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운동이었다.
아폴리네르가 자신의 드라마 <테레지아의 유방Les Mamelles de Tiresias>을 1917년에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디아길레프도 자신의 발레 <열병식Parade>을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초현실주의란 말은 브르통과 엘뤼아르에 의해서 자주 사용되었다.
브르통은 다다의 확산을 막으면서 다다의 에너지를 초현실주의로 집약시키고자 했다.
초현실주의는 잠재의식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승리를 자축하는 운동이었으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무의식세계의 무한한 통로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브르통은 1922년에 다다가 너무 체계적이며 학문적으로 안정하려고 하자 이에 반발하면서 화랑 몽테느에서 열린 대규모 다다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반대했다.
그는 1922년에 제라르 필립과 필립 수포와 함께 자동주의에 대한 가능성을 『자장the Magnetic Fields』이란 책에서 소개했는데 그는 이미 3년 전부터 자동주의의 방법으로 시를 써왔다.

브르통은 잡지 『리테라투르』의 주요 편집위원이었으며,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작가와 예술가들을 『리테라투르』에 소개했는데, 피카비아는 시를 이따금 기고했고 또 책표지를 디자인했다.
만 레이는 광선주의 추상사진을 소개했고 막스 에른스트도 그림을 소개했다.
브르통은 에른스트의 개인전을 위해 카탈로그 서문을 쓴 후 베를린 다다의 주역인 에른스트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브르통의 집이나 엘뤼아르의 집에서 만났고, 단골 카페에서 술을 마셨으며, 르 콤트 드 로트레몽, 아서 림보, 그리고 알프레드 재리의 작품과 그들의 사상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우연히 그려진 그림과 글에 관하여 대화하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 관하여 주로 대화했다.
이런 잦은 모임으로부터 브르통은 1924년에 惇角治프聆?선언문藍?발표하게 되었다.


브르통은 선언문에 초현실주의의 정의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초현실주의는 순수 정신적 자동주의로서 말이나 글로, 혹은 여러 다른 방법들로 사고의 실제 과정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이성과 미학 외의 것 또는 도덕적 선입관에 의해 작용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데서 일어나는 사고의 독재를 말한다. 초현실주의는 사고에 의해 떨어져 나온 게임과 꿈의 절대적인 힘 안에서 내려다 본 것들과 관련된 어떤 형상들의 우수한 실제 안에서 믿음으로부터 존재한다. …
어린아이들의 행위들이 아마 ‘진정한 인생’에 가장 근사할 것이다.
초현실주의는 이런 어린아이들의 관점들을 재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
피카소와 브라크의 종이 콜라주는 가장 훌륭한 문학양식의 글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프로이트의 진지한 제자이자 추종자인 브르통은 초현실의 상황을 꿈과 실제의 상반되고 모순된 해결로 인식했으며, 1930년에 발표한 두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마음의 어떤 점에서 삶과 죽음, 실제와 이미지, 과거와 미래, 대화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높고 낮음의 모순됨이 중지된다”고 주장했다.
꿈의 세계를 믿은 브르통은 자동주의가 착각을 일으키게 하며, 비이성적 사고들이 꿈의 이미지들을 재발견하고, 이성의 노예상태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동주의를 옹호하면서 꿈이 인간의 무의식 상태를 표현한다고 믿었고, 프로이트의 이론에 반대되는 논리로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비이성적인 요소들을 찬양했다.
그는 꿈과 인식을 경험의 방법으로 수용하면서 확고부동한 세계를 인간의 욕망으로 바꾸고, 정신의 지복한 상태와 새로운 상황에서 모순되는 요소들을 배제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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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의 첫 현대미술관


뒤샹이 뉴욕에 돌아온 것은 1920년 1월 6일이었다.
그는 아렌스버그의 집이 더 이상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집합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에게서 빌린 돈을 갚지 않아 그의 재정이 어려운 상태였다.
아렌스버그는 미술품을 구입할 형편이 못되어 많은 시간을 남몰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집에 연구소를 차리고 몇 사람을 고용하여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들이 실제로는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저술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뒤샹은 73번가 웨스트 246번지 아래층에 아파트를 얻고 마샬 체스 클럽에 회원으로 등록하여 본격적으로 체스를 연구하기로 결심한 후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프랑스어를 배우려는 신입생들을 모집했다.
아렌스버그 부부는 다른 예술가들과는 어울리기를 꺼려했지만 뒤샹과는 자주 만났고, 세 사람이 함께 캘리포니아 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가브리엘이 2월 말에 뉴욕으로 왔다.
뒤샹은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에 묵게 했다. 가브리엘은 이혼녀가 되었는데 피카비아는 제르마이느와 재혼했고, 제르마이느는 나중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가브리엘은 뉴욕에 석 달 머물 때 뒤샹과 계속해서 성관계를 가졌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의 그런 관계는 그 후 3년 더 지속되었다.

이 시기 캐서린은 유럽의 뮤지엄, 화랑,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두루 방문하고 돌아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뉴욕에 최초의 현대미술관을 건립하고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미술이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진 캐서린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들로 미술관을 건립할 수 있다고 보고 뒤샹에게 도움을 청했다.
구체적인 사항들을 의논하기 위해 그녀는 3월에 뒤샹을 아파트로 초대했다.
뒤샹은 만 레이와 함께 나타났다.
캐서린이 구상한 미술관은 비영리 미술관으로 교육이 중심을 이루고 전시회, 강의, 간행물 발행, 그리고 미술품 대여 등의 사업이 포함되었다.
뒤샹과 함께 이 일에 참여한 만 레이가 미술관의 명칭으로 자신이 프랑스 잡지에서 본 ‘무명사회Societe Anonyme’란 말을 제안하자 뒤샹이 그 말은 영어로 주식회사란 뜻이라고 했다.
캐서린이 생각한 명칭은 아주 촌스러웠는데 ‘현대 방주―개인 미술관’이었다.
만 레이와 뒤샹이 ‘무명사회’가 적당하다고 우기자 그렇게 하기로 하고 캐서린은 뉴욕 주정부에 미술관을 등록했다.
주정부 공무원은 주식회사Inc.를 끝에 붙여서 Societe Anonyme, Inc.라고 기록했다.
캐서린에 의해서 뉴욕에 처음으로 현대미술관이 탄생되었다.

캐서린은 무명사회 주식회사의 사장으로 뒤샹을 임명했고, 서기로는 만 레이를 임명했으며, 자신은 재정담당 이사가 되었다.
화랑은 47번가 이스트 19번지의 건물 위층을 빌려 뒤샹이 내부를 보수하고 만 레이가 전등을 달았다.
그리고 5피트 길이의 미술관 깃발을 47번가쪽으로 늘어지게 매달았다.
체스의 기사knight 이미지를 미술관 로고로 정했는데 그것은 뒤샹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디자인한 것이었다.
신문기자와 인터뷰하는 가운데 뒤샹은 미술관을 개관한 목적을 “사람들이 현대미술이 처음 미국에 착륙했을 때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로 받아들인 이유는 우리가 매우 진지하게 작업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 추구하는 바는 즐겁자는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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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미니멀리즘과 프로세스 아트


포스트미니멀리즘Post-Minimalism
1960년대 성행하던 미니멀리즘의 뒤를 이어 나타난 경향을 지칭한 명칭으로 미국의 평론가 로버트 핑커스 위튼Robert Pincus Witten(1935~)이 1971년 11월호 <아트 포럼>에 기고한 글 '에바 헤세: 숭고함으로의 포스트미니멀리즘'에서 이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이 용어는 미니멀리즘의 가치에 대한 반동을 함축하지만 '반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보다는 중립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가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다 보니 1980년대 후반까지 대지미술, 퍼포먼스 아트, 프로세스 아트, 비디오 아트 등과 같은 현상들 모두 다뤘다.
이러한 현상들이 포스트미니멀리즘이란 말로 한 데 묶어지게 된 점은 미술계를 장악해 온 상업주의, 미니멀리즘의 두드러진 물질적 특성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예술이 상업화된 데 대한 반성으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미니멀리스트들은 콜렉터들의 수집품이 되는 오브제를 가능한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핑커스 위튼은 다양한 미술 경향의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맥시멀리즘Maximalism이란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용어는 막연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사어로 사용되었다.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 작품의 형식적 측면이 아닌 창조와 관련된 과정 그리고 뒤따라 일어나는 변화와 쇠퇴의 과정을 강조한 경향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같은 일시성에 대한 강조는 미니멀 아트의 비개성성, 형식주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포스트미니멀리즘적인 측면을 보인다.
프로세스 아트 예술가들은 재료를 선택할 때 소멸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시간의 경과를 주용 방법으로 삼는다.
그들의 행위는 얼음, 풀, 흙, 펠트, 눈, 톱밥, 기름, 물감, 심지어 콘플레이크와 같은 물질을 작품의 재료로 선택하며 이런 재료를 뿌리거나, 쌓고, 바르는 등 임의적이고 구조가 없는 방법으로 한 장소에 놓고 작품을 완성시킨다.
나머지는 중력, 온도, 공기 등과 같은 자연의 힘과 시간에 맡긴다.
프로세스 아트의 예로 뉴욕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벽 아랫쪽에 녹은 납을 뿌리는 리처드 세라의 <뿌리기>(1968), 수증기 구름으로 만들어진 로버트 모리스의 <무제>(1967~73) 등이 있다.
어떤 프로세스 아트 작품은 좀더 영속적인 수명을 가지지만 고정된 형태를 취하지 않는 부드러운 물질로 만들어지는 조각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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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이란 회화를 벽에 걸거나 조각을 배치하는 등 전시회에서 사물들을 배열하는 것에 매우 폭넓게 적용될 수 있으나, 보다 구체적으로 화랑과 같은 특정한 실내 공간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그 장소를 채우기 위해 고안되며, 종종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아상블라주assemblage와 같은 일회성 작품을 일컫는 용어이다.

아상블라주는 1953년 뒤비페가 종이로 콜라주한 판에서 찍어낸 일련의 석판화에 붙인 명칭으로 그는 1954년 이 명칭을 풀 먹인 딱딱한 종이, 나무토막, 스펀지 등의 여러 파편으로 작은 형상을 만드는 기법에도 확대 적용시켰다.
그는 ‘콜라주’라는 용어는 1912년부터 1920년경까지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풀로 붙여 만든 그림들에만 따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상블라주라는 용어는 1961년 뉴욕의 모마가 개최한 ‘아상블라주 미술’전에서 채택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이 소개되자 아상블라주라는 용어가 공통된 특징이 거의 없는 별개의 다양한 오브제 작품들에 적용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이 용어의 유용성이 감소되었다.
이 전시회 이후 이 용어는 점차 다양한 오브제들을 모아 상자 같은 것에 담아 놓은 작품에만 보다 엄격하게 제한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도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단적인 한 예가 슈비터스의 콜라주 개념을 3차원으로 확장시킨 라우셴버그의 ‘콤바인 회화’이고 다른 한 예는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을 확장시킨 아르망의 집적 작품이다.

설치의 선례를 찾는다면 ‘장소 특수적 site-specific’인 작품의 전통으로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설치의 개념에 적합한 것은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전시회, 쿠르트 슈비터스의 방안을 가득 채운 <메르츠> 구성물, 1958년 <공백>이라는 제목으로 된 이브 클랭의 빈 방 전시이다.
클랭의 작품은 오늘날의 설치 개념에서 최초의 선례로 간주되고 있다.
설치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으며 몇몇 작가들이 설치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설치 미술’이라는 분야가 확고한 장르가 된 것은 1980년대에 와서였다.
설치 작가들은 “설치 미술이 오늘날의 여러 미술 형식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활발하며 창의성이 풍부한 미술”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의 설치는 일반적으로 비영속적이었으며 이는 당시 수집 가능한 미술품이 유행하던 것에 대한 저항의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많은 설치 작업이 영속적인 전시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고 소장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작품들조차 소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1990년에는 설치 미술 미술관이 런던에 문을 열었다.
설치미술을 이해하기 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미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는 곧 동시대의 특징을 아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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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뉴욕 다다

다다dada라는 말은 유럽인의 개념으로 1915년 뒤샹이 뉴욕으로 온 후 미국인에게도 알려졌고, 피카비아에 의해 더욱 유명해졌으며, 만 레이를 통해 확고해졌다.
세계대전으로 이성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은 불거질 대로 불거졌으며, 허무주의 사상이 팽배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다다는 예술의 허무주의였다.

뉴욕 다다는 뒤샹을 중심으로 1915년과 1923년 사이에 행해졌으며, 취리히 다다 예술가들과는 달리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조직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레디 메이드 대량생산품을 미술품이라고 주장하는 뒤샹의 행위에서 다다의 요소는 이미 표출되었으며, 그와 피카비아의 기계주의 드로잉을 통해 미술에 대한 허무주의는 충분히 시위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시기적으로 뉴욕의 다다가 취리히 다다보다 한 해 앞섰다.
유럽과 미국이라는 이질적인 토양이 다다를 달리 행위 하게 한 것은 특기할 만한 점이다.
일간지 『뉴욕 트리뷴』은 다다주의 예술가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1917년 5월 6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리차드 보익스는 1921년 뉴욕 다다그룹을 익살스럽게 묘사했는데 그에게 뒤샹은 체스 게임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는 사람으로 비춰졌다.
그는 알렉산더 아키펭코가 1920년에 제작한 <앉아 있는 여인>을 다다 미학에 근거하여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카반느가 뒤샹에게 물었다.

카반느: 다다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언제였습니까?

뒤샹: 차라의 저서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을 읽었을 때였는데, 그가 책을 보내주었고 나와 피카비아가 받았는데 그것이 1917년이었어.
아마 1916년 말이었는지도 모르겠군.
흥미 있었지만 난 다다가 무엇인지 몰랐고, 그런 말이 있는 줄도 몰랐지.
피카비아가 프랑스로 갔을 때 그가 보내준 편지를 통해 다다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네.
그때 차라가 취리히에서 피카비아의 그림을 사람들에게 소개했고, 피카비아는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에 취리히에 들렸네.
피카비아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매우 복잡하더군.
그가 뉴욕에 도착한 건 1915년 말이었는데, 3, 4개월 머문 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가서 그곳에서 잡지 『391』을 창간했네.
그가 취리히의 다다 예술가들과 교류한 것은 1918년이었어.

카반느: 피카비아가 그 전에 뉴욕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뒤샹: 그랬지. 1917년이었어.
그는 뉴욕에서 『391』을 두 권인가 세 권 발행했네.

카반느: 미국에서의 첫 다다 선언문이 있었습니까?

뒤샹: 물론이지.
아주 과격한 내용이었네.

카반느: 얼만큼 과격했단 말입니까?

뒤샹: 반미술이었지.
본질적으로는 예술가의 행위에 대한 회의였다네.

카반느: 그것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아렌스버그와 로세의 도움을 받아 두 개의 작은 잡지 『장님』과 『롱롱』을 발간하게 한 것입니까?

뒤샹: 하지만 분명히 해둘 점은 다다를 알고 난 후에 발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오히려 피카비아도 참여한 1917년에 있었던 앙데팡당전 때 발간된 것들이지.

카반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의 정신이 있었던 것이지요?

뒤샹: 자네가 원한다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네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어.
피카비아가 취히리에서 다다 그룹 예술가들과 어울렸고, 취리히의 것과 같은 다다는 아니었지만 다다와도 같은 정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어.
인쇄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리 창작적이지 못했어.
『장님』은 순전히 <샘-변기>에 관한 합리화였지.
우리는 두 차례 발간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발간할 무렵에 『롱롱』이 발간되었어.
그것은 상이한 종류였네.
두 잡지 모두 별거 아니었네.
별거 아니었어.
놀라웠을 뿐이었지.
… 나중에 만 레이가 1919년 3월에 다른 잡지 『TNT』를 발간했는데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어.

카반느: 잡지를 통해 <샘>은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만큼이나 유명해진 것이지요?

뒤샹: 그래.

카반느: 상업적인 목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까?

뒤샹: 아냐, 전혀 그렇지 않아!

카반느: 유명해지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뒤샹: 그러기를 바라지도 꿈꾸지도 않았네.
작품을 팔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난 <큰 유리>를 작업하고 있었고 그것은 완성되기 전에는 팔 수가 없었네.
자네도 알다시피 난 그것을 1915년에 제작하기 시작해서 1923년에야 … 파리에서 그린 그림들을 팔기는 했어.
아렌스버그가 그것들을 하나씩 구입했지.
그는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를 토리에게서 구입했네.

카반느: 얼마에 샀는지 아십니까?

뒤샹: 몰라, 난 그런데 관심이 없어.
난 가격을 몰라.
<숨은 소리와 함께>도 마찬가지라네.
가격이 무슨 상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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