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수요일

나의 삶에 있어서는 나의 ˝주관적 느낌, Subjective Feeling˝이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객관적 명제들보다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의식주라는 기본적 삶의 모든 명제들을 타자화시킨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명제보다도 훨씬 더 극심하게 일상생활이 타자화되어 있는 것이다. - 8쪽



커피는 생콩을 사서 내가 직화에 직접 볶아먹는다. 그리고 볶은 커피는 미세하게 갈 필요가 없다. 나는 이 통찰을 기본으로 내가 귀국하면 나만의 독특한 커피세계를 구축할 구상을 굳혔다. - 9쪽



10월 10일, 금요일, 아름다운 날씨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시니피앙(음성이미지)와 시니피에(소리심볼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했는데, 시니피앙의 단계에서 그 음성을 시각기호화하는 것이 표음문자라는 것이고, 시니피에의 단계에서 그 개념을 시각기호화하는 것이 표의문자라고 한다. - 20쪽



10월 11일, 토요일, 너무도 아름다운 늦가을 날씨

한국사람들은 짬뽕이나 짜장면이 중국음식인줄 알지만 그런 음식은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중국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에 살던 산똥화교들이 개발한 한국인 입맛화된 특수한 중국요리다. 중국에는 한국식 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짜장˝이란 문자 그대로 ˝된장을 볶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중국의 짜장은 문자 그대로 한국 된장 같은 것을 기름에 볶은 수준의 것이다. 산똥화교들이 개발한 그런 새까만 색깔의 오묘한 짜장은 없다.

˝짬뽕˝만 해도 그것이 중국말인줄 아는데, 중국어에는 ˝짬뽕˝이라는 발음에 비슷하게 가는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짬뽕˝은 한국말인가? 그것은 한국말도 아니다. 그럼 어디서 온 말일까? 그것은 일제시대 때 일본의 속어에서 유입된 것이다. 그 원어는 ˝챤퐁˝이다. 종류가 다른 것을 뒤섞는다는 말이다. 일설에 의하면 19세기 말기에 큐슈나가사키에 살던 화교들에 의해 개발되어 우리나라 인천항 화교방으로 유입되었다고 한다. 하여튼 그것은 일본말이다.

일본에 가면 어딜가나 ˝챤퐁˝이 있고, 뒤섞는다는 의미로 일상회화에서도 사용한다. 그런데 일본식 짬뽕은 그렇게 얼큰하지 않다. 수타면을 사용하는 짬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는 짬뽕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내가 어릴 적 습관대로 ˝벤또오˝라고 마라면 ˝도시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지랄지랄해대는 사람들이 내가 ˝짬뽕˝하면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그것도 왜식이라고 지랄지랄해대야 할 것이 아닌가? 국어 순화주의는 본질적으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순수한 국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음일 뿐이다. 음은 사용해서 의미가 전달되면 그 사명을 다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본질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어는 사용일 뿐이다. 사용해서 의미가 통했으면 사용으로서의 언어는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언어가 이 세계의 정확한 그림일 수 없다고 말한다(후기 비트겐슈타인) - 27쪽


사실 요즈음 세상에서 ˝외식˝이란 어떻게 맛있게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사악한 화학조미료를 덜 처먹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셰프가 대세인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셰프가 만든 음식은 자연미가 부족하다. 전 인류에 엠에스지 msg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화학조미료 때문에 전통적 젓갈이나 발효음식이나 향료의 지혜를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 28쪽




10월 14일 화요일, 개임

구조주의는 이와 같은 인간의 사고나 사회나 국가의 권력이나 언어나 도덕이나 가치관 같은 그 모든 것의 구조, 그 설계도면을 알고 싶어한다. 그 구조를 파악하는 날카로운 시각, 겉으로 부분적으로 드러난 감각적 체험이 아닌 어떤 통찰력, 그 통찰력의 방법론을 제각기 제시한 사상가들이 모두 크게 보아 구조주의라는 카테고리 속에 들어올 수 있다.- 39쪽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의 기나긴 역사가 플라톤의 각주일 뿐이라는 유명한 얘기를 했지만, 나는 서양철학 이천사오백년의 역사가 파르메니데스 철학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데리다가 간파했듯이 서양철학의 역사는 존재론의 역사이다.
˝있음의 형이상학˝의 역사이다. (...)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기실 매우 황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인의 사유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 42쪽



데리다의 대 binary opposites의 문제의식으로 말하자면 서양철학은 항상 존재를 센터에 놓고 생성을 변방화시켰으며, 불변, 초월, 이성을 센터에 놓고 변화, 내재, 감성을 변방화시켰다. - 45쪽



맑스를 얘기하면 우리는 곧 유물론적 변증법이나 그것의 발전단계도식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의 필연적 도래라는 정치적 이론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의 가장 큰 혁명은 자아라는 개념을 자기가 필연적으로 속할 수 밖에 없는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의식의 주체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코기탄스의 개체성을 해체시켰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는 생각하는 자아가 아니라 노동하는 자아, 생산하는 자아, 행동하는 자아가 된다. - 46쪽



맑스, 프로이드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로서 인간이라는 주체를 지배하는 가치관, 도덕의식이 결코 나의 주체적 결단의 소산이 아니라, 외적 규범에 불과하다는 것을 외친 사람이 바로 니체다. 니체 하면 우리는 ˝신은 죽었다˝라든가 ˝초인˝을 외친 사람으로 기억하지만 그보다는 ˝도덕의 계보˝를 주장한 사상가로서 기억하는 것이 보다 니체를 정확이 이해하는 첩경이다.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도덕의 가치, 당위적 명령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시대나 지역의 고유한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니체의 수만은 저작 중에서도 그의 <도덕의 계보>를 가장 탁월한 수작으로 평가한다. - 47쪽



도덕의 계보를 펼치면 니체의 서문 첫 줄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자기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 본적이 없다. 그리고 서문 제6단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도덕적 가치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가치들의 가치는 우선 그 자체로 문제시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러한 가치들이 성장하고 발전해온 조건과 상황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얘기는 미셸 푸코의 ˝지식고고학˝의 주요 명제로 들린다. 푸코의 사회철학은 니체의 계보학을 계승한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동시대인(현대인)은 억측에 의한 판단의 포로일 뿐이다. 그 억측, 자기들에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가치판단이나 심미적 판단이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형성된 편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류일반에게 보편타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동시대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끔찍한 바보일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현대인은 바보가 되었는가?(...)
니체의 위대함은 누구보다도 앞서 당대 출현하고 있는 20세기의 대중사회(근대적 시민사회보다 더 어드밴드된 개념)를 예언적으로 비판했다는 데 있다. 대중이란 ˝짐승의 무리˝와 같으며, 그 특징이란 균질적 행동패턴을 갖는다는 것이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균질성이 바로 노예의 특징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동일하게 되는 것 자체에서 행복과 쾌락을 찾는다. - 50~51쪽



이날 강의를 위하여 내가 참고한 교재가 하나 있다. 동경대학 불문학과를 나온 학자인데, 우찌다 타쯔루 교수가 쓴 <코를 골면서도 배울 수 있는 구조주의>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우찌다는 서양의 20세기 사조를 아주 쉽게 잘 풀어 말해주었다. 철학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한계도 있으나 철학전공자의 현학주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책이 이경덕에 의하여 <푸코,바르트,레비스트로스,라캉 쉽게 읽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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