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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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설터의 책 「그때 그곳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등반은 원시적이어서, 멍청하고 마초에 이기적일 수 있는 등반가들도 한가지 공통점을 지니는데, 자신의 영혼, 말하자면 자신의 품성에 관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등산이란 문법이 있다면 저 말이 이 책에도 통용될 수 있지 않을까. 「고독한 얼굴」 랜드의 삶은 등반 그 자체였고 산에 대한 정복력과 집중력으로 인생을 돌파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반면 그의 땅의 삶은 복잡하고 가난해서 그곳을 살아내는 힘이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랜드에게 산은 이 모든 걸 덮는 존재였던듯 하다. 희망 한 줄기 보이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생활을 하다가도 산을 오르는 순간부터 그의 삶과 열정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산 정복으로 성공을 거두자 명예가 뒤따르기 시작한다.


「고독한 얼굴」은 제임스 설터가 1979년에 발표한 다섯번째 장편 소설로 당초 등반가 게리 헤밍의 산악 등반에 관한 각본을 썼지만 주인공이 너무 과묵하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거절당하고 없어질뻔한 이 이야기를 설터의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


우연히 재회한 옛 산악 동료이자 친구 잭 캐벗을 만나면서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 산을 오르는 순수한 기쁨을 맛본 랜드는 위험하고 아찔한 절벽을 타고 오르며 어쩐지 모를 해방감과 함께 점점 등반하는 행위에 열정을 쏟기 시작한다. 프랑스 샤모니로 이동해 여러 암벽 등반을 성공하면서 점차 고독한 사람에서 유명한 산악인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제임스 설터는 섬세한 문장과 우아한 문법으로 풀어낸다.


아, 「고독한 얼굴」이 자칫 등산의 '등'자도 어려워할 독자들에게 가혹하리만큼 등반에 대한 지겨운 설명을 늘어놓진 않을까 걱정이라면 염려할 필요가 없다. 훌륭한 문장가 제임스 설터답게 산을 오르는 행위의 기쁨과 불안, 자연의 숭고와 엄숙함에 대해 비교적 쉬운 문체와 단어를 써서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를 이룬다. 그러므로 나같은 일반 여성 독자도 산에 대한 랜드의 맹목적인 열정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는 신처럼 고요한 봉우리들을 휘둘러보았다. 봉우리들이 발산하는 광대함과 고요함에 경외심을 느꼈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도 그것들의 일부였다. p57


산악인들은 산을 알아야 한다. 속도와 판단은 필수적이다. 계속 오르든 하산하든 고전적인 결정은 언제나 같다. 계속 오르는 것이 더 쉬운 때이다. 사실상 정상에 이르는 것이 유일한 출구인 때가 온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힘이 있어야 한다. p93


흔히 산을 오르는 일을 삶에 비유한다. 죽을만큼 어렵고 힘들고 고독한 게 등반이지만 산정상에서 맛보는 성취감, 내려올 때의 상쾌함이 인생의 희노애락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인생을 리셋하고 싶어도 멈추지 말고 계속 가야 할 시기가 있고 그 시간에 가닿아야만 하는 결론이 운명처럼 주어지는 법이어서 「고독한 얼굴」은 굴곡진 삶을 살아내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함께 등반한 잭 캐벗이 산 위에서 굴러 떨어져 내려온 바위에 부딪혀 부상에 이른 상태에서도 랜드는 최선의 등반을 보여준다.

등반 과정 중에는 산이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가장 어렵고 힘든 피치가 있다. 그 지점에서 산은 조그만 움직임도, 아주 작은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다. 머리카락 한 올보다도 가는 선 하나만 있을 뿐인 그곳을 어떻게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p109)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잭과 랜드는 등반에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랜드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물론 이때만해도 첫 성공에 대한 떠들석한 언론과 관심에 대해 난 우리가 드뤼를 어떻게 올라갔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길 원치 않아. 우리가 해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나머지는 그들의 상상에 맡기고 말이야(p121)라고 말할만큼 산을 오르는 행위만을 등반의 존재, 그것이 의미의 전부라고 여기는 랜드였다.

랜드는 그 산을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는 멀리 떨어진 봉우리들을 태양처럼 어루만졌고, 봉우리들은 그의 존재에 눈을 떴다. 그 생각이 그를 무모하게 만들었다. 엄청난 힘을 느꼈다. 산등성이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자신의 불멸의 모습을 보았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도 바치리라 생각했다.p121


위 대목이 순수함을 가장한 위험한 욕망의 다짐일 수도 있다는 건 나만 느낀걸까. 등반은 랜드에게 삶 이상이었다. 산에 발 붙지 않은 땅에서의 생활은 허술하고 초라할 뿐이다. 그 중에서도 랜드가 여성을 대하는 가벼운 만남은 혼란스럽다. 소설 속 랜드를 거치는 여자들은 도대체 랜드에게 어떤 매력이 있기에 기꺼이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넉넉한 마음씨의 여인들인건지. 어쨌든 그녀들은 결코 그의 아내는 될 수 없었다.(설령 랜드의 아이를 가졌더라도..)


결국 랜드가 존재하기 위해 돌아가는 곳은 산, 산, 산이었다.

함께 등반하던 잭 캐벗이 자신은 빼놓고 겨울 등반을 가고 무모한 등산을 감행하다 동료 한 명을 잃게 된 사건을 겪기까지 랜드는 고독하게 홀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산이 있으니 그저 오르는 사람처럼 사람들 눈에 띄었다가 조용히 사라지는 비밀스러운 산악인이었다. 잭 캐벗을 만난 후 느낀 열등감과 질투가 등반을 시작하는 잠깐의 원동력이 되어 주긴 했으나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생긴 그만의 원칙과 태도로 홀로 사냥을 나서는 외로운 늑대처럼 하얀 눈 덮인 산을 오르는 장면들이 섬세한 문체로 펼쳐진다.


커다란 산은 심상치 않다. 큰 산은 산악인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모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어렵고도 아름다워야 한다. 잊을 수 없는 여인의 이미지처럼 기억 속에 있어야 한다. 더렵혀지지 않아야 한다.(p90)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허만 등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식으로도 그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그는 기꺼이 등반에 경의를 표했다. 은밀한 기쁨이 그를 채웠다. 누구도 질투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p174


이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눈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과연 우리는 같은 책을 읽은 것이 맞나 생각이 든다. 전체적인 줄거리와 개요는 같지만 같은 페이지의 글을 읽고도 드는 감정은 각기 다르니 말이다. 어떤 사람은 진정 등반을 사랑했던 랜드가 점점 유명해지며 명성을 얻으면서 드러내는 인간의 본능을 읽었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등산을 향한 주인공의 고독한 열망을 읽었다고 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나도 몇몇 의견에 동의하지만 결국 나는 이 책이, 제임스 설터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산을 오르는 인간만이 갖는 절대적 고독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고독은 험난한 바위의 지형을 이용해 자연 그대로의 산을 오르는 과정의 묘사(바위는 바다의 표면과 같아서, 일정하긴 하나 결코 똑같지는 않다. 동일한 루트를 오르는 두 명의 등반가가 있다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등반할 것이다.p33)에서도 보이고 등산을 포기하고 싶은 판단도 산에서는 생명과 직결되는 생생한 서술(한 동작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곧바로 다른 동작을 취해야 한다. 어쩌면 세 번째 동작을 취해야 할지도 모른다. 망설이면 홀드는 사라진다. 물러나버린다.p35)에서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책 곳곳에 드러나는 부드러운 산의 성품과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동시에 느낌으로서 인간이 자연에 가져야만 하는 겸손을 되새질할 수밖에 없고 그 근거를 랜드의 등반에서 재차 확인한다.

"어떻게 혼자 등반을 해요?"

"그럼 어떻게 자신을 보호해요?"

"사실상 무엇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자기 내부에서만 지킬 수 있죠." 그가 설명했다. "등반은 도박 같은 게 아니에요. 운에 맡기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등반가라면 당연히 용감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권투선수처럼 끝장을 볼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들에게 말했다. "발이 미끄러지면 손이 있죠. 어떤 걸 시도할 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엔 절대 시도하지 않아요. 그건 정신의 문제입니다. 절대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걸 느껴야 해요."(p198)


이 문장에서 절대적 고독을 느끼지 않은 자 어디 있나. 바위 아래로 절대 떨어지지 않으라는 믿음을 가지기까지 로프 하나로 몸을 지탱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과 판단이 발을 내딛게 만드는가. 찰나의 고독은 그렇게 순간마다 찾아온다.

각자 감당해야 할 고독이 팽팽하게 압축된 산이라는 공간은 제임스 설터의 절제된 문체와 생생한 묘사로 느낄 수 있는 「고독한 얼굴」에서 드러난다.


이 글의 맨 앞구절에서 인용한 말처럼 등반은 원시적이어서 그곳을 오르는 자 누구든 자신의 품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순수하게 등반을 사랑했던 산악인이 몇 번의 성공으로 명예를 갈망하는 산악인의 모습으로 비치기까지 우리는 이 「고독한 얼굴」에서 그 여정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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