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계절 (리커버 에디션)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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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작가의 [각각의 계절]을 읽었다. ‘사슴벌레식 문답’, ‘실버들 천만사’, ‘하늘 높이 아름답게’, ‘무구’, ‘깜빡이’,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기억의 왈츠’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수상작품집에서 몇 달 전에 읽었던 터라 대강의 내용이 기억났지만, ‘실버들 천만사’ 또한 수상작품집에서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도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과 3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망각의 자리를 마련한다니, 어쩌면 다시 몇 년이 지나서 이 소설집을 다시 읽는다면 분명 또 다른 새로움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놀라운 가독성과 더불어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화자의 입장에 순식간에 몰입이 되어, 마치 나 자신이 주인공에 빙의라도 된 듯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음에도 무작정 응원하고 동의하는 만드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감탄했지만, 어떻게 이토록 한 사람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 놀람을 금치 못하게 된다. 특히나 주인공이 겉으로 내뱉지 못하는 감정의 흐름을, 때로는 본인 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내면의 변화를 마치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들여다보는 것처럼 독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낱낱이 드러내어 준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재앙과도 같은 불운이 연속된 비참한 운명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딱히 주인공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의무론을 대두시키는 상황 설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화자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인 것처럼 안타깝고 답답하고 무력하게 느껴지곤 했다. 섣부른 결론일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 보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모진 내면의 고통을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에 안쓰럽지 않은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을까란 인류애가 조금씩 싹트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여러 단편에서 저자의 연령대와 비슷한 중년을 넘긴 여성이 등장한다. 옛날 같으면 환갑 잔치를 성대하고 치르고 여생을 마무리하는 시기이겠지만 이제는 환갑이 넘긴 사람을 아무도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회적인 노동의 주역으로서는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때이지만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길고도 길다. 어쩌면 그 시기가 배우자와 자녀와 좀 더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한 때가 아닌가 싶다. 생계를 유지하는 데 전력을 다하느라, 자녀 양육을 위해 정신없는 시간을 견디느라, 사회적 노동을 통해 자아 실현하고 분투하느라 가족임에도 서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력이 없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생각보다 긴 시간을 그렇게 혈연으로 얽힌 범주의 힘만 믿고 방치한 후폭풍은 예상외로 강력하다. 

‘실버들 천만사’에서 엄마 반희와 딸 채운은 둘 만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채운은 엄마에게 여행하는 내내 서로 반희씨, 채운씨라는 호칭으로 부를 것을 약속한다. 반희씨는 딸의 제안에 반색하며 마치 서로를 존중하는 친밀한 직장동료와 티티카카를 나누는 것처럼 여행을 즐긴다. 소설에는 반희씨가 채운이 고2 때 왜 이혼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채운이 어릴 때 엄마의 하루 동안의 가출을 기억하며 언젠가 다가올 엄마의 부재를 두려워 하게 되는 미래완료에 대한 거부감의 증세를 드러나게 된다. 딸과의 즐거운 여행길에 채운의 이상 증세를 눈치 챈 반희씨는 일평생을 눈치보며 살아왔던 자신의 습관적인 행동을 딸에게 물려준 것을 안타까워하며 딸이 더 이상 자신의 부재로 다가올 미래완료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고자 이렇게 다짐한다. 

“지금껏 나는 무슨 짓을 하며 살아온 것일까. 반희는 생각했다. 두려워 도망치고 두려워 숨고 두려워 끊어내려고만 하면서. 채운과 이어진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끊어내려던 게 채운에게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을 엉키게 하는 짓이었다면. 지금껏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온 것일까.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78-79)”

‘기억의 왈츠’에서 화자인 나는 동생 부부와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을 갔다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30년이나 지나버린 어쩌면 화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살기를 선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를 아주 잠깐 동안의 만남에 대한 기억이다. 그렇게 머나먼 과거의 일이 불현듯 익숙하게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방문하게 되었을 때 마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듯이 하나의 일련된 필름들이 돌아가듯이 재현될 수 있는 것일까? 화자는 대학원생 시절 만났던 경서와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경서와 어떻게 가까워지게 되었는지, 경서와 이 숲속 식당에 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서와 왜 연락이 끊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경서를 만나는 대학원 시절의 화자는 막말로 되는대로 살아보자는 삶에 대한 희망이나 미련이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그 나이대의 허세와 만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경서가 화자를 대하는 태도는 나중에 10년 동안 써온 자신의 일기를 보낸 것으로 보아 정반대가 아니었나 싶다. 경서가 보낸 일기를 읽지 않은 화자의 모습에 화가 난 경서는 화자의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 인해 엄마와 오빠와 의절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연락이 끊기게 된다. 화자의 기억 속에 자리한 경서와의 추억은 철없던 자신의 과거을 잊고자 했던 부단한 노력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게 하지만, 이내 숲속 식당의 방문으로 인해 떠오르게 된 경서의 기억이 경서가 보낸 편지에 담겨 있던 숨겨진 의미의 뜻을 일깨워준다. 30년이나 지나버린 이 시점에서 경서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그때는 내가 편지를 너무나도 늦게 읽어서 라는 구차한 변명을 해야하지 않을까란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운이 좋다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이 오리라고 기대할 수 있게 해준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사람은 나와 춤추면서 넌 거미가 아니라고 ,너는 지금 스스로에게 덫을 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작고 딱딱한 결정체로 만족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더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할 수 있다고, 이 그물에서 도망치라고 말해주었을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그 뜻을 알아채고 울었을까. 수박 앞에서가 아니라 일기 상자 앞에서,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숲속 식당에 가자는 편지를 읽고 내가 울 수도 있었을까.(241)”

#권여선 #각각의계절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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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
김홍신 지음 / 해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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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 작가의 [죽어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를 읽었다.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등 인간의 피부색깔로 구분하는 이름에 적인종이라는 낯선 구분이 등장한다. 말 그대로 빨간색 인간이라니, 조금만 더 유추해보면 바로 아직도 부적절하게 남용되는 빨갱이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 전쟁을 겪은 세대는 분명 빨갱이라는 말을 들으면 적지 않은 감정의 파고를 드러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의 경험이 몸속 깊이 새겨지게 되어, 마치 반작용처럼 반응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북한과 대치 중인 분단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기에 공산주의적 이념에 대한 경계와 분노는 현재 진행형이다. 가끔은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며 빨갱이 프레임을 씌어 안보의 위협을 논하며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이들이 지긋지긋하기는 하지만, 언제쯤 우리나라는 평화를 이루어 맘 편히 왕래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소설의 주인공인 한서진은 어찌보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가장 서슬 퍼런 시기에 철책을 지키는 소대장으로서 휴머니즘적인 행동으로 인해 국가보안법과 방공법의 희생양이 된 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권을 잡기 위해 북한의 위협적인 전략을 이용할 때가 많았으니, 군부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적인 이념에 대한 강력한 법 적용이 유효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고문과 폭행을 당해 후유증에 평생을 고생하거나 연좌제의 수렁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본보기를 보여줘 두려움에 사로잡힌 대중들은 쉽사리 정의를 외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부당한 권력을 얻은 이들의 만행을 지켜볼 수 많은 없었던 이들이 총과 칼에 맨 몸으로 부딪혀 민주화를 이뤄냈고 그렇게 피흘린 이들 덕분에 우리는 잃어버린 정의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어딘가에 한서진과 같은 기구한 운명을 살아온 이들이 있을 것이다. 사소한 실수가 억울한 누명이 되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본보기가 될 수 있다면 불의한 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 거짓 증언을 내세워 영어의 몸을 만들고, 그 안에서 불법적으로 감행된 지속적인 폭력과 폭언은 온정한 정신을 말살시켜 한 사람의 모든 삶을 박살내고 말았을 것이다. 한서진의 비극적인 행로는 그의 사연을 들은 누구라도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심지어 아내의 배신과 자신을 그렇게 만든 원수가 자신의 딸을 키우는 아비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 방도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한서진이 철책을 지키는 소대장으로 적군을 사살하고 그의 명복을 빌어 준 후 포상과 훈장이 아니라 보안대에 끌려서 심문을 받는 대목에서 그의 유도리 없는 대답을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바보같이 느껴졌다.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한다면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보안을 유출하는 대답을 하는 장면 또한 누군가 파놓은 덫에 스스로 끌려가고 있다는 어리숙함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서진이 이렇게 인간의 순수함과 강직함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약삭빠르고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길 줄 아는 노련한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소설의 향방은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으로 치달았을 것이고 저자가 한서진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길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저자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제를 잇는 것처럼 결국 한서진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서 그리고 친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가 남긴 유작을 발표하는 딸 자인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사랑과 용서 없이는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은 먼지로 돌아갈 인간의 육신도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후대에게 각인시킬 사랑과 용서의 행위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 작품이었다. 


#김홍신 #죽어나간시간을위한애도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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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이주혜 지음 / 에트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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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 작가의 [눈물을 심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를 읽었다. 얼마 전 읽었던 저자의 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에서도 느꼈지만,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한 번에 외워지지 않고 몇 번을 곱씹어 봐야 어느 정도 입에 붙는. 하지만 막상 페이지를 열게 되면 저자의 독특한 세계가 순식간에 눈에 들어와 놀라운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나 이번 산문집은 저자가 마흔이 넘어서야 작가로서의 활동을 했다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대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어야, 아니 문학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대단해야 이런 감상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가들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읽노라면 가끔씩 한 편의 단행본을 출간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드러날 때가 있는데, 독자로서는 빠르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일주일 정도면 다 읽게 되는 그 책 한 권을 위해서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송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너무나도 쉽게 그들의 노력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느 소설의 대화에서 ’요즘 대체 책이란 걸 읽는 사람들이 있기나 하느냐’는 자조적인 한탄을 읽을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렇기 때문에 읽고 쓰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세상이기에 일상을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저작을 더욱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의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작가의 사후에도 언젠가 남겨진 책을 읽을 누군가가 그 작가의 생각을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잣대에 맞춰 자기 정신의 크기를 가늠하길 거부했던 앨리스. 오로지 모든 것에 다 맞는 하나의 크기를 가진 그의 정신은 고통 속에서도 끝내 펜을 내려놓지 않고 삶과 죽음을 사유했고 사후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상을 전하고 있다.(114)”


<1부 눈물은 떨어지지만 동시에 심어진다>에서는 저자의 자전적인 내용이 많이 언급된다. 뒤늦게 전업작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일부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음과 아들을 낳지 못해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아왔던 어머니와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숙명일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포함한 가족의 내밀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고백한다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혈육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투사가 불가능할 수도 있고, 부모이기 때문에 죽음과도 같은 상흔을 다시 끄집어 내는 것은 몹시도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 개인의 역사의 순수한 기록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투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며 공감할 수 있는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공통된 영적인 영역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가 겪게 되는 상실의 슬픔과 덧난 상처들을 통속적인 위로의 말과 감성팔이처럼 억지 눈물을 자아낼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굴하지 않도록 아주 아주 공을 들인 섬세한 손길로 독자를 어루만지며 저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부 언어가 없는 곳에 빛을 비추는 사람>에서는 세계 각지의 유명한 소설에 대한 짧은 줄거리와 저자의 일생을 견주며 하나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내용이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주제인 가부장적 남성주의 세계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여성의 존재와 문화, 계급, 젠더의 차별로 희생양이 된 이들을 소재로 한 문학에 대해서 언급한다. 안타깝게도 저자가 언급한 문학작품들 중에 읽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니 나는 그동안 대체 무슨 책을 읽었던 말인가’란 생각과 동시에 ‘아니 대체 세상에 글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는 말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에 서너편의 영화도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책 읽기를 좋아해도 하루에 서너권의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매일 매일 엄청난 양의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오니 세상의 모든 작가들의 책을 섭렵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외국 작가들의 책을 그동안 너무 등한시했구라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덕분에 신간이 나올 때 제목만 눈여겨 봤었던 작가들의 책 제목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특히나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다른 책에서는 보기 힘든 저자의 일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그 작가의 책을 읽지 않았는데도 작품은 곧 그 작가를 대변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결국 저자가 소설의 간단한 줄거리에 이어 작가의 생애를 덧붙여 설명한 것은 허구의 일종인 소설이 결코 우리 삶과 동떨어진 허황된 세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개개인이 영원히 공동체의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야기의 힘 때문이고, 그 이야기는 문학이라는 옷을 입고 작가의 사후에도 영원히 지속되며 누군가의 삶이 전복될 사상을 전해주니, 문학이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눈물을 심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깨진 거울을 겁내는 우리에게 나는 오늘 화환처럼 무지개를 걸어주고 싶다. 산다는 게 다 그렇다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내느라 오늘도 모진 애를 쓰고 있으므로, 어린 날의 낙하는 크느라 그런 거라지만 오늘 우리는 끝내 추락하지 않기 위해, 기어이 생존자가 되기 위해 낚시바늘 몇 개를 아래턱에 매달고도 숨을 쉬고 있지 않은가.(45)”


“돌봄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혜가 아니다. 아래에서 위로 치받고 올라가는 버거운 저항이어서도 안 된다. 당연하게 서로 의존해야 하고 의존한 ‘덩어리’로 자립해야 한다. 돌봄을 경시하는 태도는 모든 것을 자본의 논리에 내맡기는 살벌한 정글 수준으로 문명을 퇴보시키겠다는 것과 같다. 돌봄은 모든 인간의 존재 조건이어야 한다. 그 당연한 전제를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 쓰고 알리는 것부터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미약한 시작이 커다란 원을 만들어 활기차게 순환할 때까지.(189)”


#이주혜 #눈물을심어본적있는당신에게 #에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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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위너 1~2 세트 - 전2권 베어타운 3부작 3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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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배크만의 [위너 1-2]을 읽었다. 스웨덴이라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북유럽 국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그런지, 아님 하키를 빼놓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인지, 요즘 북유럽이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혹한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뉴스 때문인지 읽는 내내 나도 어딘가의 빙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베어타운과 헤드라는 하키팀을 둔 스웨덴 북쪽의 어느 시골 마을이 반드시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켰고, 작가가 마치 하늘 위에서 그 지역의 전방위를 내려다보며 그 마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묘사한 것처럼 느껴졌다. 벌써 6년이 되어가는 베어타운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를 읽게 되었을 때, 이 장구한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냥 추운 나라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하키에 열광적인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얼마나 옥신각신하는지, 그 안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베어타운]은 주인공 가족인 페테르 안데르손의 딸인 마야 안데르손이 파티에 갔다가 베어타운 하키팀의 기대주인 케빈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급진전하게 된다. 


십대 청소년이 범한 성폭행이라는 다루기 쉽지 않은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이, 더불어 북유럽이라고 하면 막연히 고소득 국가에 복지가 가장 잘 준비된 나라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그런 흉악한 범죄률이 몹시 낮지 않을까란 아무 근거없는 믿음을 보기좋게 부숴버렸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입에 올리기 조차 꺼려지는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함과 무력함이 밀려오는 사건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기에 그 쉬운 선택을 해왔던 지난날의 역사를 보기좋게 비웃는다. 베어타운 시리즈를 읽노라면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낱낱이 들춰내는 것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베어타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의 제목이 [위너]인 것은 아이스링크 위에서 상대편을 무참히 넘어뜨리고 퍽을 세차게 때려 골을 넣어 큰 스코어 차이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정체성이 드러나 마을과 하키를 떠난 벤이가 무참히 가해지는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희생이라는 어머어마한 사랑만이 가능함을 몸소 보여주며 진정한 위너임을 온 마을에 알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이야기라 그런지 이번 작품에는 여럿 인물들의 죽음이 그려진다. 심지어 전직 A팀 코치였던 수네가 기르던 개이자 베어타운 하키팀의 마스코트였던 ‘탕’이 쥐약이 들어간 간 파테를 먹고 죽는 일까지 벌어진다. 펠센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맥주집을 운영하던 라모나는 집에서 고요히 죽음을 맞이하고 라모나가 자식처럼 생각했던 불량배 티무를 비롯한 검은 자켓의 무리들은 그녀의 죽음을 몹시도 슬퍼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고 전편에서는 주이공인 페테르와 각을 세우며 갈등의 대척점에 있던 티무의 무리들이 오히려 이번 시리즈에서는 페테드를 도와주는 관계의 전복이 일어난다. 라모나의 죽음과 펠센이라는 맥주집은 그냥 무턱대고 시간을 죽이는 공간이 아니었음을 페테르와 티무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야기는 마야의 그 사건이 벌어지고 2년 반이란 시간이 지난 이후 라모나의 장례식을 계기로 집을 떠났던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면서 시작된다. 마야의 사건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된 후 온갖 구설수가 난무하는 가운데 마야를 지키기 위해서 아빠 페테르와 엄마 미라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마야는 자신을 온전히 내버리지 않게 되고,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천킬로나 떨어진 남쪽 대도시로 떠나게 된다. 케빈과 단짝이었던 벤이는 마야 사건으로 동성애자임이 드러나 아시아 지역을 떠돌며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야가 피해자임을 증명했던 용기 있는 목격자 아맛은 NHL에 드래프트에 떨어지면서 하키를 손 놓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베어타운 하키팀을 중심으로 삶의 기반을 삼았던 10대 청소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계기로 성장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전작에서는 주로 베어타운 하키팀을 이루는 이들의 이야기가 주된 흐름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베어타운과 영원한 라이벌인 헤드팀의 마을 이야기도 큰 축을 이루고 있다. 베어타운팀에 페테르와 미라와 마야가 있다면 헤드팀에는 요니와 한나와 테스와 동생들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족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양 팀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봉기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족이 이렇게 양쪽 마을의 정신적인 지축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선한 인간의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누군가 아주 오랜시간 묵묵히 몸으로서 올바른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면 설사 불량배와 깡패짓을 일삼던 이들까지도 결국은 그 선한 누군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심지어 그 선한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존경이 담긴 시선마저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베어타운의 티무가 헤드의 레브가 그렇게 페테르와 요니를 도와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어떤 요란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은 문 틈새과 열쇠 구멍으로 쉼없이 새어나오기에, 그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게 새어나오는 악을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벤이가 보여주었던 사랑이고 남겨진 사람들은 벤이를 그리워하며 또 다른 벤이의 모습으로 사랑이라는 선물을 누군가에게 증여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마테오가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어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의 무관심과 더불어 누나 루트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이코 로드리와  로드리의 성폭행을 방관한 옹알이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다. 마테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언가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소속감이었다. 마테오가 추운 겨울밤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져 체인을 갈아끼우며 피를 흘려도 아무 관심이 없다면 결국 마테오는 레브에게 총을 구하러 가게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은 소속될 수 있는 집단이다.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들과 다른 아이가 상처받는 이유다. 어느 누구와도 어린 시절을 공유한 적이 없기에 학교에서 찍은 사진을 나중에 보아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이. 사람들의 울타리 밖에 있으면 너무 추워서 혼자 얼어 죽을 수도 있다.(2-233)”


“우리는 악을 물리칠 수 없다. 우리가 건설한 세상의 가장 견딜 수 없는 점이 그거다. 악은 근절하지도 어디 가두지도 못한다. 그걸 없애겠다고 폭력을 쓰면 쓸수록 악은 문 틈새와 열쇠 구멍으로 스며나오며 점점 더 강력해질 뿐이다. 악은 우리 안에서 자라나기에, 어떨 때는 심지어 우리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 안에서, 또 어떨 때는 심지어 열네 살짜리의 안에서 자라나기에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것에 대항할 무기가 없다. 그것에 대처할 수 있도록 사랑이는 선물을 받았을 뿐이다.(2-486)”


#프레드릭배크만 #위너 #다산책방 #베어타운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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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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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작가의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읽었다. 고독과 침묵은 훈련이 필요하다. 시간이 참 빨리 간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다가도 갑자기 혼자 남겨졌을 때 당황스러운 마음은 잠시 나를 훓고 지나갈 뿐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아무런 방비책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못견디게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고독과 침묵이다. 사방이 가로막힌 작은 독방에 감금되기라도 한 것처럼 째깍째깍 초침이 지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세차게 머리를 뒤흔들며 이건 정말 아니라고 부정의 독설을 날린다. 그래서 문을 걷어차고 나가 세상에 온갖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알몸이라도 드러내보여줄 것처럼 낱낱이 마음의 이야기를 토해내리라 다짐하지만, 막상 마주한 이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다가 허무와 공허가 물밀듯이 밀려와 다시금 나를 유폐시키려 한다. 고독과 번잡스러움, 침묵과 소음은 짝을 이루어 나를 저울질한다. 어느 쪽으로 가든 나의 선택으로 인해 삶은 변화된다. 


참으로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랜 훈련으로 고독과 침묵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하더라도 단 하루만의 번잡스러움과 소음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고독과 침묵은 다시금 처음의 고통의 순간으로 나를 되돌려 놓는다는 것이다. 마치 지난 나의 모든 훈련이 헛되기라도 한 것처럼. 에라 모르겠다의 심정으로 어차피 이렇게 되돌려지게 될텐데 그냥 범부처럼 뇌피셜을 마구마구 내뱉으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란 체념에 이른다. 하지만 그 자포자기의 마음은 왜 이렇게 오래가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 또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금방 겁이 나서 다시금 고통의 시간으로 나 자신을 초대한다. 실패와 낙담의 연속이더라도 다시금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기꺼이 마주하게 된다. 


저자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수도원 기행을 꽤 감명깊게 읽었던 터라 이번에는 어찌보면 성지순례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을 방문했다는 예고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저자도 언급했듯이 이번 책은 세 번째 수도원 기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자의 신앙을 고백하는 문장들이 빼곡히 차 있다. 특히나 최근 가자 지구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의 오랜 갈등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기에, 예루살렘이 왜 그렇게 서로 다른 종교에 가장 중요한 성지인지부터 그리스도교의 시점으로 예수님의 삶과 연결된 굵직한 사건들을 기념하는 장소에 대한 묵상으로 가득하다. 사실 순례를 떠나게 되면 수천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장소가 주는 신비한 느낌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의 장소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그때의 사건을 되새기며 예수님의 말씀을 곱씹어 보면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특히나 저자가 예루살렘과 나자렛을 오가며 들려주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샤를 드 푸코 성인의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하기 위한 용기의 실마리를 건네 준다. 단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엄청났기에 가능했던 고통으로의 투신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하는 성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저자의 시선과 묵상으로 잠시나마 함께 그곳의 공기를 마시는 듯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나의 삶의 목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원론적이고 근원적인 이 질문 앞에서 성인들의 삶의 흔적들은 이 물음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지는 것을 포기하지 말 것을 권한다. 


“그저 어제처럼 사는 것, 내게 젊은이들보다 알량한 권력이 약간 있어, 어제처럼 살아도 나는 불편하지 않고 나만 불편하지 않은 것, 이것이 늙음이다. 죽음보다 못한 늙음을 우리는 흔하게도 본다.(73)”


“너의 자세는 무엇이냐? 이 삶을 바라보는 너의 방향은. 그가 성자가 된 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신을 만나 황홀한 접선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통은 성자가 아니라도 온다. 상처도 온다. 가난도 오고 멸시와 따돌림도 온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선택하는 것이다. 성자가 될 것인지, 희생된 비참한 늙은이가 될 것인지.(193)”


#공지영 #너는다시외로워질것이다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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