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의 작가 김말봉金末峰 내외의 무덤
앞쪽 하얀비석이 남편 이종하李鍾河, 뒤의 검은비석이 김말봉
일반적으로 왼쪽에 여자가 묻히는데 여긴 여자가 오른쪽이다
망우리 공동묘지
김말봉金末峰(1901.4.3∼1962.2.9)
여류소설가. 본관은 김해金海) 본명은 말봉末鳳. 부산 출생.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3년 수료한 뒤 서울에 와 1918년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였다. 그 뒤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1927년 경도京都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하였다.
이 무렵까지 문학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기자로서 쓴 탐방기나 수필이 주위의 호평을 받자, 1932년 보옥(步玉)이라는 필명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亡命女)>라는 단편소설로 응모,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어서 <고행(苦行)> <편지> 등을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密林)>을, 1937년 [조선일보]에 <찔레꽃>을 연재함으로써, 일약 통속소설가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전상범과 사별한 뒤, 이종하(李鍾河)와 재혼, 부산에 살면서 광복 때까지 작품활동을 중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1945년 <카인의 시장(市場)>과 <화려한 지옥(地獄)> 등을 발표하는 한편 사회운동, 즉 공창폐지운동(公娼廢止運動)과 박애원(博愛院) 경영 등의 일을 하였다.
1949년 하와이 시찰여행을 하고 온 뒤, 6ㆍ25전쟁 때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태양의 권속(眷屬)> <파도에 부치는 노래> <새를 보라> <바람의 향연(饗宴)> <푸른 날개> <옥합을 열고> <찬란한 독배(毒盃)> <생명(生命)> <길> <사슴> <장미의 고향>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처음부터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 즉 애욕의 갈등 속에서도 건전하고 정의가 이기는 모랄을 지니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신조를 가진 소설가였다. 대체적으로 순수문학에만 집착하는 문단을 향하여 “순수귀신(純粹鬼神)을 버리라.”고까지 하였으나, 그러한 주장은 아직도 일반화되고 있지 않다. 1954년 우리 나라 기독교 최초의 여성 장로(長老)가 되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사람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애욕의 문제를 다루었으나, 광복 후에는 사회성을 띤 작품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과 역사적ㆍ문학사조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비단 현대소설과는 달리 진지한 감도나 구성의 밀도면에서 볼 때 약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라는 역경 속에서 꾸준히 의지의 인간과 인간애를 추구하였다는 데 의의를 지닌다.
<망명녀(亡命女)>(1932) <고행(苦行)> <편지> <밀림>(1935) <찔레꽃>(1937) <화려한 지옥>(1945) <카인의 시장(市場)>(1945) <화려한 지옥>(1945) <태양의 권속(眷屬)>(1952) <새를 보라>(1953) <바람의 향연>(1953) <이슬에 젖어>(1953) <비퀴소리>(1953) <푸른 날개>(1954) <파초의 꿈>(1955) <찬란한 독배(毒杯)>(1955) <생명>(1957) <화관의 계절>(1957) <푸른 장미>(1958) <사슴>(1958) <행로난(行路難)>(1958) <해바라기>(1958) <광명한 아침>(1958) <아담의 후예>(1958) <환희>(1959) <제비야 오렴>(1959) <장미의 고향>(1959) <이브의 후예>(1960) <바람의 향연>(1962) ('인명사전'에서)
김말봉은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초의 부산 출신 문인이다. 1901년 4월 3일(음력)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활발한 신문소설 연재로 대중소설 개척자로 불리는 김말봉에 대해 예술성과 인간을 탐구해야 하는 문학 본질에서 벗어난 작가라는 순수문학 옹호자들의 비판이 있지만 김말봉 스스로는 통속작가임을 자처하면서 순수문학 옹호자를 '순수귀신(純粹鬼神)'이라고 통박했다.
작가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에 눈을 돌려 대중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작가적 신념이었다. 김말봉은 동구 좌천동 일신여학교 고등과 3년을 수료했다. 동기생으로는 여성 정치인인 박순천(朴順天), 박시연(朴時淵) 등이 있다.
일신여학교 수료 후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 3학년에 편입(1917년), 4년 과정을 졸업했다.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에서 교편을 잡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타카네의숙[高根義塾], 교토의 도오지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1929년 귀국 후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로 활동하는데, 1929년은 부산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경영하며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던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가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던 시기로, 백산은 일경을 피해 백산무역을 해산하고, 재정난으로 휴간 중이던 서울의 '중외일보'를 인수 복간하여 민족정기를 일깨우는데 힘을 모으고 있었다. 김말봉이 중외일보 기자가 된 것은 백산 안희제의 뜻에 동조한데 있었다.
이 시기 김말봉은 중외일보에서 이름이 바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보옥(步玉)'이란 필명으로 단편소설 '망명녀(亡命女)'를 투고, 1932년 1월 당선됨으로써 소설가로 등단한다. 이에 앞서 1925년 4월 동아일보 '신춘문단'에 '시집살이'를 발표한 적이 있지만 공식적인 문단데뷔 절차를 밟기 전으로 그의 문단데뷔 작품은 1932년의 '망명녀'이다.
우리나라 초기의 여성소설가로는 김말봉과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박화성(朴花城)이 1925년 조선문단에 '추석전야'가 추천된 바 있고, 강경애(姜敬愛)가 1931년 혜성(慧星)에 '어머니와 딸'을, 최정희(崔貞熙)가 1932년 시대공론에 '식대(食代)'를 발표한 정도였다.
김말봉의 작품세계는 광복 이전은 남녀간의 애욕(愛慾) 문제를 주로 다뤘으나 광복 이후는 인간의 애욕문제가 가미된 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광복 이전을 '제1기 작품'이라 하고, 광복 이후를 '제2기 작품'이라 하면 1기의 대표작품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찔레꽃', 제2기의 대표작품은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한 '생명(生命)'이라 할 수 있다. 광복 전 김말봉의 문학세계는 개인이 가진 애정이 애욕으로 나아가는 서구식 사조를 받아들였지만 광복 후, 제2기에서는 사회공동체에 눈을 돌려 사회정의에 초점을 맞췄다.
김말봉이 대중소설가로 가능성을 보인 것은 1935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설의식(薛義植), 학예부장 서항석(徐恒錫)의 주선으로 장편소설 '밀림(密林)'을 1935년 9월 26일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이다. 특히 밀림 집필 당시 김말봉은 부산에 살고 있던 시기로 밀림의 산실(産室)은 그의 거처인 동구 좌천동이었다.
첫 번째 장편소설 '밀림'의 신문연재로 각광을 받은 김말봉의 두 번째 장편소설은 조선일보에 1937년 3월 31일부터 10월 3일까지 연재한 '찔레꽃'이었다. 작품 '찔레꽃'은 김말봉을 통속소설가에서 일약 저널리즘 스타로 거듭나게 한다.
'찔레꽃'은 얽히고 설킨 애정관계가 하루하루 짧은 지면으로 연재되어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킨, 신문소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자의 호기심 유발로 큰 성공을 거둔다. '찔레꽃'이 연재된 시기는 김말봉이 첫 번째 남편 전상범과 사별하고 재산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이종하(李鍾河)와 1937년 재혼하여 동구 초량동의 연화동(오늘날 초량1동)에 살 때이다. 동아일보 연재작 '밀림'이 부산에 살 때이고 조선일보 연재작 '찔레꽃' 역시 부산에서 쓰여진 작품으로 김말봉의 문학적 토양은 고향 부산이었다.
김말봉은 광복 후 부산에서 서울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나선다. 1945년 부인신문(婦人新聞)에 장편소설 '카인의 시장(市場)'을 발표하는 한편 작품활동 이외에도 공창(公娼)폐지운동에 앞장서고 박애원(博愛院)을 경영하는 등 사회운동에도 활발한 활동을 한다. 김말봉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1957년 우리나라 그리스도교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된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찔레꽃'을 인문사가 1939년에, 1948년에는 합동사서점에서 출간한다. '밀림'은 영창서관에서 1942년, 공동문화사가 1955년 출간한다.
'화려한 지옥'(문연사 1952년), '태양의 권속'(삼신출판사 1953), '푸른 날개'(형설출판사 1954), '별들의 고향'(정음사 1956), '생명'(동인문화사 1957), '벌레 많은 꽃'(대일출판사 1977) 등을 발표했고, 단편선집으로 '꽃과 뱀'(문연사 1957) 등이 있다. 1961년 2월 9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2009. 1~2 '부산이야기' / 조민제 편집위원)
作家金末峰長老之墓 ... 소설가로서 文友들의 기림과 우리나라 기독교 최초의 여성 장로로서 敎友들의 기림을 입어 검은돌 비석이 서다.
작고 1년 후 세운 이 묘비의 제막날짜가 1962년 2월 9일인데, 이것을 보고 작가의 사망일을 1962년으로 기록한 곳이 많다. 위에 인용한 '인명사전'과 '부산이야기'도 그렇게 되어 있어서 머거주기가 정정했다.
아래쪽 집들이 보이는 곳은 경기도 구리시 상적마을의 일부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김말봉 내외의 묘. 왼쪽 이종하, 오른쪽 김말봉.
벌안 아래쪽을 블록으로 막아 경계를 표시하였고 내외가 나란히 묻힌 무덤이어서 찾기 어렵지 않다. 아래론 개망초 하얀 꽃 흐드러졌다.
생몰연대는 여기 묘비에서 확실해진다
묘비 뒷면에는 그의 대표적인 신문연재소설 <밀림> <찔레꽃> 등이 새겨졌다
김말봉의 마지막 남편 이종하(李鍾河)의 무덤
이종하에게도 첫부인이 있고, 김말봉에게도 가슴에 더욱 깊은 전남편이 있건만 그들은 삶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나란히 묻혔다.
남편 이종하의 묘비 뒷면에는 네 명의 아들이 적혀 있다. 위로 둘은 첫부인의 아들이다. 그러면 아래 두 명의 아들은 김말봉이 재혼하여 낳은 아들이다. 남편 이종하는 1954년 세상을 떴다. 재혼하여 함께 17년을 함께 살았다. 과부 7년을 마감하고 김말봉도 1961년 갔다.
* 소설가 김말봉 묘소 찾아가는 길 ***************************************************************************
망우리 공동묘지 주차장 뒤쪽 모퉁이에 이처럼 묘지로 통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런 길따라 50여 미터 가면
오른쪽 아래로 내외묘가 분명한 이런 무덤이 보입니다. 천천히 살펴야 합니다. 바로 길가가 아니거든요. 묘지번호 100768 김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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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 <그네> 가사를 쓴 사람은 김말봉이고 여기에 곡을 붙인 사람은 금수현입니다. 두 사람은 장모와 사위 관계입니다. 작곡가 사위를 총애한 김말봉은 자작시를 전하고, 장모의 사랑에 감격한 금수현은 심혈을 기울여 곡을 붙였다고 합니다. 애창가곡 <그네>가 탄생한 거지요. 금수현의 아내 전혜금은 물론 김말봉이 낳은 딸은 아닙니다. 김말봉이 그의 일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남자 전상범, 그의 전처 소생이지요. 김말봉은 전상범이 첫부인과 사별한 다음 그와 결혼합니다. 장모와 사위의 나이 차이는 19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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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양 나래쉬고 보더라
한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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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중인 김말봉 장로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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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사랑
부산에서 나고 자란 김말봉은 3년 동안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다녔다. 이즈음 전상범이란 남자, 평생 그의 가슴을 흔드는 청년과 첫사랑을 나눈다. 열일곱 나이에 여학교를 졸업한다. 상범을 향한 애틋함도 깊어갔다.
1917년 말봉은 서울로 올라와 정신여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이듬해 졸업하고 황해도 명신학교에 발령받아 선생 근무를 시작한다. 그 사이 말봉의 첫사랑 전상범은 말봉이 따르고 좋아했던 s언니 김경순과 결혼한다. 충격을 받은 말봉은 1920년 하와이에 있는 언니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21세 때이다. 실연의 아픔을 딛고 말봉은 다카네의숙과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한다. 그리고 1927년 귀국한다. 28세가 되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말봉은 다시 전상범이 그립다. 중외일보 기자로 활동한다. 전상범의 아내 김경순은 1남1녀를 남기고 1923년 세상을 떠난 후였다(여기에서 태어난 전혜금이 후일 작곡가 금수현의 아내가 된다). 벌써 4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 사이에 전상범에게는 새로운 애인이 있었다. 초등학교 여교사인 여운영과 살림을 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말봉은 절망했다. 괴로움과 갈등 속에서 말봉은 엉뚱한 행동을 저지른다. 일종의 반발심리였을까, 자포자기였을까, 자기를 흠모하는 은행원 이석현과 부산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석현은 말봉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말봉의 사랑은 전상범이었다. 말봉은 선언한다. 애정없는 결혼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당신과 결혼한 것은 전상범에 대한 반항이었다고,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으니 깨끗이 헤어지자고, 결국 그들은 갈라섰다.
말봉은 서울로 올라온다. 전상범도 마음이 흔들린다. 상경한다. 둘은 서울에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다. 이 소식이 부산에 전해지자 전상범의 두번째 아내 여운영은 절망한다. 말봉의 첫남편 이석현도 절망한다. 그들의 불륜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진다.
말봉의 사랑은 강하고 치열했다. 비난과 질책의 현장 부산으로 낯두껍게 내려온다. 그리고 여운영이 전상범의 첫부인이 낳은 아들과 자취를 하고 있는 것을 기회로 전상범의 본가를 차지한다. 이런 와중에 속을 끓이던 말봉의 아버지는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1931년 말봉은 전상범과의 사이에 아들 딸 쌍둥이를 얻는다. 이미 딸이 하나 있었으므로, 첫부인 김경순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을 합하여 아이들이 모두 다섯이 되었다. 두번째 부인 여운영은 소생이 없었다. 비록 세번째 부인이 되었지만 말봉은 행복했다. 전상범은 오륙도가 훤히 내다보이는 좌천동에 방 하나를 얻어 말봉이 작품 창작에 전념하라고 배려함은 물론 서로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1932년 말봉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로 공식 등단하였으며,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연재한다. 최초의 여류 신문연재였다.
전상범은 누구인가. 1896년생이니 말봉보다 5살 위였다. 경북 영일 출생으로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경남은행에 있다가 사업가로 변신 동래장온천, 미쓰이물산 조선지점 등에서 총지배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호남이었다. 매력있고 능력있는 남성이었다.
그러나, 말봉의 사랑은 겨우 7년을 채우는 것으로 끝이 났다. 1936년 봄 전상범이 사망한 것이다. 전상범의 죽음은 말봉의 소설 '찔레꽃'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봉은 전상범이 좋아한 꽃 '찔레꽃'으로 이듬해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쓴다. 이 작품은 전국을 흔드는 공전의 대 히트작이 된다. 통속소설의 전형으로 회자되는 '찔레꽃'은 이런 사연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하나 말봉의 '신여성' 면모가 드러난다. 전상범의 친구이자 첫남편 이석현의 친구이기도 한 이종화라는 남자와 전격적으로 한 방을 쓴다. 당시 이종화는 상처한 처지였고 말봉에게 뜨겁게 구애했다. 말봉의 여성적 매력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건 길이 아니었고 말봉의 뜻도 아니었다. 말봉은 연재소설을 쓰기 위해 죽은 전 남편 전상범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종화와 갈등도 심했고, 다시 들어간 전상범의 집에서 첫부인 김경순의 아들 '홍'이와 딸 '혜금'과의 갈등도 깊어졌다. 그러나 '찔레꽃'의 위력은 대단했으며 결국 혜금은 새엄마를 받아들이고, 말봉의 원고를 정서해주는 일까지 맡아주었다. 1940년 혜금은 동래고녀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1943년 교회에서 만난 금수현의 배필이 된다. 금수현은 지휘자 금난새의 아버지다.
말봉의 사랑에 휴식기는 없었다. 사랑의 첫남편 전상범이 죽은 이듬해 말봉은 재산가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호걸 이종하와 재혼한다. 이종하는 상처하여 세 살난 아들이 있었다. 이 아이를 말봉이 키운다. 나중에 시인이 되어 방황하다가 행방불명이 된 이현우 시인이 바로 이종하의 첫부인 아들이다. 부산의 초량동에서 마님으로, 최고의 인기작가로 부유한 삶을 누린다. 무덤에 나란히 누운 사람이 바로 마지막 남편 이종하다. 말봉이 진정으로 함께 눕고 싶었던 사람은 전상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상범에게는 첫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죽은 후의 운명은 이미 자기의 의지를 떠난 것이다.
해방 후 말봉은 상경한다. 고아원, 박애원을 경영한다. 공창폐지운동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1949년에는 하와이를 시찰한다. 1952년에는 베니스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한다. 작품도 열성적으로 토해낸다. 195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된다. 1957년에는 예술원 회원이 된다. 熱女다.
1960년 회갑을 1년 앞둔 그녀는 폐암 선고를 받는다. 그녀는 아무도 몰래 병실을 나선다. 부산으로 간다. 해운대를 거닐고 추억의 장소를 더듬던 그녀의 발걸음은 옛사랑 전상범의 집 앞에서 쓰러진다. 서울의 가족들에게 소식이 전해진다. 병마와 싸우던 그녀는 결국 이듬해 회갑 나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서울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애타게 찾은 이름은 누구일까.
(앞줄 왼쪽부터) 김말봉 유치환 한사람 건너 조연현 195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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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없이 떠돌다 사라진 방랑시인 이현우
그는 김말봉의 의붓아들이다
지금 무덤에 나란히 누워있는 그녀의 마지막 남편 이종하의 전처 소생이다
이현우의 시문집 <끊어진 한강교에서> 표지 (1994)
시집 '끊어진 한강교에서' 전쟁을 감성적 언어로 소화
마치 거지꼴로 나타나기 일쑤… 1983년 이후 행방 묘연
시인이나 작가가 그의 최후를 어떻게 마쳤는가를 모르는 예는 더러 있다. 프랑스의 경우 여태껏 죽은 해는 알지만 시신을 못 찾은 생텍쥐페리의 죽음이 있는가 하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랭보의 죽음도 있다.
우리 현대시사에는 시인 이현우의 죽음이 그런 예에 든다. 물론 그가 생존해 있어도 칠순을 갓 넘기는 나이다. 전쟁시를 감성적으로 잘 소화한 이현우의 죽음을 본 사람은 아직 없다.
그가 행방이 묘연해진 것은 1980년대 초반 이후니까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 이현우는 생래적으로 우수의 어두운 그늘이랄까, 그러한 비극적 인자를 몸에 지니고 태어난 것 같았다.
그를 알기 위해서는 잠깐 그의 가계를 들춰볼 필요가 있다. 1955년에 별세한 그의 선친 낙산 이종하는 잘 알려진 호남형 인사다. 그의 매부되는 시인 노석 박영환은 생전에 낙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는 동경 유학을 했고 무엇보다 진정한 항일 애국자요, 인격자로 존경을 받을만한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1937년에 이종하는 여류소설가 김말봉과 재혼한다. 광복 이후 두 내외는 아나키스트들이 발기한 독립노동당(당수 유림)에서 낙산은 노동부장, 부인은 부녀부장으로 피선된다. 이때 이현우는 겨우 세 살, 계모 김말봉의 품에서 자란다. 어릴 적부터 이복동생들과 함께 뒹군 그였지만 성장 이후 생모를 일찍 여읜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어쩐지 이복들에게 정이 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집을 자주 뛰쳐나와 무작정 거리를 방황하는 부랑아로 사는 것에 이력이 났다. 몇 달씩 집에 들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동국대를 다녔지만 공부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이현우는 이 무렵부터 다른 또래의 문학하는 친구들과 필자의 하숙이 있는 명륜동, 혜화동 쪽에 불쑥 나타나 술과 밥, 잠을 청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젊은 시인들과 작가들은 곧잘 폐허나 다름없는 명동 등지의 주점, 몽파르나스 동방사롱 엠프레스 음악 다방이 있는 부근 주점에서 곧잘 어울렸다. 김관식, 천상병, 박봉우, 송기동, 이호철, 고은 등이 그 면면들이다. 이 무렵인 1958년 이현우는 '자유문학'지에 시 '끊어진 한강교에서'가 추천되어 그 감성적 언어의 유려함 때문에 일약 그를 한국의 아폴리네르로 만들어 놓았다.
'그 날,/ 나는 기억에도 없는 괴기한 환상에 잠기며/ 무너진 한강교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 다./ 이미 모든 것 위에는 낙일이 오고 있는데/ 그래도 무엇인가 기다려지는 심정을 위해/ 회한과 절망이 교차되는 도시/ 그 어느 주점에 들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의 비극의 편력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취기에 이지러진 눈을 들고 바라보면/ 불행은 검은 하늘에 차고/ 나의 청춘의 고독을 싣고/ 강물은 흘러간다' ('끊어진 한강교에서'의 일부).
어느 늦가을 날 친구인 시인 강민이 자주 다니던 음악실 '돌체' 계단에 와이셔츠 바람으로 쓰러져 있는 거지를 봤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얼굴은 오랫동안 씻지 않아 검은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현우였다. 가까스로 수습한 다음 날 강민은 어머니 김말봉을 찾았다.
"이 녀석아, 이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내가 그애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걸 낸들 어떻게 하겠나. 네가 제발 좀 데려와 다오." 그러고 난 다음에 거지꼴로 쓰러져 있는 이현우를 친구들이 메고 집에 데려다 주기도 했다. 며칠 뒤 명동에 나타났을 때 깜짝들 놀랄 만한 일류신사 차림새였다. 말쑥한 신사복 차림에 화사한 넥타이, 번쩍이는 구두,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 다음날부터 이현우의 차림새는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의 행색을 하고 나타나곤 했다. 밤 사이에 윗도리가 사라지고 시계도 넥타이도 온 데 간 데 없다. 그 다음 날엔 얼굴이 숯칠한 것처럼 어디서 뒹굴었는지 거지꼴이 되어 나타나곤 했다. 술값으로 모두 털어준 것이다. 한 때 걸인 대장 노릇을 한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가 거지 집단에 끼어들어 재미나는 소설 얘기를 털어 놓을 땐 거지들이 자못 대장감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그만한 유식한 거지를 보지 못했기에 존경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대학을 중퇴한 것도 등록금을 술값으로 날렸기 때문이다. 때로는 서울역 앞 양동의 사창굴에서 밤새 술을 마시다가 술값도 떨어지고 화대도 주지 못해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 다음 날 어머니가 와서 밀린 돈 다 지불하고 풀려나기도 했다.
당시 김말봉은 서울 신문 두 곳에 연재소설로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런 인기 작가였다. 1961년 김말봉은 사망했는데 현우의 떠돌이는 변함이 없었다. 부산에 있을 동안에도 거지꼴로 지낸 것은 변함없는 상황이었다. 필자가 보다 못해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시 한 편에 3만 원씩 주기로 약속까지 했다. 한번 약속을 지킨 이래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는 1933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낙양고를 나왔다. 그의 형은 그를 버린 지 오래됐고 친구들도 모두 고개를 돌린 뒤 착한 시인 이인영이 1983년 마지막 모은 돈으로 부산역 발 서울행 열차에 그를 태워 보냈다. 그 이래 그를 본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