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1장 중에 도경에 해당하는 1장~37장 까지를 담은 책이다. 덕경 38장~81장은 후설에서 한의사로서의 업을 위해 다음에 펴내겠다 하셨지만 아쉽게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아쉽다.
1편부터 꾸준히 읽어온 3권의 책, 내 삶에 노자가 이렇게 깊이 들어올 줄이야. 조금 과장하자면 노자를 읽기 전의 나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독서와 삶에 대한 자세가 달라질 것 같다.
노자를 저같은 몽매한 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그 배면에 깔린 엄청난 학문적 수고에 경의를 표한다. 도올하면 역시나 노자다!

그리고 언어란 논리보다 느낌이고 지혜는 본디 깨달음이란 것을 다시한번 명심. 평생 새기고 살아야겠지.

요즘 <도올학당, 수다승철>이란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대중속으로 들어오신 걸 환영하며, 73세의 나이에도 학문에만 심취해온 그 소년같은 표정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감동받는다. 꼭 한번 뵙고 한마디라도 나눠볼 수 있다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이 시대의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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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중국일기 3 - 고구려 재즈 도올의 중국일기 3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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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엄청난 돌무지 무덤(적석총)들의 향연에서 겨우 벗어났다. 우리가 배운 것들은 1%에도 못 미친다.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보고 다양한 전문가들과 토론해서 일궈진 3권이다. 실로 부럽다. 사진들이 일품이다.

오회분, 국내성, 미천왕릉, 천추묘(고국양왕릉), 소수림왕릉, 태조대왕릉, 서천왕릉, 장천1호분, 장천4호분, 염모총, 환문총이 담겨 있다.

도올이 설파한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말해본다면, ˝역사는 기본적으로 유물의 총화˝ 정도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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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수요일

나의 삶에 있어서는 나의 ˝주관적 느낌, Subjective Feeling˝이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객관적 명제들보다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의식주라는 기본적 삶의 모든 명제들을 타자화시킨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명제보다도 훨씬 더 극심하게 일상생활이 타자화되어 있는 것이다. - 8쪽



커피는 생콩을 사서 내가 직화에 직접 볶아먹는다. 그리고 볶은 커피는 미세하게 갈 필요가 없다. 나는 이 통찰을 기본으로 내가 귀국하면 나만의 독특한 커피세계를 구축할 구상을 굳혔다. - 9쪽



10월 10일, 금요일, 아름다운 날씨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시니피앙(음성이미지)와 시니피에(소리심볼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했는데, 시니피앙의 단계에서 그 음성을 시각기호화하는 것이 표음문자라는 것이고, 시니피에의 단계에서 그 개념을 시각기호화하는 것이 표의문자라고 한다. - 20쪽



10월 11일, 토요일, 너무도 아름다운 늦가을 날씨

한국사람들은 짬뽕이나 짜장면이 중국음식인줄 알지만 그런 음식은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중국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에 살던 산똥화교들이 개발한 한국인 입맛화된 특수한 중국요리다. 중국에는 한국식 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짜장˝이란 문자 그대로 ˝된장을 볶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중국의 짜장은 문자 그대로 한국 된장 같은 것을 기름에 볶은 수준의 것이다. 산똥화교들이 개발한 그런 새까만 색깔의 오묘한 짜장은 없다.

˝짬뽕˝만 해도 그것이 중국말인줄 아는데, 중국어에는 ˝짬뽕˝이라는 발음에 비슷하게 가는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짬뽕˝은 한국말인가? 그것은 한국말도 아니다. 그럼 어디서 온 말일까? 그것은 일제시대 때 일본의 속어에서 유입된 것이다. 그 원어는 ˝챤퐁˝이다. 종류가 다른 것을 뒤섞는다는 말이다. 일설에 의하면 19세기 말기에 큐슈나가사키에 살던 화교들에 의해 개발되어 우리나라 인천항 화교방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그것은 일본말이다.

일본에 가면 어딜가나 ˝챤퐁˝이 있고, 뒤섞는다는 의미로 일상회화에서도 사용한다. 그런데 일본식 짬뽕은 그렇게 얼큰하지 않다. 수타면을 사용하는 짬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는 짬뽕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내가 어릴 적 습관대로 ˝벤또오˝라고 마라면 ˝도시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지랄지랄해대는 사람들이 내가 ˝짬뽕˝하면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그것도 왜식이라고 지랄지랄해대야 할 것이 아닌가? 국어 순화주의는 본질적으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순수한 국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음일 뿐이다. 음은 사용해서 의미가 전달되면 그 사명을 다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본질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어는 사용일 뿐이다. 사용해서 의미가 통했으면 사용으로서의 언어는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언어가 이 세계의 정확한 그림일 수 없다고 말한다(후기 비트겐슈타인) - 27쪽


사실 요즈음 세상에서 ˝외식˝이란 어떻게 맛있게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사악한 화학조미료를 덜 처먹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셰프가 대세인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셰프가 만든 음식은 자연미가 부족하다. 전 인류에 엠에스지 msg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화학조미료 때문에 전통적 젓갈이나 발효음식이나 향료의 지혜를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 28쪽




10월 14일 화요일, 개임

구조주의는 이와 같은 인간의 사고나 사회나 국가의 권력이나 언어나 도덕이나 가치관 같은 그 모든 것의 구조, 그 설계도면을 알고 싶어한다. 그 구조를 파악하는 날카로운 시각, 겉으로 부분적으로 드러난 감각적 체험이 아닌 어떤 통찰력, 그 통찰력의 방법론을 제각기 제시한 사상가들이 모두 크게 보아 구조주의라는 카테고리 속에 들어올 수 있다.- 39쪽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의 기나긴 역사가 플라톤의 각주일 뿐이라는 유명한 얘기를 했지만, 나는 서양철학 이천사오백년의 역사가 파르메니데스 철학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데리다가 간파했듯이 서양철학의 역사는 존재론의 역사이다.
˝있음의 형이상학˝의 역사이다. (...)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기실 매우 황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인의 사유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 42쪽



데리다의 대 binary opposites의 문제의식으로 말하자면 서양철학은 항상 존재를 센터에 놓고 생성을 변방화시켰으며, 불변, 초월, 이성을 센터에 놓고 변화, 내재, 감성을 변방화시켰다. - 45쪽



맑스를 얘기하면 우리는 곧 유물론적 변증법이나 그것의 발전단계도식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필연적 도래라는 정치적 이론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의 가장 큰 혁명은 자아라는 개념을 자기가 필연적으로 속할 수 밖에 없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의식의 주체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코기탄스의 개체성을 해체시켰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가 아니라 노동하는 자아, 생산하는 자아, 행동하는 자아가 된다. - 46쪽



맑스, 프로이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로서 인간이라는 주체를 지배하는 가치관, 도덕의식이 결코 나의 주체적 결단의 소산이 아니라, 외적 규범에 불과하다는 것을 외친 사람이 바로 니체다. 니체 하면 우리는 ˝신은 죽었다˝라든가 ˝초인˝을 외친 사람으로 기억하지만 그보다는 ˝도덕의 계보˝를 주장한 사상가로서 기억하는 것이 보다 니체를 정확이 이해하는 첩경이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의 가치, 당위적 명령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시대나 지역의 고유한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니체의 수만은 저작 중에서도 그의 <도덕의 계보>를 가장 탁월한 수작으로 평가한다. - 47쪽



도덕의 계보를 펼치면 니체의 서문 첫 줄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자기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 본적이 없다. 그리고 서문 제6단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도덕적 가치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는 우선 그 자체로 문제시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가치들이 성장하고 발전해온 조건과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얘기는 미셸 푸코의 ˝지식고고학˝의 주요 명제로 들린다. 푸코의 사회철학은 니체의 계보학을 계승한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동시대인(현대인)은 억측에 의한 판단의 포로일 뿐이다. 그 억측, 자기들에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가치판단이나 심미적 판단이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형성된 편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류일반에게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동시대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끔찍한 바보일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현대인은 바보가 되었는가?(...)
니체의 위대함은 누구보다도 앞서 당대 출현하고 있는 20세기의 대중사회(근대적 시민사회보다 더 어드밴드된 개념)를 예언적으로 비판했다는 데 있다. 대중이란 ˝짐승의 무리˝와 같으며, 그 특징이란 균질적 행동패턴을 갖는다는 것이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균질성이 바로 노예의 특징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동일하게 되는 것 자체에서 행복과 쾌락을 찾는다. - 50~51쪽



이날 강의를 위하여 내가 참고한 교재가 하나 있다. 동경대학 불문학과를 나온 학자인데, 우찌다 타쯔루 교수가 쓴 <코를 골면서도 배울 수 있는 구조주의>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우찌다는 서양의 20세기 사조를 아주 쉽게 잘 풀어 말해주었다. 철학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한계도 있으나 철학전공자의 현학주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책이 이경덕에 의하여 <푸코,바르트,레비스트로스,라캉 쉽게 읽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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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너무 흔한 이야기라서 맥없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의 첫 편은 광개토대왕비를 답사하고 시대별 탁본에 관한 특징과 오류, 그 의도를 통해 고구려의 위상을 보고자 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호태왕비(광개토대왕비) 비문을 해석하는 것은 다양한 문헌과 역사적 실상에 관한 포괄적인 통찰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일본군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본학계의 근본적인 문제점, 그리고 호태왕비를 구실삼아 그들이 전개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조선사에 관한 편견의 필연성에 관한 핍진한 이해가 없다.

읽다 보니 저명한 동양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찌(1865~1942)의 개소리가 눈길을 끈다.








육군참모부는 이 광개토대왕비를 통째로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 책동을 집안현 지사가 알고 이 계획을 저지시켰다.(1907년)
일본인의 범죄행위의 수준은 이와 같았던 것이다.
이반출을 책동은 사람은 동경제국대학 교수로서 만선사,한학,지나어학의 강좌를 담당했던 시라토리였다. 그는 1905년 8월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고도 추저분한 논설을 펼치고 있다.

˝이 비문이 유명한 이유는 조선남부에 치우쳐있는 신라,백제,임나의 세 나라가 일본의 신민이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써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상 매우 가치가 높은 물건이다. 물론 일본의 역사에도 이 세 나라가 일본에 조공을 했다든가, 혹은 속국이 되었다는 일이 이야기는 되고 있지만, 일본의 역사라는 것은 이른바 전설에 속하는 것이며 역사상의 가치는 희소한 것이다. 그러한데 비하여 이 비문은 당시의 정황을 알려주는 너무도 신용할 수 있는 역사유물이다. 이 비에 의하여 일본이 조선의 남부를 지배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비는 아국의 역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나는 이 비를 일본에 가지고 와서 박물관이나 공원에 세워놓는 일은 실로 의미있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이나, 독일이나, 불란서라면 몇 만원(수십억)의 돈이 든다 해도 반드시 자국에 옮겨놓을 것이 틀림없다. 단지 이 비에는 일본에 재미없는일도 쓰여져 있다. 당시 일본은 삼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었는데, 북부의 고구려와는 반대의 지위에 서있었다. 고구려라고 하는 것은 마침 지금의 러시아와 같은 존재였으며, 일본이 조선반도의 남부에 세력을 확립하려는 기획을 고구려는 좌절시키곤 했던 것이다...그 관계는 마치 지금 일본이 현금의 조선을 충분히 제어하기 위해서는 북방의 러시아를 정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일본은 조선을 세력권에 집어 넣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저 지나와 싸웠고 지금은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이 발언 당시 러일전쟁이 진행중이었다. 거의 일본의 승리가 굳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과 같이 정치상의 관계상 일본은 고구려와 전쟁을 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라토리는 총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문의 당시 정황을 보면 고구려에게 일본이 패하여 일본의 세력이 크게 떨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만약 대륙의 전쟁에서 진다고 한다면 또다시 대륙을 석권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므로 현재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러시아에게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 ˝ - 28쪽~29쪽








도올은 대석학이라는 자의 논설치고 가소롭고 황당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지성계가 동아시아 고대사상을 어떻게 보아왔고 그 원형에 대한 패러다임이 어떤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식민지를 확립하기 위해 이 광개토대왕비를 반드시 활용하고자 했던 일본지성계의 추잡스런 열망을 엿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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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 가름(8장)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잘하고,
벗을 사귈 때는
어질기를 잘하고,
말 할 때는
믿음직하기를 잘하고,
일 할 때는
능력있기를 잘하고,
움직일 때는
바른 때를 타기를 잘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



가장 많이 걸려있는 액자 문구를 하나 뽑으라면,
˝상선약수(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라는 구절이 최다득점 금메달 깜이 아닐까 생각한다. 36쪽


쿠데타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질서라는 명목아래 혼돈을 말살해서는 아니됩니다.
(......)
노자는 혼돈이야말로 선이라고 생각한다. 혼돈은 결코 무질서한 것이 아니다. 혼돈은 질서의 가능태요, 노자철학의 전문술어를 빌리면, 그것은 질서의 허다.
질서는 분명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질서가 혼돈의 이면을 갖지 못하고 고착되면, 그것은 질서가 아니라 질곡이다. 바로 김덕빈 선생님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보성중학교 3학년 도올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위대한 지혜를 혁명의 아침에 가르쳐 주셨던 것이다. 그것은 좀 더 유지되었어야만 했던 혼돈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창조성이 고갈된 질서속으로 질서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38~40쪽



진리는 항상 우리 주변에서 물 흐르듯 지나가 버린다. 어쩌다 나뭇가지라도 만나면 잠시 걸치는 거품처럼 우리 뇌리를 스치는 모양이다. 인연이 닿지 않으면 망각 속으로 묻힐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스승들은 역사의 장면장면에서 진리를 설할 줄 알았던 것이다. - 39쪽



나는 대학교 때 학교신문에 새마을 운동은 문화박멸운동일 뿐이라는 논지의 글을 발표했다가 뼈아픈 곤욕을 치루기도 하였다. -43쪽


물은 항상 자신을 겸손하게 낮춘다. 항상 위에서 알로 자신을 낮추지만 사실 아니 올라가는 곳이 없다.(...)
물의 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쟁˝이다.(...)
물은 자신을 낮추며 흐른다. 그러다가 암석을 만나도 암석과 다투지 않고, 암석의 자리를 차지할려 하지도 않는다. 점잖게 스윽 비켜지나갈 뿐이다. 그렇지만 결국 물 앞에 당할 것은 없다. 한 방울의 낙숫물이 억만년의 바위를 뚫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 물의 이미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즉 다투지 않으면서도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본 장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노자>에서 그리고 있는 물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모습은 평형작용이다. 그것은 지나가면서, 높은 것을 깎아내고 낮은 것을 돋아준다. 물은 평형의 상징이다.- 45~47쪽



우리가 깊은 물을 쳐다보면 검푸르지만 손바닥에 떠서 보면 무색투명하다. 이것이 물의 청순하고 정미로운 성질이다.(...)
물은 차이가 있을 때는 흐르지 않는 법이 없다. 그러나 평균에 이르게 되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의로움이다.- 81쪽



우리나라 민중의 철학을 대변한 동학의 성자, 해월 최시형 선생의 이 한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보자 : ˝ 하늘과 땅이 모두 하나의 물 덩어리다. 물이라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어미다. 모든 종교의 제식은 청수 한그릇으로 족하니라!˝ -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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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8장에서 물에 대한 주제로 철학을 논하고 있노라니 예전 읽었던 헤르만헤세의 <싯다르타>의 감명깊은 구절이 떠오른다. 책장에 꼽혀 있는 감동의 책. 오랜만에 펼쳐 발췌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강이었어요.(...) 우리는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지요. 보세요, 당신도 이미 강물로부터, 아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 가라앉는 것,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 [싯다르타] 중 바주데바의 말 155쪽



그는 강으로부터 무엇보다도 경청하는 법, 그러니까 고요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영혼, 활짝 열린 영혼으로, 격정도, 소원도, 판단도, 견해도 없이 귀기울여 듣는 것을 배웠다. -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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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보다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간에게 덮어씌워진 겉껍데기를 벗고 무전제의 철학의 길만을 고집하며 달려온 도올,
그리고, 인도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인도와 중국의 철학 및 정신세계에 평생 몰두한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종교와 정신세계를 배웠고 공자와 노자, 장자 등 중국 철학과 사상에 대해서도 깊이 있었던 헤세가 <싯다르타>에서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독자적 신상을 가진 점.

두 사상가는 이 세상과 자기 자신과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그것만을 중요시한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전작읽기에 도전하여 내 인생에서 어떤 중요한 맥을 가슴에 새겨 왔다면,
도올의 작품을 읽어오며 느낀 점은 헤세가 지향하는 다소 이상향적인 꿈들을 생활에서 어떤 식으로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학문의 배움을 어떤 방향으로 평생 익혀야 할 것인지가 그려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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