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 교양문고 VS 시리즈
김광우 지음 / 페퍼민트(숨비소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과학과 예술의 조화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지면이 충분하지 않아 백남준과 앤디 워홀의 작품을 한정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어 아쉬운 점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기, 같은 환경 뉴욕에서 활약했지만 만난 적이 없고 서로가 서로를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을 묶어 한 권의 책을 쓰는 데 있어 독자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언론의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서로의 활약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남준은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미술의 장르를 창안해내고 이 분야에서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영화를 제작한 워홀이 비디오아트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이며, 영상을 재료로 3차원의 작품을 제작한 백남준이라지만 그가 추구한 것은 대중적인 이미지였기 때문에 팝아트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워홀에 관해서 혹은 팝아트에 관해서 침묵한 것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비록 두 사람이 서로를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두 사람을 한 권의 책에서 다룰 충분한 근거는 있는데, 그것은 두 사람 모두 대중적인 이미지와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이미지 혹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미지를 화랑에 걸 수 있는 회화작품으로 변형시킨 놀라운 재능을 가진 워홀은 실크스크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캠코더가 시판되자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은 어려서부터 전위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서양으로 가서는 과학문명의 총아인 텔레비전을 예술의 도구로 삼기 시작하면서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좇아 자신의 작품 경향을 만들어나갔다.
예술가들이 테크놀로지를 이용할 경우 그들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백남준과 워홀은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예술을 추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활약한 1960년대는 과학의 결실이 풍성하게 수확된 시기였다.
과학과 예술을 조화시키는 노력이 없었다면 과학은 건조해졌을 것이고 예술은 문명에 뒤쳐졌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두 사람은 이런 분야에서 선구자들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많은 그 밖의 예술가들이 과학과 예술을 적절하게 접합시켜 다양한 작품들을 쏟아내게 된다.
그 후 나타난 홀로그래피아트Holographic art, 컴퓨터아트Computer art, 커뮤니케이션아트Communication art 등 이런 분야들을 테크놀로지아트 혹은 전자예술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을 수 있는데, 전자예술의 선구자는 비디오아트와 레이저아트를 실행한 백남준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업적은 두고두고 미술사에 빛날 것이다.

과학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워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영화제작을 통해 보여준 그의 감성, 기량, 야망은 복합체로서의 그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그의 주요 영화작품을 이 책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미술사가와 평론가들은 사회문화적 표상을 만들어낸 워홀과 더불어서 영화에 나타난 그의 미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기계와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경우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이 고도로 전문적이며, 시각적이고, 거대한 힘을 과시하게 된다.
그러나 워홀의 영화와 백남준의 멀티 모니터에 나타나는 영상들 중심에는 인간이 있어 두 사람의 미학이 인본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작품에서 관람자를 참여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데, 관람자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초대받는다는 개념에서 탈피하여 보다 친밀하게 상호대화적인interactive 차원에서 참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공통점은 존 케이지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케이지가 백남준에게 미친 영향은 이 책에서 충분히 언급되었지만 워홀 또한 케이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점을 좀 더 살펴본다면 일본 선불교의 영향으로 이는 동양의 사상이 서양미술에 그 입지를 마련한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미 예고한 대로 과학문명의 발달은 서양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을 불러오게 했고, 그런 공황으로부터 탈출을 그들은 동양의 명상적인 문화에서 찾았다.
백남준이 홀로 서양으로 가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으로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양의 문화로부터 원기를 공급받고 있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비틀즈의 음악에서도 발견되는 대로 1960년대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화해하고 조화를 이룬 시기였으며, 이는 동서양 모두에 바람직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랑스 미술 500년 - 모방에서 창조로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 모더니즘의 시작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쿠르베의 스페인 지향주의는 특이했다.
그는 1840년대 후반에 자화상 열 점을 그렸는데, 렘브란트와 리베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린 것들이다.
쿠르베는 스페인의 자연주의와 벨라스케스가 일상을 모티브로 그리는 데 감동을 받았다.
쿠르베는 파리에서의 피곤한 생활을 벗어나 건강을 되찾기 위해 1849년 오르낭에 있는 가족을 방문했다.
그는 고향 마을에 감화되어 두 점의 뛰어난 그림 〈돌 깨는 사람들〉336과〈오르낭의 장례〉337를 그렸다.
〈돌 깨는 사람들〉은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는 두 인물을 황폐한 시골을 배경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고, 〈오르낭의 장례〉는 농민의 장례식을 묘사한 대형 작품으로 실물 크기의 인물이 40명 이상 등장한다.
두 작품은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좀 더 절제되고 이상화된 작품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들은 귀족적인 인물이 아닌 초라한 농민들의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쿠르베가 농민들을 미화하지 않고 대담하게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사실은 화단에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851년 살롱전에 전시된 <오르낭의 장례>는 구성과 인물들의 배치에서 전통적인 구성을 완전히 깨는 작품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에 정통하지는 못했지만 벨라스케스처럼 환영을 만드는 데 능숙했으며, 벨라스케스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친구 평론가는 쿠르베의 자화상 <첼로 연주자(자화상)>339와 <가죽 벨트를 쥔 남자(예술가의 초상)>340를 벨라스케스와 무리요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한다면 매우 어울릴 것이라고 말했다.

시인 보들레르와 사회철학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등 당대의 작가 및 철학자들과 가까이 지낸 쿠르베는 새로운 사실주의파를 이끌었으며, 이 운동은 동시대의 다른 운동들을 압도했다.
그가 사실주의를 발전시키게 된 결정적인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태어난 지방인 프랑슈콩테와 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들 중 하나이자 자신이 태어난 마을 오르낭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일생 동안의 애착이었다.
그는 잠깐 스위스를 방문한 뒤 오르낭으로 돌아가서 1854년 후반에 거대한 캔버스화를 그리기 시작해 6주 만에 완성했는데, 그의 미술 생애에 미친 영향들을 온갖 사회 계층의 인물들로 묘사한 우의적인 회화〈화가의 화실〉341이 바로 그것이다.
화면에서 화가 자신은 자부심을 드러낸 채 모든 인물들을 주재하면서 누드모델에게는 등을 돌린 채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나폴레옹 3세는 1855년 “유럽을 한 가족으로 만드는 진정한 계기”라는 의미를 부여한 만국박람회를 파리에서 개최했다.
28개국이 참가한 이 축제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참관했으며 런던 뉴스는 만국박람회 현장을 연신 삽화로 보도했다.
이 전시회에 앵그르의 작품이 41점, 들라크루아의 작품이 35점이나 받아들여졌으면서도 자신의 작품은 11점밖에 받아들이지 않자, 쿠르베는 “프랑스 미술의 재앙”이라고 낙담하여 박람회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비로 별관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화가의 화실>을 포함시켰다.
쿠르베는 카탈로그 서문에 회화가 사실을 전달하는 매체임을 선언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더 이상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 …
살아서 숨 쉬는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그의 「사실주의 선언」은 아방가르드 정신의 선언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미술사에 남겼는데, 모더니즘이 이미 도래했음을 알리는 선언이기도 했다.
아방가르드 정신이란 순수미술,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진보주의 예술가들의 정신을 말한다.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과거에서 벗어나는 과격한 출발점이었다.
16세기와 17세기의 예술이론의 척도가 미켈란젤로와 푸생에 의해 규정되었다면 19세기 예술이론에서는 쿠르베의 작품이 중심에 놓여 있다.
화가로서 16세기와 17세기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한 들라크루아에서 예술과 예술이론은 이미 통일되었다.
쿠르베의 저작에서는 현대적인 삶에 대한 집중을 통해 고전주의의 그리스 동경과 낭만주의의 중세 동경에 대한 단적인 거부가 나타난다.

오르낭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쿠르베는 독립적이고 완고하며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스무 살 때 회화를 수학하기 위해 파리로 갔지만 공식적인 수업보다는 17세기 자연주의자인 카라바조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 리베라, 수르바란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그들의 양식을 익혔다.
그의 초기작은 낭만주의 경향이었지만 스물세 살 때 그린 <검은 개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사실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오르낭의 장례>로 주목을 받았고 사실주의파의 선두자로 입지를 세웠다.
그는 낭만적 과장이나 이국적인 정서를 배제하고 제리코와 들라크루아의 사실적 요소를 지속시켰다.
그는 사소하거나 일화적인 것에 장엄함을 부여하고 색조를 부드럽게 하거나 이상화시키지 않고, 추하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위엄을 불어넣는 재능을 보였는데, 스페인 화가들 특히 벨라스케스의 영향이었다.
그는 “회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므로 보이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고전주의의 역사적 풍경과 낭만파가 좋아하는 괴테와 셰익스피어에서 따온 시적인 화제를 포기해야 만한다”고 했다.

<화가의 화실>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213에서와 같은 공간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이는 쿠르베가 벨라스케스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그는 스페인 대가들의 구성과 모티브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티브에 양식의 특징을 적절하게 사용했다.
쿠르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베라, 수르바란, 그리고 특별히 벨라스케스에게 관심이 많았다. …
라파엘로로 말할 것 같으면 물론 그가 관심을 끌게 하는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별로 배울 게 없다.
소위 말하는 이상주의자들이 그를 경모하기 때문에 내게는 관심사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상이라.
하! 하! 하! 하! 하! 하!
얼마나 속임수적이냐!
호! 호! 호! 하! 하! 하!

쿠르베는 1868년 여름이 지나갈 무렵 마드리드를 방문했다.
근래 미술사학자들은 쿠르베의 양식이 루브르 뮤지엄의 스페인 전시관에 전시된 17세기 스페인 대가들의 양식과 관계가 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1860년대 프랑스 화단에서는 그가 독창적인 양식으로 새로운 미술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쿠르베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사회를 묘사하는 것을 이상으로 했으며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간성을 애호했으며, 문학에서의 졸라에 비견된다.

1860년대 마네의 작품은 무리요로부터 수르바란, 벨라스케스로부터 고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페인 양식 하에서 제작한 것들이다.
그는 또 이탈리아의 대가들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그리고 플랑드르의 루벤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마네의 1861년 살롱전 데뷔작인 <스페인 가수(기타리스트)>344는 붓놀림이 대담하며 사실주의 색채가 강렬하다.
그가 탐구해온 대가들의 장점이 두루 나타난 그림으로 배경을 어둡게 하고 조명효과를 극적으로 살린 작품이다.
색과 색의 대비를 통해 인물에 강렬한 인상을 부여한다. 보들레르와 고티에는 <발렌시아의 롤라>321와 <스페인 가수> 등 사실주의 그림들을 매우 좋아했다.
이 작품을 보고 비평가 고티에는 벨라스케스와 고야가 매우 반길 만한 그림이라고 적었다.

보라!
오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웃기는 기타리스트가 여기에 있다.
벨라스케스는 그에게 친근한 눈짓으로 인사할 것이고 고야는 담뱃불을 빌리러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이 자연스럽고도 매력적인 인물은 마네의 회화 솜씨를 돋보이게 한다.
물감을 입힌 형태 속에 과감한 붓놀림과 너무나도 사실적인 색감이 있다.

마네는 쿠르베의 전례를 따라서 공간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환영적인 묘사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 작품의 경우 구성에 있어서는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의 <현악기 연주자>342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마네의 가까운 친구 드가도 마네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로렌조 파강과 오귀스트 드 가즈>343를 그렸는데, 자신의 아버지를 오른편에 배경으로 삽입한 가운데 기타리스트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마네가 <스페인 가수(기타리스트)>를 살롱전에 소개한 이듬해, 여든두 살의 앵그르는 살롱전에 <율법학자들 가운데 예수>345를 소개했다.
쿠르베와 마네의 모더니즘이 미술사의 새로운 국면을 마련한 이 시기에 앵그르의 작품은 라파엘로의 영향이 더 이상 유효하지 못함을 보여준 예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깝다 이책


작품을 즐기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일단 그림을 보고 그 그림에서 오는 분위기, 그림 속 담긴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방법이 있겠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작품을 그린 이의 삶을 이해하면서 그림을 보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순간적으로 작품과 맞닥뜨렸을 때를 패스트푸드라 한다면, 작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할 때 느껴지는 감동은 슬로푸드가 아닐까 싶다.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눈에서부터 중추에까지 감동을 전달해주는 그 맛에 우리는 화가의 일대기를 알고 싶고, 그들의 전기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한 화가를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이 책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김광우 지음)은 무척 생소한 서술방식을 가졌다. 일반적으로라면 ‘한 화가가 태어나 이러이러한 작품을 만들었고, 어디에서 죽었다’로 끝나는 것이 정석일 텐데, 이 책은 정석에서 살짝 빗겨나 화가 다비드와 황제 나폴레옹을 묶어 서술했다. 창작은 예술가의 재능뿐 아니라 그가 처한 시대적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예술가의 일대기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을 커플로 묶어낸 것이다. 또한 ‘프랑스 화단의 나폴레옹’이라 불린 천재화가 다비드와 그의 조력자이자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나폴레옹을 완벽한 영웅으로 비약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프랑스 역사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살아간 그들의 삶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 굳건한 의지나 신념은 제껴둔 채 좌파와 우파를 오고가며 부를 축적하는 데 눈을 번뜩였던 다비드, 최고의 화가 다비드에게 그림을 요청했으나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다른 화가에게로 주문을 돌린 나폴레옹. 이런 모습들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이러한 서술방식과 함께 340점이 넘는 컬러 명화들이 수록된 이 책은 2003년 9월 출간 당시 일간지는 물론, 잡지사, 서점 등에서 떠들썩하게 소개 되었지만 독자들의 호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점점 축소되는 우리 나라 출판계 사정을 볼 때, 그리고 쉽고 편안한 글과 인기있는 소재에만 집중되는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수도 있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다비드 대신 인기 있는 다른 화가들을 제시했더라면 이 책이 제시하는, 시대와 예술가를 함께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맛있는 음식의 요리법이나 장수하는 건강비법을 나누는 것도 즐거운 일이거늘,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시각을 나눈다면 얼마나 즐겁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은 너무도 아깝다.

만만찮은 두께(527쪽)와 생소한 주제가 부담스러울지도 모르지만, 화가를 이해한다는 입장에서 슬로푸드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한번 잡아본다면 즐겁게 읽어나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도록에서는 볼 수 없는 화가의 작품들을 생생한 에피소드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으며, 그 두 사람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실을 벗어나지 않은 예술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화가 다비드와 황제 나폴레옹, ‘그들은 과연 천재인가 기회주의자인가, 아니면 시대의 영웅인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신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해답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 책은 그동안 목소리 큰 서술자의 시선에 휘말리거나 화려한 수식어에 젖어 있던 독자에게 두 인물에 대해 평가하고 비평할 수 있는 자율적 독서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슬로푸드로 되찾는 건강처럼 독서의 눈과 미술을 이해하는 폭을 이 책을 통해 찾아갔으면 한다.

 

김한영/미술문화 편집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술책 연작 김광우씨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최근 가장 왕성하게 미술관련 책을 쓰고 있는 미술 저술가를 꼽자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김광우(54)씨다. “어느날 갑자기 등장했다”는 표현에 들어맞게 김씨는 지난 97년 미국에서 귀국한 뒤 <폴록과 친구들>을 시작으로 최신작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미술문화 펴냄·2만8000원)까지 6권의 미술책을 줄줄이 내놓으며 주목을 끌고 있다.

"고전으로 거슬러 간 이유? 저작권 때문이죠"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이력이다. 김씨의 이력을 보면 사람의 운명이 참으로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스스로도 예상 못했던 변신에 김씨 본인도 아직은 ‘미술평론가’라든지 또는 ‘미술사가’라는 호칭에 어색해하는 모습이다.
대학 재학중 이민을 떠난 김씨는 뉴욕에서 20년 넘게 스포츠용품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뉴욕으로 유학온 한국 미술가들과 친해졌고, 이를 계기로 그의 인생은 갑자기 급선회를 하게 됐다. 미술이란 새로운 세계를 접한 뒤 그는 ‘일요화가’가 됐다. 92년, 그는 한 전람회에서 자기 그림을 보던 미국인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이건 잭슨 폴록 그림인가봐.” 기분이 나빠져 집에 돌아온 뒤 김씨는 도대체 폴록이 누구인지 찾아봤다. 그것이 거짓말 같은 변신의 시작이었다.
60년대 이후 현대미술계 최고의 스타였던 폴록도 몰랐던 그는 무엇엔가 홀린 듯 미술 공부에 빠져들었다. 미친듯이 책을 사고, 자료를 모으고, 그림을 보러다녔다. 공부는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이어졌다. 첫번째 책 <폴록과 친구들>이 바로 그 소산이다. 미술은 또한 아내와 그를 맺어주기도 했다. 폴록 원고를 들고 귀국해 출판사를 알아보다가 만난 출판사 미술문화의 지미정 대표와 결혼해 영구 귀국했다. 이후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가 책으로 펴내는 공동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김씨의 책은 일단 독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 등 현대 미술가 책은 물론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등 이전 책 모두가 2000부 넘게 팔렸다. 고정독자가 한정된 미술책 시장 여건과, 그의 책이 한결같이 500쪽이 넘는 분량에다 비교적 고가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선전이다. 미술 자체보다는 작가에 대한 일화나 다분히 감상적인 작품 소감이 주를 이루는 미술책들 사이에서 이름만으로 알려졌던 주요 거장들을 철저하게 해부하는 ‘정통주의적’ 미술책을 펴낸다는 점도 돋보인다. 이번에 다룬 다비드 역시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다비드만을 따로 다루는 책은 김씨의 것이 처음이다.
김씨 책의 특징은 한 명의 작가가 아닌 짝을 이루는 2명 또는 3명을 함께 다룬다는 점이다. “어느 작가에 대해, 특히 그 작가의 창의성을 이해하려면 한 명만을 따로 다루는 것보다는 오히려 가장 잘 대비되거나 영향관계에 있었던 다른 작가들과 함께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또한 한 작가의 일대기는 다분히 후대에 만들어지는 영웅주의로만 흐르기 쉬워 진정한 이해를 방해할 수도 있구요.” <다비드의…>에서도 나폴레옹은 비록 작가는 아니었지만 미술과 정치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비드의 짝패로 설정해 비슷한 중요도로 다뤘다.
현대작가로 시작한 그의 글쓰기는 다음 책 <레오나르도의 과학과 미켈란젤로의 영혼>으로 이어지면서 연대순으로 계속 거슬러 올라갈 예정이다. 그런데 이처럼 고전 작가로 올라가는 데에는 미술출판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주는 웃지못할 이유가 있다. 사후 5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경우 저작권 때문에 작품 도판 한 쪽을 쓰는 데 많게는 수십만원까지 내야해 수지를 맞추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책을 봐야 하는 아내를 설득하는 중”이라고 김씨는 웃었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사진 김종수 기자 soo@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혁명, 그리고 나폴레옹과 다비드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사학자들은 시민들이 루이 16세의 개혁정치를 무시한 채 폭동을 일으켜 바스티유를 습격한 시점부터 프랑스 혁명의 대단원이 시작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혁명은 어느 날의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한 사건이 촉발되려면 이전에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루이 16세는 개혁의 여건을 마련한 사람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미 왕실은 재정적자의 위기에 놓여 있었고 외국의 침략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파탄 직전에 있었다.
그는 외국인 재무장관을 고용해 개혁적인 경제정책을 폈으며 솔선해서 농노를 해방했다.
시민 모두 교육을 골고루 받을 수 있게 했으며, 귀족의 만행을 저지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된 과중한 세금을 낮추고 정부의 적자를 부자들에게 떠맡기려고 했다.
오늘날의 정황에서 보면 이는 바람직한 개혁정치였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가난하고 소외받은 시민이 아니라 귀족과 성직자 그리고 부르주아였다.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의 압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전유한 교육제도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계층도 정치적·경제적 파탄의 책임을 지려하지 않았다.
자연히 그들은 모두 루이 16세를 공격하게 되었고 모든 책임을 군주제에 돌리며, 루이 16세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프랑스 시민 다수의 의견이 아닌,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의 혁명이었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후에도 왕당파가 오래 잔존하고,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폭동이 일어난 것만 봐도 대다수의 시민이 군주제의 말살을 원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 여기에 지식인 계급이 합세하여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꾀하려는 목적을 은폐하고 표면적인 혁명의 바람을 일으켰다.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념을 내세워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 각계각층이 각자의 이익을 주장하기 위해 뜻을 모아 일으킨 혁명이었으므로 루이 16세 처형 후 프랑스는 오랫동안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각계각층이 충돌했고, 이념과 정치에 있어서도 의견이 분분해 서로가 서로를 위협하고 살해하는 공포의 시기가 지속되었다.
여기저기 단두대를 세우고 정적들을 처형하는 무법천지가 된 것이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는 혼란을 틈타 나폴레옹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 역시 이념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다.
그는 쉽게 쿠데타에 성공했고 제1통령이 되었으며 결국 왕정보다 더 독재적인 황제의 자리를 굳혔다.

나폴레옹은 평민출신이라서 과거 왕실과는 달리 많은 왕족을 거느리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외국의 침략을 막고 경제적 손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영토 확장 정책을 썼다.
유럽의 모든 군주제 국가들은 자연히 합세해서 대프랑스 연합군을 형성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재위기간의 3분의 2를 프랑스를 떠나 전장에서 보냈다.
그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프랑스 영토를 확장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법을 제정했는데, 나폴레옹 법전은 민주주의에 기초한 매우 진보된 법이었다.
그가 프랑스 혁명의 결실을 이룩한 것이다.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영향력은 대폭 줄었고 대신 군인들이 정치에 나섰다.
군대가 부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부패에 비하면 약과였다.
시민들은 전적으로 나폴레옹을 지지했다.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에 의해서 그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마치 유럽 전체에 대한 혁명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는 점령지에 군주제를 심었지만 군주의 일반적인 통치가 아니라 시민대표들로 구성한 시의회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그는 형제들을 점령국가의 왕위에 앉혔지만 이는 상징적인 통치수단이었고 자국민의 의견을 수렴했다.
유럽의 세습 군주들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는데, 오래된 군주제 전통이 그에 의해 와해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을 나폴레옹의 몰락까지로 보는 이유는 이런 세습 군주제의 폐지를 혁명의 목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늦게 자식을 낳았고 (로마 왕, 나폴레옹 2세) 세습시킬 여건을 만들지 못한 채 몰락했지만, 그도 왕위를 세습시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폴레옹을 혁명의 완수자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학자마다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고 독자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다만 나폴레옹의 활약으로 시민의 권리와 영향력이 커진 것이 사실이며 이런 점에서 그의 공은 매우 크다.

다비드는 당시의 많은 지식인 기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도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틈타 혁명의 기류에 편승하여 영광을 누렸다.
그가 그린 프로파간다 그림들이 프랑스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의 손에서 맹목적인 국수주의가 꽃피었고, 나폴레옹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을 거쳐 칭송받는 영웅이 되었다.
미학적으로 보면 타락한 한 예술가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푸생 이후의 프랑스 전통을 이은 훌륭한 화가였다.
이탈리아, 영국, 독일에서 시작된 신고전주의는 다비드에 의해 꽃피울 수 있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놓고 보면 다비드야말로 미술사에 획을 그은 인물임이 틀림없다.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을 쓰면서 프랑스 혁명의 배경을 설명했지만 혁명의 이념이 뚜렷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 기간도 나폴레옹의 몰락까지 연장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프랑스 혁명은 명료하게 설명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비드와 나폴레옹 모두 격변기에 한 시대를 풍미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투쟁하고 성취했지만 역사책에서는 칭송을 받아야 한다.
프랑스 혁명이 유럽에 끼친 민주주의의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