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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으로 본 한국역사 - 젊은이들을 위한 새 편집
함석헌 지음 / 한길사 / 2003년 4월
평점 :
낱권으로 씨ᄋᆞᆯ의 소리를 본 것이 30년이 지났다. 학창 시절 읽었어야 할 책을 이제 읽는다. 호구지책에 골몰하느라, 교직에 받을 디디고, 사상이나 철학은 나와 관계없다 여기고 살았다.
철이 지난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주관이 없고 자아가 성장하기 전에 읽어 폭 빠지는 어리석음을 면할 수 있다. 부족하나마 이미 생각한 바를 토대로 읽다 보니 한 걸음 물러나 읽을 수 있다. 다행인 것은 책을 관통하는 맥락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식민 사관에 물들지 않은 눈으로 한국 역사를 볼 수 있었던 그를 만날 수 있다. 성서를 바탕에 둔 것과 민족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고 시대를 구분하는 함석헌의 관점을 본다.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전문적이긴 하나 한 시대, 한 사건에 몰두하는 좁은 시각을 보다가 한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함석헌을 만난 것은 독서의 기쁨이다.
책을 읽으면서 현대교육을 받은 내가 함석헌은 몰랐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사실은 나보다 큰 객관적 존재요, 나는 사실보다 참된 주관적 삶이다. (p.30) 자아에 철저하지 못한 믿음은 돌짝밭에 떨어진 씨요 역사의 이해 없는 믿음은 가시덤불에 난 곡식이다. (p.31) 모든 싸움을 다 싸워 내면 무풍지대의 유토피아가 올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역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위대한 종교의 스승은 혁명가였다. 헤맴과 더듬이질에 지쳐 절망하는 한국 젊은이들 앞에 새 역사를 보여주리라는 마음이었다.
과거란 현재 안에 살아있고, 그것이 역사다.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을 아가페로 본다.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트럼프와 아베, 시진핑에 둘러싸인 지금, 함석헌 선생이 떠올렸던 타고르의 키탄잘리가 아직도 울며 기다린다.
“오, 내 사랑이여, 당신은 그 많은 사람의 그늘 뒤 어디에 숨어 계십니까? 저들은 이 티끌이 이는 한길 거리에서 당신을 몰라보고 떠밀고 지나갔습니다. 내가 여기서 지루한 시간을 당신께 드릴 선물을 펴놓고 기다리고 있는 동안 길손들이 내 꽃을 한 송이 두 송이 다 가져가 버리고 이제 거의 빈 바구니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침이 지나고 낮도 지났습니다. 저녁 그림자가 내릴 때 내 눈은 피곤에 좁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비웃고 입을 비죽입니다. 나는 거지 처녀처럼 얼굴을 치마폭에 파묻고 앉아서 왜 앉았느냐 묻는 그들에게 눈을 내리깔고 대답도 않습니다. 오, 참말 내가 어떻게 사람들보고 당신을 기다린다고, 당신이 오시마 약속하셨다고 말할 수 있사오리까? 지키고 있는 이 가난이 가지고 시집갈 밑천이라고 부끄러워 어떻게 말인들 하오리까?
오, 나는 이 비밀을 내 가슴속에만 품고 있습니다. 나는 잔디밭 위에 앉아 하늘을 우러르며 당신이 오실 때의 영광을 꿈꿉니다. 그때 눈이 부신 빛 속에 당신이 타신 수레가 비단기는 날리고, 당신이 그 자리로부터 내려와 티끌 속의 이 나를 건지십니다. 여름날 바람 밑으로 기어드는 벌레처럼 부끄러움과 사랑하는 마음에 떨고 있는 이 누더기 계집을 당신이 그 옆에 앉히실 때, 저들은 길가에서 입을 벌리고 놀랍니다.
그러나 시간은 지나가고 당신의 수렛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 행렬이 지나가고 소리소리 영광을 자랑하면서들 갑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저 그 모든 사람들 뒤에 서서 그늘과 외로움 속에 숨어 계십니까? 나는 그저 기다리고 울고 쓸데없는 고대에 애를 태우고만 말 것입니까?” (p. 109~110) 우리 민족이야말로 큰길가에 앉은 거지처녀지만 신랑 임금은 오교야 말 것이다.
한국 민족은 파고드는 힘,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다.
- 한사군을 보는 함석헌 선생의 입장 : 민족적 자각이 고구려를 통해 400년 낙랑을 몰아냈다. 유교의 유입으로 내적 성장이 있었다.
- 신라 통일을 보는 함석헌 선생의 입장 : 신라의 통일은 통일이 아니다. 잃어버림이다. 김춘추의 아비 자식이 번갈아 당나라에 드나들며 비루한 외교로 조상을 팔아 얻은 것은 겨우 반도 절반이었다. 신라는 너무 과한 값을 주고 통일을 샀으나 그 통일은 참 보잘것없는 통일이었다. 자기를 팔아 남을 빌려왔던 거다.
- 고구려가 망한 것은 고구려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일로 만주를 손에서 놓아 버린 것이다. 비극의 시작이다. 신라가 반도 통일의 터를 닦게 된 것은 고구려가 몇백 년 두고 북쪽 침략자와 피를 흘리며 고된 싸움에 쉴 날이 없는 동안 덕택을 입어가면서 된 일이다.
- 고려 500년은 책임 많은 한 시대였다. 다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 연유는 중국의 종이 된 까닭이다. 유교, 불교가 아니다.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은 유파 대 불파, 한학파 대 국풍파의 대립이다. 최영의 죽음은 ‘한 얼’의 죽음이다.
- 이성계 曰 : “만일 上國 지경을 범하면 천자께 죄를 지어 나라와 백성에게 화가 당장 올 것이다.” 위화도 회군은 단군이 진 것이다. 이성계는 사이비 혁명가다. 스스로 소국, 소민이 되기로 한 날이다. 이상이 죽고 현실이 이긴 것이 분하다. 만주를 되찾자는 생각을 아주 버린 날(잊은 날 )이다. 이는 하나님의 시험 문제였다.
- 조선은 민족의 이상(Vision)을 잊었다. 임경업(병자호란)을 다시 보게 한다. 청 태종의 병자호란을 “우리를 자립 자존의 단으로 오르게 했다”고 본다. 천주교의 도입은 연구에서 시작했다(남인 계열의 처지가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하는 처지였다).
- 개신교는 1882년 한미조약 이후 전도가 성했다. 미국 프로테스탄트는 민주주의를 앞장세우고 서북지방에 들어와 신교육을 뿌렸다.
- 해방은 도둑같이 왔다. 종이 될 때 반항도 못하고 되었던 것같이 놓일 때도 아무 힘 쓴 것 없이 갑자기 뜻밖에 놓였다. (p.395) 공을 주장할 자가 없었다. 하늘이 준 것이다. 진정한 씨ᄋᆞ을 해방이다. 그러나 나라의 힘이 말랐고, 기술은 부족했고, 사상도 빈곤했다. 민족의 혼을 깨워야 했다.
- 맥아더는 6.25를 신들의 싸움이라고 했단다. 38선은 세계역사의 금이다. 현대 문명의 낙제선이다. 38선은 하나님의 시험문제다. 죽지 않을 자신감이 생겼는바 이는 6.25가 끼치고 간 선물이다. (퀘이커 교도였던 함석헌 선생만이 할 수 있는 해석이다)
- 우리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인류 역사도 고난의 역사다. 우리에게도 세계적 사명이 있다. 인류 역사를 도덕적으로 한층 높이는 일이다. 덕성을 회복하고 지성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함석헌 선생이 1933년 12월 31일부터 1934년 1월 4일까지 우리 역사에 대해 강연하였던 것을 잡지 『성서조선』 1934년 2월호부터 1935년 12월호에 실었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토대로 한 것이다. 1961년에 3판을 내면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꾸어 전면 개편했고, 내가 읽은 것은 2003년 젊은이를 위한 새 편집 『뜻으로 본 한국역사』 25쇄로 2014년 12월에 한길사에서 본문 507쪽 분량으로 내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