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저녁 - 2023 대한민국 그림책상 수상작
권정민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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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아무리 먼 식당에서라도 모든 음식이 배달되는 아파트가 있다....

———
그 아파트 사람들은 집밖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어.
무엇이든 문 앞까지 가져다 주니까.
그러던 어느날
요리도 안 된 저녁이 배달된거야.
———

한때 배달음식을 신나게 시켜먹었던 내게도 어느 날 죄책감이 찾아왔다.
"겨우 이거 하나 시켜먹는데 쓰레기가 이만큼 나온다고?"

늘 알면서도 귀찮고 피곤하단 이유만으로 배달음식 앱을 눌렀던 날들. 사실 음식뿐 아니라 건전지, 물, 티슈 하나도 배달 앱 한번 클릭이면 문 앞까지 오는 이 세상이 과연 이대로 괜찮을지 의문이다.

비대면 시대가 어색하지 않은 지금, 인간이 놓치고 있는건 무엇일까?


직접 돼지를 잡아 돈가스와 감자탕, 족발, 보쌈, 김치찌개를 해먹기로 한 사람들.

물론 돼지를 잡기 위한 도구도 온라인으로 재빠르게 주문하고 하루도 안 되어 배달온 것들을 가지고 파티를 준비하는 모습에 뭔지모를 이질감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꼈다. 내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를 직관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사라진 저녁》

개인적으로 초등학생인 조카에게 이 책을 선물해주면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밀키트와 배달음식이 낯설지 않은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이 좀 더 나은 환경을 물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혹은 아이가 이 책을 읽고 느낀점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아이디어적이거나 직설적일지 궁금하다.

여러모로 얇은 책에서 복잡하고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 《사라진 저녁》

다른 분들은 권정민 작가의 《엄마도감》도 많이 읽으셨던데. 나도 찾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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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쓰는 밤 - 나를 지키는 글쓰기 수업
고수리 지음 / 미디어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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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에 있는 책들 중에서 직접 본 저자는 손에 꼽힌다. 대개 북토크, 강연 등에 신청을 해서 직접 작가를 만나고 왔는데 그 중 고수리 작가님도 있다. 코로나가 오기 전이었던가, 아니 후였던가. 


서울의 어느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해 퇴근 후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그때 처음 본 작가님의 이미지는 '참 여리여리하다' '목소리가 청순하다' '전반적인 이미지가 따뜻하다'의 느낌이었는데 이번 신간 「마음 쓰는 밤」을 읽으며 그때의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만큼 책의 내용은 참 따뜻하고 다정하고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뭐라도 써도 괜찮다며 다독이는 말들이었다.


글을 쓰는 일은 어렵다. 이 사실만큼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 아무리 글쓰기의 대가라도 빈 종이에 담긴 막막한 마음을 모를리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쓰고자 해서 썼고 그 수많은 글들은 누군가에게 읽히기도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우주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도 했을 것이다. 고수리 작가는 그 모든 마음을 안고 글을 쓰는 일에 대해 본인의 경험을 비추어 얼마든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다독인다.


나에겐 글쓰기가 일이니까, 매일 열심히 글 쓰는(일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답이 좀 싱거우리만큼 명료하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그래서 '열심히' 쓴다. (p18)


이토록 솔직하고 담백하고 명료한 마음이 어디있을까. 우리 모두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주어진 일을 하고 또 해내면서 사는건데 글을 쓰는 마음도 다르지 않다. 나또한 돈을 받고 글을 쓰진 않아도 늘 희미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좀 더 뚜렷하게 남겨두고 싶어 블로그와 브런치에 그 누가 읽을지(안 읽을지도) 모르는 글을 쓴다. 마음 쓰는 밤을 읽으며 다시 한번 느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유를.


삶의 군더더기는 걷어내고, 일상은 명료하게, 행복은 단순하게, 사랑은 가까이. 가족들과 따뜻한 저녁 식사를 나누려고 최선을 다해서 하루를 산다.(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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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
알렉스 존슨 지음, 제임스 오시스 그림, 이현주 옮김 / 부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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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작가의 방」 책을 손에 쥐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아니 너무 이쁘잖아?"

편집자가 이 책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짐작이 되었고 그 과정은 확실하게 기쁘고 벅찬 마음이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책이 나올 수 있겠는가.

「작가의 방」은 제목에서처럼 우리가 알고 있던, 혹은 몰랐던 세기의 50인 작가들이 치열하고 외롭게 글을 썼던 공간을 보여준다.


그곳은 침실일 수도 있고 서재일 수도 있고 카페나 차 안, 혹은 절벽에 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창고일 수도 있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작가들은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저 글을 썼다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방」이 좋은 건 책 안에 작가들의 방을 그려놓은 일러스트 때문이다. 글로만 설명되어 있다면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한계가 있었을텐데 옆에 귀여운 그림이 붙여지니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고 마치 작가의 방을 실제로 훔쳐보는 기쁨까지 들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펼쳐보시길.



작가의 고유한 루틴과 장소를 알아가는 재미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를 하나 더 말하자면 작가들의 고유한 습성, 루틴, 리추얼을 알 수 있다는 거다. 어떤 작가는 새벽에 일어나 6시부터 정오까지 집중하며 일했고 그 뒤에는 산책하고 밥먹고 다시 오후에 글을 쓰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애거사 크리스티는 욕조에 몸을 담궜을 때 가장 줄거리를 구상하는 가장 이상적인 순간이라고 했다. 힐러리 맨튼은 또 어떤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다른 사람 차에 타고 있는 것과 상관없이 메모를 하고 글을 쓰는 유연함을 보여줬고 주디스커는 전화, 손님 등 방해요소를 피해 다락방 집필실에서 은둔하면서 글쓰는걸 즐겼다고 하니 정말 다양하고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작가들은 자신만의 장소를 소중히 여겼다.



특히 미국 소설가 이디스 위튼은 침대에서 글쓰기를 즐겼는데, 자서전에서 "내가 계속 글을 쓰려면 지켜야 했던 사소한 의무들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줬기 때문에" 집은 그가 글을 쓰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침대에서는 편히 있을 수 있고, 글을 쓸 때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p79)라고 할 정도로 집을 좋아하고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은 작가였다.



「작가의 방」을 읽다보면 단순하게 작가가 글을 쓰는 방의 개념에서 벗어나 작가가 추구하고 사랑했던 것들, 이를테면 가족, 연인, 친구, 반려동물이라던가 반대로 사소한 의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은둔했던 방법들까지도 알 수 있는데 이게 참 매력적이다.



아내이자 엄마로서 역할과 작가로서의 본능에 균형을 잡아야 했던 실비아 플라스는 그 많은 집안일을 해내고 아이들이 잠든 밤을 아껴가며 글을 썼고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오두막을 지어 세상과 집의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p192)에서 그의 대표작들을 썼다.


모두들 할 수 있는 선에서, 하고자 하는만큼 자신의 영역을 성실하고 치열하게 지키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방」은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우선 내가 가장 좋아하고 호감가는 작가들의 방부터 구경하면 그 뒤에 전개될 다른 작가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된다.

나의 경우엔 <에밀리 디킨스> <마거릿 애트우드> <실비아 플라스> <빅토르 위고> <브론트 자매>의 방이 제일 궁금했고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브론트 자매>의 이야기를 보자면-



요즘 작가들은 작가실이라는 개념에 친숙합니다. 여러 작가들이 한곳에 모여 드라마를 쓰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150년 전 브론테 자매도 작가실과 아주 비슷한 공간을 썼답니다. (p223)



이 첫 문장에서 가슴이 두근두근, 다음 장을 넘기면 그들이 함께 쓰고 서로 읽어주고 토론회를 열었던 공간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이 부분은 직접 확인하시길 ^^) 머릿 속에 이 공간을 기억하고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 이 과연 여기서 탄생한 거구나 싶은 실재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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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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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설터의 책 「그때 그곳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등반은 원시적이어서, 멍청하고 마초에 이기적일 수 있는 등반가들도 한가지 공통점을 지니는데, 자신의 영혼, 말하자면 자신의 품성에 관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등산이란 문법이 있다면 저 말이 이 책에도 통용될 수 있지 않을까. 「고독한 얼굴」 랜드의 삶은 등반 그 자체였고 산에 대한 정복력과 집중력으로 인생을 돌파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반면 그의 땅의 삶은 복잡하고 가난해서 그곳을 살아내는 힘이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랜드에게 산은 이 모든 걸 덮는 존재였던듯 하다. 희망 한 줄기 보이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생활을 하다가도 산을 오르는 순간부터 그의 삶과 열정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산 정복으로 성공을 거두자 명예가 뒤따르기 시작한다.


「고독한 얼굴」은 제임스 설터가 1979년에 발표한 다섯번째 장편 소설로 당초 등반가 게리 헤밍의 산악 등반에 관한 각본을 썼지만 주인공이 너무 과묵하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거절당하고 없어질뻔한 이 이야기를 설터의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


우연히 재회한 옛 산악 동료이자 친구 잭 캐벗을 만나면서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 산을 오르는 순수한 기쁨을 맛본 랜드는 위험하고 아찔한 절벽을 타고 오르며 어쩐지 모를 해방감과 함께 점점 등반하는 행위에 열정을 쏟기 시작한다. 프랑스 샤모니로 이동해 여러 암벽 등반을 성공하면서 점차 고독한 사람에서 유명한 산악인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제임스 설터는 섬세한 문장과 우아한 문법으로 풀어낸다.


아, 「고독한 얼굴」이 자칫 등산의 '등'자도 어려워할 독자들에게 가혹하리만큼 등반에 대한 지겨운 설명을 늘어놓진 않을까 걱정이라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 훌륭한 문장가 제임스 설터답게 산을 오르는 행위의 기쁨과 불안, 자연의 숭고와 엄숙함에 대해 비교적 쉬운 문체와 단어를 써서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를 이룬다. 그러므로 나같은 일반 여성 독자도 산에 대한 랜드의 맹목적인 열정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는 신처럼 고요한 봉우리들을 휘둘러보았다. 봉우리들이 발산하는 광대함과 고요함에 경외심을 느꼈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도 그것들의 일부였다. p57


산악인들은 산을 알아야 한다. 속도와 판단은 필수적이다. 계속 오르든 하산하든 고전적인 결정은 언제나 같다. 계속 오르는 것이 더 쉬운 때이다. 사실상 정상에 이르는 것이 유일한 출구인 때가 온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힘이 있어야 한다. p93


흔히 산을 오르는 일을 삶에 비유한다. 죽을만큼 어렵고 힘들고 고독한 게 등반이지만 산정상에서 맛보는 성취감, 내려올 때의 상쾌함이 인생의 희노애락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인생을 리셋하고 싶어도 멈추지 말고 계속 가야 할 시기가 있고 그 시간에 가닿아야만 하는 결론이 운명처럼 주어지는 법이어서 「고독한 얼굴」은 굴곡진 삶을 살아내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등반한 잭 캐벗이 산 위에서 굴러 떨어져 내려온 바위에 부딪혀 부상에 이른 상태에서도 랜드는 최선의 등반을 보여준다.

등반 과정 중에는 산이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가장 어렵고 힘든 피치가 있다. 그 지점에서 산은 조그만 움직임도, 아주 작은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다. 머리카락 한 올보다도 가는 선 하나만 있을 뿐인 그곳을 어떻게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p109)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잭과 랜드는 등반에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랜드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물론 이때만해도 첫 성공에 대한 떠들석한 언론과 관심에 대해 난 우리가 드뤼를 어떻게 올라갔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길 원치 않아. 우리가 해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나머지는 그들의 상상에 맡기고 말이야(p121)라고 말할만큼 산을 오르는 행위만을 등반의 존재, 그것이 의미의 전부라고 여기는 랜드였다.

랜드는 그 산을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봉우리들을 태양처럼 어루만졌고, 봉우리들은 그의 존재에 눈을 떴다. 그 생각이 그를 무모하게 만들었다. 엄청난 힘을 느꼈다. 산등성이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자신의 불멸의 모습을 보았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도 바치리라 생각했다.p121


위 대목이 순수함을 가장한 위험한 욕망의 다짐일 수도 있다는 건 나만 느낀걸까. 등반은 랜드에게 삶 이상이었다. 산에 발 붙지 않은 땅에서의 생활은 허술하고 초라할 뿐이다. 그 중에서도 랜드가 여성을 대하는 가벼운 만남은 혼란스럽다. 소설 속 랜드를 거치는 여자들은 도대체 랜드에게 어떤 매력이 있기에 기꺼이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넉넉한 마음씨의 여인들인건지. 어쨌든 그녀들은 결코 그의 아내는 될 수 없었다.(설령 랜드의 아이를 가졌더라도..)


결국 랜드가 존재하기 위해 돌아가는 곳은 산, 산, 산이었다.

함께 등반하던 잭 캐벗이 자신은 빼놓고 겨울 등반을 가고 무모한 등산을 감행하다 동료 한 명을 잃게 된 사건을 겪기까지 랜드는 고독하게 홀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산이 있으니 그저 오르는 사람처럼 사람들 눈에 띄었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비밀스러운 산악인이었다. 잭 캐벗을 만난 후 느낀 열등감과 질투가 등반을 시작하는 잠깐의 원동력이 되어 주긴 했으나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생긴 그만의 원칙과 태도로 홀로 사냥을 나서는 외로운 늑대처럼 하얀 눈 덮인 산을 오르는 장면들이 섬세한 문체로 펼쳐진다.


커다란 산은 심상치 않다. 큰 산은 산악인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모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어렵고도 아름다워야 한다. 잊을 수 없는 여인의 이미지처럼 기억 속에 있어야 한다. 더렵혀지지 않아야 한다.(p90)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허만 등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식으로도 그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그는 기꺼이 등반에 경의를 표했다. 은밀한 기쁨이 그를 채웠다. 누구도 질투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p174


이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눈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과연 우리는 같은 책을 읽은 것이 맞나 생각이 든다. 전체적인 줄거리와 개요는 같지만 같은 페이지의 글을 읽고도 드는 감정은 각기 다르니 말이다. 어떤 사람은 진정 등반을 사랑했던 랜드가 점점 유명해지며 명성을 얻으면서 드러내는 인간의 본능을 읽었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등산을 향한 주인공의 고독한 열망을 읽었다고 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나도 몇몇 의견에 동의하지만 결국 나는 이 책이, 제임스 설터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산을 오르는 인간만이 갖는 절대적 고독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고독은 험난한 바위의 지형을 이용해 자연 그대로의 산을 오르는 과정의 묘사(바위는 바다의 표면과 같아서, 일정하긴 하나 결코 똑같지는 않다. 동일한 루트를 오르는 두 명의 등반가가 있다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등반할 것이다.p33)에서도 보이고 등산을 포기하고 싶은 판단도 산에서는 생명과 직결되는 생생한 서술(한 동작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곧바로 다른 동작을 취해야 한다. 어쩌면 세 번째 동작을 취해야 할지도 모른다. 망설이면 홀드는 사라진다. 물러나버린다.p35)에서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책 곳곳에 드러나는 부드러운 산의 성품과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동시에 느낌으로서 인간이 자연에 가져야만 하는 겸손을 되새질할 수밖에 없고 그 근거를 랜드의 등반에서 재차 확인한다.

"어떻게 혼자 등반을 해요?"

"그럼 어떻게 자신을 보호해요?"

"사실상 무엇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자기 내부에서만 지킬 수 있죠." 그가 설명했다. "등반은 도박 같은 게 아니에요. 운에 맡기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등반가라면 당연히 용감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권투선수처럼 끝장을 볼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들에게 말했다. "발이 미끄러지면 손이 있죠. 어떤 걸 시도할 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엔 절대 시도하지 않아요. 그건 정신의 문제입니다. 절대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걸 느껴야 해요."(p198)


이 문장에서 절대적 고독을 느끼지 않은 자 어디 있나. 바위 아래로 절대 떨어지지 않으라는 믿음을 가지기까지 로프 하나로 몸을 지탱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과 판단이 발을 내딛게 만드는가. 찰나의 고독은 그렇게 순간마다 찾아온다.

각자 감당해야 할 고독이 팽팽하게 압축된 산이라는 공간은 제임스 설터의 절제된 문체와 생생한 묘사로 느낄 수 있는 「고독한 얼굴」에서 드러난다.


이 글의 맨 앞구절에서 인용한 말처럼 등반은 원시적이어서 그곳을 오르는 자 누구든 자신의 품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순수하게 등반을 사랑했던 산악인이 몇 번의 성공으로 명예를 갈망하는 산악인의 모습으로 비치기까지 우리는 이 「고독한 얼굴」에서 그 여정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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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어서 만들다 보니 - 좋아하는 것을 오래 하기 위한 방법
한주희 지음 / 미디어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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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좋이를 뜯고 나온 샛노랑 표지에 그려진 시원한 파랑.

그 안에는 좋아하는 단어 'Creator'가 쓰여 있었다.

창조하는 사람. 창작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든, 유에서 유를 창조하든 무얼 만들어내는 사람에게 나는 어떤 동경을 갖고 있고 이번 에세이 《재밌어서 만들다 보니》에서의 한주희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파리의 건축가, 디자이너가 되다


봉주르~말도 못했던 파리의 유학생이 건축학교를 졸업하고 유명 건축회사에 입사해 열심히 일하며 그저 좋아서 시작해 본 일이 또다른 직업이 된 디자이너의 이야기. 글로 쓰면 이렇게 간단한 이력이지만 이 책에 나와 있는 저자의 구구절절한 삶을 들여다 보면 한 번에 쉽게 된 것이 없다. 일단 언어부터. 에펠탑과 낭만이 떠오르는 파리조차도 삶 속에 들어가면 언어로 시작되는 타지의 생활이다. 말이 안 되면 인간관계도, 일도, 사회도, 뭣 하나 쉬운 게 없는 생존의 생활일 뿐.


하지만 그 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극복했는지, 또 그로 인해 어떤 세상이 펼쳐지게 되었는지 읽는다면 지금 힘들게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소금같은 조언이 될 것이다.


p36

언어가 생각을 담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내게는 생각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항상 불편한 느낌이 들었고 기억과 생각, 느끼고 보는 것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쌓일수록 프랑스어 공부에 열중했다. 그렇게 프랑스에 체류하는 13년동안 나는 쉼 없이 프랑스어로 생각하고, 프랑스어로 말하고, 프랑스어로 쓰인 책을 읽으며 가장 나다운 프랑스어 표현 방식을 하나씩 찾아나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재밌어서 만들다 보니》을 읽는 동안 건축가보다는 디자이너로서의 저자가 훨씬 창작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으며, 또 마음으로 더 좋아하는 주파수가 맞춰졌다. 글을 쓰면서 저절로 투영된 것인지 기획의도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디자인을 통해 본인이 구현하는 아이디어에 훨씬 생기가 돋보이는 글이었다.


이 책을 추천한다면 제약회사 일을 그만두고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는 친구의 후배에게 권하고 싶다.


꽤 큰 제약회사에서 안정적으로 잘 일하고 있는 그 후배는 광고일을 하고 싶다는 작은 열정을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수업을 들으며 채우고 있다고 한다. 현재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와 결혼 계획도 있고 아이도 낳아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 후배가 자꾸만 현실과 이상을 재는 일은 당연할 것이다. 용기는 아무때나,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 《재밌어서 만들다 보니》를 읽는 동안은 마음 속에서라도 마음껏 본인이 하고 싶을 상상하며 재능을 펼쳐 볼 수 있지 않을까.



p197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하고 답답한 느낌이 나를 계속 짓누른다. 그 감정을 누그러트리려면 몸을 움직여 뭐라도 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아무리 구체적으로 상상해도 다짐은 다짐으로만 끝날 뿐, 직접 몸을 움직여 실행하는 것만큼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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