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육필시집
나해철 지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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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 '시(詩)'는 말(言)의 절(寺)이라는데, 말로 지은 집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시는 다른 장르의 글들과 함께 '짓는' 행위를 '쓴다'고 표현하는데, 순전히 글씨를 '쓴다'로만 시를 짓는 행위를 묘사한다면, 언젠가 시를 '친다'고 이르게 될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육필 시집 시리즈는 시대 흐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기획 자체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나해철. 시인 나해철, 의학박사 나해철, 오래된 조형물을 사랑하는 나해철, 무엇보다 사람 나해철. 그에 관해서라면, 아주 깊이 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여러 면에서 별도의 글을 쓸 수 있지 않나 싶다. 전부 다 살피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손으로 쓴 시로 먹고 살아가는 시인은 아니다. 이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정도로 시만 쓰고도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는 낮에는 성형외과 의사다. 그것도 강남 압구정 전철역 부근에 있는 성형외과 의원에서 아름다워지려는 이들의 '니드'를 충족시켜주는 일로 살아간다. 그러니까 그는 손이 하는 일로 살아간다. 그래서 그가 이번에 자신의 시편들 가운데 46편을 골라 직접 '쓰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느꼈을 소회가 궁금했다.

원고지에 직접 쓴 시인의 시를 받아서 타이핑을 하고 그렇게 입력했던 원고를 사식집에 맡기고, 프린트 된 인화지를 디자이너가 칼로 직접 오려서 조판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먹지에 새긴 글씨를 등사판으로 밀어낸 용지로 시험을 보던 시절도 앞서 있기는 했다. 어쨌거나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질 정도이니, 손글씨로 시를 쓰는 일도, 그런 시를 읽는 느낌도 남다를 수밖에 없다.

 

 

며칠 전 방학이 끝나서 아쉽다는 몇몇 교사 지인들과 정남진 장흥엘 다녀왔다. 천관산의 봉우리 하나를 오르고, 내려와 일행들이 찾은 곳은 천관산 남쪽 자락에 있는 천관산 문학기념관. 2월 2일에 끝난 것으로 현수막이 붙어 있는 주요 문인들의 시화전이 아직 철거하지 않은 상태로 전시 중이었다, 그런 '방치' 덕분에 참으로 오랜 만에 시화전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액자가 고급스럽게 바뀌었을 뿐, 필자가 직접 쓴 글씨의 느낌으로 보고 또 읽는 느낌은 여전히 설레임을 준다고 생각했다.

감히, 위에 소개한 나해철 시인이 직접 쓴 글씨의 느낌을 평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의 시들은 내용을 떠나 잘 읽힌다. <그리운 이에게>는 정평이 난 시로, 대학의 연극영화과 입시나 연기자 오디션에서 독백 과제로 제시되는 작품이다. 나해철 시의 이러한 특징을 간단히 얘기하는 쉽지 않다. 마치 흰 여백에 오로지 검은 글씨 뿐인 일반 단행본의 타이포그라피에 대해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느낌은 있는데,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듯이, 나해철의 시가 매끄럽게 읽히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러한지를 말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어미처리 등 반복 효과, 그러면서도 변용되는 우리말의 절묘한 쓰임이 내는 효과라고 할까, 물론 내용을 떠나서, 라고는 했지만 어찌 내용을 떠나서 매끄러운 읽기가 가능하겠는가. 이번 시집에서 만나는 시인이 직접 쓴 글씨에 대한 느낌도 어쩌면 잘 읽히는 그의 시 특징과 잘 어울르는지 놀랄 뿐이다

 

외로운 사람들의 밤에 드는
햇볕처럼 따사로운 손
병 깊어 쓸쓸한 이들에게
다가가 쓸어주는 손
아름다운 손

새해에는
나의 오른손 왼손 중
하나라도 그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면

불의한 사람들을 깨우치는
용기 있는 손
더러운 것을 맑게 씻어주는
깨끗한 손
어여쁜 손

새해에는
아아 나의 손 중 하나라도
그처럼 예쁠 수 있다면

 

시집 <<아름다운 손>>(1993.03.01, 창작과비평)에 수록된 시 <손> 전문. 여기에서 시집 제호 아름다운 손이 나왔다. 그의 손이 이번에는 진짜로 손글씨로 쓴 시를 썼다. 이번 시집에도 수록된 작품이다.

해서, 시인은 자신이 직접 쓴 시를 다시 쓰면서의 생각한 바를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시를 손으로 흰 종이 위에 쓰면서, 제 스스로 제 글씨를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제 살아온 시간들, 제 마음속 깊은 곳, 특히 제 성격이 거기 있었습니다. "

 

위로를 외래어로 번역하자면 근래에 유행하는 '힐링'쯤이 될 것이다. 외모에 대한 고민은 어느덧 마음의 병이 되어버린다. 그런 사람들이 그에게는 고객들이다. 외모에 대한 고민이 정작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 바 있는데, 성형외과 의사이면서 시인인 나해철만이 알 수 있는,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눈을 아름다운 코에 대한 기준은 상대적이다. 누구처럼 된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만의 모습과 절묘하게 어울릴 때에 아름다운 눈이 되고 아름다운 코가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이 되기 위해 그를 찾는 고객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낮엔 의사이고 밤엔 시인이 하는 일인데, 그가 직접 쓴 손글씨로 감상하는 이번 시편들에서 받은 느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의 절제를 시의 내용과도 절묘하게 어울리며 새로운 느낌을 선물하고 있다. 끝으로 그의 시, <그리운 이에게>를 소개한다. 오디션에 나가서 심사위원들 앞에서 낭송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보시기를!

 

그리운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걸
오랜 시간이 흘러가 버렸어도
그리움은 가슴 깊이 맺혀
금강석이 되었다고 말할 걸
이토록 외롭고 덧없이
홀로 선 벼랑 위에서 흔들릴 줄 알았더라면
내 잊지 못한다는 한마디 들려줄 걸
혹여 되돌아오는 등뒤로
차고 스산한 바람이 떠밀려
가슴을 후비었을지라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꽃같이 남아 있다고 고백할 걸
고운 사람에게
그리운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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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탄생 - 대한민국 제1호 예술경영 CEO의 자전적 에세이
이종덕 지음 / 도서출판 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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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홍길동 탄생 **주년 기념' 공연이나 출판물들의 부제는 적지 않지만 '  ~의 탄생'이란 말을 쉽게 쓸 수 있는 책이 많지 않다. ('홍길동'이라 한 것은 아무 이름이나 인명을 특정해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있어서다. 가령 '*철수'이름도 철수와 영희를 교과서에서 보았듯 막 사용해도 될 것 같은데, 실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법적으로 '걸면 걸리는' 것이 현재의 법현실이란다) 

1872년 출간된 독일의 사상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첫 저작 이름은 <비극의 탄생>이다. 한국미술사학계의 원로로서 생의 막바지에 중요한 결실을 이뤄내고 있는 강우방 선생의 역작 이름은 <한국미술의 탄생>(2007년)이다. 선언적이며 과격한 언사로도 주모를 받았던 니체의 책 이름답다. 그런데, 후자 강우방 선생의 책 제목은, 반어법적인 해석의 여지를 안고 있어, 그가 개척한 '조형해석학(일명 靈氣論)'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오만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제호다. 기존의 틀이 잘못되었음을 전제로 가능한 제호이기 때문이다.

 

이종덕의 자전적 에세이 <공연의 탄생>의 경우, 제호가 가진 의미를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책을 쓴 필자의 인생, 필자의 삶이 대한민국 공연의 역사에서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인지 짐작하게 한다. 2014년 기준으로 나이 80세. 이종덕 선생은 지금도 현역 예술공연장 CEO다. 하도 이름이 많이 바뀌어 좀 그렇지만-문광부이다가 문체부이다가 정권마다 오락가락하는 부처의 이름이라- 문공부의 주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훗날에 준 공무원 신분으로도 의 우리나라 주요 공연장의 CEO로, 예술공연계의 개혁의 전도사 역할을 해온 사람이다. 그의 공연예술인생 50년을 담은 책이 <공연의 탄생>이다.

(그리스비극전집, 희극전집, 최근의 <메난드로스 희극> 등 연극의 역사를 한눈에 살피는 원전번역서를 낸 출판사, 뮤지컬 관련 전문서들을 펴낸 숲 출판사에서 나올만한 책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므로, <공연의 탄생>은 '대한민국 공연의 탄생'이 실제 내용상의 제호라고 할 것이고, 이런 정리를 이해하면 이 책의 가치를 간파할 수 있다. 공연예술 CEO라고 하지만, 우리나의 공연예술의 역사, 그 시작이 얼마나 미미했고, 오늘날 얼마나 '창대'해졌는지, 성경 말씀 한 구절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아른거렸다. 그렇고 그런 자서전 류의 형식을 벗어났다. 80세에도 현직 공연장 CEO(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 사장)을 맡고 있는 기획력이 돋보인다.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공연아이템을 제시하고, 실현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작년 12월에는 반세기 이상 대한민국의 '문화 아이콘'으로 살고 있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팔순잔치를 겸한 출판기념회(<생명이 자본이다>)가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다. 이듬해인 2014년 1월 21일에는 중구문화재단 충무아트홀 이종덕 사장의 <공연의 탄생>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팔순 잔치를 겸한 행사로 자신이 한때 CEO였던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이었다. 연극, 뮤지컬, 무용, 클래식, 영화계 '별'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을 수 있는 사람의 출판기념회였다. 한 달 사이 진행된 두 원로들의 출판기념회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00세 시대를 얘기하는 지금, 청춘은 60부터라는 말이 나온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것은 '바람'이었지 '현실'은 아니었다. 공연예술계의 무대 위에 서거나 그 무대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은 전공 분야의 노장으로부터 노하우를 얻기 위해, 노년의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잡기 위해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인생은 무대고, 무대는 그에게는 인생이다. '인생이 나그네 길'인 것도 맞고, 인생은 한 편의 연극 무대와도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 공연의 탄생과 오늘 대한민국 공연의 현주소를 파악하는데 이만한 책이 또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관련 분야의 길 위에서 선 이들은 그가 자신의 또렷한 이정표임확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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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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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플라톤 대화편의 정점은 <국가>, 작년에 펴낸 <국가>에 이어 국가를 해하는데 필독 대화편인 두 대화편 묶음 출간은 술술 읽히는 우리말 번역만큼이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배려라고 할 수 있을 듯.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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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 단 한 권의 소크라테스전
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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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로울 때에도 사람은 왜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여덟아홉 살 비트겐슈타인이 가진 생각이란다. 까칠한 사람이란 느낌이 먼저 드는 이 철학자의, 기록으로 남겨진 최초의 철학적 성찰이다.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평전>>의 첫문장이기도 하다. 평전은 이어진다.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결국 그런 경우에는 거짓말을 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비트겐타인이 이런 고민을 할 즈음은 세기말(그는 1889년생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 대부분은 그로부터 100년 후, 20세기와 작별하고 21세기의 새로움을 영접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399년, 한 세기가 막 시작되던 즈음의 아테나이 법정,

 

"하지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 

 

자신을 유죄로, 곧이어 사형까지 선고한 배심원들과 시민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듯 소크라테스 자신은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이 쓴 거의 대부분의 대화편에, 크세노폰의 몇몇 저작에 '환생하여' 대화를 이끄는 단골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그의 말은 무수히 많고, 그의 행보는 늘 분주하다. 그나마 한마디 한마디가 짧다는 점은 대단한 미덕이다. 여가가 있는 삶이 왜 좋은가를 역설하는 동안에도 정작 자신의 삶은 그리 한가해보이는 않은 듯하다. 하는 일 없이 바쁜 사람, 실속이 없는 사람, 옛말에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했던가! 그는 철학적 담론, 대화를 너무 사랑한 '가난한' 사람이었다.

 

글머리 인용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고민한 '진실'은 소크라테스에게라면 어떤 단어로 대체할 수 있을까? 앎, 정의, 좋음, 우애, 절제, 용기... 떠오르는 단어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특유의 문답식 대화를 시작하고 있으리라. 거짓말을 하는 것이 왜 이롭다는 것이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결코 이로울 수 없다. 그라면 단박에 그러나 차근차근 상대방의 숨통을 조이는 악동의 모습을 연출하여 곧 입증했으리라. [어린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의 고민이 별 것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르기아스>에서 열변을 토하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피해를 당하는 것이 피해를 입히는 것보다 낫다. 피해를 입히고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이 가장 불행한데, 그보다 한 단계 덜 불행한 사람이 피해를 입히고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양심, 마음의 평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사학은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 편에 서서 불의를 덮고 죄를 덮어주는 역할, 곧 '환심을 사는 아첨'이며, 영혼을 파는 장사일 뿐이라는 논지를 전개하는(정확한 인용은 아님), 소크라테스다운 모습 그리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실제의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논의를 진행했을까? 진위를 가리는 일은 녹록지 않다. 플라톤의 글을 통해 생전의 소크라테스가 쏟아낸 것이 유력한 말속에 담긴 진리와 진실을 추수해야 하는 후학들 입장에서는, 그렇다. 쉽게 풀리지 않는 숙제다. 잘 맞는 옷처럼 '인문학자'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황광우의 신간, <<사랑하라>>를 읽었다. 잘 빚어낸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중 <  ~전> 한 편을 만났을 때의 즐거움을 그의 소크라테스 해석과 해설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일은 늘 안개속을 거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사상의 쌍생아인, 스승 소크라테스와 제자 플라톤을 저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소크라테스가 없었다면 저 위대한 플라톤 사상이 탄생할 수 없었겠지만, 마찬가지로 플라톤이 없었다면 저 심오한 소크라테스 사랑 역시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215면)

 

플라톤의 저작으로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일은 늘 안개 속을 헤매기의 되풀이다. 대화편들이 집필된 시점이 그렇고,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시점 추정도 끊임없는 논란 속에 있다. 어디까지가 스승의 사상이고, 어디서부터가 '청출어람' 플라톤의 사상인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대화편들을 하나하나 읽는 동안 안개가 조금 걷힌다 싶다가도, 아, 이것부터 읽고 이것을 읽었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더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그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저자도 서문에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듯, 희랍고전 원전번역서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 있다는 것. 박종현, 천병희 선생, 정암학당 학자들의 노고가 있어, 어쩌면 '단 하나뿐인 소크라테스 전'의 출간이 가능했으리라.

서양 고전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전들이 문자로 고정된 오랜 역사를 가진 덕분에 혹은 그랬기 때문에, 하나의 저작, 한 사람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서 먼저 읽어야 할 책들이 있고, 곧 선행독서는 필수이다. 가령,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다는 것이, 그 위험을 몰랐기에 과감히 떠날 수 있는 모험이 되는 것처럼,

 

'지혜-사랑'(필라-소피아)이 우리가 읽히 알고 있는 '철학'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은 곧 지혜를 사랑하기, 그의 영원한 연인은 철학이었고, 소크라테스의 사랑은 철학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하라'에 생략된 말은 지혜를 사랑하라, 곧 '철학하라'라고 할 수 있다. 황광우는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열정의 본질은 ‘사랑’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한다. 그리고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발견하는 소크라테스의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육체적 사랑은 마치 땅을 임차한 농부의 사랑과 같다. 이런 농부의 관심은 땅을 돌보는 데 있지 않고, 농작물의 소출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그러니 세월이 흘러 땅의 지력이 황폐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영혼을 향한 사랑은 다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아끼는 이는 토지를 소유한 농부와 같다. 농부는 땅을 돌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이 경우 세월이 흐를수록 땅의 힘이 좋아지고 농작물이 잘 자라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도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이 책 142면 재인용, 원전은 <<크세노폰의 향연, 경영론>>73면)

 

그래서일까, 저자 황광우는 "플라토닉 사랑의 원조"는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였다고 진단한다(141면). [모든 리뷰, 특히 북리뷰에도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있음을 잘 알지만, 붓가는대로(자판 두드려지는 대로?) 소감과 와 닿는 구절을 빌미로 이야기하는 중이다.]


1950년 에릭 R. 도즈가 쓴 <<그리스인과 비이성적인 것>>이라는 책이 있다. 그리스의 양대 서사시, 3대 비극작가의 비극들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와 <역사>와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등의 역사 등을 두루 섭렵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십수 년 만에 고향을 찾은 그날처럼 감회가 새로운, 그런 책이다. 제목처럼 '비이성적인 것'들을 탐색하는 주제에 충실한 책이지만, 그동안 고전들을 읽었기에 술술 '읽히는' 남다른 즐거움을 준다.


황광우의 <<사랑하라>>의 경우, 그동안 소크라테스와 만나기 위해 '플라톤'이란 이름의 안개속에 머물거나 헤맨 기억이 있는 독자들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줄 것인데, 그것은 안개가 걷힐 때의 개운함, 쾨청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쾌청한 기분은 안갯속을 헤매본 사람들만이 아는 것. 그러나, <<철학콘서트>>1,2,3의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문장의 안내자답게, 플라톤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가는 초보독자에게는, 훌륭한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책이 <<사랑하라>>이다.

 

<후일담>#1. 사무실이 입주한 빌딩은 개인 소유가 아니다. 층마다 칸마다 주인이 따로라는 점에서는 오피스텔과을 떠올리면 되는데, 일반 사무실들의 소유자가 저마다 다른 뿐이다. 그리고 극소수이나 주인이 입주한 경우도 있고, 대부분은 사무실 주인이 임대를 내준 경우이다. 무슨 일이 생길까? 날마다 치워야 하는 쓰레기 양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공유공간은 모두의 것이면서 그곳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상태라, 늘 청소와 관리 상태가 부실할 수밖에. 주인이 한 사람이라면, 관리비를 좀 올리더라도, 미화원을 고용하는 등 청결을 유지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라야 건물과 공간의 가치가 높아지고..

#2. 요즘 생활협동조합이 전가의 보도인 양, 한때 사회적 기업 타령을 하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영리위주인 주식회사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협동조합형 기업에 있음을 안다. 그러나, 모두가 주인이면서 모두가 주인이 아닌, 앞서 인용한 임차한 농부의 땅처럼 척박해질 수 있음을, 그러므로 본래 목적에 충실해야 함을 떠올리게 된다.

#3. 욕체적인 사랑도 사랑이고 정신적인 사랑도 사랑이다. 사랑이 어디 무 조각처럼 분명하게 갈리던가? 이 사랑도 하고 저 사랑도 하라, 중요한 것은 우선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을 믿나요? 라는 물음 앞에서 한참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 사실이 그러하므롤, '사랑하라'라고 톤을 높이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사랑은 하는 것, 사랑하는 거두절미하고 시작하는 것, 일단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이는 고전읽기에도 오롯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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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13-11-05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빠서, 다시 들러 오탈자를 잡아야 할듯, 그댄 이 댓글도 없겠지요.

oren 2013-11-0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imeroad님의 글을 읽으니 평생 소크라테스를 가장 훌륭한 인물의 본보기로 삼았던 몽테뉴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쓴 여러 대목들이 두루 떠오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었다

한 청년이 철학자 파나이티오스에게, 현자도 사랑을 해도 되느냐고 물어 보자, "현자는 치워 두라. 그러나 자네와 나는 현자가 아니니까, 우리를 타인의 노예로 만들고, 자신을 경멸하고 싶어지게 하는 그런 마음 뒤집히는 강렬한 일에는 걸려들지 말자"고 대답하였다. 이런 사태의 충격을 지탱할 수 없는 심령에게는, 그 자체로 격정을 일으키는 일에 몸을 맡길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진실이며, 예지와 연애는 병행할 수 없다고 한 아게실라오스의 말을 압도하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헛되고 부적절하고 수치스럽고 옳지 못한 처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둔중한 육체와 정신을 잠 깨워 주기에 적당하고 건전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내가 의사라면, 나와 같은 기질과 조건을 가진 인물에게는 나이가 지긋하기까지 생기를 돋우고 정력을 일으키며 늙음에 잡히는 일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다른 어느 처방보다도 이 처방전을 적어 줄 것이다. 우리가 아닌 그 주변에 머무르는 동안, 맥박이 아직 뛰는 동안,

처음으로 흰 머리칼 겨우 생기며
노령(老齡)은 아직 강건하고 몸을 가눌 수 있는 동안
운명의 여신 라케시스에게 뽑을 실이 남아 있는 동안
아직도 내가 다리를 쓰며 지팡이를 쓰지 않아도 좋을 동안, (주베날리스)

우리는 이런 따위의 몸이 찌르르 울리는 정열로 초대받고 애무받을 필요가 있다. 사랑은 저 현명한 아나크레온에게 젊음과 정력과 쾌활성을 얼마나 돌려 준 것인가를 보라.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나보다도 훨씬 더 늙어서 사랑의 대상을 두고 말했다. "내 어깨를 그의 어깨에 기대고, 내 머리를 그의 머리에 가까이 하며, 우리가 같이 책을 들여다보노라니, 거짓말 아니라, 내 어깨는 무슨 짐승이 무는 듯 찌르르하더니, 그 뒤 닷새 동안을 두고 근질거리며, 나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저린 느낌을 받았다." 우연히 어깨를 접촉한 것만으로도, 나이 탓에 식어 쇠약해져 가는 심령을 덥게 하다니! 그리고 인간 심령 중의 제1의 심령을 개혁해 주다니, 그럼 왜 못할까? 소크라테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아무것도 되려거나 닮으려고 하지 않았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中에서

timeroad 2013-11-0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편제인가요, 그 후속편인가요, 살구꽃이 흩날리는 날, 구성지게 창을 쏟아내는 젊은 여인 곁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이는, 그 할배. 이른 살에 세상을 뜨는 쏘 선생에게는 아직 젖먹이 아들이 있었지요? 댓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댓글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니 좀 이상한 시대네요?

timeroad 2014-03-0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제 장흥에 다녀왔는데, 위 영화는 <천년학>이었더군요.
 
니코마코스 윤리학 - 그리스어 원전 번역, 개정판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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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고전번역의 `노전사` 천병희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어떤 모습일까, 무척 궁금하네요. 시학을 읽었고 정치학을 읽었는데, 그 번역자가 윤리학이라 더욱 각별할 듯, 주석서 해설서 없이도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에 가깝지 않을까 싶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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