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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 단 한 권의 소크라테스전
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10월
평점 :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로울 때에도 사람은 왜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여덟아홉 살 비트겐슈타인이 가진 생각이란다. 까칠한 사람이란 느낌이 먼저 드는 이 철학자의, 기록으로 남겨진 최초의 철학적 성찰이다.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평전>>의 첫문장이기도 하다. 평전은 이어진다.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지 못한 채 결국 그런 경우에는 거짓말을 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비트겐타인이 이런 고민을 할 즈음은 세기말(그는 1889년생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 대부분은 그로부터 100년 후, 20세기와 작별하고 21세기의 새로움을 영접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399년, 한 세기가 막 시작되던 즈음의 아테나이 법정,
"하지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
자신을 유죄로, 곧이어 사형까지 선고한 배심원들과 시민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듯 소크라테스 자신은 단 한 편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이 쓴 거의 대부분의 대화편에, 크세노폰의 몇몇 저작에 '환생하여' 대화를 이끄는 단골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그의 말은 무수히 많고, 그의 행보는 늘 분주하다. 그나마 한마디 한마디가 짧다는 점은 대단한 미덕이다. 여가가 있는 삶이 왜 좋은가를 역설하는 동안에도 정작 자신의 삶은 그리 한가해보이는 않은 듯하다. 하는 일 없이 바쁜 사람, 실속이 없는 사람, 옛말에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했던가! 그는 철학적 담론, 대화를 너무 사랑한 '가난한' 사람이었다.
글머리 인용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고민한 '진실'은 소크라테스에게라면 어떤 단어로 대체할 수 있을까? 앎, 정의, 좋음, 우애, 절제, 용기... 떠오르는 단어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특유의 문답식 대화를 시작하고 있으리라. 거짓말을 하는 것이 왜 이롭다는 것이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결코 이로울 수 없다. 그라면 단박에 그러나 차근차근 상대방의 숨통을 조이는 악동의 모습을 연출하여 곧 입증했으리라. [어린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의 고민이 별 것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르기아스>에서 열변을 토하는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피해를 당하는 것이 피해를 입히는 것보다 낫다. 피해를 입히고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이 가장 불행한데, 그보다 한 단계 덜 불행한 사람이 피해를 입히고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양심, 마음의 평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수사학은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 편에 서서 불의를 덮고 죄를 덮어주는 역할, 곧 '환심을 사는 아첨'이며, 영혼을 파는 장사일 뿐이라는 논지를 전개하는(정확한 인용은 아님), 소크라테스다운 모습 그리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실제의 소크라테스가 이러한 논의를 진행했을까? 진위를 가리는 일은 녹록지 않다. 플라톤의 글을 통해 생전의 소크라테스가 쏟아낸 것이 유력한 말속에 담긴 진리와 진실을 추수해야 하는 후학들 입장에서는, 그렇다. 쉽게 풀리지 않는 숙제다. 잘 맞는 옷처럼 '인문학자'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황광우의 신간, <<사랑하라>>를 읽었다. 잘 빚어낸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중 < ~전> 한 편을 만났을 때의 즐거움을 그의 소크라테스 해석과 해설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일은 늘 안개속을 거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사상의 쌍생아인, 스승 소크라테스와 제자 플라톤을 저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소크라테스가 없었다면 저 위대한 플라톤 사상이 탄생할 수 없었겠지만, 마찬가지로 플라톤이 없었다면 저 심오한 소크라테스 사랑 역시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215면)
플라톤의 저작으로 소크라테스를 만나는 일은 늘 안개 속을 헤매기의 되풀이다. 대화편들이 집필된 시점이 그렇고,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시점 추정도 끊임없는 논란 속에 있다. 어디까지가 스승의 사상이고, 어디서부터가 '청출어람' 플라톤의 사상인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대화편들을 하나하나 읽는 동안 안개가 조금 걷힌다 싶다가도, 아, 이것부터 읽고 이것을 읽었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더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그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은 저자도 서문에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듯, 희랍고전 원전번역서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 있다는 것. 박종현, 천병희 선생, 정암학당 학자들의 노고가 있어, 어쩌면 '단 하나뿐인 소크라테스 전'의 출간이 가능했으리라.
서양 고전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전들이 문자로 고정된 오랜 역사를 가진 덕분에 혹은 그랬기 때문에, 하나의 저작, 한 사람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서 먼저 읽어야 할 책들이 있고, 곧 선행독서는 필수이다. 가령,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다는 것이, 그 위험을 몰랐기에 과감히 떠날 수 있는 모험이 되는 것처럼,
'지혜-사랑'(필라-소피아)이 우리가 읽히 알고 있는 '철학'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은 곧 지혜를 사랑하기, 그의 영원한 연인은 철학이었고, 소크라테스의 사랑은 철학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하라'에 생략된 말은 지혜를 사랑하라, 곧 '철학하라'라고 할 수 있다. 황광우는 이것을 "소크라테스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열정의 본질은 ‘사랑’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한다. 그리고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발견하는 소크라테스의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육체적 사랑은 마치 땅을 임차한 농부의 사랑과 같다. 이런 농부의 관심은 땅을 돌보는 데 있지 않고, 농작물의 소출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그러니 세월이 흘러 땅의 지력이 황폐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영혼을 향한 사랑은 다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아끼는 이는 토지를 소유한 농부와 같다. 농부는 땅을 돌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이 경우 세월이 흐를수록 땅의 힘이 좋아지고 농작물이 잘 자라듯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도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이 책 142면 재인용, 원전은 <<크세노폰의 향연, 경영론>>73면)
그래서일까, 저자 황광우는 "플라토닉 사랑의 원조"는 플라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였다고 진단한다(141면). [모든 리뷰, 특히 북리뷰에도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있음을 잘 알지만, 붓가는대로(자판 두드려지는 대로?) 소감과 와 닿는 구절을 빌미로 이야기하는 중이다.]
1950년 에릭 R. 도즈가 쓴 <<그리스인과 비이성적인 것>>이라는 책이 있다. 그리스의 양대 서사시, 3대 비극작가의 비극들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들,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비롯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와 <역사>와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등의 역사 등을 두루 섭렵한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십수 년 만에 고향을 찾은 그날처럼 감회가 새로운, 그런 책이다. 제목처럼 '비이성적인 것'들을 탐색하는 주제에 충실한 책이지만, 그동안 고전들을 읽었기에 술술 '읽히는' 남다른 즐거움을 준다.
황광우의 <<사랑하라>>의 경우, 그동안 소크라테스와 만나기 위해 '플라톤'이란 이름의 안개속에 머물거나 헤맨 기억이 있는 독자들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줄 것인데, 그것은 안개가 걷힐 때의 개운함, 쾨청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쾌청한 기분은 안갯속을 헤매본 사람들만이 아는 것. 그러나, <<철학콘서트>>1,2,3의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문장의 안내자답게, 플라톤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가는 초보독자에게는, 훌륭한 나침반 역할을 해주는 책이 <<사랑하라>>이다.
<후일담>#1. 사무실이 입주한 빌딩은 개인 소유가 아니다. 층마다 칸마다 주인이 따로라는 점에서는 오피스텔과을 떠올리면 되는데, 일반 사무실들의 소유자가 저마다 다른 뿐이다. 그리고 극소수이나 주인이 입주한 경우도 있고, 대부분은 사무실 주인이 임대를 내준 경우이다. 무슨 일이 생길까? 날마다 치워야 하는 쓰레기 양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공유공간은 모두의 것이면서 그곳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상태라, 늘 청소와 관리 상태가 부실할 수밖에. 주인이 한 사람이라면, 관리비를 좀 올리더라도, 미화원을 고용하는 등 청결을 유지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라야 건물과 공간의 가치가 높아지고..
#2. 요즘 생활협동조합이 전가의 보도인 양, 한때 사회적 기업 타령을 하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영리위주인 주식회사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협동조합형 기업에 있음을 안다. 그러나, 모두가 주인이면서 모두가 주인이 아닌, 앞서 인용한 임차한 농부의 땅처럼 척박해질 수 있음을, 그러므로 본래 목적에 충실해야 함을 떠올리게 된다.
#3. 욕체적인 사랑도 사랑이고 정신적인 사랑도 사랑이다. 사랑이 어디 무 조각처럼 분명하게 갈리던가? 이 사랑도 하고 저 사랑도 하라, 중요한 것은 우선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을 믿나요? 라는 물음 앞에서 한참을 생각하게 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 사실이 그러하므롤, '사랑하라'라고 톤을 높이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사랑은 하는 것, 사랑하는 거두절미하고 시작하는 것, 일단 사랑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이는 고전읽기에도 오롯이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