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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보면 왜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를까요?'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광고, <사기열전>의 '미자하 이야기'를 상기한다. 그 다음인가, 효(孝) 시리즈의 다음 버전인가, "꼭꼭 씹으면 다 맛집" 이라는 카피가 와 닿는 잇몸 약 광고가 있다.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는 최불암 선생의 내레이션이다. 한 끼 식사만 그럴까? 모든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단행본 한 권으로 세상에 나올만한 요건을 갖춘 것이라면, 잘근잘근 씹듯 읽는다면 얻을 것이 있다. 너도 그래, 나도 그렇던데, 감칠맛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책은 고전이 된다. 읽기는 곧 쓰기, 독서와 창작 관련 구절들을 모아보았다. 

 

방송인 최불암, "꼭꼭 씹으면 다 맛집", 책 읽기도 그런 것 같아

"느리게 읽기가 빨리 읽기보다 더 어렵다는 건 느리게 읽기를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은 마치 오래 밥을 씹는 것과 같고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의 페달을 아주 천천히 밟는 것이 어려운 것과 같다. 음식은 식도를 타고 넘어가려 하고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러나 음식은 오래 씹어야 제 맛이 나듯, 자전거 페달을 느리게 밟다보면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이승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마음산책, 2019-02-25) 24면

앞서 거론한 광고 카피가 여기서 나오지 않았을까, 정곡을 찌르는 문장이다. 작가 이승우는 우리나라의 중견작가이면서 한 대학의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소설 쓰기와 관련하여 자신의 노하우를 후학들과 나누는 것. 그러나 이 책에서 작가는 소설 창작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소설을 읽어라, 그러면 소설 창작 방법이 보인다. 소설 창작의 교과서가 따로 없다. 그런데 작가는, '가급적 느리게 깊이 읽는 것이 창작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독서법의 하나인 정독과 같은 듯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소설을 천천히 읽을 때 문장들은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고 상상력을 추동한다는 것, 문장들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나는 1)대들거나 2)반문하거나 3)수용한다. "나의 대듦이나 반문이나 수용에 대한 소설 문장들의 대듦이나 수용이 이어지고,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거기에 하나의 유연하고 둥글고 탄력 있는 공간이 생겨난다." 바로 이 공간에서 소설이 태어난다는 것.

 

작가 이승우, '가급적 느리게 깊이 읽는 것이 창작에도 도움이 된다.'

"섬이 작으니 내도의 숲길은 다해 봐야 3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원시의 숲을 오래 즐기고 싶다면 보폭을 최대한 늦춰야 마땅하다. 급하게 걸으면 숲길은 금방 끝나고 만다. 섬 밖으로 추방당하지 않으려면 사람들도 달팽이나 거북이처럼 느리게 걸어야 한다. 느리게 걸을수록 우리는 숲이 주는 혜택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몸속의 나쁜 기운들이 더 많이 빠져 나가고 숲의 정령들이 불어넣어주는 맑은 기운은 더욱 충만하게 되리라."  -강제윤, 『당신에게, 섬』(꿈의지도, 2015년 7월) 296면

책 읽기도 그런 것 같다. 일단 재밌고, 감동이 있으면서, 술술 읽히는 그런 책은 아껴 읽게 된다. '강제윤 시인과 함께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섬 여행'이란 부제를 가진 책에서 시인은 경남 거제의 섬 내도의 비경을 소개한다. 인위적으로 만든 섬이 잘 알려진 외도라면 내도야 말로 대조되는 자연 그대로의 섬이라는 것. 내도의 편백나무 숲이 가진 탁월함을 소개하면서 숲길이 길지 않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하다. 그래서 몸의 건강을 이야기하지만 궁극에는 마음의 평화가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 동안 생각은 더욱 깊은 어딘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누구도 얻지 못하고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을 얻는 과정(같은 책 110면). 앞서 소개한 작가 이승우의 느리게 읽는 동안 '나만의' 소설을 쓰게 된다, "유연하고 둥글로 탄력 있는 공간"과의 만남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좋은 사진을 얻으려면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마저 걸림돌이 된다.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프레임을 정하고 하루 종일 한 순간을 위해 잠복하는 형사처럼 기다리는 사진의 대가들이 있다.

 

시인 강제윤,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오직 '한 생각'

"창조적 아이디어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죽을힘을 다해 몰입해야 나오는 것이 창조력이다. 열정과 고민의 산물이며, 뭔가를 개선하고 바꿔보려는 문제의식의 결과물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집중하고 몰입해야 한다. 절박해야 한다."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메디치미디어, 2014-02-25) 43면
그런데, 무엇에 집중하고 몰입해야 하는가, 관련해서 어떻게 쓰느냐와 무엇을 쓰느냐의 차이를 설명한다. 어떻게 하면 멋있게, 있어 보이게 쓸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이란다. 그러나 무엇을 쓰느냐에 대한 고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 앞서 소개한 인용들과 맥락이 닿아 있다.
"글의 중심은 내용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자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 대부분은 전자를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명문을 쓸까 하는 고민인 것이다. 이런 고민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담감만 키울 뿐이다. 글의 감동은 기교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시인도, 소설가도 아니지 않은가."(바로 위의 책)

 

연설문작가 강원국, 글은 열정과 고민의 산물, “죽을힘을 다해 몰입해야 나오는 것“

말이 글이고 글이 말이다. 그런데 말은 잘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로는 논리정연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말은 어눌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는데 '걸림'이 많은 사람도 있다. 말이란 잘 쓴 글을 읽는 것과는 다른 현장성과 임기응변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듣는 이를 즐겁게 하는 '애드리브'는 독서를 비롯 숱한 직간접적인 경험이 축적된 상태에서 터지는 것.   그럼에도 말이든 글이든 숙고 끝에 정곡을 찌르는 것이 아닐 때는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보다 낫다. 플루타르코스의 철학에세이 「수다에 관하여」가 수다쟁이는 어떤 사람이며, 폐해는 무엇이며, 처방까지 제시하지만 가장 심플한 지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확실한 것은, 말을 하지 않아 이득이 된 경우는 많아도, 말을 해서 이득이 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은 언제든 말할 수 있어도. 일단 말한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것은 엎질러진 물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건 인간이지만, 침묵하는 법은 신들이 가르치는 것 같다. 우리가 비의(秘儀)에 입문할 때 침묵하는 법부터 배우기에 하는 말이다." -플루타르코스, 「수다에 관하여」 8장, 344~345면, 『그리스로마 에세이』(천병희 역, 숲, 2011.12.)

 

플루타르코스,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건 인간, 침묵하는 법은 신들이 가르쳐“
글로 말하기보다는 말로 말하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유투브방송을 개설하고, '스피커'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뭔가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하는(방송을 하는), 콘텐츠의 부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필자만 그런지 모르겠으나 eBOOK의 '음성 듣기'도 거슬린다. 제3자가 개입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눈으로 읽으면서 생각하고, 자신의 견해와 일치(공감), 불일치(메모)를 확인하는 독서야 말로 말이든 글이든 창작으로 꽃피우는 진정한 독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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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었지만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를 주문하다가 생각한 검색어는 '304명'이었다. 내가 스크랩한 글들을 내가 검색어로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작년 여름 『곽재구의 신포구기행』이 출간되었다. 앞서 자료수집용 게시판에 농민신문사의 월간 <전원생활>에 연재된 기행수필을 모아놓은 것. 연재는 2016년 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36회 진행되었다. 내용이야 훤하지만 책으로 해당 페이지를 찾기가 쉽지 않아, 게시판에서 가서 검색한다. eBOOK을 구매했다면 간단한 문제인 것을. 검색어는 '304명'. 글 네 개가 뜬다. 시간 순으로 살핀다.

 

신포구기행 텍스트를 '304명'으로 검색하다
첫 번째가 진도 팽목항을 찾았을 때다. "시인 나해철은 304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시집 한 권을 냈다. 시 304편으로 이뤄진 시집.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의 이야기 한 편을 옮긴다." 그리고 시집 속 단원고 2학년 2반 양온유(17) 양을 기리는 시를 소개한다.(<전원생활> 2017년 3월호, 책은 2부 네 번째)
두 번째는 '목 놓아 부르는 목포' 편이다. '2017년 4월 9일. 목포에 왔습니다.'로 시작되는 후반부에서, 목포 신항. 세월호 거치소를 찾아간다. '304명'은 사고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거론되지만, 한 유가족 어머니의 인터뷰 장면이 와 닿는다.
"정말 비참한 것은 아이 잃은 우리를 매일 누군가가 감시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들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지요. 아이를 잃은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었지요.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 권력이 국민에게 이래도 되는지 가슴이 찢어졌지요. 그때부터 마음을 다 닫았어요." (2017년 5월호, 책은 2권 다섯 번째)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 권력이 국민에게 이래도 되는지"
세 번째는 태안 격렬비열도를 찾았을 때인데, 이번 여행에는 동행이 여럿이다. "신진도 여객선터미널(안흥 외항)로 향했다. 터미널에서 N과 C, Y, <전원생활>의 기자를 만났다. N과 C는 시를 쓰고, Y는 싱어송라이터(가수 겸 작곡가)다." 그들은 등대에 이르는데, 동행인 N시인이 시 한 편을 낭송한다. "국토의 한 끝. 망망대해. 수평선이 펼쳐진 등대 그늘에서 N이 시 한 편을 읽었다. 그는 세월호에서 숨진 304명을 위로하기 위해 304편의 시를 써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이라는 시집을 냈다." N은 나해철 시인이다. 그날 밤 세월호가 이 섬 부근을 지날 때, 모두 살아있었고, 이튿날 아침의 참사를 상상할 수 없었다. (2017년 9월호, 책은 1부 세 번째)
네 번째는, 보성 장도를 찾았을 때다. 이번 여행에서 '중공군 모자'로 거론되는 이가 나해철 시인인데, 여기서는 의사 나해철이다. 고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던 두 시인이 장도에 지난해(2017년)에 새로 생긴 13km의 산책로를 걷는다. 이번에 친구를 소개하는 내용은 좀 남다르다. "중공군 모자는 지난해 아름답고 슬픈 시집 한 권을 냈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위로한 시집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이 그것이다. 304일 동안 매일 한 편의 시를 쓰며 많이 울었고 많이 아팠고 더 많이 그리웠다고 한다. 지난 한 해 나의 큰 자랑은 내 친구가 낸 이 시집이다."(2018년 2월호, 책은 3부 여섯 번째)

 

지난 한 해 나의 큰 자랑은 내 친구가 낸 이 시집
인세의 대부분을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활동비로 기부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세월호 5주기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그렇게 4월이 갔다. 4월 12일, 목포 신항, 거치된 녹슨 세월호 앞에서 진행된 음악회(전남 20개 시군 드림오케스트라 추모음악회)에 다녀오는 것이 올해 나의 추모 행동이었다. 전남 20개 시군 학생들로 구성된 꿈키움 드림오케스트라 단원 1천여 명이 무대에 섰다. 관객들보다 출연자가 더 많은(?) 해서 특별한 공연이었달까? 굳이 하나를 더 거론한다면 영화 <생일>을 본 것. 음악회에 다녀와서 마음이 편치 않던 참에,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영화를 보았다. 불편함이 있었는데 그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는 피로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산적한데, 이렇게 다큐도 아니고 정극(형식)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 비현실적이었다고 할까? 영화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였다. 화장실에서 좀 전에 마주친 중년의 사내가 탑승한다. 좀 전의 그는 세수하고 1회용 타올로 얼굴과 손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영화 어땠어요, 힘들었어요, 였던가 정확한 대답(멘트)을  기억은 못하는데 내가 가지는 감정과 유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생일>이 끝나고, 영화 어땠어요, "힘들었어요!"
절반쯤 읽다가 멈춘 나해철의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 후반부를 읽기 시작한다. 페이스북을 통해 대부분을 읽었기에 익숙하지만 아직 다 읽지를 못하였다. 지난 주 토요일 광화문에서는 집회를 한 모양이다. 유투브에 집회 실황을 다룬 동영상을 보았다.‘다시 촛불, 자한당해산 촛불집회’다.
https://youtu.be/UrfOsjvzHOw
유가족인 어머니 한 분이 무대에 오른다. 호성이 엄마다. 분노와 절규다. 세월호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제1야당의 막말, 광화문 광장에 천막당사를 설치하겠다는 막무가내, 오죽 하면 ‘다시 촛불’이겠나! 동영상 24분에서 34분까지 10분 동안의 발언은 가슴을 후빈다. "이것이 나라냐!" "국가는 없다" 2014년 4월 이구동성으로 던진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나라가 뭔가. 대한민국 이 나라는 대체 뭐하는 곳인가, 이 부모가 가만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면 알수록(똑바로 들어~) 이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아니었어요. 1%의 저들의 나라." (위 호성 엄마의 연설 중)

 

해철은 304편의 추모시편들의 맨 앞에 '서문'을 앞세웠는데, 일종의 서시다.
"우리 국가를 믿고 있다가,/ 우리 사회를 믿고 있다가,/ 우리를 믿고 있다가,// 가만 있으라는/ 지도자의 말을 따르다가,// 산 채로 수장되신 분들에게,/ 세상에 남겨진 그분들의 가족들에게,// 국가는 없었다./ 우리 사회는 산산이 깨져 있었고, /우리는 없었다.// 그분들과 함께 하고자,/ 그분들이 되어 보고자,/ 울고, 외치고, 몸부림한 일 년 동안의 기록을 그분들께 바친다. // 영원한 죄와 / 영원한 슬픔을 / 벗어날 수 없을 것이나/ 더 나은 우리 민족공동체를 꿈꾼다.” (서문 전문)

 

"알면 알수록 이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2017년 1월, 『천만 촛불바다-촛불혁명기념시집』(실천문학사, 2017-01-25)이란 시집이 나온 모양이다. 신경림, 강은교, 박노해 등 '블랙리스트' 시인 61명 참여했다. '2016년 겨울 천만 촛불집회에 대한 시인들의 서정적 응답'이라는데, 거기 수록된 박노해의 시가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게 나라다」전문이다.
"눈발을 뚫고 왔다/ 추위에 떨며 왔다/ 촛불의 함성은 멈추지 않는다/ 100만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어둠의 세력은 포위됐다/ 불의와 거짓은 포위됐다/ 국민의 명령이다/ 범죄자를 구속하라// 눈보라도 겨울바람도/ 우리들 분노와 슬픔으로 타오르는/ 마음속의 촛불은 끄지 못한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멈춰서지 않는다// 나라를 구출하자/ 정의를 지켜내자/ 공정을 쟁취하자/ 희망을 살려내자//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나는/ 백만 촛불 중의 하나가 아니라/ 백만 촛불의 함성과 한몸이 된/ 크나큰 빛이 되어 나 여기 살아있다// 이게 나라다/ 이게 민주다/ 이게 역사다/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 
 

박노해의 「이게 나라다」, '다시 촛불' 국면에 새로워    
최근에 완간된 번역가 천병희의 플라톤전집 전7권 중 4권이 『국가』다. 첫 번역판은 2013년 2월에 나왔다. 한 고전모임에서 간사 역할을 할 때 얘기다. 교사들 모임과 엄마들(학부모) 모임의 토론회가 주1회씩 진행되었는데,  2014년 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1년에 걸쳐서 읽고 토론했다. 필자는 각각 다른 날 진행된 두 모임에 다 참석했는데, 바로 그 시기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텍스트는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데, 특히 뒷풀이(3교시)에서 벌인 열띤 그리고 격앙된 토론을 기록해놓았으면(녹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2015년에는 플라톤의 주요 대화편 중 중요 대목들을 필사하는 고전 필사다이러리북이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플라톤의 대화』다. 이 책에는 「향연」,「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파이드로스」 그리고  「국가」에 수록된 천병희의 번역 중 중요 대목들을 필사하게 해놓았다. 이 책에 수록된 「국가」는 509d~521c로, 『국가』의 제6권 후반부에서 제7권 전반부에 해당한다. 구매만 해놓고 '활용'하지는 않았는데, 며칠 전에야 「국가」부분부터 필사하기 시작했다.

 

2014년 1년동안 『국가』토론하는 동안 참사 일어나
철학자가 통치자이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플라톤이 주창한 『국가』의 핵심이다. 플라톤전집 7권에 수록된 <서한집>을 보면, 플라톤이 시칠리아 시라쿠사이 시를 두 차례 더 방문하여 이론을 실천하려 했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플라톤이 쓴 것으로 인정되는 일곱 번째 편지에 주목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 주장은 철학에서 최고 경지에 이른 이가 곧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교육받은 적이 없어서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교양 쌓는 일에만 일생을 바치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자들 역시 국가를 능히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그럴 것 같은'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아닐까? 전자들의 경우는 공과 사를 불문하고 모든 행동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생활의 유일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고, 후자들의 경우는 자신들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축복 받은 자들의 섬들'에 가서 살고 있다고 믿으므로 자진해서 일을 떠맡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네.” (『국가』519d)

 

「국가」의 이론을 실현하려 했던 플라톤의 실험
그만큼 교육을 통해(곧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지도자(오피니언) 그룹이 기반이 되고 제 역할을 할 때 철인 통치는 가능하다. 그러나 일정한 반열에 오른 철학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통치권을 맡지 않으려고 애를 쓴단다. 인생 도처에 상수(上手)가 있다지만 그들이 적재적소에서 제 역할을 맡기란 쉽지 않다, 그런 얘기로 들린다. 그러므로 아래 인용한 것과 같은 기이한 일이 발생하는데, 이를 오늘날 우리나라에 적용해서 살펴보면 와 닿는 것이 많다. "이게 나라냐?"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국가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호성이 엄마의 절규가 귓전에서 쩌렁쩌렁 울린다.

"그리하여 우리 것이자 여러분의 것이기도 한 이 국가는, 오늘날 그림자를 둘러싸고 서로 싸우는가 하면 정권이 무슨 대단한 선이라고 되는 듯이 정권을 둘러싸고 당파싸움을 일삼는 자들이 다스리는 많은 국가들처럼 꿈속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제정신으로 통치하는 국가가 될 것이오. 그러나 사실은 다음과 같소, 통치할 사람들이 통치하는 일에 가장 열의가 적은 나라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조용하게 통치되지만, 그와 반대되는 치자들을 둔 나라는 그와 반대로 통치될 것이오,” (『국가』520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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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필자가 '소크라테스의 최후' 며칠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부분 크세노폰의 회상을 큰 고민없이 영화의 첫 부분에 자막이나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사용할 것이다.
 

빵 터졌다. 인질이 생존본능이 작동하여 인질범을 옹호하고 그의 심기를 '케어'하게 된다. 이것은 단지 인질극만이 아니라 일상의 여남(女男) 관계에서 작동되고 있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책을 읽다가 말 그대로 '빵 터졌다!'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인질극에서 유래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사례는 거의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그런 근거를 오래된 고전에서 찾고 있다. 어쨌든 『여자는 인질이다』 1장('네 원수를 사랑하라')에서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이는 인질극의 몇몇 사례를 소개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인질 생존을 위한 행동 원칙'을 다룬다.

 

심각한 주제를 다룬 책을 읽다가 말 그대로 '빵 터졌다!'
인질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협상팀에게 인질이 진실을 말하거나 도움이 되리라고 예단할 수 없다. 검찰까지도 (이후 재판정에서) 인질이 자신을 가해한 인질범이 합당한 처벌을 받는데 (검찰을) 협력할 것이라고 섣불리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사정에 이러함에도 인질극이 진행되는 동안 (경찰의) 협상팀은 인질범·인질 간의 유대감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둘 사이의 유대감이 인질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앞의 책 74~75면). 실제로 스톡홀름 증후군을 연구한 전문가들은 인질의 생존 확률을 높이려면 인질범을 대할 때 지켜야 할 여러 행동 원칙 및 방침을 제시한 바 있다. 유사시의 재난을 대비해 매월 15일이면 민방위훈련을 하듯, '스톡홀름 증후군'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혹시라도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누가 알겠는가), (호신술처럼) 자신만이 아니라 함께 연루된 인질들을 구할 확률을 높아진다는 얘기다. 터너가 권하는 행동 원칙 중 첫째는 이렇다.
“희망을 유지하고, 인질범이 희망을 유지하도록 최대한 도와라. 희망이 없는 인질범은 다 포기하고 모든 인질을 살해한 후 자살할지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에 끝내 남은 것 하나가 희망이었다는데 가혹하다. 한마디로 가해자든 피해자든 죽음을 눈앞에 맞이했다는 점에서 형성되는 동지적 연대감을 활용하시라는 말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인질은 그 상황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 인질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치고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인 본능이 작동하는 것. (자세한 수칙은 책에서 확인하시고) 이런 상황을 다룬 영화에서 익히 보았을 법한 행동수칙이 제시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재난대비용 자기계발서의 일종이 된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 하나가 희망이었듯, 가혹하다

어쨌든, 이어서 인질 경험이 있는 메클루어는 납치·감금 상황에 놓인 인질에게 생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을 권한다.
"감금이 장기화될 시 인질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인질범의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인질범의 호감을 사는 일이다… 인질이 특정 계급이나 체계의 상징이 아니라, 개인이자 한 개인으로 보이도록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인질범과 대화할 기회가 있다면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체 금하고, 인질범에게서 가족과 문화적·개인적 관심사, 목표, 동기 등을 끌어내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후략)"
이 심각한 조언을 읽는 동안 '빵 터진' 대목은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체 금하고"다(안주일절이 아니고 안주일체 여기서는 '일절'인 듯한데). 앞서 인용에 이어지는 터너가 제시하는 행동원칙3은 '다른 인질과 섞여들어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해라.’이다. 어쨌든 메클루어의 조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소크라테스가 대체 어쨌기에, 플라톤의 대화편 중 주요한 것들 몇 편은 반드시 교양 차원이 아니라 생존 차원에서 읽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시도는 일절 금하고
필독해야 할 플라톤의 대화편 1번은 당연히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자신에게 유죄로 투표하고(1차), 형량과 관련하여 '사형'에 투표할 아테나이 시민들(배심원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변론하면서(가급적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변론은 변호사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고용대란도 해결되지 않겠는가), 배심원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앎의 출발점이라는데(무지의 지), 이 말은 배심원들 입장에서 보자면, 너는 네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비참한) 존재라는 것. 플라톤은 이날 스승 소크라테스가 행한 변론을 그럴듯하게 재구성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제자인 크세노폰은 상당히 다르다. 당시 재판정 상황을 전해 듣고 단도직입으로 진단하는데「소크라테스 회상록」 얘기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논거를 제시했기에 소크라테스가 나라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아테나이인들을 설득했는지 나는 가끔 이상하게 생각하곤 했다."
「소크라테스 회상록」의 첫 문장이다. 만약 필자가 감독이 되어 ‘소크라테스의 최후의 며칠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대목의 크세노폰을 특별히 고민하지 않고 영화의 첫 부분에 자막이나 내레이션(narration)으로 사용할 것이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변론은? 변호사에게
『소크라테스 회상록』에 수록된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살핀다. 역시 첫대목이다.
"소크라테스가 법정 출두 명령을 받았을 때 자신의 변론과 삶의 종말에 관해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도 내 생각에는 회고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앞서 인용에 대응하는 새 글의 첫 문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글을 썼는데, 그들은 모두 그(소크라테스)의 잘난 체하는 말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천병희의 주석은 그 대표적인 필자와 저작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35c~38b를 제시한다). 크세노폰에 얘기를 이어 살피자.
"하지만 그들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이미 자신에게는 삶보다 죽음을 더 바람직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밝히지 않으면 그의 잘난 체하는 말투는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헤르모게네스가 누설했다는 비밀을 소개한다, 그(소크라테스)는 다른 모든 것에 관해 논의하면서도(재판에 앞서 굵직한 대화편의 대화를 바쁘게도 수행한다. 「테아이테토스」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재판에 관해서는 일정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는 것,

 

「변론」35c~38b, 플라톤도 잘난 체 하는 말투 담아
"소크라테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변론해야 할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요?"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다. "자네는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소크라테스 회상록」을 마무리하면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진단한다. 역시 헤르모게네스로부터 당시 상황을 듣고 내리는 진단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사형)을 자초했다는 것. 일종의 자살,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죄책감을 남기는 죽음이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화 곳곳에서 상대방을 조롱하는 대목들이 등장하지만, '변론'에서는 대놓고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거침없이 얘기한다. 그들에게 해야 할 얘기를 해야 할 순간에 하는 것이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표결 결과가 나오는 것을, 어쩌면 그러기를 바라고 그리 했다는 식으로 진단하는 것. 이유는 이렇다. 1)소크라테스는 곧 죽을 나이였다. 2)누구나 사고력이 쇠퇴하여 살아가기 힘겨운 인생의 시기를 피하고자 했다. 해서 정직하고 솔직하고 고결하게 자기 변론을 (속 시원히) 하고 사형선고를 더없이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자초했다
플라톤이 정리한「소크라테스의 변론」이나 크세노폰의 회상 속에서만 '소크라테스식으로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태도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산파술'에 걸려들어 비참함을 맛보는 대담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의 표적이 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논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플라톤-소크라테스는 그렇게 기획되었다. 재판정에서 스스로의 변론 이전에, 소크라테스는 (적어도 플라톤의 대화편에 따르자면) 아테나이 시민들 다수, 충분할 정도로 많은 잠재적인 적들을 양산해온 셈이다. 자업자득이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은 철학이고 정치는 정치인 인 것을……. 거침없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모는 ‘변론’ 중 해당 부분(앞서 언급한) 일부와 이 대화편의 유명한 끝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끝까지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시민들을 불편하게 한다. 마지막 선물이다.
"또한 내가 미덕과 그밖에 대화를 통해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캐묻곤 하던, 여러분이 들었던 그런 주제들에 관해 날마다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선이며, 캐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38a)
"하지만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같은 대화편 42a, 마지막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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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하순 들어 두 권의 주목할 만한 철학 신간이 생산, 등록되었다. 플라톤의 『법률』(2016년 12월) 이후 모처럼 선보이는 천병희의 플라톤 대화편이다.『법률』은 천병희가 번역한 22번째 플라톤 대화편이었다. 예외 없이 이번에도 도서출판 숲에서 펴냈는데, 이번에는 '플라톤전집2'(2019-04-20), '플라톤전집7'(2019-04-24)이란 시리즈번호를 달고 있다. 왜 그럴까?

 

이번엔 '플라톤전집2', '플라톤전집7'이란 시리즈번호를 달고 있어!

특히, 모두 8편의 초·중기 대화편들을 수록하고 있는 플라톤전집2에는 <파이드로스/메논> (중기대화편), <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초기 대화편들)를 비롯하여, 이전에 소개되지 않은 세 편의 새로운 대화편(번역)을 수록하고 있다. 초기 대화편에 속하는 「에우튀프론」과 중기대화편에 속하는「에우튀데모스」와 「메넥세노스」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에우튀프론」은 작년 1월에 정암학당 플라톤전집20(강성훈 옮김)으로 출간된 바 있으며, 2008년 1월 정암학당에서는 「메넥세노스」와 「에우튀데모스」가 출간된 바 있다. 이보다 앞서 「에우튀프론」은 박종현의 주석서로「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과 함께 출간된 바 있다(서광사, 2003년 4월) 이들 네 작품을 소크라테스의 최후와 관련된 4부작으로 분류하는 데에 따른 것이다.
또한 박종현의 「메넥세노스」는 『고르기아스/메넥세노스/이온』(서광사, 2018년 12월)으로 세 편이 한 권으로 묶여 작년 12월 30일에 출간되었다. 이번 천병희의 플라톤전집2권에 세 대화편의 신규 번역이 추가됨으로써, 우리는 희랍어-우리말 원전번역을 세 종(種)씩 보유하게 되었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축하할 일이다.

 

'플라톤전집2' 천병희 신규번역 「에우튀프론」.「에우튀데모스」.「메넥세노스」 포함
이보다 더 흥미로운 일은 ‘플라톤전집7’인데, <알키비아데스1.2/힙피아스1.2/미노스/에피노미스/테아게스/클레이토폰/힙파르코스/연인들/서한집/용어 해설/위작들>을 수록하고 있다. 위작이란 플라톤이 실제 필자인지 논란이 되고 있는 플라톤의 저작들을 말한다. 옮긴이(천병희) 서문은 "이 플라톤 전집에서 위작까지 다 옮긴 것은 위작도 플라톤의 철학체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플라톤전집7'에 수록된 대화편들 가운데, 앞서 번역으로는, 정암학당 플라톤전집3으로 『알키비아데스1,2』(김주일,정준영, 2007년 4월)와 전집8인 『편지들』(김주일,강철웅,이정호, 2009년 3월)이 있다.
위작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상당수 작품이 드디어 독자들에게 제대로 소개되는 것이다. 학자들의 논문에서 인용되는 것을 통해 접하던 전체(작품)를 우리말 텍스트로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 것. 7권 수록작품 중 '위작들'에 묶인 길이가 들쑥날쑥한 대화편은 「정의에 관하여」, 「미덕에 관하여」, 「데모도코스」, 「시쉬포스」, 「에뤽시아스」, 「악시오코스」까지 모두 6편이다.
결국 천병희의 '플라톤전집7'은 모두를 대화편이라고 지칭하기는 좀 그렇지만 ‘알키비아데스’와 ‘힙피아스’를 각각 2권씩으로 보면 19개의 섹션으로 나뉘는 플라톤 저작들이 수록되어 있는 것. 대중 독자들도 직접 위작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플라톤의 저작들을 우리말로 읽으면서 논의에 '참전할 수 있게' 되었다. 꼭 필요한 주석만 간명하게 밝히는 천병희 번역의 스타일로 볼 때 플라톤전집 7권은 총 560쪽(양장본)으로 상당한 분량이다.


'위작도 플라톤 철학체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플라톤전집7 발행
그런데 오늘은 2019년 4월 25일이다. 알라딘(서점)에 신간이 등재된 날을 기준으로 하면 어제 천병희의 플라톤전집7이 등록됨으로써, 마침내 천병희의 플라톤전집이 전7권으로 완간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한 번역가가 플라톤 대화편 전편을 그것도 위작들까지 완간된 것. 천병희 선생이 번역한 작품들이 플라톤 말고도 헤아릴 수 없기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득 인터넷으로 천병희 선생의 인물정보를 검색했더니 생년월일이 1939년 3월 12일이다. 이 분 연세에 음력 생일을 세시겠지 싶어 확인하니 오늘 4월 25일이(음력 3월 12일로), 천병희 선생의 80회 생일이다. 80세를 '산수(傘壽)'라고 한다는데, 한자 산(傘)자에 팔(八)과 십(十)이 들어 있어서란다. 우선 축하드린다. 그리고 감사드린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80회 생일에 마쳐 플라톤전집을 완간하게 된 것. 필자는 이것이 출판사의 거장 번역가에 대한 예우라고 받아드린다(실제로 기념하는 생일이 오늘이라고).

 

2019년 4월 25일, 천병희 선생 80세 생일 맞아 플라톤전집(전7권) 완역 출간
플라톤(기원전 427년경~347년). 그는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에 사형당하는 것을 본 28세에 큰 충격을 받는다. 정계 진출의 꿈을 접고 철학을 통해 사회 병폐를 극복하기로 결심을 굳힌 그는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사회가 개선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기원전 387년경(34세) 영웅 아카데모스(Akademos)에게 바쳐진 원림(園林) 근처에 서양 대학교의 원조라고 할 아카데메이아(Akademeia) 학원을 개설한다. 그리고 시칠리아에 있는 쉬라쿠사이(Syrakousai) 시를 두 번 더 방문해 그곳 참주들을 만난 것 이외에는 다른 외부 활동을 하지 않고 연구와 강의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기원전 347년 아테나이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 80세다. 이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소크라테스가 대담을 주도하는 30편 이상의 철학적 대화편과 소크라테스의 변론 장면을 기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론』(Apologia Sokratous)을 출간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80세까지 50년이 넘는 기간을 플라톤이 집필한 대화편을 80세 천병희가 완역
인터뷰 기록에 따르면 천병희가 『국가』 번역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의 대사상'이란 시리즈를 출간하던 한 출판사가 급한 일정으로 번역을 의뢰했는데, 당시 1~5권은 박종현 교수가, 6~10권은 천병희 교수가 번역했다. 천병희 선생이 33세쯤이던 해다. 물론 이것이 플라톤 대화편의 첫 번역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당시 천병희 선생은 투옥과 자격정지 등으로 생계 걱정을 해야 했고, 번역은 그런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일 수 있었으니까.
1967년 7월 8일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이 있다. 이른바 동백림사건(The East Berlin Affair, 東伯林事件)이다. 천병희 선생은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해직되고 10년간 자격 정지를 겪어야했다. 당시 29세, 서울대사대전임강사(불문학석사) 시절의 얘기다. 이 사건은 2006년 1월 26일,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 접촉과 동조 행위를 국가보안법과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확대·과장한 사건으로 재해석했다. 천병희 선생은 당시 윤이상(무기징역에서 감형) 등과 함께 10년형을 받는다. 잠시 윤이상 선생 얘기를 하자면, 그는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다.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에 입국할 수 없었다. 1974년 도쿄에서 김대중 구출운동의 일환으로 윤이상 음악회를 열 때 유명한 말을 남긴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 철학과 정치 사이를 오가며 고민한 젊은 플라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28세에 스승의 죽음을 맞이한 플라톤, 유학 시절의 일로 지옥을 경험한 28세의 천병희, 서양 나이로 치면 천병희 선생도 당시 28세였다.

 

만 28세에 동백림사건으로 인생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천병희, 28세의 플라톤처럼
한 포털사이트의 인터뷰에서 번역가 천병희는 (자신의) ‘서재는 작업장’이라고 정의했다.
"나에게 서재는 그리스 신화에 비유하자면 '다이달로스'라는 기술자가 있는데 다이달로스의 작업장과 같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이름있는 영역본이나 독역본 등을 한 4~5가지 이상 참고해야 되고 또 주석도 봐야 됩니다. 그걸 전부 참고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우리말로 옮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장 하나하나를 번역하는 것을 일종의 작업에 비유한 것입니다."(2015. 05. 28. [네이버 지식백과 번역가 천병희의 서재)
지금도 꾸준히 서울 송파의 한 아파트, 집안의 서재에 머물며 하루에 일정량씩 번역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날마다 인근 야산을 산책하는 일도 거르지 않는다. 100세 시대인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다. 아직도 천병희 선생의 번역으로 읽고 싶은 고전들이 숱하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라 참 다행. 아직도 천병희를 통해 읽고 싶은 고전들이 숱하기에
다른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연구와 강의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던 플라톤이 기원전 347년 아테나이에서 세상을 떠난다. 80세다. 철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이후 50여 년을 자신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플라톤의 나이쯤에 천병희는 뜻하지 않은 공안사건에 휘말려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해직되고 10년간 자격정지를 견디면서 어느 때보다 희랍어-라틴어 원전번역에 집중하게 된 것. 28세의 플라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리고 천병희 선생은 이후 50여 년 학업과 번역에 정진하면서 마침내 한 번역가가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를(그것도 위작논란 중인 작품들까지) 7권으로 번역해 천병희표 플라톤전집을 완간하게 된 것이다.
2019년 4월 25일 오늘은(80세를 '산수(傘壽)'라고 한다는데 낯설고) 어쨌든 천병희 선생의 80세 생신이다.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그리고 건필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 플라톤전집4『국가』, 플라톤전집5 『플라톤의 다섯 대화편-테아이테토스/필레보스/티마이오스/크리티아스/파르메니데스국가』,  플라톤전집6 『법률』. 천병희의 플라톤전집(전7권) 완간은 선생에게도 독자들에게도 큰 선물,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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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초겨울 딸과 함께 서해안의 구시포(해수욕장)에 가는 길이었다. '해가 넘어가는' 풍경이 좋아 제철이 아닌 때에도 주말이면 찾는 발길들이 상당한 포구다. 그즈음에 16년 만에 나온 『곽재구의 포구기행』(해냄, 2018) 개정판을 살피고 있었다. 이 책(초판)에 구시포를 다룬 글이 있다(<천천히, 파도를 밟으며, 아주 천천히…… -전북 고창군 상하면 구시포>). 그렇다고 새삼스럽게 이 책 때문에 구시포를 찾았다기보다는, 가까이에 구시포가 있어 찾아가는 길에 마침 개정판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인근 지리에 좀 익숙하다는 티를 내려고, "너, 상하면의 한자가 어떻게 되는지 아니?" 딸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글쎄!'다. 마침 상하면 소재지를 막 벗어난 군내버스가 상하중학교 앞을 지나 구시포 방면으로 달리고 있었다. "위 상(上)에 아래 하(下), 해서 상하(上下)야, 우리말로 '위아래' 면(面)." 여기까지였으면 좋았는데, 한 발 더 나간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이 학교의 교가가 뭔지 알아? <위아래>야. 위아래, 위아래, 위위 아래~ 그 유명한 EXID(이엑스아이디)의 <위아래UP&DOWN>를 언급했으니, '아재' 소리를 들을 수밖에! 응원가라고 했으면 그나마 면(面이 섰을 텐데..

 

상하면(上下面) 상하중학교의 교가는 <위아래>?  

어쨌든 구시포가 있는 상하면은 행정구역 개편 전의 '상이면(上二面)'과 '하이면(下二面)'에서 앞 글자를 따 상하면(上下面)이 되었다. 상이면과 하이면에 이(二)라는 한자도 왜 그런지 궁금하기는 하다. 어쨌든 필자가 알기로는 충남 예산군 삽교읍, 충남 홍성군 홍북읍, 전남 영광군 홍농읍 등에 상하마을(上下里)이 있는데, 이들 한자도 상하(上下)다. 도시에는 상동이나 하동이 즐비하다.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라, 놓인 형상에 따라, 서울을 올라간다고 하듯이, 위와 아래로 구분하는(혹은 중간까지도), 상하는 지형상 자연스럽게 붙여지는 이름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상하면 소재지에서 6킬로미터쯤 733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면 구시포에 이른다. 개정판 ‘포구기행’ 해당 페이지를 확인한다. 포구기행의 작가가 이곳을 처음 찾은 계기도 이곳의 특이한 이름 때문인 듯하다. 주민들이 기억하는 구시포의 원이름은 '새나리불똥'이었단다. '새나리'는 갯가(바닷가)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불똥'은 '불뜸'에서 전이된 말인데, '뜸'은 우리말에서 자연부락을 의미한다. 작가는 구시포의 옛이름 새나리불똥을 '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 쯤으로 풀이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이 포구 이름이 ‘구시포(九市浦)’로 바뀐다.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이라는 뜻이니 바뀐 이름의 의미 또한 낮은 것은 아니다.'라고 작가는 덧붙인다. 구시포의 바다가 백합조개가 무럭무럭 자라는 개펄바다인데다 조기들로 유명한 그 칠산바다가 아닌가?

 

'아홉 개의 도시, 혹은 아홉 개의 저자(市場)를 먹여 살릴 마을'
‘그렇다는 구나!’ 하고 이야기를 마칠 참인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 그럴까, 이름 곧 여기서는 지명, 그 지명은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이야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야기도 나눈 기억이 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가에서 플라톤의 대화편 한 권을 꺼내 새롭게 이야기했다. ‘이름의 올바름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가진 플라톤의 대화편 『크라튈로스』다. 천병희의 번역은 『이온/크라튈로스』(숲, 2014년 10월)로 두 편이 묶여 있다.

 

“누가 맨 처음 이름들의 올바름에 관해 모른다면 나중 이름들의 올바름에 관해서도 알 수 없네. 나중 이름들은 그가 모르는 맨 처음 이름들로 설명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나중 이름들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분명 무엇보다도 맨 처음 이름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네.”-플라톤 『클라튈로스』 426a~b), 천병희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한 걸음 더 들어가려하면 복잡해지고 심오해지는 대화편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 무엇(사물이나 사람이나 이름의 대상)에 대해 그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일까? 책에서는 '입법자'라고 한다. 어쨌든 입법자는 어떤 기준으로 그것에  [그것]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가? 이 대화편 서두에서는 헤르모게네스는 '이름의 올바름은 합의와 동의에 의해 정해진다'는 규약주의를 주장한다. 그것을 [그것]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로 합의한 '약속'이란 얘기다. 반면에 크라튈로스는 '있는 것들 각각에는 이름의 올바름이 본래 자연적으로 있다.'(객관적으로)는 자연주의를 주장한다. 그것이 [그것]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 목(木)이나 물 수(水)와 같은 한자의 상형문자를 떠올리면 크라튈로스의 주장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한자의 갈래에는 상형문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혀의 모양에 따라 자음을 정하고(설형문자) 천지인(天地人)의 원리에 따라 기본 모음을 정한 한글의 경우는 어떠할 것인가?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먼저 헤르모게네스와 긴 토론을 한다. 인용한 부분은 둘의 대화가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인데, 앞선 대화들의 상당부분이 희랍어의 어원에 관한 고찰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나중 이름(현재 사용하는)은 맨 처음 이름(이전 이름)과의 연관 관계에서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2권 후반부 '함선목록'에서 읽기를 멈추는 것처럼,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희랍어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지루하고 시험에 든 것처럼 갈등하지 않을 수 없다. 희랍어 고전을 좀 읽었다는 사람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신들과 영웅들의 이름이나 중요한 철학의 개념어들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어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사실 우리말에서도 쉽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앞서 포구기행의 지명 유래에 대한 추적을 예시한 것이다.)

 

맨 처음 이름들의 올바름에 따르는 나중 이름들의 올바름
플라톤은 궁극적으로 이데아(idea) 이론을 펼치기 위해 사물의 이름 이전의 사물 자체가 가진 본성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프레임을 벗어나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 일부를 이야기한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맨 처음 이름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가 나중 이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허튼소리일 뿐이라고 진술하고, 헤르모게네스의 동의를 구한다.
포구기행의 작가는 구시포가 왜 구시포인지, 이전 이름인  '새나리불똥'이 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인지, 나름대로 해석했다. 상하면의 구시포는 나중 이름(현재 이름이면서)인데, 그 처음 이름(이전 이름)은 '새나리불똥'이었다. 그렇다고 '새나리불똥'이 현재 구시포의 맨 처음 이름이었다고 할 수 없다. 현재 이름에 대한 이전 이름일 뿐이다. 다만 한자어가 아닌 고유한 우리말 지명인 점에서 처음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어쨌든 작가는 국토지리를 기본으로 인문지리와 거기에 시인의 상상력까지 가미하여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있다. 김춘수의 시에 따르자면 ‘구시포’가 비로소 구시포가 되는 셈이다(실제로 해당 지명이 왜 그 지명인지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구시포가 비로소 구시포가 되는 순간, 그러나 맨 처음 이름은?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논점은 여기에 있지 않다. 인용부분 대사의 앞에서 그는 얘기한다. "사물들이 자모와 음절을 통한 모방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워 보일 걸세."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맨 처음 이름들의 참됨에 관한 한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물을 그 [사물]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언어이고, 언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져 있다. 자음과 모음은 결합하여 음절을 이루고, 한 음절이 한 사물의 이름이 되기도 하지만 음절과 음절의 결합으로 한 사물의 이름이 된다. 그 사물에 그 [사물]의 이름을 붙이는 재료가 언어인데, 이를 모방이라고 표현한다. 사물이 가진 본질을 모방하는 수단이 언어인 것. 이렇게 언어로 된 그 [이름]은 사물을 대신한다. 곧 대치(代置)한다. 그러나 그것이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이고, 그것이 적절한지 그 원칙은 무엇인지 등 의문투성인데, 이 대화편의 주제다. 일단 우리는 그 이름(언어)에 의존해서 ‘구시포가 구시포인‘ 이유, 구시포가 구시포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언어의 한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인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접목시켜야 비로소 이해가 가고, 후반부 크라튈로스와의 대화에서 앞서 인용한 부분과 관련된 흥미로운 얘기를 꺼낸다. 그러나 논점은 조금 달라진다.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우리는 이름들이 어떤 힘을 갖고 있으며, 어떤 훌륭한 일을 한다고 주장할 텐가?” 크라튈로스는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님, 이름들의 힘은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 사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사물도 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어요.” 이어지는 대화다. 잠시 따라가 보자.

 

이름들의 힘은 가르치는 것, "삼척동자도 알 수 있어요."
소크라테스: 크라튈로스. 자네 말은 아마도 누군가 이름의 본성을 안다면―이름의 본성이 사물의 본성일세― 사물은 이름을 닮은 만큼 사물도 알며, 서로 닮은 사물은 모두 같은 기술(技術)에 속한다는 뜻인 듯하네. 내 생각에 그래서 자네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사물도 안다고 주장하는 것 같네.
크라튈로스: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자네가 방금 말한 가르치는 방법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보다 더 열등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는지. 아니면 그와 다른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기로 하세. 자네 생각은 어떤가?
크라튈로스: 나는 다른 방법은 없고, 그것이 하나뿐이자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크라튈로스』(435d~436a), 천병희

소크라테스는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독단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배려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그것은 또한 사물을 발견하는 방법이기도 해서. 사물의 이름을 발견한 사람은 사물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자네는 탐구와 발견은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하고, 배우는 것은 이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크라튈로스: 나는 탐구와 발견도 같은 수단에 의해 같은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확신해요.
소크라테스: 자, 크라튈로스. 우리는 이 점에 유의하세. 자네는 이름들을 길라잡이 삼아 그것들의 뜻을 뒤쫓으며 사물들을 탐구하는 사람은 속을 위험이 크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크라튈로스: 어째서 그렇지요?
소크라테스: 맨 처음 이름을 지은 사람은 분명 사물들의 본성과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이름들을 지었네. 그것이 우리의 주장일세. 그렇지 않은가?
크라튈로스: 네. 그래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한데 그가 그에 근거해 이름을 짓는다면, 자네는 그를 길라잡이로 삼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리라고 생각하는가? 속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
『크라튈로스』(436a~436b), 천병희

 

맨 처음 이름을 지은 자의 생각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크라튈로스의 이름의 올바름에 관한 자연주의 이론이 앞서 인용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소크라테스는 다음 인용에서 결정적으로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가진 한계를 지적한다. 아래 인용은 [판본A]와 [판본B]로 두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판본A]의 일부 내용이다. 그만큼 이 대화편의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얘기로 받아들인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말해보게. 최초의 입법자들이 맨 처음 이름을 지었을 때 이름 지은 사물들을 알고서 지었을까, 아니면 모르고 이름 지었을까?
크라튈로스: 나는 그들이 알고서 이름 지었다고 생각해요, 소크라테스님.
소크라테스: 여보게 크라튈로스, 아마도 모르고 이름 짓지는 않았을 걸세.
크라튈로스: 나도 그들이 모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소크라테스: 그런데 만약 이름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알 수 있다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 그러니까 이름을 알 수 있기 전,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알고 이름을 지었다거나 그들이 입법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크라튈로스』(437e~438b7)

 

이름을 통해서만 가르칠 수 있고, 탐구와 발견도 가능하다고 '믿는' 크라튈로스의 주장이 자가당착에 빠지는 부분이다. 인식론이니 존재론이니 하는 철학의 영역으로 대화편은 깊이를 더해간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클라튈로스의 주장은 외골수에 가까운 것으로 판명이 되지만, 그만큼 보통의 삶에서 언어를 재료로 만들어진 이름(단어, 언어, 말)이 하는 역할은 크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필자도 한글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가벼운 얘기처럼 다가오던 『클라튈로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의 깊이를 더해갈수록 인식의 숲에서 헤매게 하는 묘한 대화편이다.

 

이름을 통해서만 사물들을 알 수 있다면.. 크라튈로스의 자가당착

탐구와 발견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것도 이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고집을 부리는 클라튈로스, 그러나 우리는 상당 부분 이러한 이름을 통하여 책을 읽고 또한 글을 쓰며, 대화하고 있다. 이름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행, 그리고 이름 이전의 사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행은 좋은 기행수필 작가의 아름다운 여행과 다를 바 없다. '미법도彌法島. 처음 섬의 이름을 만났을 때 가슴이 뛰었지요. 미륵의 불법이 존재하는 섬.' 작가는 여정을 미법사로 정한 이유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이름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곽재구의 신新 포구기행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해냄, 2018년 7월) 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거제의 포구를 여행한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욕지도 자부포에서」의 일부다. 이 글을 위해 이 책에서 작가가 여행한 곳의 지명과 관련된 언급들을 여러 군데 골라냈는데, (너무 길어지니 문제라) 그 중 하나 고르 것이 우연히도 이 책의 제목이 된 기행수필이다. 2018년 1월호 『전원생활』에 처음 소개되었다.


"1시간 15분 항해 끝에 욕지도에 이른다. 섬의 이름은 난해하고 철학적이다. 욕지慾知, ‘알기를 원한다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는 동안 곤궁한 생화두에 시달리지 않는 이가 있을 것인가. 왜 사는가. 왜 먹는가. 왜 걷는가. 그 이유를 알려줄 테니 어서 오라 손짓하는 것만 같은 이름. 사실 이 섬의 이름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선 ‘욕지 연화장 두미 문어 세존 慾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이라는 불가의 전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_『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354~35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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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sky 2019-05-11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시포!
여기에 사진을 올리 수 없으니 그날의 광경을 못 다 이야기하네!
파도와 모래폭풍!

timeroad 2019-05-13 19:36   좋아요 0 | URL
정확히는 구시포해수욕장과 동호해수욕장 사이 명사십리해수욕장이겠지요. 얼마 전에 갔더니 명사십리의 그 고운 모래들을 헤집어놓아 속이 상했어요. 자연은 곧 복원을 하겠지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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