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원류고
장진근 엮음 / 파워북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만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반 없다. 그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때에 한민족의 터전이었다. 당과 밀약에서 김춘추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해준 대가로 대동강 이북을 당에게 넘겨주기로 했다는 것조차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이후 한 번도 우리 땅인 적이 없다. 여진과 만주족이 금과 청나라를 세웠고 청대에 봉금지역이었으며, 만주괴뢰국이 존재했음과 마오가 국민당군을 만주에서 몰아낸 것이 중국통일에 전기를 마련했다는 정도다. 중국은 만주지역에 존재했던 왕조들을 중국의 소수민족사로 취급하여 만주 역사 속에서 한민족의 흔적을 지우려 동북공정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무얼 하는지 답답하다. 역사학계와 재야사학계의 주장이 부딪히는 상황이다. 이도 인터넷에서나 그렇다. 언젠가 만주원류고를 읽으리란 다짐은 겨울의 시작과 함께 실천한다.

 

정식 이름은 <흠정만주원류고>로 흠정이란 황제가 직접 지었거나 명으로 저술되거나 편찬한 책이란 의미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서 편찬한 만주족 선조 및 그와 관련 있는 여러 민족의 중요한 역사를 다룬다. 명을 멸하고 청을 세웠기에 명의 지배를 받았던 부분은 명확치 않고 부정하거나 착오가 있지만 만주와 한반도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정리하였기에 동북아시아 민족의 흥망성쇠를 파악할 수 있다. 건륭제의 명(1777)에 따라 청조의 창업을 찬양한 책이기에 한계가 있을지라도 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꼭 참고할 책이다. 이 책은 정통역사학자가 아니라 공직생활을 마친, 한문과 중국어에 소양이 있던 장진근이 번역하였다. 왜 역사학계에서 번역하거나, 학교에서 <만주원류고>란 책이 있다는 사실도 가르치지 않는가?

중국의 역사인 [하은주춘추전국위진남북조수당송원명청중국] 중 북위, , 청조는 북방 유목민족이 중국을 지배했으니 농경민과 유목민족의 대립이 중국 역사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고구려의 영역이 금과 청의 영역이 겹치니 우리 역사학계에서 다루어야만 할 부분인데도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역자에 따르면 신채호, 정인보, 안호상 등이 기초자료로 활용하였고, <고조선 연구>를 남긴 리지린 등 북한 학자들은 <만주원류고>를 대만족주의 사상의 산물로 보고 가차 없이 비판하거나 가감 없이 인용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한다. 만주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과 연구결과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형편에 장진근은 번역을 통해 기존 사학계의 정설에 반하는 기록을 찾아내 우리나라 고대사를 제대로 연구해 보자고 한다.

역자가 찾은 흥미로운 사실은 첫째, 고조선과 삼한이 원래 만주에 있었고, 둘째, 현재 만주와 길림(吉林)이 신라의 계림(鷄林)이었음을 지리나 언어와 연관시켜 밝히고 있고, 셋째, 백제의 강역에 대해 중국 동부 연안으로부터 요서, 요동을 거쳐 황해, 충청, 전라도까지라고 한다. 최근 역사 교과서에서 중국 동부 해안이 백제의 영역이었음을 가르치는 것을 제외하면 역사상식을 혼란스럽게 하는 기록들이다.

이외에도 동이족이 발해만 북쪽에서 황하문명보다 한 시대 앞선 요하 문명을 만들었다’, ‘한 무제가 B.C.108년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세운 낙랑군이 항상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기사’, ‘7년 대당전쟁후(676) 신라가 백두대간 대부분을 확보했다’,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은 임진왜란(1592) 때 의주로 피난 왔던 선조에게 10만 명에 달하는 원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선조가 거절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만주는 본래 부족의 이름인데 주()의 의미가 지명과 비슷해 가차(假借)해 쓰다가 그대로 쓴 것이라고 한다. 만주족의 발생설화(p. 61~62)에 따르면 장백산 동쪽에서 청나라의 터전을 삼았다. “()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제도 또한 요서, 진평(당나라 유성과 북평일대)을 빼앗아 차지하였다”(p.110)는 기록에 대해 중국과 남북한 사가들 사이에 의견차이가 현격하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

백제 의자왕은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행실이 알려지고 형제들 사이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의 증민曾閔(증참과 민자건을 동시에 일컫는데, 공자의 제자로 효행이 유명)이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오대사(五代史)와 책부원구(冊府元龜)후당 청태 3(936) 정월에 백제국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했다고 국사에서 배웠는데…….

당서(唐書)에서 백제의 왕이 사는 곳은 동서 두 성에 있다는 기록은 서도가 오늘날 산둥 반도 영성현에 있었다는 의미로 백제 만주존재설의 방증이며, “백제가 만주에도 있었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는 한 <삼국사기><당서>에 기록된, 백제가 망하고 그 땅이 신라, 말갈, 발해에 나눠지고 말았다는 기록에 대한 합리적인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주석을 달고 있다.

신라에서 임나(任那) 등 여러 나라를 공격하여 이들을 멸하였다"(p.151)는 기록이 있는데,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국사에서 임나조차 일본이 꾸며낸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1225년에 남송에서 만든 지리책 <제번지(諸蕃志)>에서 아프리카, 시칠리아, 중앙아시아, 소아시아에 대해 기록한 것은 1402년 김사형, 이무, 이회 등이 작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참고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당태종이 고구려에 침입했을 때 흑수말갈은 군사 15만 명을 최전선에 배치돼 고구려를 도왔다고 한다.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은 패수(패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왕험성의 위치가 확정된다”(p.305)고 보고 중국의 강물에 관한 기록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은 대능하(大凌河) 뿐임을 지적한다.

명조의 역사를 평가한 <명위소성참고>에서 청은 명나라가 실록에 기록하며 벼슬을 주었다라고 하지만 어쩌다 어떤 부()의 장이 스스로 왔다거나 겨우 사람이 와서 거래를 했을 뿐이라고 근거 없음을 지적한다.(p397)

 

참으로 의아한 것은 <흠정만주원류고> 1부터 권7까지 만주,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안완, 건주 부족을 고증하였는데, 고구려가 없다는 거다. 왜 그랬는지 책을 읽으며 단서를 찾을 수 없다. 우리 역사로 백제, 발해를 신라보다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8부터 권13까지 강역에서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은 없다. 14부터 권 15까지 산천을 다루고 권 16부터 권20까지 국속을 다룬다.

 

내가 읽은 <만주원류고>는 장진근이 옮기고 파워북에서 20081, 20114쇄로 나온 것으로 본문 605쪽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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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123 2022-01-13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중국어판 <만주원류고>는 고구려 건국신화부터 그 역사가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