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장르'라는 말이 태어난 영화 <기생충>을 개봉일(5월 30일)에 봤다. 이틀 뒤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지금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라고. 감상평을 듣고 싶었으나 하루를 참았다. 한국 영화사의 새로운 역사를 쓴, 칸느영화제의 그랑프리_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좋은 작품이기는 한데, 내게는 개운치 않은 뭔가가 남은 작품이었던 것, 그렇게 열심히 관련 기사를 읽은 것 같지는 않은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내가 극장을 나선다는 지인에게 보낸 문자는 다음과 같다. '스포일러에 특히 취약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약점'.

 

스포일러주의보 발령! '스포일러에 특히 취약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약점'

이 영화의 감독도 영화제 현장에서 세 개의 언어로 스포일러 주의를 당부했다 하고, 귀국 후 인터뷰에서 그런 당부를 잊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기존 영화 문법의 모범답안을 뛰어넘는 플러스 알파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칸느영화제를 의식하고 제작한 것은 아닐 테지만 결과적으로 칸느영화제 수상을 위한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칸느 영화제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나름대로의 흥행과는 반비례하는 독특한 특성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영화를 보면 재미 삼아, 또는 나의 대중성 인지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흥행 예측을 해보곤 하는데, 수상 효과가 적지 않게 작용하겠지만, 그런 사실을 배제한다면 ‘대박’까지 기대하기는 좀 힘든 영화가 아닐까! 한 편의 영화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그런 기준으로 볼 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앙금처럼 남았다. 해서 개봉중인 다른 영화 한 편(<악인전>)을 극장을 옮겨가면서까지 관람해야 했다. 그리고 이 글은 어제 조조(5000원이란 착한 가격 덕분에)로 한 차례 더 <기생충>을 보고서 쓰고 있다(그게 뭐지? 스포일러 때문에 훗날 쓰기로 한다).

 

이틀 만에 한 차례 더 본 영화,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앙금처럼 남아
내가 혹은 우리가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팝콘영화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그렇게 분류되는 영화들은 작품성이란 측면에서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너무 진지하고 고단한 삶에서 잠시 떠나 있고 싶은 소박한 바람, 영화 한 편을 보는 동안이라도 현실을 잠시 잊고 싶은 그런 어루만짐에 대한 기대, 이것을 거의 모든 영화들이 지향하는 '대중성'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이에 있다. 그러니까 '봉준호 장르'는 문제소설이라고 하듯 문제(예술)영화와 대중영화라는 '사이' 어딘가에 있고,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한 편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지 않을까?

이승우는 문고판으로 펴낸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에서(<저 아래층에서 끌어올려라>) 얘기한다. "소설은 대체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어쩐지 허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지 않겠는가"(책 146면)라고,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라는 핀잔을 듣는 소설은 지표수의 물론 만든 맥주와 같다는 것, 그는 '지하 150미터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로 만든' 맥주의 히트 사례를 예로 들면서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필요하다면 신화를 활용하고 상상력을 풀(full)가동할 것, 상징과 은유를 적극 활용한 소설로 다양성과 개성을 확보할 것을 주문한다.


"만일 그들의 사랑이 현실(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 주인공들의 지하(비현실)에 대한 꿈꾸기나 신화 속 인물에 대한 동일시의 과정을 보여준다면 소설은 달라질 것이다. 층이 생기니까. 그 내부의 깊은 층에서 끌어올리려 한다면 메타포나 상징은 지표면의 그렇고 그런 사연들에 대한 및을 비춘다." (책 146면)

 

 

주인공들의 지하(비현실)에 대한 꿈꾸기나 신화 속 인물에 대한 동일시 과정을…….

 -작가는 소설 작법을 다룬 이 책에서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제시하지만, 인용한 부분의 사례로 그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 대표작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2015년(39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김숨 작가의 중편소설 「뿌리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보이지 않지만 있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대칭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로 인식의 지평을 넓힌 혹은 연장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에서도 인간이 나무로 변신하는 모티브 못지않게 지하(뿌리)의 세계가 신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여 새로움을 창조한다.

-오디비우스의 『변신이야기』는 그러한 일이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상상력 사전이라고 할 수 있으면, 이런 관련성은 다른 글에서 이미 살폈다.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변신이야기』, 가장 오래된 상상력 사전

시간(서사)과 공간(묘사)은 소설에서나 영화, 모든 이야기의 기본 구성요소다. 우리 삶의 전제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좋은 소설(이야기)에 대한 이승우의 주문에도 A플러스 학점을 받을 만큼 모범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반지하-지상이라는 현실 속 공간에 대한 설정, 그것은 또한 상상력의 영토를 확장이며, 동시에 인간들의 빈부 차이(계급갈등)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이 점이 돋보인다.

영화의 주요 공간인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의 저택이라는 공간의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부엌 창고에서 지하의 세계로 ‘내려가는’ 혹은 ‘떨어지는’ 계단에 주목한다. 잘 다듬어진 잔디 정원은 '그렇고 그런' 풍경일 수 있지만 지상층과 2층(이상) 공간들은 실제 집의 구조보다도 넓고 쾌적한데, 지하의 세계와 극적 대비를 이루는 설정으로 읽힌다. 어쨌든 영화 <기생충>은 서사를 제외하고도 공간에 대한 묘사(세트 설정과 세팅)만으로도 상당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지하와 반지하 그리고 지상, 현실 공간에 대한 설정, 빈부 갈등에까지 연결

"아무리 튼튼한 담론이라고 해도, 아니, 튼튼할수록 더욱더 스스로 몸을 해체하여 다른 몸으로 변신하여야 한다."(이승우 같은 책, 141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서 지하(저승)를 통치하는 은둔의 신 하데스가 딱 한 번 직접 등장할 법한 사건이 벌어진다. 제우스의 재가로 올룀포스의 신들까지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아군)에 가세하여 총력전이 벌어지는 20권에서다. "좀 조용히 살게 해주면 안 되겠니?" 요란한 지상의 전투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저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참전하는 것(여기까지),

 

*영화 <기생충>에서 펼쳐지는 지하의 세계에 대한 설정은 (특히, 3월에 개봉한 <어스US>를 비롯 지하세계를 다룬 영화들이 적지 않지만) '한국적인' 현실성이 겸비되면서 관객을 새로운 차원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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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9-06-02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이승우) <시간이 만든 소설, 공간이 만든 소설> 마무리 부분에서 이 글의 제목을 차용했다. ˝안개나 비고 그냥 내리지 앟는다. 현실 속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소설 속에서는 내릴 만할 때 내리고 표현할 이지가 분명할 때 내린다. 그것들이 만드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소설의 몸을 이룬다. 때때로 공간이 곧 캐릭터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런 경우다 ˝(153면)
 

"궂은 날씨는 창 안에서 볼 때 더 우울해 보인다."(J. K)

보통은 다른 컴퓨터로 지상파든 공중파든 뭐든 실시간TV나 라디오를 켜놓고 할 일 하지만, 유독 명절 즈음엔 그렇지 않게 된다. 명절 분위기에 편승하고 싶지 않은 것. 1인 가구가 나라 전체 가구수의 25%, 1/4에 이르렀다니, 왜 그런지 더 이상 설명은 필요없을 듯. 물론 나머지 75%, 3/4에 속하는 가구의 구성원들, 부모와 자식들의 삶도 마음도 명절이라고 마냥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는 것일까?

 

"독신으로 지내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다.

독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B.S.)"

이라는. 그럼에도 추석 날 아침 창(WINDOW)를 잠시 벗어나기로 했다. 명절은 누가 뭐래도 영화 한 편. 그렇게 찾은 영화가 <사도>. 결정적으로 한 편 봐줘야지, 라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은 "잘 봤는데 추석에 보기엔 쫌..." "무거웠다" 등등의 멘트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창 밖으로 나가자. 그렇게 <사도>를 봤는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창 밖을 나가 다른 창을 만나 창 밖의 우울한 세계를 또 보았다는 거다. '창 밖의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책 이야기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67세쯤이던 어느 날, 한 귀족 청년을 만난다. 이름은 메논. 훗날 크세토폰의 『페르시아 원정기』('아나바시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에서 (페르시아 권력 쟁취에 용역으로 나선) 그리스 용병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메논의 노예인 소년 일명,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 아뉘토스다. 그는 아테나이의 민주제 지지자로 이 즈음 메논이 머무르던 집주인이다. 이렇게 플라톤의 『메논』의 대화자는 이들 네 사람이다. 그리고 이 대화편의 핵심 주제는 <'미덕'이란 무엇인가?>인데, 정작 미덕의 정의(定義)보다도 미덕의 실체를 규명하는 동안 파생된, 미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 없는 것인가, 하는 논의 중 나온 질문이 흥미로우며 자극적이다. 머잖아 소크라테스가 고소되어(세 명의 고소인 중 하나가 아뉘토스다) 법정에 서게되는 한 계기가 이 대화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모래 속에서 알의 껍질을 깨고 갓 때어난 거북의 새끼는 어떻게 어미가 길을 안내하는 것도 아닌데, 곧바로 물을 찾아 이동하는가? 동물의 세계를 다룬 다큐에서 자주 보여주는 모습 가운데 하나다. 소크라테스(혹은 플라톤은)는 오늘날 불교의 '윤회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미덕은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지, 생후에 습득하는 것,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일관되게 피력한다. 이른바 상기(想起)론을 일관되게 주창한다.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표어가 지금도 시골 농협창고의 벽면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필자에게 '상기(想起)'라는 단어는 이런 표어나 반공글짓기, 궐기대회에 '동원되어' 참여한 함성으로 기억되어 있다.

  

이미 태어나기 전에, 전생의 흔적들(기억들)을 가지고 왔기에 그렇게 태어났고 사는 법도 안다는, 사는 데 필요한 정보도 어떤 계기를 만나 다시 기억해낸다는 얘기다.  그것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대화편 중간에 아뉘토스와 소크라테스는 일대일로 대화하는데, 마치 치킨게임처럼 한치도 물러섬이 없는 팽팽한 대결을 펼친다. 늘 그렇듯이 소크라테스의 완승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뉘토스에게 자신들의 미덕을 남들에게 가르친 훌륭한 교사가 모두가 아는 인물 중에 있느냐고 근거를 댈 것을 요청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가진 미덕을 자기 자식들에게 전수한 사람이 있느냐고.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미덕을 왜 숱한 재산과 여러 자질들은 자식에게 전수하거나 증여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가? 메논과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주를 이루지만 중간에 아뉘토스가 대화에 참여하여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는 부분, 『파이드로스/메논』의 188면에서 200면에 이르는 21면가량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쫌' 있다.

아뉘토스가 내세우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테미스토클레스다. 영화<300>의 속편. <제국의 부활>에서 '대중적으로' 부활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왜 자신의 삶은 화려했음에도(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뭔가 있었다) 자식에게는 그 '무엇'을 대물림하지(가르치지) 못하였을까를 제시한다. 이렇게.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우리는 테미스토클레스가 다른 분야는 아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하면서 자신이 지혜로웠던 분야에서는 아들을 결코 이웃보다 더 나은 인물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미덕이 배울 있는 것이라면 말일세." _『메논』93e

아리스테이데스, 투퀴디데스의 사례를 소크라테스는 또 다른 논거로 제시하고, 아뉘토스는 논박당한다. 결론은 '미덕은 배울 수 없는 것' 그러므로 가르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우리 영화 <사도>를 떠올려본다.

 

"<사도>는 영조와 세자가 어떻게 해서 비극이 펼쳐졌는지를 관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인문학적인 메시지와 감동을 주려고 한다. 이준익 감독이 '사도세자'를 영화의 소재로 선택한 이유인 것."

_<사도>, 폭넓은 감동으로 관객들을 이끌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슬픔', 2015. 09. 22. <헤럴드경제> 소준환 기자

 

기자는 '왜'가 아니고 '어떻게'에 방점을 찍어야 하며, 그것이 인문의 기본 정신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어떻게'가 <뒤주에 가둬서 물 한 모금 주지 않은 채 굶어 죽게 했다>는 처형 방식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어떻게' 안에 '왜'가 포함되어 있다. 마치 그동안 장희빈 못지 않은 사극 소재로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 이야기가 충분히 다뤄져 왔고, 이미 관객들은 '왜'에 대하여 나름의 대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첫째 날 영조의 대사,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나는 지금 가장으로서 애비를 죽이려고 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야”  넷째 날의 다음 “이 일은 궁궐 담장을 넘을 수 없는 내 집안의 문제다”라는 대사도 '왜'와 '어떻게'의 경계지음 못지 않게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 사건을 한 집안의 일일 뿐이라고 한정할 수 있다면, 왕조 조선의 신하들은, 백성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라는 말인가.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을 자식이기에 시작된 비극이 아니었던가. 권력을 남용하여 자식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상속세를 최소한으로 내려고 갖은 편법을 자행하는 재벌가의 편법상속을 우리는 비판할 수 있을까? 역사는 가정할 수 없다는 말처럼, 무의미한 또한 무자비한 '주문'으로 들린다.

부모가 자식에게 부와 권력을 물려주려는 것은 본능이다. '세습을 통해 완성되는 인간 고유의 욕망'에 의해 부모와 자식은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가지는 것. 인간의 본능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 그리고 물려줄 수 있는 것과 물려줄 수 없는 것을 분간하지 못한 데서 영조와 사도의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알게 되면 인간은 곧 누군가를 가르치게 되어 있다.  특히 아이보다 먼저 세상을 살았던 어른들, 그렇지만 모든 어른들이 후세대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또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플라톤의 『메논』의 사례에서 거론하였듯이, 특히 부모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저 집안 일일 뿐이라면, 아버지 영조는 아들 사도를 그렇게 사랑하고 기대하기에 실망하고 증오하는 일이 벌어졌을리가 없다. 세 개의 명언을 골라보았다.

 

(1)어른은 누구나 가르칠 아이가 필요하다. 그래야 어른도 배우게 된다.(F. C.)

(2)꾸지람 뒤의 격려는 소나기 뒤에 나오는 태양 같은 것.(요한 볼프강 폰 괴테)

(3)조숙한 아이보다 더 지겨운 존재는 그 아이의 어머니.(J. W. M.)

명언들 각각의 함의는 해설하지는 않으련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왜'를 품은) '어떻게' 영조가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잘 알 것이므로. 다만, 위 (3)과 관련하여 '애어른'을 등장시키는 TV쇼프로그램(드라마는 말할 것도 없고)들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도한 기대는 골깊은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애어른 캐릭터를 소비한다는 것인데, 좀 웃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대화편 얘기로 돌아와, 앞서의 논변에서 밀린 아뉘토스가 남긴 말이 예사롭지 않다.

 

"아뉘토스: ...선생님께서는 남을 헐뜯는 것을 쉬운 일로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하지는 나는 선생님에게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싶어요. ...이 나라에서는 확실히 남을 이롭게 하기보다는 해롭게 하기가 쉬워요. .."

결국, 아뉘토스는 앞서 대화 참여자들 설명에서 언급하였듯이 3년후,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3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된다.[『소크라테스의 변론』참고]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유죄판결을 받게 될 것인데,

 

"내가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밀레토스 때문에 아니고 아뉘토스 때문도 아니며,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 시샘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게 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나와 함께 끝날 염려는 없습니다. "

=『소크라테스의 변론』28a~b

라고 소크라테스는 변론하지만, 그 구체적인 사례로서 .『메논』에서의 대화는 당시 아테나이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할 때 '불온한' 의견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재판정에 나와서도 소크라테스는 몇몇 고소인들만이 아니라 (배심원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플라톤은 스승의 행적과 사상을 보전하기 위해 대화편들을 쓴다. 일종의 가늘고 긴 '명예회복' 과정이며 일종의 '복수'다.  한 자연인이 인간들의 결정에 의해 사형판결을 받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잘 스케치하고 있다면, 『메논』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에 해당하는 그 밑그림에 색을 입힌 채색화로 비유할 수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나 페리클레스 등 아테나이 시민들의 자부심을 소크라테스는 가차없이 무너뜨린 것이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결국 죽음으로 내몬 것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숱한 신하들이 곁에 있었지만, 누가 감히 나서서 이를테면 '미덕'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울 수도 없지요. 더구나 자식을 아비가 가르치는 일은 불가합니다, 라는 충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지만, 영조는 너무 오래 살았기에(왕위에 머물렀기에) 비극의 한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닐겠는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뜻이고 그래서 부모에게 부모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부모에게 자신의 부모 역할을 계속 해달라고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세계가 계속 상징적 부모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성숙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차이(어떤 것의 대체물과 그것을 상징해아 하는 것의 차이)에 통달하고, 아무리 아쉬워도 성인에게 어울리는 대체물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로버트 노직,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2장 '부모와 자식'에서)

좀 어렵다. 역사는 가정할 수 없지만, 영화 <사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로 이어지는 비극이 수습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은, 대리청정 즈음이 아니었을까? 사도세자 스스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왕의 길을 실습할 수는 없었을까? 왜 그 거리 유지에 영조는 실패한 것일까? 정직원으로 채용하기 위한 인턴 과정이 아니었던 것일까? 영조의 출신 컴플렉스, 왕권 강화를 위해 탕평책을 쓰면서 신권과의 갈등과 타협의 살얼음판을 걸어온 사람, 늘 신중하고 또 신중하였던 영조로서는 자식이 자신과 같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갈 것에 대해 우려하고 또 우려했을 것이다. 천상 아비다. 어느때보다도 한 자녀 가정이 많은 우리나라, 정책적으로 인구억제책을 쓴 중국에서 자식을 향한 부모 역할의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자식보다 한 살만 더 살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완성되는 것일까?   

 

"궂은 날씨는 창 안에서 볼 때 더 우울해 보인다." 설마 이런 심각한 영화였어! 영화 <사도>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영화 한 편을 더 보자고 상의하는 장면을 곳곳에서 목격했다. "아버님, 한 편 더 봐도 괜찮으시겠어요"(자식이 아버지를 걱정하는 소리다) 아마도 <사도>에 앞서 개봉한 <베테랑Veteran>이 천몇백만의 흥행성적을 거둔 데에는 '결정적'은 아니라도 <사도>의 우울모드가 '상당한' 역할을 했으리라. <베테랑>은 과연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였을까?

 

     "

  생각한다
  눈 오는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남과 북 사이에
  은서네 피아노학원과 종점세탁소 사이에
  홍매화와 목련꽃 사이에
  너와 나 사이에

 

  또 무슨
  병은 없는지

     "

=곽재구의 시 <사랑이 없는 날> 일부(『와온바다』에 수록). 인용한 시를 참고하여,  제목을 <사이에 슬픔은 없는지>로 미리 정하고 쓰기 시작한 페이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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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방 2개월이 된 드라마 얘기를 꺼내는 것은, 우연히 보게 된 한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 같아서이다. 드라마 초반의 한 장면 덕분에 나는 이 드라마 전편을 어떤 식으로건 보았다. SBS수목드라마 <가면>(2015.05.27.~2015.07.30) 얘기다. 확인해보니 드라마 2회의 초반부(19분쯤),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시달리는 서은하(수애 분)의 가족들이 사채업자들의 방문으로 곤혹스러워 하는 장면이다. 업자 심사장(김병옥 분)이 하는 말이다.

 

"심사장: 소크라테스 성님께서 약 먹고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뭔지 아십니까? 어이 친구 내가 닭 한 마리 빚진 게 있는데, 대신 갚아줄 수 있겠나. 아 감동 아닙니까. 감동! 죽어가면서도 빚을 갚겠다는 이~ 아름다운 마인드. (부하 둘까지 셋이 박수) (이)얘기 듣고 느끼는 것 없습니까?"

 

이미 주연을 꿰찬 빛나는 조연급 배우들이 더러 있지만,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빛나는 조연으로 주로 거친 역할을 맡아온 배우 김병옥. 그가 누구인지, 얼굴을 연결해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위의 대사가 예사롭지 않게 들려오지 않을까 싶다.

이 에피소드는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즉각 처형이 진행되었지만, 축제가 진행중일 때는 처형을 연기한다는 관례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한 달 가까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이날은 마침내 처형이 진행되는 날, 여러 대화편에서 보았듯이 친구와 제자들, 말하자면 측근 중의 측근들이 감옥을 찾아와 그들과 더불어,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해 마지막 토론을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숨이 끊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친구 크리톤에게 부탁하는 말을 하는데, 바로 그 상황을 드라마는 인용한 것이다. 이 대목을 원전번역으로 읽어보자.

 

냉기가 어느새 허리 있는 데까지 올라오자 그분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을 벗기고-그분께서는 얼굴이 가려져 있으니까요-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사실상 그분의 마지막 말씀이었소.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잊지 말고 그분께 빚진 것을 꼭 갚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네"하고 크리톤이 말했소. "그 밖에 달리 할 말이 있는지 살펴보게."(「파이돈」118a)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의신이다. 어쨌거나 성인으로 추앙받는 SO선생께서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몸을 돌봐준 의사에게 보답하는 마음의 빚을 거론한 것이다. 성인이 최후에 남긴 말치고는 아이러니랄까, 위트가 있다. 처형을 대기하는 동안, 감옥을 찾은 크리톤은 친구 소크라테스에게 국외로 탈출(당시에는 망명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을 권하지만, 그 유명한 "악법도 법이다"라는 요지의 논변을 펼친다.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크리톤」이 그 대화편이다. 이어지는 마지막 날의 대화 「파이돈」은 위에서 보았듯이 극적인 장면으로 마감되지만 필멸의 인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크리톤」과 비교할 때) 상당히 무겁다. 그리고 심오하다. 몸은 필멸이지만 혼은 불멸이라는 혼불멸론,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想起)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특정 사물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관여하기 때문이라는 이데아론이 그것이다.

 

도서출판 숲에서 번역가 천병희의 원전번역들을 꾸준히 펴내고 있는데, 천 선생이 플라톤의 대화편 번역에 몰입하게 만든 첫번째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에 「파이돈」이 수록되어 있다. 소송에 계류되어 재판에 앞서 법정에 출두하는 날 진행된 대화를 담은  「에우튀프론」(경건에 대하여)이 있지만,  한 권으로 묶인 4편의 대화편 가운데 「향연」을 제외한 세 편은 대철학자의 생애 마지막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았고, 사는 동안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 사랑(우정과 우애 혹은 친애를 포괄하는 개념)에 대해 논하는 「향연」도, 왜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죽음을 맞이하는지, 소크라테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대화편이다.

앞서 악역 조연으로서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배우 김병옥(만54세)에 대해 언급한 바 있거니와 채무자의 입장에서는 또한 시청자 중에서도 그런 채무와 관련된 쓰린 기억을 갖고 있거나 현재진행형일 경우를 감안하면, 결코 예사롭지 않는 장면에서 필이 꽂힌 것은 다분히 「파이돈」이란 텍스트를 읽은 사람으로서 역시 해당 텍스르를 읽고 작품에 반영한 독자(드라마 작가와 여러 시청자들)를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 혹은 동질감이 아니겠는가,

 

"같은 책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맺은 우정처럼 빠르게 뭉치는 우정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것." 

미국 작가 어빙 스턴(1903~1989)이 남긴 말이다. 고전을 읽는 독서모임을 통해 쌓은 친교가 얼마나 강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지를 예단해볼 수 있는 말이 아닌가 한다. 어빙 스턴은 전기문학의 신경지를 개척한 작가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교수하기도 했으나, 고흐에 심취하여 그의 생애를 소설화하여 20세기 전기문학의 획을 그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소설처럼 윤색해 실감을 준 전기 『삶에 대한 열망 Lust for Life』(1934)이 그 작품이다.

결국 사채를 쓸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기구한 사연들이 많다. 그 슬픔과 분노가 너무 크고 깊다. 치솟은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 사회 생활을 채 시작해보기도 전에 빚쟁이가 되어버리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인 나라, 청년실업의 근본 문제는 해결할 의지가 없고, 그것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무슨 기금을 만든다고 힘을 행사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 채무를 탕감해서 신불(신용불량자)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국민행복기금 어쩌고 하는데, 그것을 빌미로 보이스피싱이란 독버섯이 무섭게 자라고 있는 나라, 그 상태를 감안하면 기가 막힌 상황에서 드라마의 한 대목을 보고 쓴웃음을 짓는다.(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67편(2부) 2015년 추노(推奴) 이야기(1시간 15분. http://www.podbbang.com/ch/7657) 참고.

 

드라마 <가면> 극본을 쓴 방송작가 최호철은 사채업자 심사장의 캐릭터를 다음과 같이 설정해놓았다.

 

심사장(남, 40대)  사채업자:

어릴 적 어머니가 지인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갔다가 결국 받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치여 죽었고, 그 뒤로 고아로 힘들게 자랐다는 비극적인 사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연을 채무자의 배를 갈라서라도 돈을 받아내야 하는 대의명분으로 삼는다. 굉장한 다혈질 성격으로 자기 분에 못이겨 폭발할 때도 있지만 평상시엔 꽤 젠틀하고 진지하다. 

가방끈이 짧은 콤플렉스를 명언집을 읽으며 극복했다. 

때론 사람들에게 꽤 그럴싸한 명대사를 날리기도 한다. 그게 다 돈과 연관 돼서 문제지만.

 

어쨌거나 그렇고 그런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슬쩍 보다가 만난 한 대목에서, 시작된 글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가방끈이 짧은 콤플렉스를 명언집을 읽으며 극복했다."고 하였으나, 사채를 빌미로 괴롭히는 쪽이나 사채에 시달리는 쪽이나 고명하신 소크라테스 선생의 최후를 다룬 「파이돈」의 전체 텍스트를 읽는다면, 좀더 현명한 선택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 한 자락을 깔아본다. 실제로 명언집(문장백과사전)에 닭 한 마리 어쩌고 하는 부분은 많이 뒤틀린 채로 소개되어 있다.  「파이돈」전체를 읽지 않고서는 칠 수 없는 대사다.


흔치 않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진리 가운데 하나는 생명체는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생명체로 불린다는 거다.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석가모니도 모두 인간으로 살았고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 책,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가 세 성인의 최후를 비롯하여 그들의 닮은점에서 배울 것을 잘 짚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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