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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위너 1~2 세트 - 전2권 ㅣ 베어타운 3부작 3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2월
평점 :
프레드릭 배크만의 [위너 1-2]을 읽었다. 스웨덴이라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북유럽 국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그런지, 아님 하키를 빼놓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인지, 요즘 북유럽이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혹한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뉴스 때문인지 읽는 내내 나도 어딘가의 빙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베어타운과 헤드라는 하키팀을 둔 스웨덴 북쪽의 어느 시골 마을이 반드시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켰고, 작가가 마치 하늘 위에서 그 지역의 전방위를 내려다보며 그 마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자연스럽게 묘사한 것처럼 느껴졌다. 벌써 6년이 되어가는 베어타운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를 읽게 되었을 때, 이 장구한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냥 추운 나라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하키에 열광적인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얼마나 옥신각신하는지, 그 안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베어타운]은 주인공 가족인 페테르 안데르손의 딸인 마야 안데르손이 파티에 갔다가 베어타운 하키팀의 기대주인 케빈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급진전하게 된다.
십대 청소년이 범한 성폭행이라는 다루기 쉽지 않은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이, 더불어 북유럽이라고 하면 막연히 고소득 국가에 복지가 가장 잘 준비된 나라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그런 흉악한 범죄률이 몹시 낮지 않을까란 아무 근거없는 믿음을 보기좋게 부숴버렸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입에 올리기 조차 꺼려지는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함과 무력함이 밀려오는 사건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기에 그 쉬운 선택을 해왔던 지난날의 역사를 보기좋게 비웃는다. 베어타운 시리즈를 읽노라면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낱낱이 들춰내는 것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베어타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의 제목이 [위너]인 것은 아이스링크 위에서 상대편을 무참히 넘어뜨리고 퍽을 세차게 때려 골을 넣어 큰 스코어 차이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성정체성이 드러나 마을과 하키를 떠난 벤이가 무참히 가해지는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낳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희생이라는 어머어마한 사랑만이 가능함을 몸소 보여주며 진정한 위너임을 온 마을에 알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이야기라 그런지 이번 작품에는 여럿 인물들의 죽음이 그려진다. 심지어 전직 A팀 코치였던 수네가 기르던 개이자 베어타운 하키팀의 마스코트였던 ‘탕’이 쥐약이 들어간 간 파테를 먹고 죽는 일까지 벌어진다. 펠센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맥주집을 운영하던 라모나는 집에서 고요히 죽음을 맞이하고 라모나가 자식처럼 생각했던 불량배 티무를 비롯한 검은 자켓의 무리들은 그녀의 죽음을 몹시도 슬퍼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고 전편에서는 주이공인 페테르와 각을 세우며 갈등의 대척점에 있던 티무의 무리들이 오히려 이번 시리즈에서는 페테드를 도와주는 관계의 전복이 일어난다. 라모나의 죽음과 펠센이라는 맥주집은 그냥 무턱대고 시간을 죽이는 공간이 아니었음을 페테르와 티무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야기는 마야의 그 사건이 벌어지고 2년 반이란 시간이 지난 이후 라모나의 장례식을 계기로 집을 떠났던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면서 시작된다. 마야의 사건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된 후 온갖 구설수가 난무하는 가운데 마야를 지키기 위해서 아빠 페테르와 엄마 미라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마야는 자신을 온전히 내버리지 않게 되고,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천킬로나 떨어진 남쪽 대도시로 떠나게 된다. 케빈과 단짝이었던 벤이는 마야 사건으로 동성애자임이 드러나 아시아 지역을 떠돌며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야가 피해자임을 증명했던 용기 있는 목격자 아맛은 NHL에 드래프트에 떨어지면서 하키를 손 놓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베어타운 하키팀을 중심으로 삶의 기반을 삼았던 10대 청소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계기로 성장하게 되는지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전작에서는 주로 베어타운 하키팀을 이루는 이들의 이야기가 주된 흐름이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베어타운과 영원한 라이벌인 헤드팀의 마을 이야기도 큰 축을 이루고 있다. 베어타운팀에 페테르와 미라와 마야가 있다면 헤드팀에는 요니와 한나와 테스와 동생들이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족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양 팀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횃불을 들고 행진하는 봉기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족이 이렇게 양쪽 마을의 정신적인 지축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선한 인간의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누군가 아주 오랜시간 묵묵히 몸으로서 올바른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면 설사 불량배와 깡패짓을 일삼던 이들까지도 결국은 그 선한 누군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심지어 그 선한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존경이 담긴 시선마저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베어타운의 티무가 헤드의 레브가 그렇게 페테르와 요니를 도와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어떤 요란한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은 문 틈새과 열쇠 구멍으로 쉼없이 새어나오기에, 그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게 새어나오는 악을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벤이가 보여주었던 사랑이고 남겨진 사람들은 벤이를 그리워하며 또 다른 벤이의 모습으로 사랑이라는 선물을 누군가에게 증여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마테오가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어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의 무관심과 더불어 누나 루트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이코 로드리와 로드리의 성폭행을 방관한 옹알이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다. 마테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무언가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소속감이었다. 마테오가 추운 겨울밤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져 체인을 갈아끼우며 피를 흘려도 아무 관심이 없다면 결국 마테오는 레브에게 총을 구하러 가게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선물은 소속될 수 있는 집단이다.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들과 다른 아이가 상처받는 이유다. 어느 누구와도 어린 시절을 공유한 적이 없기에 학교에서 찍은 사진을 나중에 보아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이. 사람들의 울타리 밖에 있으면 너무 추워서 혼자 얼어 죽을 수도 있다.(2-233)”
“우리는 악을 물리칠 수 없다. 우리가 건설한 세상의 가장 견딜 수 없는 점이 그거다. 악은 근절하지도 어디 가두지도 못한다. 그걸 없애겠다고 폭력을 쓰면 쓸수록 악은 문 틈새와 열쇠 구멍으로 스며나오며 점점 더 강력해질 뿐이다. 악은 우리 안에서 자라나기에, 어떨 때는 심지어 우리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 안에서, 또 어떨 때는 심지어 열네 살짜리의 안에서 자라나기에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것에 대항할 무기가 없다. 그것에 대처할 수 있도록 사랑이는 선물을 받았을 뿐이다.(2-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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