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지나가다 소설, 향
조해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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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었다. 소설, 향 시리즈 8번째 작품이다. 한파가 몰아닥치는 시기라 그런지, 소설의 소제목인 동지가 가까워서 그런지, 엄마를 떠나보낸 소설 속 주인공 정연의 마음이 너무나도 깊이 와닿아서 그런지 나 또한 깊은 겨울을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찬바람이 부는 쌀쌀한 온도가 아니라 잠시도 밖에 서 있기 힘든 매서운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시기가 오면 마음이 더 쓸쓸해지는 기분이다. 몸의 어딘가에도 서리가 맺히고 점점 굳어지는 것처럼 삐그덕거리는 것 같은 착각은 행여나 비슷하게 굳어진 무엇과 부딪혀 깨지기라도 할까봐 더욱 몸을 사리게 만드는 것만 같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얼게 만들 정도로 추워 모든 기능을 멈추게 할 것만 같지만, 실상 두터운 얼음 밑에서도 생명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조금씩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정연을 위로하는 "모든 건 잊힌다고, 세상에 잊히지 않는 것은 없다고."라는 엄마의 말처럼, 세상의 절대 강자인 시간은 무던히도 흘러가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든 쓸쓸함과 허전함을 밀어내고 만물의 생명을 다시 숨쉬게 만드는 촉촉한 비를 내리는 때를 가져온다. 그렇게 물기를 흠뻑 머금은 것들은 새싹을 튀우며 언젠가 발화할 아름다움을 한껏 웅그린 채 감춰두고 고이고이 키워낸다. 서울에서 분주하게 편집 일을 하던 큰 딸 정연은 엄마의 투병과 죽음으로 엄마가 칼국수 가게를 하던 집으로 내려와 엄마의 흔적을 붙잡고만 싶어 한다. 


누군가 돌볼 사람이 있다는 것은 슬픔과 무력의 늪에서도 스스로 걸어나갈 수 있는 힘을 북돋워주기에 정연의 동생인 미연은 언니를 혼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못내 걱정스럽지만, 정연은 엄마가 키우던 정미라는 개를 산책시키며 조금씩 살아갈 의지를 보듬게 된다. 그리고 엄마가 남겨둔 김치를 덜어내 칼국수를 먹으며 데워진 몸은 남겨진 이들의 시간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엄마가 남겨준 것은 머물 집과 옷가지와 털신만이 아니라 정미와의 산책 그리고 정미의 보금자리를 맡긴 목공소 주인 영준과의 만남 또한 해당되었다.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영준이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한적한 곳에 취미생활로 하던 목공소를 열게 된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되는데,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영준의 사정이 드러나게 되고 영준의 가슴 아픈 고백과 다현이라는 소녀가 머물던 자리를 방문함으로써 정연 또한 엄마와의 이별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하던 일에 익숙해지면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충분히 계획하고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무리 철두철미하게 준비한다 하더라도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이별의 시간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무상함,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무력함의 긴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또한 나의 의지와 노력과는 무관하게 선물처럼 다가온다. 마치 내가 흘려온 눈물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듯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따스한 손길과 손수건의 부드러운 만남은 잃어버린 끈을 다시 이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어 준다. 


"칠십일 년 동안 엄마의 몸 안에 축적된 시간과 지상에는 더 이상 흔적을 남기지 못할 미래으 ㅣ시간까지 함께 묻혔다. 엄마의 삶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과 인연을 맺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미완성된 역사가, 하지 못한 말과 가보지 못한 곳, 끝내 이루지 못한 일들까지...(41)"


"집으로 걸어가는데 바람 끝에 둥글고 나른한 온기가 배어 있는 게 느껴지긴 했다. 겨울에서 봄 사이의 국경을 지나가는 기차 안의 승객이 된 것만 같았다. 기차는  느리게, 그러나 쉬는 일 없이 규칙적으로 달릴 것이고 겨울 나무와 봄 나무가 섞여 있는 기차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주머니 안을 을 뒤적이면....

시곗바늘은 없지만 타이머는 내장된, 그러나 그 타이머가 언제 멈추는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시계가 내 손에 딸려 나올 터였다.(131)"


"언제나 그랬다. 조해진의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젠가 크게 발을 헛디뎌 무너져 내렸을 때 스스로 일으켜 세울 힘을 비축해두는 일이고, 적대적인 얼굴을 하고 불쑥 나타난 타인 앞에 잠시 멈춰 그가 나쁜 건지 아픈 건지를 헤아려볼 수 있는 숨을 준비해주는 일이고, 미래로 함께 나아가야 할 이 시대의 가장 약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들어두는 일이다.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으면서는 이미 아프게 겪었던 죽음들을 다시 제대로 애도할 기회를 갖는 동시에, 언젠가 이런 커다란 상실을 마주했을 때, 시간을 들여 요리한 칼국수를 맛보고 씹고 삼키는 행위에만 온전히 몰두하며 추상적인 고통이 마음에 그어놓은 어지러운 선들을 지워내고 구체적인 감각으로 삶을 채워가기 시작했던 정연을 떠올리며 어떤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쌓아둔다. - 김혼비(6)"


#조해진 #겨울을지나가다 #소설향8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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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사생활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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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작가의 [취미는 사생활]을 읽었다. 은행나무 시리즈 N 15번째 작품이다. 거주 불안. 영혼까지 끌어모아서라도 자가를 마련하지 않으면 영원히 집주인에게 질질 끌려다닐 것만 같은 막막함을 하염없이 퍼붓는 시대이다. 은협의 가족이 그렇다. 은협의 남편 보일씨의 직업이 무엇인지, 벌이는 얼마나 되는지 나오지 않았지만 아이가 넷인데도 아들 둘을 태권도 학원에 보내고 방 3개짜리의 전세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보일이 은밀한 취미생활을 시작하며 숨통을 틔우고 싶게 만든 이유 중의 하나는 빚을 져서 라도 아파트를 구매하자는 의견에 은협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은협이 마음을 바꾼다 하더라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져야만, 아니 대출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를 정도로 아파트 값은 올랐고 은협의 가족은 영원히 전세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집주인이 아들에게 신혼집으로 내줄 것이니 어서 빨리 집을 나가라고 독촉한다. 집주인이 기존 전세세입자에게는 5% 이상의 전세비를 올릴 수 없기에, 새로운 세입자를 찾으려는 꼼수인 것인지 진짜로 아들의 신혼집을 마련해주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자기가 들어와 살 거라는 말로 세입자를 내보내고 월세로 바꾸어 이득을 취하려는 경우가 더 많지만, 은협은 집주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낼 방도가 없고, 괜히 보일러를 교체할 것인지 물어보려고 전화해서 이런 파국을 맞게 된 것이라 자책한다. 은협에게 남은 선택은 서울 근교의 지방으로 이사하던지, 서울에 남으려면 빌라로 이사하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빌라는 너무나도 싫었다. 


은협의 경우처럼 초등학교 남학생 두 명의 자녀와 아직 곧 취학을 앞둔 유치원생 소연과 갓난 아기 민희까지 네 명의 아이를 두었다면, 소연이 피가 날때까지 긁어서 피부과를 데리고 가는 동안 민희까지 돌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갓난아이를 잠시라도 맡아준다면 훨씬 더 수월하고 빠르게 소연이의 진료를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소설의 화자인 ‘나’는 은협을 도와주는 착한 이웃으로 등장한다. 23층짜리 아파트 맨 윗층에 사는 은협과 바로 아랫층에 사는 ‘나’는 민희를 돌봐주다가 소연이 이모라고 부르며 애착을 갖게 되면서 언니, 동생 사이로 가까워지게 된다. 화자가 나중에 은협의 전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자신의 집을 은협에게 전세로 내주고 자신은 은협이 세입자로 있던 곳에 새로운 세입자로 들어가는 나름의 희생 정신을 발휘한 결단을 내리며 농담처럼 층간 소음을 복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은협의 미안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애써 그럴 필요 없다고 통 큰 결단을 내린 사람의 말처럼 들리지만, 결말에 이르게 되면 화자가 농담처럼 던지 말은 진심이었을지도 아니 그런 복수의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사기를 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화자가 은협네 가족을 도와주면서 은협의 남편 보일의 은밀한 사생활을 알게 되었고, 여장을 즐기며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던 보일은 아내와 화자의 습격으로 인해 모든 게 들통나고 난 후에야 자신이 원한 것은 여장이 아니라 잠시도 혼자 일 수 없는 집에서의 탈출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보일의 무책임한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기에 보일이 땅을 팔라는 제안에 화자가 동의한 것 또한 남편을 갑작스럽게 잃은 이가 은협의 가족을 통해 위로받고자 하는 선행이 아니었을까란 기대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화자의 기인한 행동들과 현 프로라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얼핏 화자가 남편의 죽음으로 삶에 대한 모든 기대를 내려놓았고 서서히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결국 화자 또한 비참하고 어이없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지만, 남겨진 은협의 가족은 그리고 소연이 착한 일을 하고 받은 10원짜리 동전 50개를 모아 마지막 선물로 전해준 새콤달콤은 너무나도 가슴 아리는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장진영 #취미는사생활 #은행나무시리즈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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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레퓨테이션: 명예 1~2 세트 - 전2권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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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본의 [레퓨테이션: 명예 1-2]을 읽었다. 띠지에 쓰인 “당신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이 강렬하게 다가오며, 과연 어떤 내용이 폭풍처럼 휘몰아칠지, 어떤 반전이 도사리고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눈앞에 법정 드라마 몇 회가 펼쳐지는 것처럼 긴장감이 넘치며 과연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모른 채 두 손을 모으고 엠마 웹스터의 무죄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진실이 밝혀지고 나니 과연 엠마는 자신과 딸 플로라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냈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인간이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 이후에도 명예가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 일이 가능할까. 엠마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 검사측에 해당되는 영국의 기소청 변호사가 엠마를 살인자로 만들기 위해 배심원단에게 마이크 스톡스와 주고 받은 문자 내용을 보여주는 장면은 개인의 사적 영역이 영원히 보장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지껄인 욕 몇 마디가 나중에 살인자로 판결받을 지 모를 결정적인 증언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좋은 감점을 나누었던 상대가 갑자기 나를 배신하고 이용하려고 할 때 조차 자신이 불리해질 것을 예상하고 조심히 문자를 나누거나 응대할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결국 엠마 웹스터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인간은 누구가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단면이 존재하며, 많은 이들에게 공개가 된다면 마치 낙인이 찍힌 것처럼 괴로운 일이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나 엠마가 딸 플로라를 지키기 위해서 평소와는 다른 보호본능이 폭력적인 언행을 드러내도록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엠마의 모든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마이크의 죽음으로 더군다나 엠마가 재판에 이르기 전까지 수차례의 거짓말을 반복하면서 엠마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증인과 증거가 없는 정황들은 엠마를 사면초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인공인 엠마 웹스터는 영국의 노동당 하원의원으로 나온다. 아무리 엠마가 에이미법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 노동당의 투사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택시도 타지 못하고 비가 오는 날 자전거로 퇴근하는 모습이나, 다른 여성 의원들과 함께 공동 소유의 집에서 기거하는 모습등은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과 너무 달라서 조금 놀라웠다. 더군다나 엠마가 지역 민원을 위해서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지만 그곳에서 혹시나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도주로를 확보하거나 염산 테러에 대비해 물병을 놓아두는 모습 또한 우리나라의 의원도 과연 이런 위협을 느끼며 의정활동을 하는 것일까란 의구심이 생겼다. 엠마가 각종 폭력적이고 퇴폐적인 문구로 공격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을 호소하는 의원에게 안전이 보장된 거주지도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놀랍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의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우밖에 받지 못하는 엠마와 같은 영국의 여성의원들이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명예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야기는 엠마가 리벤지 포르노로 자살한 십대 소녀와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되지 않도록 에이미법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한 마이크 스톡스라는 기자와의 관계에서 사건이 발생된다. 엠마는 교사 시절 알고 지내던 플로라의 피아노 가정교사 캐롤라인과 남편의 부적절한 관계로 이혼하게 되었고, 플로라와는 주말에만 함께 지내고 있었다. 엠마의 전남편인 데이비드는 엠마가 지방의회에서만 일하기를 바랐지만, 설마했던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엠마의 분주한 생활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결국 캐롤라인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소설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킨 것은 엠마의 재판이었지만, 엠마가 재판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보호받지 못하는 여성의 실존이 있었다. 더군다나 따돌림을 당하던 플로라가 순간적인 실수로 친구의 알몸이 담긴 사진을 전송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은 모든 문제가 복잡해지는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런 취약함을 이용하거나 즐겨서는 안된다는 윤리적 의식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기에 현대의 수많은 여성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는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어쩌면 엠마의 재판과정에서 마이크의 동료였던 후배 기자 레이철이 엠마를 공격하기 위해 내세운 공인에 대한 논리가 적용되는 잔인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불의를 보고도 외면하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즐기는 샤덴프로이데와 같은 괴물이 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공인이라면 당연한 목표물이 되는 셈이죠(2-109)”


“나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상태로, 괜찮아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그냥 서 있었다. 명예가 어떻게 될 거 같으냐고? 명예는 산산조각 나버린다. 찰나의 부주의로, 누가 슬쩍 한번 쿡 찌른 것으로, 어쩌면 빗나간 펀치로도 명예는 웨이터가 놓친 접시처럼 순식간에 날아간다. 레아의 것이든 플로라의 것이든 나의 것이든 캐럴라인의 것이든, 심지어 소냐나 코스타 판사의 것이라도. 명예라는 건 가장 위태로운 무언가다. 오랜 시간 쌓아도 단 몇 초 만에 무너질 수 있다.(2-250)”


#세라본 #REPUTATION #명예 #미디어창비 #신솔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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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 마셔
한은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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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작가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를 읽었다. 표지가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읽다보니 그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아마도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술을 마신 경험담 중에서도 가장 왓따로 여겨질 만큼 강렬하게 다가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굴의 형상을 한 인간이 샤블리를 가득 채워주고 광물의 맛을 느껴며 한달 내내 그 맛을 음미했다고 하니 표지가 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다. 당장 파리에 갈 이유를 거뜬히 만들어주는 굴과 샤블리의 이야기는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먹거리가 존재하는지, 이 세상에 얼마나 다른 자연환경에서 나름대로의 생존 본능에 의해 인간이 존재해 왔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지 않을까 싶다면 너무 멀리 나간 거려나.


술을 좋아하지도 잘 마시지도 못하지만 술에 대한 에세이를 종종 즐겨 보게 된다. 대리만족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대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술을 마셔대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랄까. 사실 술을 즐기는 사람이 무척 부럽기 때문이 오히려 가까울 것 같다. 20대를 고통스러운 술자리를 견디며 지나고 보니 술이라면 사실 진저리가 처지고 누군가 술을 권하면 도끼눈을 뜨고 무안을 준 적도 있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데도, 그 사실을 알리가 없는 누군가가 지금부터 마시면 술이 는다느니, 아직 제대로 마셔보지 않아서 그런거라느니 라는 나름의 친분을 나누고 싶은 멘트를 들을 때면 친목이고 뭐고 밥상을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었다. 참았으니 망정이지, 성질나는데로 했었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ㅋㅋ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살펴봐도, 아니 그렇게 거창할 필요도 없이 살다보면 술 한잔 나누며 편안하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좋아보인다. 원래 맨정신에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의논해야하겠지만, 의외로 술자리에서 생긴 친분이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술상무라는 말도 있었지 않았겠는가. 커피 맥주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 말했듯이, 술은 사람의 몸을 이완시키고, 커피는 각성시키는 정반대의 성분이 담겨 있다. 그런데 커피 맥주를 마시면 이완되면서도 각성이 되는 야릇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몸이 노곤해지면서도 불현듯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는 술이라면 적당히 취하면서도 실수 하지 않고 좋은 마무리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ㅋㅋ


제목이 밤은 부드러워 이니 술을 마시면서도는 아니더라도 왠지 밤에 리뷰를 써야할 것만 같았다. 저자가 사계절로 구분지어 열거한 술에 대한 48가지 에피소드들은 세상에 술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았나 싶기도 하고, 또 그 술을 사람들이 즐기기까지의 역사과 얽힌 이야기들이 꽤나 좋은 술안주가 될 것 같았다. 누군가 매달 한 번 모임을 할 때마다 새로운 술을 가지고 와서 그 술에 얽힌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해준다면 그 모임은 얼마나 싱그럽고 설레일까. 그리고 그 술의 기원을 듣고 누군가가 지금 느끼는 이야기를 나눠준다면 아마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만 같다. 그럼 나 같이 술에 취약한 사람들도 한 잔을 아껴 마시며 경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유럽에 살아본 경험 덕분인지 몇 가지 술은 마셔보기도 잠깐이나마 즐기기도 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고 그나마 좋아했던 술은 당연히 와인류인데, 여름에 즐기는 Spritz Aperol과 겨울에 마시는 Gluhwein(vin brule)이다.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와인을 즐기는 문화는 색깔도 너무나도 매혹적인 오렌지색과 끓어서 더욱 짙어진 자주빛깔이다. 또 더블린에 갔을 때에는 기네스팩토리에서 기네스 따르는 법을 배우며 기네스에는 철분이 많아서 임산부도 마신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까지 들어서 그런지, 더블린에 머무는 내내 펍에서 기네스만 마셨던 기억이 난다. 제임스 조이스의 동상 옆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블룸스데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던 문외한에서 그나마 [율리시스]나 [더블린 사람들]은 시도조차 할 생각도 않고 그냥 제목을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안분지족으로 한 걸음 나아간 정도랄까. 


그 외에 저자의 책에 소개된 다양한 술은 읽을 때는 우와 신기해하며 검색창에 이름을 넣어 실물을 보고 블로그 내용을 살펴보았지만,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면 술의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난해함을 매 장마다 경험하게 된다. 아마도 나중에 어쩌다 우연히 저자의 책에 나온 술을 접할 기회가 있더라도 이렇게 그 술에 대한 내용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진이니 번이니 위스키니 평생 마실 일이 없을 것 같은 술이라도 이렇게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누구보다도 술을 좋아해서 ‘마셔’라고 큰소리 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늘 밤도 이렇게, 아니 겨울밤은 유난히 길고 봄이 오는 밤은 부드러울테니 책에 나온 몇 가지 술을 적어두었다가 ‘마셔’라고 권하고만 싶어지는 순간이다. 


“눈 뜨자마자 스카치를 마시고, 점심에 샴페인 한 병, 저녁에 또 샴페인 한 병, 새벽까지 브랜디와 와인을 마시는 게 매일의 일정이었다고 <다키스트 아워>에 나온다. 남들이 보리차를 먹듯이 스카치를, 탄산수를 먹듯이 샴페인을 마시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과시적인 음주 일정료를 본 적이 없다. 비싼 브랜디와 샴페인을 쉬지 않고 들이마시는 매일매일이라니.(131)”  이 영화를 꼭 봐야만 할 것 같다. 


“바텐더라는 말은 오묘하다. ‘바bar’와 ’텐더tender’라는 말이 결합되었는데, ‘텐더’에는 온갖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다. ‘부드러운’, ‘연한’, ‘상냥한’, ‘다정한’, ‘애정 어린’이라는 형용사와 ‘부드럽게 하다’, ‘소중히 하다’ 같은 타동사를 생각하면 무릎이 녹는 느낌이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감미로워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바텐더라는 단어를 발음할 자격을 박탈당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텐더는 바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루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고, 하루 중에서도 밤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다. 마음에 대한 최고의 기술자랄까. 예약하지 않아도 갈 수 있는 정신 상담소일 수도 있다.(312)”


#한은형 #밤은부드러워마셔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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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일기
권남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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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희 작가의 [스타벅스 일기]를 읽었다. 저자의 번역서보다 에세이를 빠짐없이 읽다보니 신간정보를 보자마자 더군다나 스타벅스 일기라는 흥미로운 제목이 주는 호기심에 이건 재미없을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저자가 고백하기로 극내향성의 집순이라고 하는데, 에세이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깨알같은 개그에 빵빵 터질 때가 있다. 엄마와의 딸과의 친밀하고도 내밀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전해주는 저자의 솔직담백함에 감동을 받곤 하는데, 이내 스타벅스에 마주친 익명의 사람들에 대한 잔잔한 애정이 어디에서 기원되었는지 깨닫게 된다.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 없이는 번역이라는 장구한 과정이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란 결론에 이르기까지. 


언제부터인지 스타벅스 하면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카페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내가 처음 스타벅스를 가봤을 때만 해도 주로 젊은 여성들과 연인들의 성지였기에 가끔씩 눈치가 보이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눈총을 받을 이유도 분위기도 사라진 것이 큰 변화가 아닐까 싶다. 스타벅스 커피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다른 지역이나 나라를 방문하더라도 반드시 스타벅스 커피를 고수하곤 하는데, 사실 커피 맛에 민감하지 않더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 한 가지는 다른 어느 카페보다도 스타벅스에서 편히 머물 수 있다는 점이다. 잠깐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화장실을 가고 싶다거나 물 한잔 마시고 싶을 때 거리낌 없이 들어가서 용무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스타벅스의 경영 방침은 분명 고객을 끌어모으는 데에 큰 성공 요소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한은형 작가의 [레이디 맥도날드]의 숙녀 레이디에게 스타벅스를 좋아하시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는 내용이 나온다. 

“좋아한다기보다는 뭐랄까… 거슬리는 게 그다지 없다고 할까요. 직접조명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고, 블라인드 내려서 이렇게 채광을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좋고요. 파트너들도 교육을 잘 받아서 어떤 손님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합맂적이죠. 음악도 요상한 댄스 가요 같은 거 틀지 않고, 정해진 매뉴얼이 있잖아. 계절을 느낄 수 있어. 연말에는 캐럴을 틀어주고 그런거 말이에요. 이렇게 잡지도 있고, 신문도 볼 수 있고, 나처럼 생활이 단조로운 사람들은 너무 지루하면 또 못 살거든요. 그런데 여기 오면 숨이라도 쉴 수 있어. 젊은 사람들이 차려입고 다니는 거 보면 얼마나 기운이 나는지 몰라. 새 옷 냄새. 바로 빨아서 입은 냄새. 향수 냄새 같은 게 나. 매일매일 자기를 아끼면서 살아가려는 의욕의 냄새가 나거든. 나는 그런 걸 맡으면 기분이 아주 좋아요. 아주, 아주요.(레이디 맥도날드 165-166)”


레이디처럼은 아니지만 비슷한 기분으로 스타벅스를 다닐 때가 있었다. 벌써 10년이나 지나버린 처음 맡은 강의 준비를 위해서 열나게 공부하다가 집이 감옥처럼 느껴지면 가까운 스타벅스에 가곤 했다. 어느덧 카공족의 일원이 되어 옆에서는 무슨 공부를 하나 살며시 엿보며 머리를 쥐어짜던 때가 있었다. 스타벅스에서 일하지만 커피를 마시지 않는 저자처럼 나도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신 적이 별로 없다. 매번 신상 음료가 나오면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맛보기도 하고 오후에는 커피 마시기가 부담스러워 도전하기도 하고 또 신상 음료는 저자의 말마따나 별을 많이 주니까 고르지 않을 수 없다. 그보다 더 오래 전에는 지금은 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차이티라떼만 주구장창 마셨던 때가 있었다. 오죽하면 같이 간 사람들이 뭐 시킬거냐고 묻지도 않았던 고집스러운 때도 있었다. 그때는 타조 차이티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었는데, 요즘에는 워낙에 잠시 동안만 나왔다 사라지는 너무나도 긴 이름의 음료가 많기에 타조 차이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스타벅스는 미국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음료의 용량 사이즈에 이탈리아어를 사용한다. 최근에 trenta 라는 어마어마한 용량의 사이즈가 출시되었는데,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하루종일 각성된 상태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Trenta 이전에 이미 venti 와 grande 사이즈가 있었는데, trenta는 숫자 30이고, venti는 숫자 20, grande는 거대한 또는 큰 이라는 뜻이다. 최근에 이 숫자가 미국에서 즈그들끼리만 사용하는 용량 수치인 온스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trenta는 30온스라는 얘기인데, 대체 그게 몇 미리리터인지 계산해보지 않고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암튼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점점 음식문화가 오밀조밀에서 먹방으로 바뀌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 100원에서 200원짜리 자동판매기 믹스 커피를 종이컵에 반도 안되게 즐겨먹던 문화에서 30온스의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바뀌다니 세대 간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속도이다. 


지금처럼 커피 문화가 전반적으로 용인되기 이전에 카페에서 4-5천원 가량이나 되는 커피를 마시는 이들을 욕하던 때가 있었다. 특히나 스타벅스 커피가 부르주아 산물의 대표격인 것으로 인식되어 된장녀, 된장남과 같은 폄하하는 용어들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었다. 사실 요즘 아주 경제적인 가격과 대용량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에 주력하는 메가, 컴포즈, 백다방과 같은 가격에 비하면 스타벅스 커피는 좀 비싼 편이다. 편의점 커피나 저가 프랜차이즈 커피나 스타벅스 커피나 사실 맛은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원두의 질적 차이는 분명 있겠지만 어차피 각성을 위한 커피라면 아무데서나 마셔도 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큰 돈이 아님에도 자기 자신을 위해 작은 사치를 부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적당히 배를 채울 수 있는 간식도, 달콤한 먹거리로 준비되어 있기에 미팅 장소로는 제격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쩌다 한 번씩 기프티콘을 보내려 할 때에는 나도 모르게 스타벅스 쿠폰이나 카드를 선물하게 된다. 


저자가 스타벅스에서 일을 하며, 그 일을 방해한 주인공들 덕분에 일기의 내용이 이렇게 풍성해졌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카페는 도서관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마음껏 이야기하고 쉴 수 있는 곳이지만 또 저자와 같은 이들에게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각자의 입장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작은 세상이기도 한 것 같다. 어찌하다보니 요즘에는 밥집이나 술집보다 카페에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술을 마실게 아니라면 일단 밥부터 배부르게 먹고 좋은 카페에 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나누는 데 익숙해졌다. [스타벅스 일기]를 읽고 나니 혼자서 카페에 갔는데 누군가 내 옆에서 신나게 떠들더라도 짜증내지 말고 오늘은 어떤 진귀한 사연을 들을 수 있을까 가만가만 귀를 열어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저자의 우리나라 전역의 스타벅스를 더 나아가 해외의 스타벅스 일기가 이어지기를 고대해 본다. 


#권남희 #스타벅스일기 #한겨례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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