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




라파엘전파가 등장한 시기는 인류와 자연과의 관계가 급격히 변화하던 시기였다.
1851년 인구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잉글랜드와 웨일즈Wales 인구의 대다수가 소도시와 대도시에서 살았다.
산업화와 도시의 성장 그리고 이에 따른 대기오염이 이 시기에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러스킨은 제조공장의 짙은 연기를 ‘19세기의 먹구름’으로 표현했다.
당시 빅토리아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많은 사람이 산업화와 번영을 국가의 진보로 보았지만 러스킨은 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경제발전을 위해 자연환경의 파괴와 도시의 사회적 문제라는 대가 톡톡히 치르고 있다고 보았다.


라파엘전파가 탄생한 해에 영국에서는 1840년대의 마지막 대격변인 차티스트 운동Chartist movement이 일어났는데, 차티즘Chartism은 최초의 공장 노동계급운동으로 그들은 남성들의 보통 선거권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차티스트들이 런던 중심부에서 케닝턴 코먼Kennington Common으로 비폭력 행진을 했을 때 밀레이와 헌트가 호기심으로 대열에 참가했다.
그러나 라파엘전파는 차티스트와 같은 정치적 노선을 걷지는 않았다.
1850년대에는 대중적인 시위가 점차 줄고 중산계급이 부상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근대화의 자랑스러운 상징인 철도교통망이 완성됨으로써 전례 없는 이동의 자유가 이루어졌다.
영국 대륙과 그 식민지, 그 밖의 세계들로부터 유입된 자원과 기계제품들은 만국박람회에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경제적 부흥을 예고했다.
이 시기에 중산계급은 신념에 차 있었으며 경제적 부의 축적으로 인해 미술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라파엘전파 구성원들 중에 특히 헌트와 밀레이가 직접적으로 이득을 보았는데, 헌트는 1860년 화상 어니스트 갬버트Ernest Gambart에게 자신의 작품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찾다 The Finding of the Saviour in the Temple>를 5,500파운드라는 엄청난 돈을 받고 팔았다.
이 작품은 누가복음 2장 45-46절 가운데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어린 예수를 찾는 장면이다.
생생한 현실장면을 재현한 화면은 두 개의 대립되는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왼편에 혼란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성서학자 랍비들의 무리가 있고, 오른편에는 성가족이 피라미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관람자가 보기에 대립적인 두 요소는 옛 섭리와 새로운 섭리의 만남, 구약의 유대세계와 신약의 기독교세계와의 만남이란 의미를 지닌다.
랍비들의 믿음을 시대에 뒤떨어진 답답한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왼편 끝의 늙은 랍비가 율법 두루마리를 부여잡은 채 율법의 정신보다는 문구에 매달린 모습으로 표현한 의도는 19세기 중엽 영국 문화에서 일반화되어 있던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반영한 것이다.
화려한 사원의 형태는 예루살렘에서 새로 발굴된 유물을 참고로 했지만 대부분의 디자인은 런던 남부의 수정궁에 있던 그라나다Granada의 알함브라 궁전Alhambra Palace을 도해한 오웬 존스Owen Jones의 책을 참고로 한 것이다.
라파엘전파의 작품을 구입한 사람들은 대부분 주식중개인, 직물제조업자, 선박계의 부호들이었다.


라파엘전파가 결성된 지 7년 후인 1855년에 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각각 자신의 길을 걸었다.
헌트는 중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에피 그레이가 러스킨과 이혼하고 밀레이와 재혼한 사건은 러스킨이 밀레이와 반목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그 밖에도 구성원들 간에는 성향의 차이가 있었다.
로제티는 자연 그대로를 묘사하는 작업을 하지 않았고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오히려 공상적인 중세의 이야기였다.
밀레이는 1853년 왕립미술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자 이전의 급진적인 태도를 버렸다.
그러나 라파엘전파의 중요하고 개성적인 작품 대부분은 1850년대 후반에 나왔다.
로제티, 헌트, 브라운은 비록 독자적으로 작업했으나 나름대로 풍부한 이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었다.
밀레이는 1855년 이후 풍경화에 인물화를 접목시켜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그리게 되었다.
초기의 어지러울 정도로 세밀하던 극사실주의 대신 색채들 간의 조화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이야기 서술에서 벗어나 감각에 호소하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로제티는 초기의 라파엘전파 양식을 떠나 점차 전위적인 미술가 그룹을 주도했는데, 이 그룹에 윌리엄 모리스와 그의 아내 제인 모리스, 번-존스, 엘리자베스 시덜, 프레더릭 샌디스Frederic Sandys(1829-1904), 시미언 솔로몬Simeon Solomon(1840-1905) 등이 포함되었다.
1860년대 로제티와 관계한 그룹의 작품들을 라파엘전파 양식으로 묶을 수 없는데 자연에 대한 묘사에 충실하는 것과 풍자적인 서술 구조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로제티의 상상력을 자극한 중세주의 같은 몇몇 주제는 이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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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공예Arts and Crafts운동 1>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미술공예Arts and Crafts운동은 기계생산으로 인한 공산품의 질 저하에 대한 불만족으로 수작업의 공예품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중세의 직인제도에 대한 향수가 내재된 이 운동의 사상은 건축가 오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어 퓨진Augustus Welby Northmore Pugin(1812-52)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윌리엄 모리스에게 영향을 끼친 존 러스킨의 저작에 잘 나타나 있다.
가구, 은그릇, 직물, 스테인드글라스, 보석 등을 디자인하기도 한 퓨진은 영국 건축 전체의 운동으로까지 확산된 고딕복고 양식의 제창자였다.
그는 저서 <대비 Contrasts>(1836)에서 기독교의 중심을 이룬 중세 건축물을 칭찬하여 당대에 유행하던 르네상스 양식의 경박함과 대비시켰다.
퓨진은 찰스 배리 경Sir Charles Barry(1795-1860)과 함께 1836년에 영국의 국회의사당을 착공했으며 이는 고딕 부활에 있어 최대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이런 고딕에 대한 취향은 나폴레옹의 전쟁을 통해 국수주의의 감정이 고조되었고 영국뿐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 고딕이 국민정신의 고유한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술가를 영감 받은 예언자로 본 러스킨은 미술의 위대함을 “신이 만든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미술의 성실함과 소박함을 회복하며 아카데미즘의 원류로 간주되는 라파엘로 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 라파엘전파의 옹호자로 나섰다.
러스킨은 퓨진과 함께 고딕양식의 부활을 주창했지만, 장식에 있어서는 퓨진과 달리 고전적 전통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예술과 건축은 신이 창조한 인간의 경이로움과 기쁨을 반영해야만 한다고 믿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영감을 받은 자연주의 형식이 요구되고, 고딕이야말로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술을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과 연결하는 그의 사상을 모리스가 받아들였다.
러스킨은 저서 『베네치아의 돌』에서 “아름다운 미술품은 의도적이든 우연적이든 자연의 형태를 닮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스킨의 책에는 그가 미술가들에게 세밀하게 연구할 것을 요청한 바위와 잎의 곡선 형태들이 뒤엉킨 모습을 묘사한 도판이 많이 실려 있었다.
그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모리스였다.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한 미술가들로는 아서 헤이게이트 맥머도, 월터 크레인, 찰스 로버트 애슈비,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를 비롯하여 글래고스 출신 건축가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 및 프란시스 맥도널드와 마거리트 맥도널드 자매를 꼽을 수 있다.
잉글랜드의 건축가이며 디자이너 아서 헤이게이트 맥머도Arthur Heygate Mackmurdo(1851-1942)는 러스킨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그와 함께 고건축물보호협회Society for the Protection of Ancient Buildings에 관여했다.
맥머도가 1882년에 세운 센추리 길드Century Guild는 다양한 기술을 보유한 장인들의 단체로 맥머도는 이 길드가 “공예의 모든 분야를 더 이상 장인의 영역이 아닌 미술가의 영역으로 만들고 건축물, 장식, 유리회화, 도자기, 목조각 그리고 금속을 그들의 정당한 자리인 회화와 조각의 옆자리로 되돌려놓은 것”이라고 천명했다.
센추리 길드는 아르누보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인식될 물결모양의 자연주의 장식을 실험했다.
맥머도는 1884년에 길드의 기관지로 공예전문지 <하비 호스(목마) Hobby Horse(Wooden Horse)>를 창간했다.
그는 등받이에 구멍을 뚫어 장식한 의자를 디자인해 유명해졌다.
이 장식은 나중에 아르누보로 규정되었다. 등받이를 장식한 비대칭의 덩굴식물은 1년 뒤 약간 변형되어 그의 저서 <렌즈 시티 교회 Wren's City Churches>의 표지에 다시 등장했다.

맥머도와 함께 미술공예운동의 전통에 속한 월터 크레인Walter Crane(1845-1915)은 미술공예전시협회Arts and Crafts Exhibition Society의 의장이었다.
그의 목표는 미술가를 수공업자로 만들고 수공업자를 미술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크레인은 미술의 진정한 근원과 토대는 수공업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론서는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공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확산에 기여했다.
모리스와 함께 사회주의연맹Docial League의 회원이었던 크레인은 모리스의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르누보를 “기이한 장식의 질병”으로 간주하고 적대감을 보였다.
그러나 크레인은 1890년대 유럽 아르누보 디자인의 초기 중심지 중 하나인 브뤼셀에서 전시한 최초의 영국 미술가이자 디자이너였다.
그곳에서 그는 1891년에 아동도서 삽화를 선보였는데, 1889년에 처음 출판되어 이제는 잘 알려진 그의 <꽃의 축제 Flora's Feast>와 같은 삽화에서는 벨기에 대중이 선호한, 자연주의 주제에 토대를 둔 운동감이 보였다.
문학적, 신화적 주제를 즐겨 그린 크레인은 아동도서에는 컬러그림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했다.
아르누보를 경멸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레인은 1900년 당시로서는 아르누보 미학에 대해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한 『선과 형태 Line and Form』라는 책자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는 미술공예운동의 전통 속에서 영국 디자이너들이 아르누보로 인식될 만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러스킨과 모리스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1888년에 수공예 길드를 설립하여 영국 미술공예운동에 앞장을 선 찰스 로버트 애슈비Charles Robert Ashbee(1863-1942)는 1887년과 1904년 런던의 이스트엔드에 수공업 학교School of Handicraft와 공예 학교School of Arts and Crafts를 각각 설립하기도 했다.
애슈비는 정규 교육을 받은 건축가로 모리스와 마찬가지로 건축과 장식미술이 모든 예술의 기본 토대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설립한 수공업 길드와 두 개의 공예학교는 비자본주의적 강령을 따랐으며, 그곳들에서 제작된 생산품을 가지고 단체 토론을 벌이곤 했다.
모리스 양식을 좇은 가구 외에 정교하게 조각되고 마무리된 은공예품이 이 공방의 특별 상품이었다.
애슈비가 1890년대 중반부터 제작한 사각형 가구는 국제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국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그가 1898년경에 디자인한 필기용 캐비닛은 아르누보 양식에 대한 그의 관심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작품이다.
이것은 1899년 런던에서 열린 미술공예전시협회전과 1900년 빈에서 열린 제8회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되어 빈의 한 가정에 판매되었다.
짙은 마호가니 외장에 구식의 구슬다리가 달린 이 캐비닛은 영국 고유의 가구 제작전통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당대의 유행이 반영된 부분은 서립의 손잡이를 이루는 정교한 투각 잎 무늬 장식판과 상단 문에 부착된 열쇠구멍 덮개와 띠 장식이다.
상단 문을 열면 본격적인 아르누보 양식이 드러난다. 여섯 개의 호랑가시나무 문에는 디자인된 튤립이 상감으로 장식되었으며, 은제 투각 자물쇠는 디자인된 잎 무늬로 장식되었다.
애슈비와 아르누보의 관계는 그가 근대적인 제작방식을 거부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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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공예Arts and Crafts운동 2>





애슈비는 1902년에 뮌헨미술아카데미의 명예회원에 위촉되었다.
같은 해에 그는 런던의 학교와 길드를 글로스터셔의 치핑 캠프든 마을로 옮겼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공예뿐 아니라 농업까지 새롭게 활성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애슈비와 그의 제자들은 잉글랜드와 파리, 빈, 뒤셀도르프, 뮌헨의 전시회에 출품했다.
애슈비는 결국 현대문명은 기계작업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그는 1911년에 현대문명은 기계에 있으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미술교육을 장려하거나 재정적으로 보조하는 시스템은 합리적일 수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주제에서, 예를 들면 아일랜드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1854-1900)가 1892년에 프랑스어로 쓴 기괴한 미와 환상의 시극 <살로메 Salome>를 위한 삽화나, 런던 태생의 시인이며 평론가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1688-1744)의 시 <머리카락을 훔친 자 The Rape of the Lock>(1712)에 나오는 퇴폐적인 18세기 풍경을 묘사한 후기 드로잉에는 아르누보의 모든 요소가 나타났다.
와일드의 아버지는 유명한 안과의사이며 고고학자였고 어머니는 시인이었다.
와일드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어로 하는 탐미주의를 주창한 것은 옥스퍼드 대학에 재학 중일 때였다.
1895년에 동성연애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년 동안 레딩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참회록 <옥중기 De Profundis>(1897)는 그 소산이다.
직물도매상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 때 앓은 병으로 평생 불구의 몸이 된 포프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고전을 익혔고 타고난 재능으로 스무 살 때 이미 시집 <목가집 Pastorals>을 발표했다.
<머리카락을 훔친 자>는 포프가 스물네 살 때 쓴 것이다.

1893년 2월 오랜 학교 친구인 스콧슨-클라크G.F. Scotson-Clarke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1872-98)는 완전히 새로운 드로잉과 구성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양식을 “일본을 암시하지만 완전히 일본적이지 않은”이라는 표현을 하여 적어도 자신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브라이턴의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교육을 마친 뒤 런던에서 독학으로 화화를 배우고 음악과 문학에 관심을 기울인 비어즐리는 번-존스의 권유로 판화를 배우기 위해 야학에 다니며 라파엘전파의 영향을 받았다.
1892년 파리에서 프레스코화의 영향을 받아 침묵하는 색조와 구도로 담백미를 풍기는 벽화를 주로 그린 퓌비 드 샤반Puvis de Chavannes(1824-98)을 만났고 툴루즈-로트레크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부터 에도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로 제작된 풍속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섬세하고 장식적인 양식을 확립했다.
1893년 월간지 <스튜디오 Studio> 창간호에 특집으로 실린 <나는 너의 입술에 입 맞추었노라 J'ai baise ta bouche>로 명명된 비어즐리의 삽화는 공중에 떠 있는 악마 같은 살로메가 피를 흘리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다.
영국과 유럽에서 구독되던 <스튜디오>는 비어즐리에게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이름은 아르누보 양식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이 1894년에 미국인 작가 해런드와 함께 창간한 <옐로 북 The Yellow Book>에 실렸다.
<옐로 북>은 퇴폐적 표현에 대한 비난으로 1897년에 폐간되고 그는 새로 <사보이 The Savoy>를 창간하여 스물다섯 살로 요절할 때까지 제작을 계속했다.
그의 작품은 아르누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던 국가에서 나타난 성숙된 아르누보 초기의 예가 되었다.

런던 리전트 스트리트Regent Street의 리버티상사Liberty Company가 날염한 직물은 또 다른 차원에서 미술공예운동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부유한 중산층 소비자를 겨냥해 가장 성공적인 소매점들 가운데 하나인 리버티상사는 아서 라젠비 리버티Arthur Lasenby Liberty(1843-1935)가 1875년에 첫 번째로 연 상점이다.
그는 스스로 ‘동인도 상인 East India Merchant’을 자처하며 동양에서 수입한 도자기, 카펫, 그 밖의 제품들을 팔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함부르크 출신의 화상 지크프리트 빙Siegfried Bing(1838-1905)도 파리에서 유사한 제품을 취급하고 있었다.
리버티상사는 영국 미술공예 제품, 특히 아치볼드 녹스Archibald Knox(1864-1933)와 같은 디자이너들의 웨일스 제품과 튜더 제품을 팔기도 하고 생산해냈으며, 또한 대륙의 아르누보를 런던의 구매자들에게 소개하고 리하르트 리메르슈미트Richard Riemerschmid(1868-1957)의 의자와 헝가리 상사인 졸네이의 도자기 같은 물품도 취급했다.
리메르슈미트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미술애호가의 방’을 위한 실내장식 계획을 전시했으며, 다음해에는 뮌헨에서 가장 유명한 세기말 건축물인 극장을 설계했다.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리버티상사는 유명한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을 상업적으로 생산한 자사의 가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서 라젠비 리버티는 1890년 파리에 1931년까지도 남아 있던 오페라 가 38번지에 지점을 열었으며, 이 상사의 제품, 특히 직물과 벽지는 헬싱키부터 밀라노까지 유럽 전역으로 판매되었다.
리버티의 성공은 ‘예술가구’를 좀 더 적정한 가격으로 직접 제작한다는 회사의 정책이 중산층 시장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리버티상사가 취향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르누보 이해에 중요한데, 유럽 아르누보의 많은 주요 인물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리버티상사는 1899년에 유명한 자사 제품인 은과 보석류의 쿰릭Cymric(웨일스Welsh 사람들이 선호한) 제품과 뒤이어 1901년에는 튜더식 백랍제품Tudric Pewter range을 출시했다.
보석상자, 벨트, 버클 그리고 모자핀 등으로 이루어진 이 금속제품들은 켈트부활Celtic Revivial과 르네상스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독특한 아르누보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녹스가 디자인한 1900년의 쿰릭 보석상자는 단순한 형태에 당대의 섬세한 곡선이 가미되고 아르누보의 느낌이지만 여전히 미술공예운동에 뿌리를 둔 절제된 선적 모티프로 장식되어 있다.
자사의 화가와 디자이너를 밝히지 않는 리버티상사의 방침으로 누가 무엇을 설계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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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 Art Nouveau>



19세기 후반 미술공예운동과 연계된 ‘새로운 미술’이란 뜻의 아르누보Art Nouveau는 19세기 후반 아카데믹한 역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국제주의 양식으로 과거 양식들을 모방하고 변화시키는 대신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려는 신중한 시도였다.
당시 미술은 과거의 양식들이 퇴화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소생하는 혼성모방의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들이 뒤섞인 부조화를 연출한 19세기의 주요 전시회들은 산업시대가 가져다 준 진보에 대한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진보주의 사상을 가진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에게는 역사주의를 탈피하고 자신들의 시대에 걸 맞는 양식을 창출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반면 보수주의 디자이너들은 전통적 장인정신과 우아함이라는 원칙을 폐기하기보다는 갱신하려고 했다.

시대에 부합하는 생활환경을 요구한 아르누보는 1880년대와 1890년대에 형성되어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몰려든 수백만의 유럽 관람객들을 통해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박람회는 112헥타르의 넓은 부지에 8만1천 명에 달하는 출품자들의 작품이 전시되었고, 전시 품목은 다양했으며 전통과 역사와 관련된 새로운 양식으로 건축, 실내장식, 가구, 도자기, 직물, 보석디자인 등 이었다.
아르누보는 채찍을 내려칠 때 형성되는 곡선, 비대칭적 덩굴손이 이루는 소용돌이패턴, 방랑자 같은 인물을 도식화된 기하학적 구조와 형태에 결합시켜 새로운 장식으로 창출되었다.

지크프리트 빙Siegfried Bing(1838-1905)의 잘 알려진 아르누보 빙Art Nouveau Bing 전시관은 아르누보 양식으로 간주할 만한 것이었다.
빙의 전시관 실내장식은 현대적이면서 전통 아르누보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1870년대 말 파리에 상점을 열고 일본 미술품 판매에 종사한 빙은 1888년에는 월간잡지 <미술의 일본 Le Japon Artistique>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1895년 12월에 파리의 프로방스 가에 아르누보 화랑을 열고 국제적인 화가와 디자이너의 작품, 특히 앙리 반 데 벨데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1898년경에 조르주 드 푀르Georges de Feure(1868-1928), 에두아르 콜론나Edouard Colonna(1862-1948), 외젠 가이야르Eugene Gaillard(1862-1933)와 같은 디자이너들의 가구와 제품의 생산을 조직화하기 시작했으며, 1900년의 만국박람회에서 빙의 전시관 실내장식을 맡아 찬사를 받았다.

아르누보의 가장 설득력 있는 대변인이자 흥행주였더라도 빙은 상업적 안목이 탁월한 사업가는 못되었다.
아르누보 발전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업은 단명했다.
1900년 콜론나가 제작하고 빙이 전시한 응접실 집기의자, 팔걸이의자, 테이블 세 점이 독일 크레펠트Krefeld의 카이저 빌헬름 박물관Kaiser Wilhelm Museum에 팔렸다.
이는 빙이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제작된 가구세트를 나누어서 팔아야 했음을 의미한다.
빙의 파리 화랑인 아르누보가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뒀다는 증거가 없다.
1904년 빙의 화랑이 문을 닫았을 때 재고 품목은 사업이 신통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핀란드 공예디자인협회는 드 푀르, 콜론나 그리고 가이야르의 가구, 도자기, 청동제품을 구입했다.
카이저 빌헬름 박물관이 지불한 가격은 테이블 하나에 450프랑, 의자 하나에 250프랑이었다.
빙은 파리의 장식박물관과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도 판매했지만 두 박물관은 빙의 제품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오늘날 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빙의 화랑에서 취급한 작품이 많다는 사실을 토대로 그의 성공을 가늠해서는 안 되는데, 드 푀르와 콜론나의 도자기를 포함해 상당수의 소장품은 1905년 빙의 아들 마르셀에게 상속되어 1908년에 박물관에 기증된 것이다.

초기의 아르누보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독일에서는 1896년 창간된 ‘젊음’이란 뜻의 잡지 <디 유겐트 Die Jugend>에서 유래한 명칭인 유겐트슈틸Jugendstil,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슈틸Secessionstil, 이탈리아에서는 아르누보 디자인 보급에 크게 기여한 리버티상회 이름을 딴 스틸레 리베르티Stile Liberty, 스페인에서는 모데르니스타Modernista로 불렸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1890년대 영국에서 시작된 점을 반영하여 모던스타일modern style로 통했다.

아르누보 양식은 “좋은 시대”로 불리는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eacute;poque를 맞아 국제적인 양식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30년에 해당하는 이 시대에 중산층은 번영을 누렸고, 자유로운 삶을 향유하면서 행복을 추구했으며, 당당한 부르주아는 쾌락을 추구할 수 있었다.
문손잡이에서 의자, 테이블, 램프, 샹들리에, 도자기, 직물, 보석디자인, 아파트 건축용 석재, 벽지, 상점 입구에 이르기까지, 건축과 장식미술 전반에 걸쳐 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이 양식은 사회적 계층을 뛰어넘어 일반인을 위한 포스터와 책자 및 각종 인쇄물을 비롯해 싸구려 보석과 공장에서 제작된 가구뿐만 아니라 부유층을 위한 사치품도 이 양식으로 디자인되었다.
아르누보는 다양성을 지녔으며, 엘리트적이면서 대중적이었고, 사적이면서 공적이었으며, 보수적이면서 진보적이었고, 풍요로우면서 단순했으며,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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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아르누보와 앙리 반 데 벨데>



벨기에, 프랑스, 독일의 아르누보에는 공통점이 많다. 자연에 대한 매료, 추상성, 곡선에 대한 관심, 상징주의와 정신주의에 대한 내밀한 관심, 그리고 현대적이기를 바라는 열망 등이 그 예이다.
영국 아르누보의 대조적인 두 경향인 찰스 로버트 애슈비와 오브리 빈센트 비어즐리의 양식, 즉 단순함과 호화로움, 도덕적인 요소와 퇴폐적인 요소는 영국의 미술과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인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의 벨기에 화가들을 통해 유럽 아르누보에 전해졌다.
아르누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곳이 벨기에였듯이 이 양식이 완성된 곳도 1890년대 초반의 벨기에였다.
벨기에는 네덜란드에 반대한 봉기였던 1830년 혁명 이후에 건립된 작은 나라로 풍부한 자연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산업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져 19세기 중반과 후반 세계에서 영국 다음으로 중요한 산업국가로 부상했다.
벨기에 왕국의 수도인 브뤼셀의 인구는 1850년에 12만 5천 명이었던 것이 1900년에는 19만 5천 명으로 증가했다.
브뤼셀은 아르누보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고 영국과 대륙의 매개역할을 수행했다.
벨기에 화가들은 영국의 영향 외에도 특히 프랑스의 상징주의와 후기인상주의 회화에 영향을 받았다.
벨기에 화가들이 급진적 색채를 수용할 수 있었던 데는 벨기에 정치상황이 한 몫을 했다.
1840년대 이래 벨기에에서는 처음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나중에는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이 정치를 좌우했다.
그래서 정치적 불만이 팽배해 있었고 1886년에 리에주Liege와 그 밖의 도시들에서 노동자들의 폭동과 시위가 일어났다.
벨기에 노동자당Belgian Workers` Party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노동자당은 특이하게도 전위적인 미술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벨기에 아르누보 양식은 처음에는 영국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곧 고유한 특성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앙리 반 데 벨데, 귀스타브 세뤼리에-보비, 빅토르 오르타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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