많기 때문에 '트리플 패키지'는 성공하고 싶은 이들이 한번쯤 참고로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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