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 


추상이란 용어는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미술이라는 서구의 전통적 미술 개념을 탈피한 20세기의 회화와 조각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영국 시인이며 미술 비평가 허버트 리드Sir Herbert Read(1893~1968)는 『아트 나우 Art Now』(개정판 1948)에서 추상을 정의했다.
“관례적으로 어떤 미술품이 외적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미술가의 자각에서 출발했다고 할지라도, 더이상 대상에 기반을 두지 않는 독자적이며 일관적인 미학적 총체를 만들어 나가는 모든 미술품을 우리는 ‘추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의 추상은 1910~20년에 출현하여 10여 년 동안 그 특수한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오늘날 20세기 미술의 가장 특징적인 형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추상은 두세 개의 기본적 경향으로 추려낼 수 있다.
미국 미술사가이며 행정가 알프레드 바Alfred H. Barr(1902~81)는 『입체주의와 추상 미술 Cubism and Abstract Art』(1936)에서 “지나친 단순화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추상 미술을 두 개의 주요 경향으로 양분했다.
우선 말레비치Kasimir Severinovich Malevich(1878~1935)로 대표되는 첫 번째 경향은 “지적이고, 구조적이며, 건축적이고, 기하적이며, 직선적이고, 고전적인 엄격함을 지닌 논리와 계산에 기반한” 것이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로 대표되는 두 번째 경향은 “지적이기보다 직관적이고 감상적이며, 기하적이기보다는 유기적이고 생물적 형태를 취하며, 직선적이기보다는 곡선적이고, 구조적이기보다는 장식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을 고양시킨다는 점에서 고전적이기보다는 낭만적이다.”
이는 바의 관점이고 후대의 관점에서 보면 추상 미술에 세 가지 주요 흐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자연적 외관을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형태로 감축시키는 방법으로 브란쿠시의 조각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경우 ‘추상화하다 to abstract’라는 동사에는 ‘요약하다’ 또는 ‘응축시키다’라는 뜻이 있다.

둘째, 비재현적인 기본 형태들로 작품을 구축하는 경향으로 영국 화가 벤 니콜슨Ben Nicholson(1894~1982)의 부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단순한 기하 형태들이 종종 사용된다.

셋째, 즉각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잭슨 폴록Jsckson Pollock(1912~56)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경향의 대표적 미술가 대부분이 ‘추상’이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르프Jean (Hans) Arp(1887~1966)는 이 용어를 싫어했으며 대신 ‘구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이 선호하는 대안적 용어들은 더 정확할지는 모르지만 부르기에는 다소 번거로운 경우가 많은데, 그런 예로 주로 사용된 것이 비구상, 비재현, 비대상 같은 용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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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취리히 다다

세계대전은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고, 남은 이들에게 허탈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예술가들은 무차별한 살육장으로부터 안전한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로 피신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야만적인 행위와 부조리를 조장한다고 자소하면서 이성 자체에 거세게 반발했는데, 이 같은 자연발생적 혁명은 따지고 보면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그리고 상징주의 작가들의 우상과도 같았던 알프레드 재리의 작품에 등장한 기괴한 장면과 허세에서 이미 조짐이 나타난 적이 있었고, 데 키리코와 샤갈의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시각적인 환상들로 분출된 적이 있었다.
환상주의 혹은 형이상학의 예술가들로 알려진 데 키리코와 샤갈은 이성이 인간이 바라고 이루고자 하는 사고와 꿈을 실현시키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욕망과 꿈을 성취하기를 바랐다.
이 같은 경향이 파리의 미술계에 널리 알려질 무렵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취리히 다다를 결성한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인 독일인 후고 발은 어린아이들의 자연발생적이고 무책임한 요소를 환영하면서 이런 요소가 새 예술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1916년 일기에 적었으며 그해 취리히에서 다다가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이성에 대한 이 같은 반발을 발은 다다로 명명했다.
프랑스어 dada의 뜻은 아이들의 장난감 ‘목마’이다.
이 말은 발과 리하르트 휠젠벡이 사전에서 닥치는 대로 페이지를 열어 발견한 낱말이었다고 휠젠벡이 말했다.

취리히로 도피한 예술가들은 정신적으로 새 힘을 얻어 본능에 근거한 예술가의 자유를 구가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자연발생적인 것들, 환상들, 그리고 발명의 고유한 자유를 최대한으로 만끽했고 파괴야말로 창조라는 역설을 표어로 삼았다.
발을 중심으로 작가이자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된 휠젠벡과 루마니아인 시인 트리스탄 차라, 차라와 같은 나라 사람 마르셀 얀코, 독일인 화가이면서 조각가 장 아르프와 미래의 아내 소피 타우버가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모였다.
발은 자신의 볼테르 카바레에 전쟁으로 불만투성인 사람들을 초대하여 용기를 가지고 새 정신으로 무장하는 연합을 결성하자고 종용하면서 “전쟁과 민족주의의 이면에서 상이한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독자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전 세계에 알리자!”고 외쳤다.

그들은 처음이자 유일한 잡지 『카바레 볼테르』를 6월에 간행했다.
발은 서문에서 다다란 말을 사용했는데, 다다란 말이 프린트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잡지에는 아폴리네르, 아르프, 발의 오랜 여자친구 에미 헤닝스, 얀코, 칸딘스키, 마리네티, 휠젠벡, 모딜리아니, 피카소, 데 키리코, 에른스트, 피카비아, 마르크, 오스카 코코슈카, 그리고 차라의 글과 그림이 실렸다.
이 잡지는 1916년 11월에 뉴욕에 도착했으며, 데 자야는 11월 16일 차라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난 이제 막 9월 30일자로 쓴 자네의 편지와 10권의 흥미 있는 다다 간행물을 받았네.
… 그것들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네.
뉴욕의 서점에서 자네의 간행물을 팔 수 있도록 알아봐야겠네.”

차라는 그룹의 미학적 대변인이었으며, 7월에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La premiere aventure celeste de Monsieur Antipyrine』을 출판했으며, 컬러 목판화를 얀코가 제작했다.
차라는 저서에서 다다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다다는 우리의 맹렬함이다.
다다는 독일 아기의 수마트라인 머리를 이치에 맞지 않는 총검들로 장치한다.
다다는 양탄자 슬리퍼나 유사한 물건들이 없는 인생이다.
다다는 통일을 원하면서 또한 통일에 적대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분명히 적대한다.
… 다다는 훈련이나 도덕이 없는 가혹한 요구이며, 우리는 인간성에 침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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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희망


“나는 앙리 베르그송과 니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변화와 인생은 동의어이다.
… 변화는 인생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뒤샹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는 두 철학자의 저서를 읽지는 않았다.
그는 어떤 종류의 책도 열심히 읽은 적이 없었다.
그는 훗날 니체와 같이 복잡한 생각을 가진 사람의 저술을 읽을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고를 전달하는 데 언어가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그는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일은 전혀 불가능하다”면서 “우리가 생각을 말이나 문장으로 표현하려는 순간 우리의 생각은 모두 달라지고 만다”고 했다.
그가 가장 신뢰한 언어의 형태는 시였다. 말라르메의 시를 특히 좋아했고 “언어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고 제자리에 있을 수 있는 곳은 시다”라고 했다.

1910년 2월 20일자 『르 피가로』 일면에 이탈리아 밀라노인들의 ‘미래주의 선언문’이 크게 보도되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신문을 수백 장 구입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일일이 발송했다.
미래주의는 원래 문학운동으로 1908년 시인 필립포 토마소 마리네티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선언문들이 1909∼1910년에 연속적으로 발표되었다.
미래주의는 한마디로 밀라노인들의 운동으로 이탈리아의 문화를 재건하려는 자주적인 노력이었다.
첫 선언문에서 그들은 과거에 속한 도서관, 뮤지엄, 그리고 학교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네티의 이탈리아 문화재건운동에 움베르토 보치오니, 카를로 카라, 루이지 루솔로가 1909년 초에 동조했고 지노 세베리니와 자코모 발라가 나중에 가세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입체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속력과 과격한 행위, 동력적인 운동,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면서 운동을 정지시키고, 미묘한 색조를 사용하여 명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그림을 주로 그리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입체주의 회화공식에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그들은 기계문명을 찬양하여 빠른 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와 기차를 문명의 자랑스러운 자식들로 여겼으며, 나중에는 전쟁을 세계를 재건하는 위생학이라는 위험한 생각까지도 했다.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은 파리의 모든 예술가들도 품고 있던 믿음이었다.
벨기에의 상징주의 시인 에밀 베르헤렌은 1909년에 예언적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미래여, 나의 신이 나를 한번 의기양양하게 했던 것처럼 네가 나를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노래했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마리네티가 1910년에 파리에서 발표한 선언문에는 “현대 도시의 혁명적인 무수한 색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다성곡, 반짝이는 전기의 달 아래 군수품 창고와 항구의 한밤중과 새벽 … 공장들은 방사한 연기가 만든 구름에 매달려 있다”고 적혀 있는데,
공장에서 방사하는 매연은 오늘날 반드시 퇴치시켜야 할 오염물질이지만 마리네티에게는 기계문명의 향기처럼 아름답게만 보였다.
기계의 발달이 미래주의 예술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그들은 도시생활을 찬양했고, 도시의 장면들을 주로 그렸으며, 문명의 자식답게 정장 차림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유행을 따라 무늬가 있는 양말에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
그들은 과거 미술의 사망과 미래 미술의 시작을 공표했다. 선언문 발표하기를 좋아한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열서너 편의 선언문을 연속적으로 발표했다.

마리네티가 처음 선언문을 발표할 때 그의 나이는 30살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물의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변호사 아버지는 그가 장차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했으며, 아버지의 바람에 부응하여 그는 제노바대학에서 법을 전공했지만 문학에 관심이 생기자 파리로 가서 상징주의 그룹의 작가들과 어울렸다.
그는 “과거의 연못으로부터 공포적인 유령이 악성 유행병 연기처럼 태어난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정신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아폴리네르는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문’을 읽고 “그가 마비된 이탈리아를 깨웠다.
그는 프랑스를 예로 삼았는데 프랑스는 예술과 문학의 선진국이다”라고 했다.
마리네티는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에 심취하여 니체가 말한 초인을 자신의 영웅으로 삼았다.
그는 선언문에서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문명화된 가치들에 대적하며”라고 했는데 이는 더욱 니체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파리의 베른하임 준 화랑에서 1912년 2월에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들의 그림 38점이 이 화랑에서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은 1906년부터 파리에 거주한 세베리니와 프랑스인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베리니는 로마의 동료 예술가들에게 파리로 가서 전시회를 열 것을 권유했으며, 미래주의 예술가들의 선두주자 보치오니는 예술의 수도에서 전시회가 성공한다면 그들이 표방하는 미래주의는 전 세계로 파급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세베리니는 브라크와 피카소의 친구로서 동료 예술가들을 두 사람에게 소개하여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피카소를 중심으로 모이는 작가들 야곱, 사몽, 아폴리네르를 만났다.
보치오니는 카페에서 알렉산더 아키펭코, 콘스탄틴 브랑쿠시, 그리고 레이몽을 만나 모던 아트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보치오니는 <밀라노에서의 미래주의자 이브닝 파티>를 스케치로 그렸는데 여기서 미래에 대한 그들의 열광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1911년에 그린 <마음의 상태들: 작별들>에는 그림에 숫자를 적어 넣었으며 심상을 동력주의로 표현했다.
동력주의는 미래주의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발라의 <추상 속력과 소리>와 루솔로의 <자동차의 동력주의>에서도 이것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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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문’

1942년 10월 14일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처음으로 그들을 위한 전람회를 메디슨 가에 있는 ‘화이트로 라이드 Whitelaw Reid ’에서 개최했다. 전람회의 명제는 ‘초현실주의의 첫 선언서 First Papers of Surrealism’이었는데, 미국 작가들은 아직껏 그처럼 왁자지껄하고 요란한 전람회를 본 적이 없었다. 전람회는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주최했고, 뒤샹은 2마일 가량의 기다란 끈을 사용하여 내부를 장식했다. 그들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 안에 아이들이 놀며 떠드는 소리가 울려퍼지게 했고, 뒤샹은 사람들을 고용하여 전시장 안에서 미식축구나 돌차기 놀이(hopscotch), 줄넘기를 하게 했다. 뒤샹이 기획하고 건축가 프레데릭 키슬러가 공간을 구성하여 탕기, 뒤샹, 마타, 에른스트, 마송, 그리고 미국작가 만 레이의 작품들을 배치했다. 전람회장의 실내에서는 지하철역에서 들을 수 있는 기차소음이 재생되었으며 기차소리가 날 때마다 전람회장의 불들이 껌뻑거렸다. 그러나 그런 장치들이 작품을 자세히 관람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미로, 에른스트, 쿠어트 셀리그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 옆에는 피카소와 클레의 그림이 함께 걸려 있었는데 피카소와 클레는 자신이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불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미국 작가들로는 바지오츠, 마더웰, 데이비드 헤어가 참여했으며 마타와 달리의 그림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는 그들이 미국인들에게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유럽 예술가들 중 꿈, 정신이상, 시에 관심이 많았던 브르통은 당시 마타의 아파트 윗층에 살고 있었다. 브르통은 뉴욕에 5년 동안 체재했는데 문화적으로 아주 뒤떨어진 미국생활에서 만족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어를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예술가들의 모임에도 덜 참석했으며, 돈이 떨어지자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하여 나치를 비난하는 방송을 했다. 그는 미국인 조각가 데이비드 헤어와 우정을 나누었고, 그와 함께 잡지 『VVV』를 창간했다. 번역은 브르통의 아내가 맡았다. 그러나 브르통과 헤어는 우정관계에서 연적의 상대로 돌변했는데 이는 브르통의 아내 재클린이 헤어와 사랑에 빠져 브르통의 아이를 데리고 헤어에게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들에 비해 성적으로 더욱 자유분방했다. 달리도 친구인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카라를 자신의 아내로 낚아챘었다. 브르통은 뉴욕 생활에 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이 빨리 끝나 파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레제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식당에서 예술가들을 종종 만났는데 그들은 레제를 늘 주인공으로 여겼다.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던 레제의 유물론에 근거한 기계주의 미학은 그 논리적 귀결로서 당연히 그로 하여금 공산당에 입당하게 했다. 레제와 피카소의 공산당 입당은 당시 신문에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몬드리안은 재즈를 좋아했으므로 할렘(Harlem)에 있는 댄스홀에 자주 갔고, 여가가 생기면 블루스를 추었다. 페기와 결혼한 에른스트는 이스트 51번가에 있는 페기의 고급주택에서 살고 있었으며, 뒤샹은 1915년 뉴욕에 온 이래로 파리를 자주 방문하고 있었다. 피카소, 마티스, 미로는 유럽에 남아 있었지만 나치의 반(反)모더니즘적 태도로 인해 활동할 수가 없었다. 피카소의 경우 나치는 언론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부분의 중요한 예술가들이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파리는 텅 빈 것처럼 보였다.

폴록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주제들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니라 학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들의 회화방법에 감동했고 그들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험을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특히 미로의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좋아했고, ‘자동주의’ 기교의 창시자인 마송의 그림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송은 그때 코네티컷 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화법으로서 그 우수함이 알려졌지만 초현실주의는 하나의 미학운동으로서 그 영역을 계속 넓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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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 뮤지엄


프라도 뮤지엄Museo del Prado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다.
루브르 뮤지엄의 전신인 나폴레옹 뮤지엄의 설립과 내셔날리즘의 대두에 자극을 받아 19세기 전반 유럽 각지에서 생겨난 뮤지엄들 가운데 하나이다.
프라도 거리에 있던 자연사박물관의 건물을 새롭게 치장하여 1819년에 '왕립 회화 조각 뮤지엄'으로 설립했다.
스페인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건물로 현재도 뮤지엄의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후 왕실의 각 시설에 분산 소장되어 있던 미술품이 점차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수집도 충실히 이루어졌다.
1868년 혁명에 의해 명칭도 국립 회화 조각 뮤지엄으로 변경되었다.
1872년에는 1830년대의 자유주의 개혁 때 교회와 수도원으로부터 몰수한 미술품들을 모아놓은 마드리드의 트리니다드 뮤지엄을 흡수 합병했다.
1912년에는 정식 명칭을 프라도 뮤지엄으로 정해졌고
20세기에 들어와 부속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소장품의 수도 더욱 늘었다.
소장품 대부분은 유화로 약 3만 점에 달한다.
역대 스페인 국왕의 수집품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취향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육적 목적에 따라 계통적으로 작품을 수집한 뮤지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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