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필자가 '소크라테스의 최후' 며칠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부분 크세노폰의 회상을 큰 고민없이 영화의 첫 부분에 자막이나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사용할 것이다.
 

빵 터졌다. 인질이 생존본능이 작동하여 인질범을 옹호하고 그의 심기를 '케어'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인질극만이 아니라 일상의 여남(女男) 관계에서 작동되고 있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책을 읽다가 말 그대로 '빵 터졌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인질극에서 유래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사례는 거의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그런 근거를 오래된 고전에서 찾고 있다. 어쨌든 『여자는 인질이다』 1장('네 원수를 사랑하라')에서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이는 인질극의 몇몇 사례를 소개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인질 생존을 위한 행동 원칙'을 다룬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책을 읽다가 말 그대로 '빵 터졌다!'
인질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협상팀에게 인질이 진실을 말하거나 도움이 되리라고 예단할 수 없다. 검찰까지도 (이후 재판정에서) 인질이 자신을 가해한 인질범이 합당한 처벌을 받는데 (검찰을) 협력할 것이라고 섣불리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사정에 이러함에도 인질극이 진행되는 동안 (경찰의) 협상팀은 인질범·인질 간의 유대감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둘 사이의 유대감이 인질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앞의 책 74~75면). 실제로 스톡홀름 증후군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인질의 생존 확률을 높이려면 인질범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여러 행동 원칙 및 방침을 제시한 바 있다. 유사시의 재난을 대비해 매월 15일이면 민방위훈련을 하듯, '스톡홀름 증후군'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혹시라도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누가 알겠는가), (호신술처럼)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연루된 인질들을 구할 확률을 높아진다는 얘기다. 터너가 권하는 행동 원칙 중 첫째는 이렇다.
“희망을 유지하고, 인질범이 희망을 유지하도록 최대한 도와라. 희망이 없는 인질범은 다 포기하고 모든 인질을 살해한 후 자살할지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에 끝내 남은 것 하나가 희망이었다는데 가혹하다. 한마디로 가해자든 피해자든 죽음을 눈앞에 맞이했다는 점에서 형성되는 동지적 연대감을 활용하시라는 말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인질은 그 상황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 인질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치고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본능이 작동하는 것. (자세한 수칙은 책에서 확인하시고) 이런 상황을 다룬 영화에서 익히 보았을 법한 행동수칙이 제시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재난대비용 자기계발서의 일종이 된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 하나가 희망이었듯, 가혹하다

어쨌든, 이어서 인질 경험이 있는 메클루어는 납치·감금 상황에 놓인 인질에게 생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을 권한다.
"감금이 장기화될 시 인질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인질범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인질범의 호감을 사는 일이다… 인질이 특정 계급이나 체계의 상징이 아니라, 개인이자 한 개인으로 보이도록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인질범과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체 금하고, 인질범에게서 가족과 문화적·개인적 관심사, 목표, 동기 등을 끌어내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후략)"
이 심각한 조언을 읽는 동안 '빵 터진' 대목은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체 금하고"다(안주일절이 아니고 안주일체 여기서는 '일절'인 듯한데). 앞서 인용에 이어지는 터너가 제시하는 행동원칙3은 '다른 인질과 섞여들어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해라.’이다. 어쨌든 메클루어의 조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소크라테스가 대체 어쨌기에, 플라톤의 대화편 중 주요한 것들 몇 편은 반드시 교양 차원이 아니라 생존 차원에서 읽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절 금하고
필독해야 할 플라톤의 대화편 1번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자신에게 유죄로 투표하고(1차), 형량과 관련하여 '사형'에 투표할 아테나이 시민들(배심원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변론하면서(가급적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변론은 변호사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고용대란도 해결되지 않겠는가), 배심원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앎의 출발점이라는데(무지의 지), 이 말은 배심원들 입장에서 보자면, 너는 네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비참한) 존재라는 것. 플라톤은 이날 스승 소크라테스가 행한 변론을 그럴듯하게 재구성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인 크세노폰은 상당히 다르다. 당시 재판정 상황을 전해 듣고 단도직입으로 진단하는데「소크라테스 회상록」 얘기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의 첫 문장이다. 만약 필자가 감독이 되어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며칠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대목의 크세노폰을 특별히 고민하지 않고 영화의 첫 부분에 자막이나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사용할 것이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변론은? 변호사에게
『소크라테스 회상록』에 수록된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살핀다. 역시 첫대목이다.
"소크라테스가 법정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 자신의 변론과 삶의 종말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도 내 생각에는 회고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앞서 인용에 대응하는 새 글의 첫 문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글을 썼는데, 그들은 모두 그(소크라테스)의 잘난 체하는 말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천병희의 주석은 그 대표적인 필자와 저작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35c~38b를 제시한다). 크세노폰에 얘기를 이어 살피자.
"하지만 그들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이미 자신에게는 삶보다 죽음을 더 바람직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그의 잘난 체하는 말투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헤르모게네스가 누설했다는 비밀을 소개한다, 그(소크라테스)는 다른 모든 것에 관해 논의하면서도(재판에 앞서 굵직한 대화편의 대화를 바쁘게도 수행한다. 「테아이테토스」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재판에 관해서는 일정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는 것,

 

「변론」35c~38b, 플라톤도 잘난 체 하는 말투 담아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변론해야 할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요?"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다. "자네는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소크라테스 회상록」을 마무리하면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진단한다. 역시 헤르모게네스로부터 당시 상황을 듣고 내리는 진단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사형)을 자초했다는 것. 일종의 자살,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죄책감을 남기는 죽음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화 곳곳에서 상대방을 조롱하는 대목들이 등장하지만, '변론'에서는 대놓고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거침없이 얘기한다. 그들에게 해야 할 얘기를 해야 할 순간에 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표결 결과가 나오는 것을, 어쩌면 그러기를 바라고 그리 했다는 식으로 진단하는 것. 이유는 이렇다. 1)소크라테스는 곧 죽을 나이였다. 2)누구나 사고력이 쇠퇴하여 살아가기 힘겨운 인생의 시기를 피하고자 했다. 해서 정직하고 솔직하고 고결하게 자기 변론을 (속 시원히) 하고 사형선고를 더없이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자초했다
플라톤이 정리한「소크라테스의 변론」이나 크세노폰의 회상 속에서만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태도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산파술'에 걸려들어 비참함을 맛보는 대담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의 표적이 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논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플라톤-소크라테스는 그렇게 기획되었다. 재판정에서 스스로의 변론 이전에,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플라톤의 대화편에 따르자면) 아테나이 시민들 다수, 충분할 정도로 많은 잠재적인 적들을 양산해온 셈이다. 자업자득이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은 철학이고 정치는 정치인 인 것을……. 거침없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변론’ 중 해당 부분(앞서 언급한) 일부와 이 대화편의 유명한 끝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끝까지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시민들을 불편하게 한다. 마지막 선물이다.
"또한 내가 미덕과 그밖에 대화를 통해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캐묻곤 하던, 여러분이 들었던 그런 주제들에 관해 날마다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선이며, 캐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38a)
"하지만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같은 대화편 42a, 마지막 부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쓰려는 이야기 제목은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 '두 여자 이야기'. 『일리아스』 속 크뤼세이스와 브리세이스, 처지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 역사만이 아니라 모든 글은 과거, 기원전 13세기(또는 12세기)에 있었다는 전쟁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례라고 하더라도 2019년 현재를, 그것도 우리나라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획한 두 여자 이야기의 현대판은 당분간 숙성이 필요할 것 같다. 지난 이야기를 하자.

 

'두 여자 이야기'는 당분간 숙성이 필요할 것
두 여인은 포로로 잡힌 상태로 한 사람은 그리스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다른 한 사람은 맹장 아킬레우스에게 배정된 '트로피 여인'인데, 유일한 공통점이다. 하지만 두 여인의 운명은 엇갈렸다. 크뤼세이스의 아버지 크뤼세스 노인은 아폴론 신을 섬기는 사제였고, 그리스연합군을 전멸 위기까지 몰아붙이면서 딸을 구출한다. 『일리아스』 는 이처럼 극적인 순간에서 '문득' 시작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 '때문에' 피해를 보는 쪽은 자신의 트로피 여인 브리세이스를 내주어야 하는 아킬레우스이다. 어쩌다 그리스연합군 내분의 도화선이 된 브리세이스의 입장에서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자,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크뤼세이스와 브리세이스, 서사시 『일리아스』 에서 두 여인의 다른 점은 간명하다. 크뤼세이스에게는 배정된 대사가 한마디도 없다. 반면, 브리세이스는 대사가 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 왕의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는 현장에 '있는 것으로' 설정되었을 뿐 한마디의 대사가 없다. 이처럼 『일리아스』 에서 크뤼세이스는 그냥 거기 있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브리세이스는 다르다. 『일리아스』 19권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아킬레우스는 복수를 위해 아가멤논의 화해를 받아들이고, 앞서 협상이 결렬될 때(9권) 제시한 선물이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도착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브리세이스가 있다(마치 물건처럼 취급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돌아온 브리세이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마주하고는 통곡하는데, 거의 스무 번 가까이 『일리아스』 를 읽었지만, 그때마다 '이거 뭐지?'하고 물음표를 표기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브리세이스의 발언이다.

 

"파트로클로스여, 가련한 내 마음에 누구보다도 소중하던
분이여! 내가 이 막사를 떠날 때는 그대가 살아 있었건만
이제 다시 돌아와 보니, 백성들의 지배자여! 그대는 이미
죽어 있구려. 이렇듯 내게는 불행에 불행이 겹치는군요.
나는 아버지와 존경스런 어머니께서 내게 주신 남편이
우리 도시 앞에서 날카로운 청동에 찢기는 것을 보았고,
같은 어머니께서 낳아주신 사랑하는 세 오라비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도 모두 파멸의 날을 맞았지요.
하지만 그대는 날랜 아킬레우스가 내 남편을 죽이고
신과 같은 뮈네스의 도시를 함락했을 때 나를 울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나를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의 결혼한 아내로
만들고 또 나를 그대들의 함선들에 싣고 프티아로 데려가서
뮈르미도네스족 사이에서 결혼식을 올려주겠노라고 약속했지요.
그대가 늘 친절했기에 나는 그대의 죽음이 한없이 슬퍼요."

-『일리아스』19권 287~300행(천병희, 숲, 2015년 6월, 개정판)

 

슬프다, 그대의 발언이, 그 상황이. 그리스연합군의 보급투쟁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킬레우스였다. 아무리 당시의 해적행위가 보급투쟁이고 경제활동으로 인정되는 때라고 하더라도 브리세이스에게는 철천지 원수인 아킬레우스다. 그런데, 파트로클로스가 브리세이스에게 그의 아내가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 더욱 심각한 것은 사건 당시 브리세이스는 이미 결혼한 여자였다. 그리고 세 오라비도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했고, 아킬레우스의 '경제활동'으로 가계 전체가 무너진 상태다. 더구나 아킬레우스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들이 있으며, 이 친구가 트로이아 전쟁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결혼식' 얘기까지 나온다. 공약(公約)이었을까, 공약(空約)이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희망을 준 파트로클로스의 부재를 브리세이스는 많이 슬퍼한다. 순수한 의미의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애도가 없지 않지만 자신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두드러진다. 사실, 살아 있는 사람은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망자가 다른 차원의 세계(하늘나라)로 간다고 보기에, 당면한 자기 소망을 해결해주기를 장례 과정에서 '기도하듯' 바란다(이상하지만, 이것은 수 차례의 조문 과정에서 관찰한 결과에 따른 의견이다). 이러한 과정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브리세이스의 심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은 나의 오랜 숙제였다.

 

『일리아스』 를 읽을 때마다 찍는 물음표 '이거 뭐지?'

작가 양귀자의 유명한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개정판(쓰다, 2019-04-20, 초판출간 1992년)이 출간되었다. 젊은 여성이 인기 남자배우를 납치해서 감금하고 조종하는 이 소설은 발간 직후부터 독자와 평단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양귀자의 이 장편소설은 1992년에 초판이 나오자마자 페미니즘 논란과 함께 화제가 되었고,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을 고스란히 뒤집어 학대당하고 조련당하는 남성을 보여주는, 앞선 페미니즘 소설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공격적인 방법이 화제가 되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면서 처음부터 소설의 흡인력은 최대치로 고조되었다. 문제는 스티븐 킹의 소설 『미저리』에서처럼 처음부터는 아니나, 여주인공 강민주가 인질로 삼은 백승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 이 소설은 1994년에 영화로 제작·개봉되어 '선전'을 했다. 27세의 강민주는 최진실이 당대의 톱스타이자 여성들의 우상인 백승하는 임성민이 연기했다. 두 분다 고인이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쨌든 전세계적인 흐름인 미투현상를 계기로 우리의 페미니즘 논의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상태인데, 이 소설은 이른바 스톡홀름 증후군을 엿볼 수 있는 상황을 포함하고 있어, 다시 읽게 된다.

 

우리의 페미니즘 논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상태

197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가장 큰 은행에서 전과자 두 명이 여자 세 명과 남자 한 명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질범은 인질의 목숨을 위협하는 동시에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긴 인질극이 진행되는 동안 인질은 인질범과 교김하고 감정적 유대감을 쌓는다. 급기야 인질은 자신을 구하려는 경찰을 적으로 돌리고, 인질범을 안정감을 주는 친구라고 느낀다. 이렇게 인질과 인질범이 서로 유대감을 느끼는 이상한 현상은 다른 사례에서도 관찰되었고,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브리세이스의 상태를 어떻게 봐야 하나, 오랜 고민을 '스톡홀름 신드롬'과 연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상은 최근에 출간된 한 번역서의 출판사제공 책 소개를 다듬은 것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신드롬) 이론으로 남성 지배 사회와 여자의 인질심리를 파헤치는 책, 『여자는 인질이다』(디 그레이엄,에드나 롤링스,로버타 릭스비 지음/ 유혜담 옮김/ 열다북스, 2019-03-15) 얘기다.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고대 그리스 고전 중에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만한 단골 소재는 없을 것이다. 페니미즘 시각에서 비극 한 편에 대한 재해석이 열렬히 이루어졌고, 상당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으며,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여자는 인질이다』 출간, '스톡홀름 신드롬'의 최초 사례는?
그런데 앞서 인용한 브리세이스의 발언(태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것을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봐야 하는가, 그렇다면 참 안타깝고 화가 난다. 기원후 2019년에 말이다. '트로피 아내'란 말(몇 년 전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했다) 자체도 문제적이지만 아직도 이러한 성의 불평등과 불균형이 전제되어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주문한 두 권의 책,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개정판과 『여자는 인질이다』를 주문하고 기다리다가 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9-05-06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열심히 읽고 있는 에드워드 기번의 책에서도 이 글과 관련이 깊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어서 흥미롭더군요.

포로가 된 여자들은 미인을 소유하는 것은 용맹에 대한 보상이라는 전쟁의 법칙을 감수해야 했다. 영웅들의 시대에도 이에 대한 본보기가 있었던 만큼 그리스인들로서는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119쪽)
-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기번의 주석
호메로스는 자신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인 자들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마음까지 주었던 여자 포로들의 모범적인 인내심을 끊임없이 묘사한다. 이런 열정(아킬레스에 대한 에리필레의 감정)을 라신은 경탄할 만한 섬세함으로 다루었다.

timeroad 2019-05-07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기대합니다. ‘여자 포로들의 모범적인 인내심‘이라~ 흥미롭네요. 소급해서 적용한다는 것이 무리가 있을 듯하지만, 당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을까 해요. <안티고네>를 두고 숱한 페미니즘 시각에서의 논쟁이나 연구 성과들이 그러하듯이요. 감사합니다.

ransky 2019-05-11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남자가 인질 아닌가여?
여자가 이미 인질이면 남자는 인질의 인질!

timeroad 2019-05-12 00:36   좋아요 0 | URL
일종의 죄책감도 좋은 해소는 아닌 듯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주창하면 샘 말이 맞을지도.
 

"끝으로, 무엇보다도 말한 것을 후회한 적은 있어도 침묵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는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23장으로 「수다에 관하여」를 마무리하면서, 앞서 수다를 줄이는 방법까지 처방했음에도 거듭 당부한다. 차라리 침묵하라는 것, 침묵 자체는 자신이 의도하든 하지 않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법이며 경청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소통이 너무 쉬워진 요즘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이 말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체로 자초한 것으로 '보인다'.


SNS시대, 정치인도 네티즌도 말 때문에 고통, 자초한 것

21장에서는 대답을 해야 한다면 간략하게 하라며, "소크라테스는 집에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수다쟁이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대답을 하는지 실례를 든다. "질문에는 세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필요한 대답, 공손한 대답, 쓸데없는 대답이다."고 결론부터 제시하고서 위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
"소크라테스는 집에 있습니까?"
첫째 간결한 대답은 '집에 없소'(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 마지못해)다. 혹은 '없소'(과묵한 라코니케인들[스파르테인들]처럼 대답하려면 '집에'도 빼라는 것. 라코니케인들은 필립보스[마케도니아의]가 서찰을 보내 도시가 자기를 받아들이겠느냐 물었을 때 큼지막하게 '아니오'라고 쓴 서철을 보냈다고 한다)다. 두 번째 공손한 대답은, "집에는 없고, 환전소에 가 있어요."라고 대답하거나 좀 덧붙이고 싶으면 "그곳에서 이방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어요."정도다,

 

 

"소크라테스는 집에 있습니까?" 당신의 대답은?

세 번째 쓸데없는 대답은 바야흐로 수다쟁이의 몫이다.

"집에는 없고, 환전소에 가서 이오니아 출신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들을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추천했는데, 알키비아데스는 전에는 라케다이몬인들(스파르테인들)을 편들었지만 지금은 알키비아데스의 중재로 아테나이인들의 편이 된, 대왕의 태수 툇사페르네스와 함께 밀레토스 시 근처에 체류하고 있어요. 툇사페르네스가 마음을 바꾸도록 알키비아데스가 주선한 것은 추방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어서죠"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으신 분들이라면 폭소를 터뜨릴 지점이다. 거기 소개된 알키비아데스의 행적인데, 플루타르코스는 수다쟁이가 투퀴디데스를 읽지 않았기를 소망한다. 만약 읽었다면 책의 전8권(베개로 써도 충문한 분량의)을 단숨에 읊어 묻는 사람을 말의 홍수에 빠뜨릴 것이라고. "그러면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밀레토스가 함락되어 알키비아데스는 두 번째로 추방당할 것"이라고.

 

침묵이 힘들면, 간결하게 요점만 간단히, 그것이 가능하다면

「수다에 관하여」는 플루타르코스의 6편의 철학에세이가 실린 『수다에 관하여』에 또한  『그리스로마 에세이』에도 수록되어 있다. 플루타르코스는 수다의 근원이 되는 혀에 관해 '해부학적' 지식을 동원한 경구를 남기고 있다. 인체 가운데 자연이 혀만큼  울타리로 둘러친 부위는 없다는 것. "자연은 혀를 지키기 위해 그 앞에 이(齒)를 배치"(3장) 했다. 그래서 내부의 이성이 침묵의 고삐를 당기는데도 혀가 복종하지 않거나 자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피를 흘릴 때까지 혀를 깨불어 그 불복종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것. '이빨을 깐다'는 말이 역설로 다가와 당황스러웠다. 또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이 어른거린다. 혀를 깨물기 전에 위아래 입술을 다물면 침묵이기에 하는 말이다. 어쨌든 '세 치 혀'라고 하는데, 각종 민원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잘못 사용하면 그 자신을 가장 먼저 그리고 치명적으로 망가뜨리는 것이 바로 혀다.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는데, 세 치밖에 안 되는 짧은 혀라도 잘못 놀리면 사람이 죽게 되는 수가 있다는 뜻이다. 계량법에 따르면 한 치는 1.1930inch, 3.0303cm로(백과사전) 세 치 혀란, 10cm쯤 길이의 혀라는 뜻이다.

 

플루타르코스,  "자연은 혀를 지키기 위해 그 앞에 이(齒)를 배치"

최근에 발간된 흥미로운 책 한 권을 발견하고 구매했다. '돈, 사람, 기회를 끌어당기는 최강의 말습관'이란 부제를 단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은 3마디로 말한다』(오수향, 위즈덤하우스, 2019-04-19)이다. '3마디'라는 말이 좀 불편하다. 이 책에서 심리대화 전문가인 저자는 '세 마디'로 말하라고 주장한다. '세 마디'를 의식해서 필요 없는 말의 잔가지를 없애고, 핵심만 쏙쏙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 비지니스와 연관해서 얘기를 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고는 있지만 움베르토 에코(1932~2016)가 데뷔작이자 대표작 『장미의 이름』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설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희극편)이 간직한 비밀 만큼이나 '3'에는 뭔가가 있다. 어쨌든 다양한 예시와 노하우를 담은 친절한 책이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군더더기일 듯하다. 다만, '수다에 관하여'와 관련하여 이 책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어느 선사가 한 말이란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무기를 한 수레 가득 싣고 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한 치도 안 되는 칼 하나만 있어도 문득 사람을 죽일 수 있지요." (13면)

여기서 살인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한마디 정도의 짧은 말로 사람을 깨닫게 할 수 있다는 의미란다. '깨달음에는 수천 권의 책 속에 들어 있는 막대한 단어가 다 부질없다. 짧은 말 하나면 족하다.'고 부연설명한다. 과연 그럴까,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했으면 좋겠다.
 

말의 잔가지를 없애고, 핵심만 쏙쏙  '세 마디'로 말하시라

어쨌든 세  치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극과 극으로 다른 결과를 맞이한다. 암튼 '세 마디'와 '세 치 혀'는 뭔가 관련성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3마디'의 필자는 위 인용문이 속한 꼭지의 글 서두에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유명한 카이사르의 말을 인용하고 그 배경을 설명한다. 자기계발서의 한계는 생산자는 그렇다치고 소비자들이 늘 뭔가에 기대지 않으면 불안하게 한다는 것. 생산자인 필자가 이런 나약한 독자들의 심리를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의 마음처럼 '어여삐' 여겨주면 좋은련만. 사실 알고 보면 서양발(發) 모든 자기계발서의 원조이면서 고전 중의 고전은 『그리스로마 에세이』에 수록되어 있다. 기왕이면 고전을 읽는 동안 내 인생을 바꾸어놓을 한마디를 발견하기를. 더불어 교양도 쌓으면 좋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서양발(發) 자기계발서의 원조이자 고전, 『그리스로마 에세이』

카이사르의 유면한 세 마디도 기왕이면 『카이사르의 내전기』(김한영, 사이, 2005)나 『갈리아 전쟁기』(천병희, 숲, 2012) 등 그의 저작을 읽는 동안 발견할 수 있기를. 이것도 힘들면 그에 앞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천병희, 숲, 2010)이나('카이사르 전') 고 이윤기 선생이 기획하고 따님 이다희 씨가 번역한 『플루타르코스영웅전세트(전10권, 휴먼앤북스, 2015) 중 를 '카이사르'를 다룬 책을 찾아 읽어도 좋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는 사람은 3마디로 말한다』를 읽는 독자라면 어쩌면 이 책의 기획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다음 책, '명쾌하게 생각하고 쓰고 말하는 초간단 훈련법'이란 부제의 『3의 마법』(노구치 요시아키, 김윤수 옮김, 다산라이프, 2009)도 살피시기를.

 

문득 『3국유사』꼭지들의 마무리가 생각나서 시 한 편으로 마무리.

그제 쓴 시는
어제 지웠지요
어제 쓴 시는
오늘 지워요
오늘 쓴 시는
내일 지우겠지요
버드나무는 일 년에 한번 꽃 피워요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지워요
나도 고요히 꽃 필 때가 올까요?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가
스스로 지며 좋아서 혼자 웃겠지요.

-곽재구 신작시집 『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에 실린 시 「버드나무」전체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imeroad 2019-04-2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올리고 보니 『3의 마법』의 절판 확인일이 2019-04-24이라고 뜨네요.
 

4월 하순 들어 두 권의 주목할 만한 철학 신간이 생산, 등록되었다. 플라톤의 『법률』(2016년 12월) 이후 모처럼 선보이는 천병희의 플라톤 대화편이다.『법률』은 천병희가 번역한 22번째 플라톤 대화편이었다. 예외 없이 이번에도 도서출판 숲에서 펴냈는데, 이번에는 '플라톤전집2'(2019-04-20), '플라톤전집7'(2019-04-24)이란 시리즈번호를 달고 있다. 왜 그럴까?

 

이번엔 '플라톤전집2', '플라톤전집7'이란 시리즈번호를 달고 있어!

특히, 모두 8편의 초·중기 대화편들을 수록하고 있는 플라톤전집2에는 <파이드로스/메논> (중기대화편), <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초기 대화편들)를 비롯하여, 이전에 소개되지 않은 세 편의 새로운 대화편(번역)을 수록하고 있다. 초기 대화편에 속하는 「에우튀프론」과 중기대화편에 속하는「에우튀데모스」와 「메넥세노스」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에우튀프론」은 작년 1월에 정암학당 플라톤전집20(강성훈 옮김)으로 출간된 바 있으며, 2008년 1월 정암학당에서는 「메넥세노스」와 「에우튀데모스」가 출간된 바 있다. 이보다 앞서 「에우튀프론」은 박종현의 주석서로「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과 함께 출간된 바 있다(서광사, 2003년 4월) 이들 네 작품을 소크라테스의 최후와 관련된 4부작으로 분류하는 데에 따른 것이다.
또한 박종현의 「메넥세노스」는 『고르기아스/메넥세노스/이온』(서광사, 2018년 12월)으로 세 편이 한 권으로 묶여 작년 12월 30일에 출간되었다. 이번 천병희의 플라톤전집2권에 세 대화편의 신규 번역이 추가됨으로써, 우리는 희랍어-우리말 원전번역을 세 종(種)씩 보유하게 되었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축하할 일이다.

 

'플라톤전집2' 천병희 신규번역 「에우튀프론」.「에우튀데모스」.「메넥세노스」 포함
이보다 더 흥미로운 일은 ‘플라톤전집7’인데, <알키비아데스1.2/힙피아스1.2/미노스/에피노미스/테아게스/클레이토폰/힙파르코스/연인들/서한집/용어 해설/위작들>을 수록하고 있다. 위작이란 플라톤이 실제 필자인지 논란이 되고 있는 플라톤의 저작들을 말한다. 옮긴이(천병희) 서문은 "이 플라톤 전집에서 위작까지 다 옮긴 것은 위작도 플라톤의 철학체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플라톤전집7'에 수록된 대화편들 가운데, 앞서 번역으로는, 정암학당 플라톤전집3으로 『알키비아데스1,2』(김주일,정준영, 2007년 4월)와 전집8인 『편지들』(김주일,강철웅,이정호, 2009년 3월)이 있다.
위작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상당수 작품이 드디어 독자들에게 제대로 소개되는 것이다. 학자들의 논문에서 인용되는 것을 통해 접하던 전체(작품)를 우리말 텍스트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 것. 7권 수록작품 중 '위작들'에 묶인 길이가 들쑥날쑥한 대화편은 「정의에 관하여」, 「미덕에 관하여」, 「데모도코스」, 「시쉬포스」, 「에뤽시아스」, 「악시오코스」까지 모두 6편이다.
결국 천병희의 '플라톤전집7'은 모두를 대화편이라고 지칭하기는 좀 그렇지만 ‘알키비아데스’와 ‘힙피아스’를 각각 2권씩으로 보면 19개의 섹션으로 나뉘는 플라톤 저작들이 수록되어 있는 것. 대중 독자들도 직접 위작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플라톤의 저작들을 우리말로 읽으면서 논의에 '참전할 수 있게' 되었다. 꼭 필요한 주석만 간명하게 밝히는 천병희 번역의 스타일로 볼 때 플라톤전집 7권은 총 560쪽(양장본)으로 상당한 분량이다.


'위작도 플라톤 철학체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플라톤전집7 발행
그런데 오늘은 2019년 4월 25일이다. 알라딘(서점)에 신간이 등재된 날을 기준으로 하면 어제 천병희의 플라톤전집7이 등록됨으로써, 마침내 천병희의 플라톤전집이 전7권으로 완간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한 번역가가 플라톤 대화편 전편을 그것도 위작들까지 완간된 것.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작품들이 플라톤 말고도 헤아릴 수 없기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득 인터넷으로 천병희 선생의 인물정보를 검색했더니 생년월일이 1939년 3월 12일이다. 이 분 연세에 음력 생일을 세시겠지 싶어 확인하니 오늘 4월 25일이(음력 3월 12일로), 천병희 선생의 80회 생일이다. 80세를 '산수(傘壽)'라고 한다는데, 한자 산(傘)자에 팔(八)과 십(十)이 들어 있어서란다. 우선 축하드린다. 그리고 감사드린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80회 생일에 마쳐 플라톤전집을 완간하게 된 것. 필자는 이것이 출판사의 거장 번역가에 대한 예우라고 받아드린다(실제로 기념하는 생일이 오늘이라고).

 

2019년 4월 25일, 천병희 선생 80세 생일 맞아 플라톤전집(전7권) 완역 출간
플라톤(기원전 427년경~347년). 그는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에 사형당하는 것을 본 28세에 큰 충격을 받는다. 정계 진출의 꿈을 접고 철학을 통해 사회 병폐를 극복하기로 결심을 굳힌 그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사회가 개선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기원전 387년경(34세) 영웅 아카데모스(Akademos)에게 바쳐진 원림(園林) 근처에 서양 대학교의 원조라고 할 아카데메이아(Akademeia) 학원을 개설한다. 그리고 시칠리아에 있는 쉬라쿠사이(Syrakousai) 시를 두 번 더 방문해 그곳 참주들을 만난 것 이외에는 다른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연구와 강의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기원전 347년 아테나이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 80세다. 이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크라테스가 대담을 주도하는 30편 이상의 철학적 대화편과 소크라테스의 변론 장면을 기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론』(Apologia Sokratous)을 출간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80세까지 50년이 넘는 기간을 플라톤이 집필한 대화편을 80세 천병희가 완역
인터뷰 기록에 따르면 천병희가 『국가』 번역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의 대사상'이란 시리즈를 출간하던 한 출판사가 급한 일정으로 번역을 의뢰했는데, 당시 1~5권은 박종현 교수가, 6~10권은 천병희 교수가 번역했다. 천병희 선생이 33세쯤이던 해다. 물론 이것이 플라톤 대화편의 첫 번역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당시 천병희 선생은 투옥과 자격정지 등으로 생계 걱정을 해야 했고, 번역은 그런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일 수 있었으니까.
1967년 7월 8일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이 있다. 이른바 동백림사건(The East Berlin Affair, 東伯林事件)이다. 천병희 선생은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해직되고 10년간 자격 정지를 겪어야했다. 당시 29세, 서울대사대전임강사(불문학석사) 시절의 얘기다. 이 사건은 2006년 1월 26일,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 접촉과 동조 행위를 국가보안법과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확대·과장한 사건으로 재해석했다. 천병희 선생은 당시 윤이상(무기징역에서 감형) 등과 함께 10년형을 받는다. 잠시 윤이상 선생 얘기를 하자면, 그는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다.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에 입국할 수 없었다. 1974년 도쿄에서 김대중 구출운동의 일환으로 윤이상 음악회를 열 때 유명한 말을 남긴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 철학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고민한 젊은 플라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28세에 스승의 죽음을 맞이한 플라톤, 유학 시절의 일로 지옥을 경험한 28세의 천병희, 서양 나이로 치면 천병희 선생도 당시 28세였다.

 

만 28세에 동백림사건으로 인생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천병희, 28세의 플라톤처럼
한 포털사이트의 인터뷰에서 번역가 천병희는 (자신의) ‘서재는 작업장’이라고 정의했다.
"나에게 서재는 그리스 신화에 비유하자면 '다이달로스'라는 기술자가 있는데 다이달로스의 작업장과 같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이름있는 영역본이나 독역본 등을 한 4~5가지 이상 참고해야 되고 또 주석도 봐야 됩니다. 그걸 전부 참고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우리말로 옮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장 하나하나를 번역하는 것을 일종의 작업에 비유한 것입니다."(2015. 05. 28. [네이버 지식백과 번역가 천병희의 서재)
지금도 꾸준히 서울 송파의 한 아파트, 집안의 서재에 머물며 하루에 일정량씩 번역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날마다 인근 야산을 산책하는 일도 거르지 않는다. 100세 시대인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아직도 천병희 선생의 번역으로 읽고 싶은 고전들이 숱하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라 참 다행. 아직도 천병희를 통해 읽고 싶은 고전들이 숱하기에
다른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연구와 강의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던 플라톤이 기원전 347년 아테나이에서 세상을 떠난다. 80세다. 철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이후 50여 년을 자신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플라톤의 나이쯤에 천병희는 뜻하지 않은 공안사건에 휘말려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해직되고 10년간 자격정지를 견디면서 어느 때보다 희랍어-라틴어 원전번역에 집중하게 된 것. 28세의 플라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천병희 선생은 이후 50여 년 학업과 번역에 정진하면서 마침내 한 번역가가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를(그것도 위작논란 중인 작품들까지) 7권으로 번역해 천병희표 플라톤전집을 완간하게 된 것이다.
2019년 4월 25일 오늘은(80세를 '산수(傘壽)'라고 한다는데 낯설고) 어쨌든 천병희 선생의 80세 생신이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건필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 플라톤전집4『국가』, 플라톤전집5 『플라톤의 다섯 대화편-테아이테토스/필레보스/티마이오스/크리티아스/파르메니데스국가』,  플라톤전집6 『법률』. 천병희의 플라톤전집(전7권) 완간은 선생에게도 독자들에게도 큰 선물,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초겨울 딸과 함께 서해안의 구시포(해수욕장)에 가는 길이었다. '해가 넘어가는' 풍경이 좋아 제철이 아닌 때에도 주말이면 찾는 발길들이 상당한 포구다. 그즈음에 16년 만에 나온 『곽재구의 포구기행』(해냄, 2018) 개정판을 살피고 있었다. 이 책(초판)에 구시포를 다룬 글이 있다(<천천히, 파도를 밟으며, 아주 천천히…… -전북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이 책 때문에 구시포를 찾았다기보다는, 가까이에 구시포가 있어 찾아가는 길에 마침 개정판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인근 지리에 좀 익숙하다는 티를 내려고, "너, 상하면의 한자가 어떻게 되는지 아니?" 딸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글쎄!'다. 마침 상하면 소재지를 막 벗어난 군내버스가 상하중학교 앞을 지나 구시포 방면으로 달리고 있었다. "위 상(上)에 아래 하(下), 해서 상하(上下)야, 우리말로 '위아래' 면(面)." 여기까지였으면 좋았는데, 한 발 더 나간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 학교의 교가가 뭔지 알아? <위아래>야. 위아래, 위아래, 위위 아래~ 그 유명한 EXID(이엑스아이디)의 <위아래UP&DOWN>를 언급했으니, '아재' 소리를 들을 수밖에! 응원가라고 했으면 그나마 면(面이 섰을 텐데..

 

상하면(上下面) 상하중학교의 교가는 <위아래>?  

어쨌든 구시포가 있는 상하면은 행정구역 개편 전의 '상이면(上二面)'과 '하이면(下二面)'에서 앞 글자를 따 상하면(上下面)이 되었다. 상이면과 하이면에 이(二)라는 한자도 왜 그런지 궁금하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가 알기로는 충남 예산군 삽교읍, 충남 홍성군 홍북읍, 전남 영광군 홍농읍 등에 상하마을(上下里)이 있는데, 이들 한자도 상하(上下)다. 도시에는 상동이나 하동이 즐비하다.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라, 놓인 형상에 따라, 서울을 올라간다고 하듯이, 위와 아래로 구분하는(혹은 중간까지도), 상하는 지형상 자연스럽게 붙여지는 이름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상하면 소재지에서 6킬로미터쯤 733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면 구시포에 이른다. 개정판 ‘포구기행’ 해당 페이지를 확인한다. 포구기행의 작가가 이곳을 처음 찾은 계기도 이곳의 특이한 이름 때문인 듯하다. 주민들이 기억하는 구시포의 원이름은 '새나리불똥'이었단다. '새나리'는 갯가(바닷가)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불똥'은 '불뜸'에서 전이된 말인데, '뜸'은 우리말에서 자연부락을 의미한다. 작가는 구시포의 옛이름 새나리불똥을 '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 쯤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 포구 이름이 ‘구시포(九市浦)’로 바뀐다.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이라는 뜻이니 바뀐 이름의 의미 또한 낮은 것은 아니다.'라고 작가는 덧붙인다. 구시포의 바다가 백합조개가 무럭무럭 자라는 개펄바다인데다 조기들로 유명한 그 칠산바다가 아닌가?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
‘그렇다는 구나!’ 하고 이야기를 마칠 참인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 그럴까, 이름 곧 여기서는 지명, 그 지명은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이야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야기도 나눈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가에서 플라톤의 대화편 한 권을 꺼내 새롭게 이야기했다. ‘이름의 올바름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가진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다. 천병희의 번역은 『이온/크라튈로스』(숲, 2014년 10월)로 두 편이 묶여 있다.

 

“누가 맨 처음 이름들의 올바름에 관해 모른다면 나중 이름들의 올바름에 관해서도 알 수 없네. 나중 이름들은 그가 모르는 맨 처음 이름들로 설명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중 이름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분명 무엇보다도 맨 처음 이름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네.”-플라톤 『클라튈로스』 426a~b), 천병희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한 걸음 더 들어가려하면 복잡해지고 심오해지는 대화편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 무엇(사물이나 사람이나 이름의 대상)에 대해 그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일까? 책에서는 '입법자'라고 한다. 어쨌든 입법자는 어떤 기준으로 그것에  [그것]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가? 이 대화편 서두에서는 헤르모게네스는 '이름의 올바름은 합의와 동의에 의해 정해진다'는 규약주의를 주장한다. 그것을 [그것]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로 합의한 '약속'이란 얘기다. 반면에 크라튈로스는 '있는 것들 각각에는 이름의 올바름이 본래 자연적으로 있다.'(객관적으로)는 자연주의를 주장한다. 그것이 [그것]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 목(木)이나 물 수(水)와 같은 한자의 상형문자를 떠올리면 크라튈로스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한자의 갈래에는 상형문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혀의 모양에 따라 자음을 정하고(설형문자) 천지인(天地人)의 원리에 따라 기본 모음을 정한 한글의 경우는 어떠할 것인가?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먼저 헤르모게네스와 긴 토론을 한다. 인용한 부분은 둘의 대화가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인데, 앞선 대화들의 상당부분이 희랍어의 어원에 관한 고찰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나중 이름(현재 사용하는)은 맨 처음 이름(이전 이름)과의 연관 관계에서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2권 후반부 '함선목록'에서 읽기를 멈추는 것처럼,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희랍어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지루하고 시험에 든 것처럼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희랍어 고전을 좀 읽었다는 사람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신들과 영웅들의 이름이나 중요한 철학의 개념어들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어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사실 우리말에서도 쉽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앞서 포구기행의 지명 유래에 대한 추적을 예시한 것이다.)

 

맨 처음 이름들의 올바름에 따르는 나중 이름들의 올바름
플라톤은 궁극적으로 이데아(idea) 이론을 펼치기 위해 사물의 이름 이전의 사물 자체가 가진 본성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프레임을 벗어나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 일부를 이야기한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맨 처음 이름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가 나중 이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허튼소리일 뿐이라고 진술하고, 헤르모게네스의 동의를 구한다.
포구기행의 작가는 구시포가 왜 구시포인지, 이전 이름인  '새나리불똥'이 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인지, 나름대로 해석했다. 상하면의 구시포는 나중 이름(현재 이름이면서)인데, 그 처음 이름(이전 이름)은 '새나리불똥'이었다. 그렇다고 '새나리불똥'이 현재 구시포의 맨 처음 이름이었다고 할 수 없다. 현재 이름에 대한 이전 이름일 뿐이다. 다만 한자어가 아닌 고유한 우리말 지명인 점에서 처음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어쨌든 작가는 국토지리를 기본으로 인문지리와 거기에 시인의 상상력까지 가미하여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있다. 김춘수의 시에 따르자면 ‘구시포’가 비로소 구시포가 되는 셈이다(실제로 해당 지명이 왜 그 지명인지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구시포가 비로소 구시포가 되는 순간, 그러나 맨 처음 이름은?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논점은 여기에 있지 않다. 인용부분 대사의 앞에서 그는 얘기한다. "사물들이 자모와 음절을 통한 모방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걸세."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맨 처음 이름들의 참됨에 관한 한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물을 그 [사물]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언어이고, 언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져 있다. 자음과 모음은 결합하여 음절을 이루고, 한 음절이 한 사물의 이름이 되기도 하지만 음절과 음절의 결합으로 한 사물의 이름이 된다. 그 사물에 그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재료가 언어인데, 이를 모방이라고 표현한다. 사물이 가진 본질을 모방하는 수단이 언어인 것. 이렇게 언어로 된 그 [이름]은 사물을 대신한다. 곧 대치(代置)한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이고, 그것이 적절한지 그 원칙은 무엇인지 등 의문투성인데, 이 대화편의 주제다. 일단 우리는 그 이름(언어)에 의존해서 ‘구시포가 구시포인‘ 이유, 구시포가 구시포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언어의 한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인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접목시켜야 비로소 이해가 가고, 후반부 크라튈로스와의 대화에서 앞서 인용한 부분과 관련된 흥미로운 얘기를 꺼낸다. 그러나 논점은 조금 달라진다.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우리는 이름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으며, 어떤 훌륭한 일을 한다고 주장할 텐가?” 크라튈로스는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님, 이름들의 힘은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 사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사물도 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어요.” 이어지는 대화다. 잠시 따라가 보자.

 

이름들의 힘은 가르치는 것, "삼척동자도 알 수 있어요."
소크라테스: 크라튈로스. 자네 말은 아마도 누군가 이름의 본성을 안다면―이름의 본성이 사물의 본성일세― 사물은 이름을 닮은 만큼 사물도 알며, 서로 닮은 사물은 모두 같은 기술(技術)에 속한다는 뜻인 듯하네. 내 생각에 그래서 자네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사물도 안다고 주장하는 것 같네.
크라튈로스: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가 방금 말한 가르치는 방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보다 더 열등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는지. 아니면 그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기로 하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크라튈로스: 나는 다른 방법은 없고, 그것이 하나뿐이자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크라튈로스』(435d~436a), 천병희

소크라테스는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독단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배려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그것은 또한 사물을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해서. 사물의 이름을 발견한 사람은 사물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자네는 탐구와 발견은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하고, 배우는 것은 이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크라튈로스: 나는 탐구와 발견도 같은 수단에 의해 같은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확신해요.
소크라테스: 자, 크라튈로스. 우리는 이 점에 유의하세. 자네는 이름들을 길라잡이 삼아 그것들의 뜻을 뒤쫓으며 사물들을 탐구하는 사람은 속을 위험이 크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크라튈로스: 어째서 그렇지요?
소크라테스: 맨 처음 이름을 지은 사람은 분명 사물들의 본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이름들을 지었네. 그것이 우리의 주장일세. 그렇지 않은가?
크라튈로스: 네. 그래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데 그가 그에 근거해 이름을 짓는다면, 자네는 그를 길라잡이로 삼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속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
『크라튈로스』(436a~436b), 천병희

 

맨 처음 이름을 지은 자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크라튈로스의 이름의 올바름에 관한 자연주의 이론이 앞서 인용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소크라테스는 다음 인용에서 결정적으로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가진 한계를 지적한다. 아래 인용은 [판본A]와 [판본B]로 두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판본A]의 일부 내용이다. 그만큼 이 대화편의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얘기로 받아들인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말해보게. 최초의 입법자들이 맨 처음 이름을 지었을 때 이름 지은 사물들을 알고서 지었을까, 아니면 모르고 이름 지었을까?
크라튈로스: 나는 그들이 알고서 이름 지었다고 생각해요, 소크라테스님.
소크라테스: 여보게 크라튈로스, 아마도 모르고 이름 짓지는 않았을 걸세.
크라튈로스: 나도 그들이 모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소크라테스: 그런데 만약 이름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알 수 있다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 그러니까 이름을 알 수 있기 전,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알고 이름을 지었다거나 그들이 입법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크라튈로스』(437e~438b7)

 

이름을 통해서만 가르칠 수 있고, 탐구와 발견도 가능하다고 '믿는'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자가당착에 빠지는 부분이다. 인식론이니 존재론이니 하는 철학의 영역으로 대화편은 깊이를 더해간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클라튈로스의 주장은 외골수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이 되지만, 그만큼 보통의 삶에서 언어를 재료로 만들어진 이름(단어, 언어, 말)이 하는 역할은 크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필자도 한글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가벼운 얘기처럼 다가오던 『클라튈로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의 깊이를 더해갈수록 인식의 숲에서 헤매게 하는 묘한 대화편이다.

 

이름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알 수 있다면.. 크라튈로스의 자가당착

탐구와 발견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것도 이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고집을 부리는 클라튈로스, 그러나 우리는 상당 부분 이러한 이름을 통하여 책을 읽고 또한 글을 쓰며, 대화하고 있다. 이름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행, 그리고 이름 이전의 사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행은 좋은 기행수필 작가의 아름다운 여행과 다를 바 없다. '미법도彌法島. 처음 섬의 이름을 만났을 때 가슴이 뛰었지요. 미륵의 불법이 존재하는 섬.' 작가는 여정을 미법사로 정한 이유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이름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곽재구의 신新 포구기행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해냄, 2018년 7월) 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거제의 포구를 여행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욕지도 자부포에서」의 일부다. 이 글을 위해 이 책에서 작가가 여행한 곳의 지명과 관련된 언급들을 여러 군데 골라냈는데, (너무 길어지니 문제라) 그 중 하나 고르 것이 우연히도 이 책의 제목이 된 기행수필이다. 2018년 1월호 『전원생활』에 처음 소개되었다.


"1시간 15분 항해 끝에 욕지도에 이른다. 섬의 이름은 난해하고 철학적이다. 욕지慾知, ‘알기를 원한다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는 동안 곤궁한 생화두에 시달리지 않는 이가 있을 것인가. 왜 사는가. 왜 먹는가. 왜 걷는가. 그 이유를 알려줄 테니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은 이름. 사실 이 섬의 이름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선 ‘욕지 연화장 두미 문어 세존 慾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이라는 불가의 전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_『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354~355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ansky 2019-05-11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시포!
여기에 사진을 올리 수 없으니 그날의 광경을 못 다 이야기하네!
파도와 모래폭풍!

timeroad 2019-05-13 19:36   좋아요 0 | URL
정확히는 구시포해수욕장과 동호해수욕장 사이 명사십리해수욕장이겠지요. 얼마 전에 갔더니 명사십리의 그 고운 모래들을 헤집어놓아 속이 상했어요. 자연은 곧 복원을 하겠지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