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김말봉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김말봉의 다시 피어난 찔레꽃
김광우|知와 사랑 대표

찔레꽃

 

 

 

 

문학 관련 분야 전공자들에게 김말봉의 작품을 읽어보았는지 물으면 거의가 이름은 들었지만 작품을 접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이럴 수가!


‘김말봉’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그의 생애가 자세하게 읽혀진다. 1901년에 태어나 1961년 타계할 때까지의 60년의 생애가 어찌도 그렇게 소상하게 전해지는지 놀라울 뿐이다. 파란만장한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뿐 아니라 수많은 작품들의 제목과 그것들이 언제 쓰였고, 어떤 작품이 어느 신문에 연재되었는지 그리고 그 반응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으며, 망우리 공동묘지 100768호에서 영원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묘지사진에 이르기까지 작가에 관한 자료는 넘쳐난다. 작품에 대한 논문도 눈에 띈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려면 절판이고 도서관에도 비치되어 있지 않다. 이는 실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말봉은 누구인가? 근대 여류소설가로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대중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는 이 한 마디로 그를 규정하기란 어렵다. 남긴 작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사에서의 그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려면 많은 작품들에 대한 각각의 해석과 비평이 뒤따라야 한다. 시인 천상병千祥炳이 “김말봉의 찔레꽃론”에서 언급했듯이 김말봉의 『찔레꽃』이 문제작인 이유는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의 정체성이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던 1937년에 이 소설이 신문 연재를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독자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독차지한 점 때문이다. 시인은 작가가 당대 현실을 효과적으로 작품에 형상화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 젊은 지식인 남녀의 자유결혼에 대한 작가의 세계관이 작품에 녹아 있음을 지적했다. 대중소설에 대한 이해가 없던 때에 자유결혼을 주장하는 애정소설을 쓴 작가가 김말봉인 것이다. 이는 『찔레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그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산적한 문제는 그 밖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서 그것들에서 나타난 김말봉의 일관된 문학세계 혹은 정신세계가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1901년 밀양 태생인 김말봉은 정신여고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7년 중외일보 기자로 입사한다. 신문사에서 탐방기와 수필 등을 쓰게 되자 점차 집필에 흥미를 느껴 1932년 보옥步玉이라는 필명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단편소설 “망명녀”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어서 “고행” “편지” 등을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통속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가 작가가 된 것은 첫 남편 전상범의 격려에 힘입은 바 컸다.


1936년 전상범과 사별한 뒤 이종하와 재혼해 부산에 살면서 광복 때까지 작품활동을 중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1945년 “카인의 시장”(1945)과 “화려한 지옥”(1945) 등을 발표하는 한편 공창폐지운동, 박애원 경영 등의 사회운동을 병행하였다. 6.25전쟁 때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961년 2월 9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산 작가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었으나, 광복 후에는 사회성을 띤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김말봉의 작품세계는 광복 이전은 남녀 간의 애욕 문제를 주로 다뤘으나 광복 이후에는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광복 이전을 ‘제1기 작품’이라 하고, 광복 이후를 ‘제2기 작품’이라 하면 1기의 대표작품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 제2기의 대표작품은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한 “생명生命”이라 할 수 있다. 광복 전 김말봉의 문학세계는 개인이 가진 애정이 애욕으로 나아가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였지만 광복 후, 제2기에서는 사회공동체에 눈을 돌려 사회정의에 초점을 맞췄다.

대표 작품으로 “태양의 권속”(1952) “새를 보라”(1953) “바람의 향연”(1953) “이슬에 젖어”(1953) “바퀴소리”(1953) “푸른 날개”(1954) “파초의 꿈”(1955) “찬란한 독배”(1955) “생명”(1957) “화관의 계절”(1957) “푸른 장미”(1958) “사슴”(1958) “행로난”(1958) “해바라기”(1958) “광명한 아침”(1958) “아담의 후예”(1958) “환희”(1959) “제비야 오렴”(1959) “장미의 고향”(1959) “이브의 후예”(1960) “바람의 향연”(1962) 등이 있다.


『찔레꽃』은 1937년 7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우리나라에서 여류작가가 쓴 최초의 인기소설로 선풍을 일으켰다. 김말봉의 남편 전상범은 평소 일본 시인 기다하라 학슈北原白秋 작사에 야마다 고사쿠山田耕筰가 작곡한 가곡 ‘찔레꽃’을 즐겨 불렀고, 김말봉은 이에 맞춰 피아노 반주를 해주었다. 전상범은 1936년에 죽었는데, 그 이듬해 소설을 쓰게 되자 당시의 추억이 생각나 제목을 『찔레꽃』으로 정한 것이다.


『찔레꽃』은 연재가 끝난 지 2년 만인 1939년 인문사에서 출간되었고 해방 때까지 3판을 냈으며, 1948년 합동사에서 다시 출간됐다. 이후 1955년 문연사에서, 1961년 진문출판사에서, 1979년 대일출판사에서, 1984년 문학출판사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지금 『찔레꽃』을 다시 출간하는 이유는 한국 문학사에서 이름만 빛날 뿐 작품이 사라진 슬픈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작품은 작가의 실존적 가치이므로 작가의 생애를 아무리 소상하게 안다 하더라도, 또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연구논문을 읽는다 하더라도 작가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품을 읽고 작가의 정신세계와 교감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작가는 우리와 더불어 현재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김말봉을 검색하던 중 한 네티즌이 2012년 9월 8일 다음카페에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 예천고등학교 61회 동창들과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로 김말봉을 참배하러 간 권모 씨가 후기를 올린 것이다. 198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우연히 『찔레꽃』을 읽고 너무도 충격적이었다면서, 수많은 사람을 울린 명작 토머스 하디의 『테스』(1891)를 『찔레꽃』에 비교하고 있다.


『테스』는 김말봉의 『찔레꽃』에 비하면 유도 아니었다. 정말로 한국적인 소설이었다.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이 그 시대를 고스라이 말해주는 정말로 토속적인 우리 소설이었다. 대단한 문장가는 아니었으나 토속적인 너무나 토속적이어서 된장국에 밥을 말아 훌훌 마셔버리듯이 그렇게 책을 마셨을 정도로 그렇게 빠져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런 참 좋은 글을 남기신 김말봉 선생님을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해준 친구들에게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딸아이 인생길의 멘토가 되어주길 바랐던 김말봉 선생님을 추모하면서” 글을 썼다는 이 네티즌의 글에서 작가 김말봉이 그의 삶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알 수 있다. 1937년대 작가의 문학성이 2012년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현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김말봉은 ‘순수성’을 주장하며 소수 지식인을 위한 글을 쓰던 당대의 문인들을 나무라면서 다수를 위한 글이 아니라면 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예술과 삶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각은 1950년대 후반 주로 런던과 뉴욕에서 생겼으며, 1960년대에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일찍이 1930년대에 대중을 위한 문학을 주창한 김말봉은 한국 문학의 선구자임이 틀림없다.


2012년은 김말봉이 우리 곁을 떠난 지 51년이 되는 해라서 잊혀가는 그의 작품에 대한 아쉬움으로 『찔레꽃』을 서둘러 출간했다. 현대의 독자들이 작품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달라진 오늘날의 문법으로 약간 수정하여 내놓았다.


우리나라 문학사에 끼친 그의 공로에 새삼 감사를 표하면서 2012년 새로 피어난 『찔레꽃』을 그의 영전에 바친다.

2012년 가을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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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김말봉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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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소설가 김말봉金末峰

 

김말봉의 애정소설 '찔레꽃'

 

찔레꽃

 

 

 

 

<찔레꽃>의 작가 김말봉金末峰 내외의 무덤

앞쪽 하얀비석이 남편 이종하李鍾河,  뒤의 검은비석이 김말봉

일반적으로 왼쪽에 여자가 묻히는데 여긴 여자가 오른쪽이다

망우리 공동묘지

 

 

 

 

 

 

 

                                                   

김말봉金末峰(1901.4.3∼1962.2.9) 


  

 여류소설가. 본관은 김해金海) 본명은 말봉末鳳. 부산 출생.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3년 수료한 뒤 서울에 와 1918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였다. 그 뒤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1927년 경도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하였다.

   이 무렵까지 문학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기자로서 쓴 탐방기나 수필이 주위의 호평을 받자, 1932년 보옥(步玉)이라는 필명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亡命女)>라는 단편소설로 응모,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어서 <고행(苦行)> <편지> 등을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密林)>을,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통속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전상범과 사별한 뒤, 이종하(李鍾河)와 재혼, 부산에 살면서 광복 때까지 작품활동을 중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1945년 <카인의 시장(市場)>과 <화려한 지옥(地獄)> 등을 발표하는 한편 사회운동, 즉 공창폐지운동(公娼廢止運動)과 박애원(博愛院) 경영 등의 일을 하였다.

   1949년 하와이 시찰여행을 하고 온 뒤, 6ㆍ25전쟁 때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태양의 권속(眷屬)> <파도에 부치는 노래> <새를 보라> <바람의 향연(饗宴)> <푸른 날개> <옥합을 열고> <찬란한 독배(毒盃)> <생명(生命)> <길> <사슴> <장미의 고향>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처음부터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 즉 애욕의 갈등 속에서도 건전하고 정의가 이기는 모랄을 지니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신조를 가진 소설가였다. 대체적으로 순수문학에만 집착하는 문단을 향하여 “순수귀신(純粹鬼神)을 버리라.”고까지 하였으나, 그러한 주장은 아직도 일반화되고 있지 않다. 1954년 우리 나라 기독교 최초의 여성 장로(長老)가 되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애욕의 문제를 다루었으나, 광복 후에는 사회성을 띤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과 역사적ㆍ문학사조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비단 현대소설과는 달리 진지한 감도나 구성의 밀도면에서 볼 때 약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라는 역경 속에서 꾸준히 의지의 인간과 인간애를 추구하였다는 데 의의를 지닌다.

   <망명녀(亡命女)>(1932) <고행(苦行)> <편지> <밀림>(1935) <찔레꽃>(1937) <화려한 지옥>(1945) <카인의 시장(市場)>(1945) <화려한 지옥>(1945) <태양의 권속(眷屬)>(1952) <새를 보라>(1953) <바람의 향연>(1953) <이슬에 젖어>(1953) <비퀴소리>(1953) <푸른 날개>(1954) <파초의 꿈>(1955) <찬란한 독배(毒杯)>(1955) <생명>(1957) <화관의 계절>(1957) <푸른 장미>(1958) <사슴>(1958) <행로난(行路難)>(1958) <해바라기>(1958) <광명한 아침>(1958) <아담의 후예>(1958) <환희>(1959) <제비야 오렴>(1959) <장미의 고향>(1959) <이브의 후예>(1960)  <바람의 향연>(1962)                       ('인명사전'에서)

 

 

 

 

  

 

김말봉은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초의 부산 출신 문인이다. 1901년 4월 3일(음력)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활발한 신문소설 연재로 대중소설 개척자로 불리는 김말봉에 대해 예술성과 인간을 탐구해야 하는 문학 본질에서 벗어난 작가라는 순수문학 옹호자들의 비판이 있지만 김말봉 스스로는 통속작가임을 자처하면서 순수문학 옹호자를 '순수귀신(純粹鬼神)'이라고 통박했다.

  작가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에 눈을 돌려 대중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작가적 신념이었다. 김말봉은 동구 좌천동 일신여학교 고등과 3년을 수료했다. 동기생으로는 여성 정치인인 박순천(朴順天), 박시연(朴時淵) 등이 있다.

   일신여학교 수료 후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3학년에 편입(1917년), 4년 과정을 졸업했다.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에서 교편을 잡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타카네의숙[高根義塾], 교토의 도오지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1929년 귀국 후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로 활동하는데, 1929년은 부산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경영하며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던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던 시기로, 백산은 일경을 피해 백산무역을 해산하고, 재정난으로 휴간 중이던 서울의 '중외일보'를 인수 복간하여 민족정기를 일깨우는데 힘을 모으고 있었다. 김말봉이 중외일보 기자가 된 것은 백산 안희제의 뜻에 동조한데 있었다.

   이 시기 김말봉은 중외일보에서 이름이 바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보옥(步玉)'이란 필명으로 단편소설 '망명녀(亡命女)'를 투고, 1932년 1월 당선됨으로써 소설가로 등단한다. 이에 앞서 1925년 4월 동아일보 '신춘문단'에 '시집살이'를 발표한 적이 있지만 공식적인 문단데뷔 절차를 밟기 전으로 그의 문단데뷔 작품은 1932년의 '망명녀'이다.

   우리나라 초기의 여성소설가로는 김말봉과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박화성(朴花城)이 1925년 조선문단에 '추석전야'가 추천된 바 있고, 강경애(姜敬愛)가 1931년 혜성(慧星)에 '어머니와 딸'을, 최정희(崔貞熙)가 1932년 시대공론에 '식대(食代)'를 발표한 정도였다.

   김말봉의 작품세계는 광복 이전은 남녀간의 애욕(愛慾) 문제를 주로 다뤘으나 광복 이후는 인간의 애욕문제가 가미된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광복 이전을 '제1기 작품'이라 하고, 광복 이후를 '제2기 작품'이라 하면 1기의 대표작품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 제2기의 대표작품은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한 '생명(生命)'이라 할 수 있다. 광복 전 김말봉의 문학세계는 개인이 가진 애정이 애욕으로 나아가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였지만 광복 후, 제2기에서는 사회공동체에 눈을 돌려 사회정의에 초점을 맞췄다.

    김말봉이 대중소설가로 가능성을 보인 것은 193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설의식(薛義植), 학예부장 서항석(徐恒錫)의 주선으로 장편소설 '밀림(密林)'을 1935년 9월 26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이다. 특히 밀림 집필 당시 김말봉은 부산에 살고 있던 시기로 밀림의 산실(産室)은 그의 거처인 동구 좌천동이었다.

   첫 번째 장편소설 '밀림'의 신문연재로 각광을 받은 김말봉의 두 번째 장편소설은 조선일보에 1937년 3월 31일부터 10월 3일까지 연재한 '찔레꽃'이었다. 작품 '찔레꽃'은 김말봉을 통속소설가에서 일약 저널리즘 스타로 거듭나게 한다.

   '찔레꽃'은 얽히고 설킨 애정관계가 하루하루 짧은 지면으로 연재되어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킨, 신문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자의 호기심 유발로 큰 성공을 거둔다. '찔레꽃'이 연재된 시기는 김말봉이 첫 번째 남편 전상범과 사별하고 재산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이종하(李鍾河)와 1937년 재혼하여 동구 초량동의 연화동(오늘날 초량1동)에 살 때이다. 동아일보 연재작 '밀림'이 부산에 살 때이고 조선일보 연재작 '찔레꽃' 역시 부산에서 쓰여진 작품으로 김말봉의 문학적 토양은 고향 부산이었다.

   김말봉은 광복 후 부산에서 서울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나선다. 1945년 부인신문(婦人新聞)에 장편소설 '카인의 시장(市場)'을 발표하는 한편 작품활동 이외에도 공창(公娼)폐지운동에 앞장서고 박애원(博愛院)을 경영하는 등 사회운동에도 활발한 활동을 한다. 김말봉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1957년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된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찔레꽃'을 인문사가 1939년에, 1948년에는 합동사서점에서 출간한다. '밀림'은 영창서관에서 1942년, 공동문화사가 1955년 출간한다.

   '화려한 지옥'(문연사 1952년), '태양의 권속'(삼신출판사 1953), '푸른 날개'(형설출판사 1954), '별들의 고향'(정음사 1956), '생명'(동인문화사 1957), '벌레 많은 꽃'(대일출판사 1977) 등을 발표했고, 단편선집으로 '꽃과 뱀'(문연사 1957) 등이 있다. 1961년 2월 9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2009. 1~2 '부산이야기' / 조민제 편집위원)

 

 

 

 

作家金末峰長老之墓 ... 소설가로서 文友들의 기림과 우리나라 기독교 최초의 여성 장로로서 敎友들의 기림을 입어 검은돌 비석이 서다.

작고 1년 후 세운 이 묘비의 제막날짜가 1962년 2월 9일인데, 이것을 보고 작가의 사망일을 1962년으로 기록한 곳이 많다. 위에 인용한 '인명사전'과 '부산이야기'도 그렇게 되어 있어서 머거주기가 정정했다.

 

 

 

아래쪽 집들이 보이는 곳은 경기도 구리시 상적마을의 일부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김말봉 내외의 묘. 왼쪽 이종하, 오른쪽 김말봉.

벌안 아래쪽을 블록으로 막아 경계를 표시하였고 내외가 나란히 묻힌 무덤이어서 찾기 어렵지 않다. 아래론 개망초 하얀 꽃 흐드러졌다.

 

 

생몰연대는 여기 묘비에서 확실해진다

 

 

묘비 뒷면에는 그의 대표적인 신문연재소설 <밀림> <찔레꽃> 등이 새겨졌다

 

 

김말봉의 마지막 남편 이종하(李鍾河)의 무덤

이종하에게도 첫부인이 있고, 김말봉에게도 가슴에 더욱 깊은 전남편이 있건만 그들은 삶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나란히 묻혔다. 

 

 

 

남편 이종하의 묘비 뒷면에는 네 명의 아들이 적혀 있다. 위로 둘은 첫부인의 아들이다. 그러면 아래 두 명의 아들은 김말봉이 재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남편 이종하는 1954년 세상을 떴다. 재혼하여 함께 17년을 함께 살았다. 과부 7년을 마감하고 김말봉도 1961년 갔다.

 

 

 

* 소설가 김말봉 묘소 찾아가는 길 ***************************************************************************

 

망우리 공동묘지 주차장 뒤쪽 모퉁이에 이처럼 묘지로 통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런 길따라 50여 미터 가면

 

 

 

오른쪽 아래로 내외묘가 분명한 이런 무덤이 보입니다. 천천히 살펴야 합니다. 바로 길가가 아니거든요. 묘지번호 100768 김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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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그네> 가사를 쓴 사람은 김말봉이고 여기에 곡을 붙인 사람은 금수현입니다. 두 사람은 장모와 사위 관계입니다. 작곡가 사위를 총애한 김말봉은 자작시를 전하고, 장모의 사랑에 감격한 금수현은 심혈을 기울여 곡을 붙였다고 합니다. 애창가곡 <그네>가 탄생한 거지요. 금수현의 아내 전혜금은 물론 김말봉이 낳은 딸은 아닙니다. 김말봉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남자 전상범, 그의 전처 소생이지요. 김말봉은 전상범이 첫부인과 사별한 다음 그와 결혼합니다. 장모와 사위의 나이 차이는 19살이었습니다.

 

아티스트 - 김말봉 작사 / 금수현 작곡
그네-금수현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양 나래쉬고 보더라


한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집필중인 김말봉 장로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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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사랑

 

부산에서 나고 자란 김말봉은 3년 동안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다녔다. 이즈음 전상범이란 남자, 평생 그의 가슴을 흔드는 청년과 첫사랑을 나눈다. 열일곱 나이에 여학교를 졸업한다. 상범을 향한 애틋함도 깊어갔다.

1917년 말봉은 서울로 올라와 정신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이듬해 졸업하고 황해도 명신학교에 발령받아 선생 근무를 시작한다. 그 사이 말봉의 첫사랑 전상범은 말봉이 따르고 좋아했던 s언니 김경순과 결혼한다. 충격을 받은 말봉은 1920년 하와이에 있는 언니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21세 때이다. 실연의 아픔을 딛고 말봉은 다카네의숙과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한다. 그리고 1927년 귀국한다. 28세가 되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말봉은 다시 전상범이 그립다. 중외일보 기자로 활동한다. 전상범의 아내 김경순은 1남1녀를 남기고 1923년 세상을 떠난 후였다(여기에서 태어난 전혜금이 후일 작곡가 금수현의 아내가 된다). 벌써 4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전상범에게는 새로운 애인이 있었다. 초등학교 여교사인 여운영과 살림을 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말봉은 절망했다. 괴로움과 갈등 속에서 말봉은 엉뚱한 행동을 저지른다. 일종의 반발심리였을까, 자포자기였을까, 자기를 흠모하는 은행원 이석현과 부산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석현은 말봉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말봉의 사랑은 전상범이었다. 말봉은 선언한다. 애정없는 결혼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당신과 결혼한 것은 전상범에 대한 반항이었다고,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으니 깨끗이 헤어지자고, 결국 그들은 갈라섰다.

말봉은 서울로 올라온다. 전상범도 마음이 흔들린다. 상경한다. 둘은 서울에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이 소식이 부산에 전해지자 전상범의 두번째 아내 여운영은 절망한다. 말봉의 첫남편 이석현도 절망한다. 그들의 불륜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진다.

말봉의 사랑은 강하고 치열했다. 비난과 질책의 현장 부산으로 낯두껍게 내려온다. 그리고 여운영이 전상범의 첫부인이 낳은 아들과 자취를 하고 있는 것을 기회로 전상범의 본가를 차지한다. 이런 와중에 속을 끓이던 말봉의 아버지는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1931년 말봉은 전상범과의 사이에 아들 딸 쌍둥이를 얻는다. 이미 딸이 하나 있었으므로, 첫부인 김경순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을 합하여 아이들이 모두 다섯이 되었다. 두번째 부인 여운영은 소생이 없었다. 비록 세번째 부인이 되었지만 말봉은 행복했다. 전상범은 오륙도가 훤히 내다보이는 좌천동에 방 하나를 얻어 말봉이 작품 창작에 전념하라고 배려함은 물론 서로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1932년 말봉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로 공식 등단하였으며,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연재한다. 최초의 여류 신문연재였다.

전상범은 누구인가. 1896년생이니 말봉보다 5살 위였다. 경북 영일 출생으로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경남은행에 있다가 사업가로 변신 동래장온천, 미쓰이물산 조선지점 등에서 총지배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호남이었다. 매력있고 능력있는 남성이었다.

그러나, 말봉의 사랑은 겨우 7년을 채우는 것으로 끝이 났다. 1936년 봄 전상범이 사망한 것이다. 전상범의 죽음은 말봉의 소설 '찔레꽃'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봉은 전상범이 좋아한 꽃 '찔레꽃'으로 이듬해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쓴다. 이 작품은 전국을 흔드는 공전의 대 히트작이 된다. 통속소설의 전형으로 회자되는 '찔레꽃'은 이런 사연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하나 말봉의 '신여성' 면모가 드러난다. 전상범의 친구이자 첫남편 이석현의 친구이기도 한 이종화라는 남자와 전격적으로 한 방을 쓴다. 당시 이종화는 상처한 처지였고 말봉에게 뜨겁게 구애했다. 말봉의 여성적 매력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건 길이 아니었고 말봉의 뜻도 아니었다. 말봉은 연재소설을 쓰기 위해 죽은 전 남편 전상범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종화와 갈등도 심했고, 다시 들어간 전상범의 집에서 첫부인 김경순의 아들 '홍'이와 딸 '혜금'과의 갈등도 깊어졌다. 그러나 '찔레꽃'의 위력은 대단했으며 결국 혜금은 새엄마를 받아들이고, 말봉의 원고를 정서해주는 일까지 맡아주었다. 1940년 혜금은 동래고녀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1943년 교회에서 만난 금수현의 배필이 된다. 금수현은 지휘자 금난새의 아버지다.

말봉의 사랑에 휴식기는 없었다. 사랑의 첫남편 전상범이 죽은 이듬해 말봉은 재산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호걸 이종하와 재혼한다. 이종하는 상처하여 세 살난 아들이 있었다. 이 아이를 말봉이 키운다. 나중에 시인이 되어 방황하다가 행방불명이 된 이현우 시인이 바로 이종하의 첫부인 아들이다. 부산의 초량동에서 마님으로, 최고의 인기작가로 부유한 삶을 누린다. 무덤에 나란히 누운 사람이 바로 마지막 남편 이종하다. 말봉이 진정으로 함께 눕고 싶었던 사람은 전상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상범에게는 첫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죽은 후의 운명은 이미 자기의 의지를 떠난 것이다. 

해방 후 말봉은 상경한다. 고아원, 박애원을 경영한다. 공창폐지운동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1949년에는 하와이를 시찰한다. 1952년에는 베니스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한다. 작품도 열성적으로 토해낸다. 195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된다. 1957년에는 예술원 회원이 된다. 熱女다.

1960년 회갑을 1년 앞둔 그녀는 폐암 선고를 받는다. 그녀는 아무도 몰래 병실을 나선다. 부산으로 간다. 해운대를 거닐고 추억의 장소를 더듬던 그녀의 발걸음은 옛사랑 전상범의 집 앞에서 쓰러진다. 서울의 가족들에게 소식이 전해진다. 병마와 싸우던 그녀는 결국 이듬해 회갑 나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서울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애타게 찾은 이름은 누구일까.     

 

 

 

 

(앞줄 왼쪽부터) 김말봉 유치환 한사람 건너 조연현  195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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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없이 떠돌다 사라진 방랑시인 이현우

그는 김말봉의 의붓아들이다

지금 무덤에 나란히 누워있는 그녀의 마지막 남편 이종하의 전처 소생이다 

 

 

이현우의 시문집 <끊어진 한강교에서> 표지 (1994)

 

                                        시집 '끊어진 한강교에서' 전쟁을 감성적 언어로 소화

                                       마치 거지꼴로 나타나기 일쑤… 1983년 이후 행방 묘연

  

 

시인이나 작가가 그의 최후를 어떻게 마쳤는가를 모르는 예는 더러 있다. 프랑스의 경우 여태껏 죽은 해는 알지만 시신을 못 찾은 생텍쥐페리의 죽음이 있는가 하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랭보의 죽음도 있다.

우리 현대시사에는 시인 이현우의 죽음이 그런 예에 든다. 물론 그가 생존해 있어도 칠순을 갓 넘기는 나이다. 전쟁시를 감성적으로 잘 소화한 이현우의 죽음을 본 사람은 아직 없다.


그가 행방이 묘연해진 것은 1980년대 초반 이후니까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현우는 생래적으로 우수의 어두운 그늘이랄까, 그러한 비극적 인자를 몸에 지니고 태어난 것 같았다.

그를 알기 위해서는 잠깐 그의 가계를 들춰볼 필요가 있다. 1955년에 별세한 그의 선친 낙산 이종하는 잘 알려진 호남형 인사다. 그의 매부되는 시인 노석 박영환은 생전에 낙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는 동경 유학을 했고 무엇보다 진정한 항일 애국자요, 인격자로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1937년에 이종하는 여류소설가 김말봉과 재혼한다. 광복 이후 두 내외는 아나키스트들이 발기한 독립노동당(당수 유림)에서 낙산은 노동부장, 부인은 부녀부장으로 피선된다. 이때 이현우는 겨우 세 살, 계모 김말봉의 품에서 자란다. 어릴 적부터 이복동생들과 함께 뒹군 그였지만 성장 이후 생모를 일찍 여읜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어쩐지 이복들에게 정이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집을 자주 뛰쳐나와 무작정 거리를 방황하는 부랑아로 사는 것에 이력이 났다. 몇 달씩 집에 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동국대를 다녔지만 공부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이현우는 이 무렵부터 다른 또래의 문학하는 친구들과 필자의 하숙이 있는 명륜동, 혜화동 쪽에 불쑥 나타나 술과 밥, 잠을 청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젊은 시인들과 작가들은 곧잘 폐허나 다름없는 명동 등지의 주점, 몽파르나스 동방사롱 엠프레스 음악 다방이 있는 부근 주점에서 곧잘 어울렸다. 김관식, 천상병, 박봉우, 송기동, 이호철, 고은 등이 그 면면들이다. 이 무렵인 1958년 이현우는 '자유문학'지에 시 '끊어진 한강교에서'가 추천되어 그 감성적 언어의 유려함 때문에 일약 그를 한국의 아폴리네르로 만들어 놓았다.

   

'그 날,/ 나는 기억에도 없는 괴기한 환상에 잠기며/ 무너진 한강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 다./ 이미 모든 것 위에는 낙일이 오고 있는데/ 그래도 무엇인가 기다려지는 심정을 위해/ 회한과 절망이 교차되는 도시/ 그 어느 주점에 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의 비극의 편력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취기에 이지러진 눈을 들고 바라보면/ 불행은 검은 하늘에 차고/ 나의 청춘의 고독을 싣고/ 강물은 흘러간다' ('끊어진 한강교에서'의 일부).


어느 늦가을 날 친구인 시인 강민이 자주 다니던 음악실 '돌체' 계단에 와이셔츠 바람으로 쓰러져 있는 거지를 봤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얼굴은 오랫동안 씻지 않아 검은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현우였다. 가까스로 수습한 다음 날 강민은 어머니 김말봉을 찾았다.

"이 녀석아, 이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내가 그애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걸 낸들 어떻게 하겠나. 네가 제발 좀 데려와 다오." 그러고 난 다음에 거지꼴로 쓰러져 있는 이현우를 친구들이 메고 집에 데려다 주기도 했다. 며칠 뒤 명동에 나타났을 때 깜짝들 놀랄 만한 일류신사 차림새였다. 말쑥한 신사복 차림에 화사한 넥타이, 번쩍이는 구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 다음날부터 이현우의 차림새는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의 행색을 하고 나타나곤 했다. 밤 사이에 윗도리가 사라지고 시계도 넥타이도 온 데 간 데 없다. 그 다음 날엔 얼굴이 숯칠한 것처럼 어디서 뒹굴었는지 거지꼴이 되어 나타나곤 했다. 술값으로 모두 털어준 것이다. 한 때 걸인 대장 노릇을 한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가 거지 집단에 끼어들어 재미나는 소설 얘기를 털어 놓을 땐 거지들이 자못 대장감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그만한 유식한 거지를 보지 못했기에 존경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대학을 중퇴한 것도 등록금을 술값으로 날렸기 때문이다. 때로는 서울역 앞 양동의 사창굴에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술값도 떨어지고 화대도 주지 못해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 다음 날 어머니가 와서 밀린 돈 다 지불하고 풀려나기도 했다.

당시 김말봉은 서울 신문 두 곳에 연재소설로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런 인기 작가였다. 1961년 김말봉은 사망했는데 현우의 떠돌이는 변함이 없었다. 부산에 있을 동안에도 거지꼴로 지낸 것은 변함없는 상황이었다. 필자가 보다 못해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시 한 편에 3만 원씩 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한번 약속을 지킨 이래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는 1933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낙양고를 나왔다. 그의 형은 그를 버린 지 오래됐고 친구들도 모두 고개를 돌린 뒤 착한 시인 이인영이 1983년 마지막 모은 돈으로 부산역 발 서울행 열차에 그를 태워 보냈다. 그 이래 그를 본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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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김의 메모아 - 내가 사랑한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
김정준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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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김의 메모아: 내가 사랑한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

 

 

『마태 김의 메모아: 내가 사랑한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은 저자가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들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여류소설가 김말봉, 김환기를 비롯하여 시인 김기림, 이상, 박산운, 정지용, 이은상, 공중인, 김광섭, 김동리, 손소희, 조각가 한용진, 화가 김하건, 문미애, 김병기, 김창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성악가 김자경, 목사 김재준 등 다양한 문학인, 예술가와 종교인들의 개인적이고 치밀한 삶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저자소개

김정준

저자 : 김정준
저자 김정준은 1928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고, 경성에서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1952년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95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2년 후 전재금과 결혼하고 1964년에 외과전문의로 개업했다. 1997년에 외과전문의를 은퇴했으며, 1984년부터 뉴욕 한국음악재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어 테너로서 성악적 재능과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미술 애호가로서 유명 미술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목차

서문

1. 나의 정신적 멘토들: 김기림, 김하건, 이상
내 고향, 아라사의 소문이 바람을 타고 미치는 곳
나의 스승 김기림
화가 김하건의 부임
김기림과 이상의 시세계
김기림과 이상의 시비詩碑
자랑스러운 고향 사람들

2. 끝뫼 김말봉과의 인연
김말봉과의 첫만남
김말봉의 생애
교제하던 여인들
남성사중창
재금에 대한 순정
맹의순의 숭고한 죽음
불같은 성격의 김말봉
총을 멘 시인 박산운
부산에서 약혼식을 올리다
김말봉의 대학 동창 정지용
노산 이은상
김동리와 손소희의 스캔들
뉴욕집을 찾은 방문객들
나와 인연을 맺은 목사님들
김말봉에 대한 평가

3. 평생 이어진 김환기와의 인연
광복동 다방에 진을 친 문인과 예술가들
광복동 거리에서 마주친 김환기 부부
파리로 간 김환기
김환기의 뉴욕 생활
화상이 김환기의 작품을 갖고 사라지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죽음을 예감하다
김향안, 김환기 작품 알리는 일에 전력하다
뮤제 베리에에서 열린 김환기 ‘뉴욕 10년’ 전시회

4. 뉴욕에서 만난 예술가들
뉴욕에 온 김병기
뉴욕의 미술가 마을
김향안, 한용진, 문미애 부부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한용진의 이상 문학비 제작
김향안이 세상을 떠나다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 백남준, 문미애

축하의 글: 아름다운 인연이 주는 감동 ㆍ 박미정

 

출판사 서평

위대한 한국 예술가들과의 조우, 잊지 못할 추억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다!

『마태 김의 메모아: 내가 사랑한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은 저자가 한국의 근현대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들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여류소설가 김말봉, 김환기를 비롯하여 시인 김기림, 이상, 박산운, 정지용, 이은상, 공중인, 김광섭, 김동리, 손소희, 조각가 한용진, 화가 김하건, 문미애, 김병기, 김창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성악가 김자경, 목사 김재준 등 다양한 문학인, 예술가와 종교인들의 개인적이고 치밀한 삶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저자의 중학교 담임이었던 시인 김기림과의 에피소드에서 시작하여 여류소설가 김말봉을 통한 다양한 예술가들과의 만남, 주치의와 환자로 만난 김환기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만나고, 교류하면서 느낀 인상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한국 예술가들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또한 시인 이상의 아내이기도 했던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본명 변동림)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통해 위대한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또 다른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여류소설가로 한국 근현대사의 한 장을 수놓았음에도 업적이 잘 드러나지 않아 국문학 연구사의 불모지였던 김말봉의 삶과 문학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어 많은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저자가 지인들과 직접 찍은 사진들과 환기미술관에서 제공한 김환기 작품들도 본문에 함께 수록하여 당시 예술가들의 작품세계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우리가 마태 김정준의 회고록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교류한 예술가들이 우리나라 근대 예술계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기록으로 남겼지만, 그 속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근대 예술가들의 진솔한 삶이 함께 녹아 있으므로 우리는 그의 회고록을 단순한 개인의 회고록으로 폄하할 수 없다. 그의 개인의 역사가 우리나라 근대 예술의 역사와 오버랩되고 있다. 숨겨진 우리나라 근대 예술의 역사가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예술가들 다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들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에 나타나는 그들의 일화는 자연히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난 저자는 서울의전을 졸업한 부친이 함경북도 경성鏡城에 병원을 개업한 때문에 어려서부터 부유...(하략)

 

책속으로

이 책은 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내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한국이 자랑하는 예술가와 종교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에는 김말봉 장모님, 화가 김환기, 중학교 시절의 김기림, 시인 이상, 박산운, 정지용, 이은상, 김동리, 김광섭, 손소희, 공중인, 화가 김하건, 한용진, 문미애, 백남준, 김병기, 김창렬, 성악가 김자경, 김재준 목사 등 많은 문학인, 예술가와 종교인들의 모습이 나의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내가 만나고, 교류하고, 느낀 인상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내 생애의 일부분을 차지한 그분들을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그분들 덕택에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데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 pp.5-6

그 순간이 나의 일생을 변화시킬 결정적인 동기가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김말봉과 K군이 방으로 들어왔다. 여사는 몸이 부한 편이고 얼굴이 둥글었다. 이따금 입가에 미소를 띠며 영어를 종종 사용하며 말하는 유명 소설가와의 첫 만남은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 경험으로, 그때 받은 여사의 인상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변치 않고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당시 서울에 온 지 2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강한 함경도 사투리가 나의 말 속에 남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접하는 사회는 매우 협소했다. 그날에야 나는 비로소 넓은 세계를 경험했다. 젊은 여학생과 함께 방문한 나는 여사의 놀림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즐거운 대화의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갔던지 통행금지가 원수와도 같았다. 다시 찾아뵙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나면서 내 머릿속은 온통 다시 방문할 생각뿐이었다. --- p.82

내가 김환기 부부를 처음 만난 건 1951년이었다. 재금이와 김말봉 여사를 따라 광복동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미군 군복을 입은 안경 낀 키 큰 분이 안경을 낀 아내 김향안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여사의 소개로 그 부부와 미소로 인사를 나눴다. 김향안의 안경은 도수가 높았는데, 훗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안경을 착용했다고 말해주었다. 그 후 광복동에서 그 부부를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당시 동란 중 이전한 의대가 근처에 있었고, 나는 졸업 후 의사자격증을 받은 때였다. 김향안이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안 건 그 후였다. 이상이 나의 중학교 담임인 김기림 선생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도 몰랐다. 당시 김기림 선생은 납북 후 고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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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김말봉 지음 / 지와사랑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김말봉의 애정소설 '찔레꽃'

 

찔레꽃 - 김말봉 애정소설

 

 

 

『찔레꽃』은 여류소설가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음에도 국문학 연구의 불모지였던 김말봉의 문학세계를 깊이 있게 탐색할 수 있는 작품이다. 『찔레꽃』에는 1930년대 젊은이들의 자유연애와 결혼관, 자본주의적 빈부 갈등이 드러나 있어 당대 시대상황이 효과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특히 ‘돈’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현 실태를 다양한 인물상과 화려한 부유층의 삶을 통해 감각적으로 체화해나간다. 『찔레꽃』은 김말봉 특유의 섬세하고 낭만적인 문체로 남녀의 심리를 리얼하게 묘사해 독자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찔레꽃』에 나타나는 김말봉 문학의 현재적 가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문학성이나 대중성에 비추어 봤을 때 오늘날의 현대문학, 연애소설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저자소개

김말봉

저자 : 김말봉
저자 김말봉(金末峰)(1901~1961)은 경남 밀양 출생으로 1918년 서울 정신여학교 졸업 후,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교토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했으며, 193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라는 단편소설을 응모하여 당선되었으며, 최초의 부산 출신 문인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어서 “고행” “편지” 등을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통속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뿐 아니라 공창폐지운동, 박애원 경영 등의 사회운동을 병행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1954년 우리나라 기독교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되기도 했다. 1961년 2월 9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다산 작가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표 작품으로 “카인의 시장”(1945) “화려한 지옥”(1945) “태양의 권속”(1952) “새를 보라”(1953) “바람의 향연”(1953) “이슬에 젖어”(1953) “바퀴소리”(1953) “푸른 날개”(1954) “파초의 꿈”(1955) “찬란한 독배”(1955) “생명”(1957) “화관의 계절”(1957) “푸른 장미”(1958) “사슴”(1958) “행로난”(1958) “해바라기”(1958) “광명한 아침”(1958) “아담의 후예”(1958) “환희”(1959) “제비야 오렴”(1959) “장미의 고향”(1959) “이브의 후예”(1960) “바람의 향연”(1962) 등이 있다.

목차

여섯 째의 여자
운명의 손
팔리는 사랑
빛과 어둠
물레바퀴 세상
황금보다 귀한 것
꽃은 피었건만
사랑의 척도
영혼의 시장
적자

김말봉의 찔레꽃론 │ 천상병
사회와 윤리

발행인의 글 │ 김광우
다시 피어난 찔레꽃

 

출판사 서평

여류작가 최초의 인기 애정소설!

『찔레꽃』은 여류소설가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음에도 국문학 연구의 불모지였던 김말봉의 문학세계를 깊이 있게 탐색할 수 있는 작품이다. 『찔레꽃』에는 1930년대 젊은이들의 자유연애와 결혼관, 자본주의적 빈부 갈등이 드러나 있어 당대 시대상황이 효과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특히 ‘돈’과 ‘욕망’에 의해 좌우되는 현 실태를 다양한 인물상과 화려한 부유층의 삶을 통해 감각적으로 체화해나간다. 『찔레꽃』은 김말봉 특유의 섬세하고 낭만적인 문체로 남녀의 심리를 리얼하게 묘사해 독자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찔레꽃』에 나타나는 김말봉 문학의 현재적 가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문학성이나 대중성에 비추어 봤을 때 오늘날의 현대문학, 연애소설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김말봉의 대표작이다. 대중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여류작가로서 김말봉이 살았던 시대를 효과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의 시대사조와 아울러 김말봉의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다. 자유연애, 여성해방운동, 성 개방, 신구세대의 가치관 대립 등의 문제는 시대를 거슬러 지금도 유효한 문제이다. 김말봉의 『찔레꽃』이 문제작인 이유는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의 정체성이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던 1937년에 이 소설이 신문 연재를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독자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대중소설에 대한 이해가 없던 때에 자유결혼을 주장하는 애정소설을 쓴 작가가 김말봉인 것이다.

2012년은 김말봉이 우리 곁을 떠난 지 51년이 되는 해이다. 절판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찔레꽃』을 재출간하는 이유는 한국 문학사에서 이름만 빛날 뿐 작품이 사라진 슬픈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김말봉’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그의 생애를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작품에 대한 논문도 눈에 띈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작품을 서점에서 구입하려면 절판이라서 가능하지 않다. 이는 실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은 작가의 실존적 가치이므로 작가의 생애를 아무리 소상하게 안다 하더라도, 또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연구논문을 읽는다 하더라도 그건 작가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 부분적으로만 유익할 뿐 문학사적 공로나 영향을 아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름만 무성한 것으로는 작가가 진정으로 우리 곁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작품을 읽고 작가의 정신세계와 교감을 ...(하략)

 

책속으로

“어버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자식이 아니야. 남의 자식이 되었으면 음! 부모 말을 순종하는 것이 그게 사람의 도린데 말야 음!”
“아버지!”
하고 경애가 조만호씨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자식이 싫다는데도 어떤 욕심 때문에 기어이 윽박지르는 것은 부모 된 도리라고 하겠습니까? 바른 말씀이지 윤 선생의 인격을 보시고 절 시집을 보내시겠다는 겁니까? 그보다도 이 양반이 이번에 상속받은 백만 원에 탐이 나신 것이 아니야요?”
탄환처럼 튀어나오는 경애의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는 어떤 조롱과 멸시와 그리고 끝없는 반항이 섞여 있었다. --- p.34

“얘 경애야.”
조씨의 목소리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너도 나이가 한두 살이 아니고 벌써 과년한 처녀가 아니냐? 음! 그러니 말야,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보란 말야. 그리고 결정적 대답은 몇 날 후에 들어도 좋으니 음!”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경애의 음성도 나지막하였다. 그러나 잘 다져진 납덩어리처럼 차디차게 굴러나왔다.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세계가 있는 것과 같이 또 저에게도 제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결혼하지 않고도 훌륭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제가 실행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 p.35

대체로 여성으로서는 우리 신문학사에서 뚜렷하게 활약한 소설가는 드물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낭만적인 여성감정의 묘사에 뛰어난 작가가 드물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김말봉은 자신이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여성의 심리묘사에는 남성 작가들이 따를 수 없는 뛰어난 능력을 우리에게 나타내어주고 있다.
가령 『찔레꽃』에 있어서 바람을 잘 피우는 남편을 둔 병든 중년여인의 갈등이라든가, 이러한 상전 밑에서 갖은 아첨을 떨어가며 소시민적인 음모도 서슴지 않는 침모라든가, 기생 백옥란이 순진무구한 은행원 출신의 연인을 버리고 상류사회의 달짝지근한 맛에 취하여 배신을 교묘히 한다든가 하는 그런 묘사들이 그것이다. --- p.432

지금 『찔레꽃』을 다시 출간하는 이유는 한국 문학사에서 이름만 빛날 뿐 작품이 사라진 슬픈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작품은 작가의 실존적 가치이므로 작가의 생애를 아무리 소상하게 안다 하더라도, 또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연구논문을 읽는다 하더라도 작가의 정신세계를 아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품을 읽고 작가의 정신세계와 교감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 작가는 우리와 더불어 현재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 pp.445-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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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 The Great Couples 4
김광우 지음 / 미술문화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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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폴레옹의 전속 화가인 다비드에 대한 책이다. 다비드는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그렸으며 예술적, 정치적으로 프랑스 화단에 많은 영향을 행사했다. 그의 영향은 부정적인 면과 아카데미에 대한 개혁과 같은 긍정적인 면을 모두 포괄한다.

다비드에게 있어서 나폴레옹이란 인생 최대의 기회이며 운명이었고 자신의 야심을 펼치는 데 완벽한 배경이었다. 때문에 프랑스 혁명과 다비드의 그림을 모르고 나폴레옹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어려우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을 모르고 다비드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렵다.

지은이는 프랑스 역사에 다비드와 나폴레옹이 끼친 영향을 똑부러지게 설명하고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영웅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또한 엇갈린 다비드의 행적에 대한 평가와 비평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떠맡긴다. 다비드는 천재화가인가, 기회주의자인가? 그 판단은 책을 다 읽은 뒤라야 가능하다.


결국 정치가와의 유착 고리가 끊어졌을 때, 즉 나폴레옹이 몰락했을 때 나폴레옹의 사람 다비드도 그와 더불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강제로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고 다비드는 스스로 벨기에로 망명하여 그곳에 뼈를 묻었다. (본문 중에서)


저자소개
김광우 - 197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City College of New York과 Fordham University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했다. 1980~86년까지 뉴욕 교회에서 바이블 스터디를 지도하고 욥기 주석을 편역했다. 예술의 중심지가 된 뉴욕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접하면서 미술과 미술비평에 관심을 가졌으며, 일찍부터 뉴욕 미술 패러다임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대가와 친구들' 시리즈를 집필했다.

지은 책으로는 <폴록과 친구들>, <워홀과 친구들>, <뒤샹과 친구들>, <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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