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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 -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마라
얀 드로스트 지음, 유동익 옮김 / 연금술사 / 2019년 11월
평점 :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
2019.12.4. 수
철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책 읽기를 좋아하는 독서가일 뿐이다. 얀 드로스트의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를 읽고 독서가로서 묻고 답해 보려한다. 칸트의 두 이성비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마르크스의 경제-철학 수고는 제대로 이해한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정리할 내용은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 한권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다. 여러 해 동안 책(철학과 철학 이외의 책들)을 읽다보니 철학과 인문학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전공자의 수준에서 보면 형편없는 수준이라는 비웃음을 살 것이다.
철학의 출발점은 ‘나’다. 자연과 신이 철학의 출발점이었던 고대, 중세를 지나 19세기에 헤겔과 마르크스가 역사에 어떤 법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니체는 생의 철학, 샤르트르는 실존철학이라 부르는 나(인간)에서 출발한 거로 본다. 자연, 신, 역사를 거쳐 ‘나(인간)가 현재 철학의 출발이라는 거다. 서양철학이 그랬듯이 동학의 인내천이나, 중국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인(仁)도 결국은 ’나(인간)‘에 대한 것이 아닌가.
철학은 ‘생각’이란 방법으로 밀어간다. 사고, 숙고라는 단어를 쓰더라고 생각이다. 생각은 연역적일 수 있고 귀납적일 수 있으며, 직관을 중요하게 볼 수 도 있다. 헤겔은 변증법적 사고, 후설은 현상학적 사고를 내세웠다. 모두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무엇에 대해 생각하는가? 사고, 존재,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나’가 원하는 삶, 행복한 삶을 살려는 목적을 가진다.
나에서 출발한 철학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를 숙고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신의 피조물로 여길 때가 있었고, 세상에 던져진 것(피투)으로 보기도 한다. 나를 포함한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본성이란 게 있는가? 를 물었기에 성악설이니 성선설을 말할 수 있었던 거다. 본성이란 게 없고 ’나‘가 스스로 만들고 채워가는 존재로 보기도 한다.
내가 나와 나 이외의 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인식론에서 어떤 이는 관찰과 경험을, 어떤 이는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고, 둘 다 중요하게 사용해야한다는 이도 있었다. 경험론과 합리론이다.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면 이원론이고 구분하지 않으면 일원론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쾌락에 따른 삶, 신의 뜻을 따르는 삶, 이성에 맞는 삶, 타인과 어울리는 삶, 사회구성원의 하나로서 삶 등으로 답해왔다. 금욕주의, 행복론, 의무론, 사회계약론이 발생한 거다. 실존철학에서 선택에 따른 결과,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강조한다. 이게 내게 와 닿는 부분이다. 어떤 삶을 살고자하는가는 물음에 신의 뜻을 따르거나 성인의 삶을 따르거나 자신의 목표를 따르는 목적 있는 삶을 살거나 하는 거다.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에는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자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샤르트르, 푸코 등 여러 철학자들이 철학의 문제에 대해 숙고해 ‘생각하는 틀’을 만들어 놓았다. 힘들 때는 스토아 철학이나 에피쿠로스의 생각 방식에 따라 행동하면 위로를 받는다. 완벽한 삶을 살고자한다면 샤르트르나 하이데거의 실존천학에 기대어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행동이 쌓여 우리의 삶을 만드는 거다.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를 읽어가며 ‘스피노자’에 대한 이야기는 지루한 면이 있었다. 얀 드로스트가 왜 이런 철학자의 생각방식을 소개하는가를 곳곳에 밝혀 두었다. 덕분에 책을 읽어가며 방향을 잃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
‘교육철학’을 생각해 본다. 교육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교육의 방법과 목적은 어때야 하는가를 되물어가며, 성찰하고 교직에 있었어야 했다. 그저 교육정책을 수행, 집행하거나 수업만 잘 할 수 있다면 그 이외의 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고 생활했던 것은 아닐까.
정치철학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우리 정치인들이 정치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고, 그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하면서 정치하고 있는지......
철학사를 읽어 이와 같은 철학의 이해에 역사를 더듬어보면 현재의 주류 철학은 과거의 철학에 대한 반성에서 재출발한 것이고, 앞으로의 철학은 변화하는 현재를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까지 담아낼 것이다. 철학의 역사는 인간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때로는 신의 영역 안에 있던 인간이 신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을 찾아가는 역사였음을 본다. 이러한 과정을 자신의 생각에 따라 경험을 덧붙여 말하고 글로 써내는 거가 문학이 아닌가. 인문학이 본질이 아닐까. 생각의 틀인 철학을 이해하고 내 삶에 적용해 어떤 세계관, 인생관, 윤리관을 거지고 살아갈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이것이 독서가가 인문학을 하는 까닭이지 싶다.
얀 드로스트의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는 2019년 10월에 ‘연금술사’에서 본문 540쪽 분량으로 번역해 내놓았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해보는 독자들이라면 읽어가는 과정에서 ‘철학하는 힘’, ‘생각의 틀’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메모한 분량이 너무 많아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의 본문 요약은 게시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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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 본문 요약
서문 :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생각이 단순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다. 자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반대인 무력감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아무리 사소하고 일상적이라도 우리는 ‘세계관’이라는 큰 그림으로 바라본다. 실재란 우리가 인지하는 물질세계다. 실재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을 철학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숙고하지 않는 인생은 모호한 채로 머물게 된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일정한 인간관과 세계관으로부터 나오는지 알 수 있다. 철학자들이 무력감을 종식시키려 선택한 도구는 사고능력이다. 깊이 생각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Epikouros와 함께 생각하기 :
두려움에 정당한 근거가 없다면 안심할 수 있다. 관찰이라는 수단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기도 한다. ‘실재’의 성격을 간파해 인간을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에피쿠로스가 설파하는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당신들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은 창조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졌다.”. 죽음 이후에는 삶이 없고 영혼이 몸에서 빠져 나오면 끝이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좋은 뜻의 말도 비논리적이다. 이유를 가지고 일어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우연히 일어난다.
행복에는 ‘자족’과 ‘평정심’이 중요하다. 세 가지 부류의 쾌락으로 구분해 무장하면 인생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다. 첫째,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쾌락에 음식, 집, 옷, 산소, 안전, 수면 등이다. 둘째, 자연스럽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쾌락은 첫 번째 쾌락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물이나 빵 대신 샴페인, 더 큰집, 자전거 대신 리무진 등이다. 있으면 좋겠지만 없더라도 죽는 것은 아니다. 대신 수고를 많이 해야 한다. 셋째, 자연스럽지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쾌락은 절대 좇지 말라한다. 불행해 짐으로. 부, 지위, 명성, 과도한 부,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이란 ‘두려움’과 ‘고통’이 없는 상태다. 기본적인 삶의 필요가 충족되면 우리는 ‘영점 기준선’에 도달한다. 이를 아는 것은 커다란 위안이며 우리의 상태를 계속유지하기 위해 중요하다. 섹스는 세 가지 쾌락 가운데 어디에 해당할까?
니체는 에피쿠로스와 다른 세계관을 가졌다. 니체는 권력과 성장, 팽창으로 이루어진 행복의 형태를 믿었다. ‘영점 기준선’보다 ‘상승과 하락’이라는 용어를 생각했다. 니체에 따르면 인생은 고통이 함께한다. 안정된 사람은 행복에 대해 알지 못한다. 행복과 불행은 쌍둥이이다. 둘 다 양육하라한다. 밤이 없으면 별도 없다. 가장 강한 빛은 주변의 깊은 어둠 덕분에 밝게 빛날 수 있다.
쾌락주의의 이상은 육체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불안이 없는 ‘평정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야망과 인내심 부족이 자랄 때, 내가 자신과 주변에 있는 사람을 잊으려 할 때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생각하라.
Stoicism 스토아학파와 함께 생각하기 :
세상은 합리적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돼 있다. 감정이란 우리의 행복에 커다란 위험이다. 격렬한 감정을 겪는 사람은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감정이 배제된 ‘아파테이아(부동심)’ 혹은 마음의 평화, 마음의 동요가 없는 상태가 행복이다. 감정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고의 꽃이다.(이것이 스토아학파의 일원론적 사고방식이다)
에픽테토스는 ‘우리의 힘 안에 있는 것과 우리의 힘 밖에 있는 것’을 구분하라. 우리의 힘 밖에 있는 것에 관심두지 말라. 우리가 보는 것만 소유하고 남에게 속하는 것은 타인의 소유로 인정하라. 변화할 수 없는 것을 변화시키려하거나 우리 힘 밖에 놓인 것과 싸우면 무력감을 느낀다. 계획하는 모든 것은 우선 무엇을 정확히 할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나에 대한 소문과 오해를 바로잡으려 하지 마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결국 그들의 문제다. 감정은 생각의 실수로부터 나오고 이성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감정에 충실하게 살면 진짜 행복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은 언제나 타인에게 자신의 역경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초보 철학자는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통달한 철학자는 그중 어느 것도 하디 않는다.”
희망은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것이다. 불안해 한느 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에 대해 준비를 하지 않고 생각을 먼 미래로 보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절제’를 통해서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자연(이성)과 일치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다.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없는 경우라면 스토아 철학이 임시라도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지 안 할지 결정하는 사람은 나다.
Aristoteles 와 함께 생각하기 :
인간이 사회적 존재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위해 서로 의지한다는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은 목적론적 세계관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고 봅니다. 인생에서 목표가 달성도면 새로운 목표를 가져옵니다. 성취한 목적은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거죠. 감정은 선악이 없고 무엇을 할 때가 되어서야 도적적인 판단을 할 수 잇다는 윤리관을 가졌습니다. 예수의 인간관(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느니라)과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은 행동에 대한 가르침이다. 능력은 타고나나 태도는 배우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선천적이지는 않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덕목에 주목하고 중용을 추구했다. 좋은 습관의 힘을 가지라 한다. 오늘날처럼 세분화된 사회에서 그의 철학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인생에서 성공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인정한 첫 번째 철학자다.
Spinoza 와 함께 생각하기 :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궁극의 목적이란 없다. 욕망, 기쁨, 슬픔이 스피노자 윤리학의 기본이며, 선과 악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유익함과 무익함의 정도에 따라 선과 악으로 해석한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자연현상으로 간주하라. 그럼 분노와 책망은 이해로 전환될 것이다. 그들이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한 사람의 냉정한 눈길은 폭력이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사실상 용어 모순이다. 스피노자의 직업은 안경유리공이었다.
Sartre와 함께 생각하기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세상이 신의 계획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이다. 이 세상에 결정된 것은 없다.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다. 자유로운 가운데 결정하는 선택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현실의 기본은 우리의 주관적 판단이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지 않으면 세상이 없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란 샤르트르가 의미하는 세상으로 ‘그자체로 존재’를 말한다. 세상을 인식하는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 인식이란 ‘자기에 대하여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 있는 존재’이다. 인생이 우리의 책임인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객관적 지식은 주관성에 근거를 둔다. 주관성이란 첫째, 자신이 스스로 개인적인 주관을 선택하는 것이고, 둘째, 인간적인 주관성을 뛰어넘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두 번째 의미는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샤르트르는 존재하고, 자유를 인정하고 책임감을 가지라고 요청한다. 통찰의 시기는 늘어나는 지식과 연관이 있다. 지식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통찰의 시기까지 인생을 살아왔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우리만의 자유다. 부모님은 오직 시작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 이후 이어지는 것에 책임이 있다. 삶을 개선하는 것은 스스로 시작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샤르트르의 철학을 배우면, 우리가 앞을 내다보지 못할 때 격려를 받는다. 인생에 대한 책임에 관한 한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대로 평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 실존주의가 가르쳐주는 행복이다. 나의 행동, 나의 집중력, 내가 선택한 가치에 충실하기, 이상, 사람을 통해 내 자신을 실현해야 한다. 실존주의적 자유는 언제나 자신의 책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나, 신자유주의적 자유는 자신의 책임을 주로 타인에게 미루려고 노력한다.(트럼프! 샤르트르가 하는 말 알아들었니?)
결론 :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의하면 두려워해야할 신은 없고,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우연이고 목적이나 계획도 없으며,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졌다. 사후 세계도 없으며 신은 인간에게 무관심하므로 남아 있는 것들을 즐겨야 한다. 행복한 이생은 부나 지위 같이 자연스럽지 않고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쾌락을 무시하는 인간 스스로의 능력과 심적 안정에서 나온다고 가르친다.
에픽테토스나 세네카는 모든 것이 확정되어 있고 우연이란 없다. 모든 것은 하나이며 서로 연관되어 있다. 자연은 신이나 로고스와 동일하다. 그들에게 행복은 이성적인 것이고 지혜로운 것이며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감정과 집착을 인식하고 그러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사람들은 행복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게 좋은 삶이란 이성적인 삶이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이성을 활용하라고 가르친다. 행복이란 목적을 이루는 것과 많은 관련이 있으며, 그는 인간이 자신이 이룬 것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의 일원론적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이 같은 실체, 즉 자연 혹은 신으로부터 창조되었다. 그는 일어나는 모든 일의 필연성을 이해할 때 고통이 멈추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격정이나 기쁨, 슬픔을 다스릴 때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의 논리는 타인들을 단순히 존재하는 자연의 현상으로 간주할 때 분노와 책망이 이해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샤르트르의 세계에서 자유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이 자유는 우리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책임지고 있다. 그는 인간을 창조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창조한다고 했다. 즉, 실존이 본질을 앞서고 반대의 경우는 없다. 샤르트르의 세계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러한 자유에 대한 개념을 가지 사고관은 잠자고 있는 인간을 깨워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