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브라이언 키팅 지음, 마크 에드워즈 그림, 이한음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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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심상치 않았던 이 책은 논리와 이성으로 똘똘 뭉친 물리학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연구를 완성시키고 또 실패하는가에 이야기한다.
사실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무수히 많은 실패는 그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ing 일뿐이다.

부제인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답게 우리는 노벨과학상을 탄 이후의 물리학자들의 삶을 통해 이들이 끊임없이 창조하는 연구에 대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의 태도의 에센셜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조언이 될 것이다.

우주론자 브라이언 키팅은 노벨상을 탈 뻔한 과학자다. 여러 책을 집필했으며 이번 「과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는 노벨상을 탄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그 유명한 상을 수상하고도 어떤 마음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또 노력하고 있는지에 대해 성실함과 꾸준함을 밝혔다.

우리는 흔히 과학자라고 하면 엄청 똑똑해서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여 어렵게 생각하지만 이번 책에서 읽은 물리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쩌면 직장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연구비를 받기 위해 기획서를 잘 써야 하고, 동료와 협력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매일 마주하면서 인류에 도움 되는 작은 단서를 가지고 다시 연구에 매진해야 하는 반복적인 삶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삶에서 과학자들은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특히 그중에서도 재미, 자신들의 흥미를 돋울 연구를 계속한다는 점에서 그 지속성이 있다.

의외로 이 책은 굉장히 딱딱한 듯 보여도 속은 말랑말랑한 에세이에 속한다. 나는 가끔 보기에 부드럽고 인상이 좋은 사람에게 듣는 말보다, 보기에 엄청 냉정하고 세게 생겼는데 그 사람이 하는 하는 말에서 뜻밖의 위로를 받곤 하는데 아마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에게 받은 위로가 더 마음에 강하게 와닿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절대 이성과 논리로 점철된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수치와 데이터를 가지고 그들만의 운과 노력에 대해 어떤 본능적인 감각을 지닌 듯 보인다.

처음부터 정답을 향해 걸어가 보이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미로 속을 헤매다 끝끝내 결승점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지성은 돌파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성장한다. 언뜻 볼 때 결과가 비슷해 보인다고 해도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 성장의 정도는 다르다. 막막함을 견디며 버거운 과제에 몰입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 끝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면 치를 수 없는 값도 아니다. 스트레칭할 때 닿기 힘든 곳까지 몸을 뻗는 순간 근육이 자란다고 한다. 지적 근육 또한 새롭고 낯설고 조금 불편한 시도를 통해 자란다.(129)”의 저자의 말처럼 모든 이에게 번뜩이는 영감과 창조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묻고 실행하고 실패하고 다시 또 하고 또 좌절하고 또다시 해보면서 포기하려는 마음의 근육을 조금씩, 조금씩 늘려 길고 길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말을 그동안 수도 없이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마음에 남지 않았던 건 너무 뻔하디 뻔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자들이 겪고 있는 인내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바로 세계 최고의 상을 수상하고 거만의 세상에 남지 않고 다시 겸손한 자세로 작은 연구실에서 그들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은 그들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단 위로가 된다.

이 책의 큰 흐름은 계속하는 거다. 남들이 인정한 노벨상을 본인과 팀의 헌신으로 받았다더라도 결코 그것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그들의 호기심 여정에서 만난 잠깐의 행운일 뿐. 결국 그들은 계속 일을 한다.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를 읽는 내내 머릿속을 관통한 말은 ‘계속해 볼 것’이었다. 실수를 하든 실패를 하든 혹, 성공을 하든. 그 자리에서 좌절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계속 뭔가를 하는 일이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의 안락한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려 하지 않는다.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것이 오롯이 나 혼자 해낸 듯 능력을 믿고 까불기 마련이고 크게 실패했다면 세상 모든 저주를 스스로에게 내리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 단 한 가지, 그저 계속하는 것이다. 기왕이면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상처받지 말고 계속해 볼 수밖에 없는 증거를 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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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
수아지크 미슐로 지음, 이현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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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크림색의 책표지와 그 속에 그려진 창문 하나.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은 과연 나인가, 무엇인가.

이제 명상은 꽤 비즈니스적인 말과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정도로 많은 현대인들은 ‘명상’이란 단어에 기대 지금의 불안과 걱정을 잠재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도달하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눈 감고 ‘명상 시작~!’하면 온갖 잡념의 끄트머리까지 보게 된다. 이번 을유문화사의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은 좀 신기한 명상록이랄까?

이 책의 목적은 단 하나다.

수도자들은 순례길 위에서 시를 읊었고 은자들은 즉흥적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거나 그림이나 서예에 몰두하면서 명상을 했다. 명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비물질 사이 빈 곳에 위치하는 내면의 운동이므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개 장치가 필요한 법이다. 예술 작품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책에서 발췌>


그래서 우리가 이번 책을 통해 담아갈 것은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매개장치로서 예술을 바라보고 작가가 안내하는 명상의 길로 차분히 들어서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한 번만 읽고 딱 끝내기 보다는 시간을 두고 페이지를 곱씹으면서 읽기를 추천한다.

처음에는 그림 한번, 글 한번.

두번째는 그림만 집중적으로 한번 더 보고, 마지막으로 글을 다시 꼭꼭 씹어 읽는다면 예술 작품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명상의 길로 이끄는지 좀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모든 작품이 내 마음에 와닿진 않았지만 꽤 많은 페이지에 인덱스를 붙이고 귀퉁이를 접은 걸 보면 그동안 어렵고 추상적으로 느꼈던 명상의 본질을 눈으로 확인하며 더욱 쉽게 다가간 것 같다.

작가가 안내하는 예술 작품은 독자들이 그동안 갖고 있던 명상의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매개체가 된다. 처음에는 과연 이 그림 혹은 작품에서 우리가 뭘 알 수 있을까 싶은데 옆에 글이 나란히 놓이면 우리는 머릿 속이 아닌 눈으로 직관하며 저절로 명상의 초입에 다다른다. 특히 나처럼 눈만 감으면 수많은 생각의 꼬리들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하나에 한 글, 한 작품에 하나의 명상록을 간직하는 것이 더없이 단순한 수행의 길이 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기대하는 명상의 역할을 뒤로하고 진정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 고야의 <수프를 먹는 두 노인>의 그림을 빌려왔다. 늙고 추레한 노인이 표정에서 인간의 유한한 삶을 직관적으로 보게 함으로써 우리는 시간을 피할 수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이 명상이란 점을 일깨운다.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자기 마음을 통제하고 세상의 불안을 이기는 방법으로 명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가만히 바라보며 인지하는 것부터 우리는 명상으로 다시 배워야 한다.

결국 명상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시간과 장소에서 시작하는 일이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에 살지 않는, 지금 여기에서. 그런 의미로 화가가 그린 정물화에서 모든 사물은 거기에 그대로 존재하는 그것이며, 그것이 전부이고 모두다. 오직 그것. 작가는 “정물화가 들려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야기다. 빈약하고 체념 어린 만족감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평범하게 방치하지 않는 만족감.”이라고 표현했다. 완벽히 딱 들어맞는 말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미술관에서 그냥 지나치던 그림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정물의 각도를 틀어 명상의 길로 잇는 디테일한 시선을 갖게 되었다. 그 계기가 무척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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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이제창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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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공감받을 수 없을 종류의 눈물이 차오르는 날도 있었다.

나는 내 눈물의 방향을 정할 수 없어 가끔은 화가 났고 대개는 고독했다.



가끔 책의 얼굴과 제목이 심각하게 잘 들어맞을 때, 나는 작가도 아니고 편집자도 아니면서 희열을 느낀다.


세상의 모든 책이 무수한 고민과 여러 타진 끝에 나온 결과물인건 당연하겠만 그 중에서 독자에게 첫인상을 남길 표지와 제목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책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방황하는 소설은 처음 물성으로 손에 잡힌 걸 보자마자 딱 알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있겠구나. 물론 작가진을 보더라도 그 믿음은 타당한 근거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밝고 난해한 이야기보단 우울하고 난해한 이야기에 몰입이 훨씬 잘 된다. 살면서 누구나 경험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과 우울한 감정을 글로 읽었을 때 우리는 희열을 느끼고 더 깊은 감정의 땅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이번 미디어 창비에서 나온 방황하는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추천되는 소설이다.


총 7명의 작가의 글로 엮었다. 모두 다 아는 작가도 있고 나만 모르는 작가도 있고 우리 모두 몰랐던 작가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건 작가의 타이틀보다 그들이 내놓은 이야기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견디고 있는 세계는 때론 낯설고 그 지점에서 만나는 여러 갈래의 방향은 방황하는 자들의 것이 된다.


요즘애들(박상영)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공감하며 읽었던 챕터다. 단어도 그 핫하다는 '요즘애들'

이제 나는 조직에서 저런 요즘애들을 단속하는 자리에 있고 나이 또한 예전애들에 속하지만 나도 한 때는 누군가의 '요즘애들'로 불리면서 사회 초년생을 거쳤던 시절이 있었기에 이 내용에 크게 몰입했던 것 같다.


남준은 뉴스 앵커가 된 신입기자로 일하다가 우연히 예전 첫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은채'를 만났다. 스물 여섯 살에 잡지사 인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남준은 은채와 함께 드립커피를 내리고 고목나무에 물을 주는 업무를 하며 그녀와 가까워졌다. 그러나 문제는 사수의 부당한 업무지시와 알 수 없는 태도로 남준과 은채의 사회생활이 힘들어지고 결국 그 상황을 버티지 못한 남준은 퇴사를 하게 되었는데..


"황은채와 나는 인턴 시절 팔십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매일 아홉시 반부터 이르면 저녁 여덟 시, 늦으면 열한 시까지 일했다. 한 달에 한두 번씩은 무조건 밤을 새워 마감을 했다. 점심과 저녁 식대가 따로 나오지 않아 식비나 출퇴근 교통비를 제하면 남는 돈이 없었지만 괜챃았다. 이 시기를 버티고 나면 더 나은 삶이 펼쳐지게 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방황하는 소설-요즘애들(박상영)



"사수 배서정의 디렉션은 일관성이 없었다. 어떤 날은 인터넷 게시판에나 적합할 만큼 신조어를 많이 쓰는 발랄한 무드를 요구하는가 하면, 가벼운 톤으로 기사를 써 가면 문장에 중량감이 떨어지고 수식이 지나치게 많다고 평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김없이 매거진C의 성격과 잘 맞지 않는다며 다시 써 오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과월호를 뒤져보고 선배들이 쓴 기사를 외우듯 읽어봐도 매거진 c다운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방황하는 소설-요즘애들(박상영)



우리는 모든 처음의 시기에 필연적으로 방황을 한다.

첫직장, 첫부모, 첫키스(..는 아닌가???)

여하튼 특히 학생의 신분을 떼고 처음 돈을 받는 프로의 세계, 사회생활로 들어오면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했든, 돈을 봤든, 되는대로 들어왔든간에 방황은 디폴트 값이다.

"지금 이 일이 나랑 맞나?" "이렇게 하는건가?"


업무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돌발적으로 이뤄지는 사회조직 언어를 처음 배우면서 부딪치고 깨지는 순간이 오고야 마는 것인데 그 시간을 지나고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빛나고 반갑다. 그런 의미에서 남준과 은채의 시간은 가장 어두운 시기에 낮게 떠 있는 별같은 이야기였다.



월계동 옥주(김은희)

이 소설은 내가 아는 동네, 월계동이 나와서 관심이 일었고 옥주의 방황에 눈길이 갔다. '방황'이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다른 말을 찾아본다면 '관계'가 떠오를 정도로 우리가 그토록 많은 낮과 밤에 방황하는 이유는 관계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옥주'는 부모의 이혼으로 가족들과 흩어지고 연인과도 헤어진뒤 중국 유학을 떠났다. 낯선 곳에서 그녀는 어떻게든 탄탄한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했고 우연히 만난 중국인 '예후이'와 친구가 되고 또다른 친구들과 옥주가 예후이에게 중국어 과외를 받게 되면서 함께 어울리게 된다. 그러던 중 여름 방학에 예후이의 고향집에 다같이 여행가게 되었는데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옥주는 지켜보고 그들과의 관계 또한 무너지게 되면서 다시 한번 실망하지만 그 시간은 옥주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옥주는 여행하면서 많은 것들을 애도했다. 이제 식구들이 월계동에 다 같이 모일 날은 없고 자신의 스무 살 시절과 관련된 많은 이들도 떠나 버렸다는 것을. 읽어버린 사람들을 다른 사람으로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비로소 상실은 견딜 만해졌다.

방황하는 소설-월계동 옥주(김금희)




예전에 누군가 '방황하는 청춘'은 아름답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옛날의 일일뿐, 흔들리는 청춘은 더 단단해지지 못하고 바람에 쉽게 날아가는 형상이 되어버린 꼴이다. 누구는 나약하다고 말했고 또 다른 누구는 사회가 이렇게 만들어놨다고 하지만 정작 흔들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방황'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자주 맞춘다.


깨진 유리파편처럼 이리저리 튀어오르는 감정 속에 방황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결코 나쁘지 않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각자의 세계에서 힘껏 고독하다 보면 방황과 상실에서 차오르는 알 수 없는 종류의 희망을 마주할 수 있다.


세상은 온통 뿌옇게 보였다. 누구도 그녀에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막연함을 느껴다. 막연한 두려움, 막연한 슬픔, 막연한 외로움,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 시간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길을 돌고 돌아 집으로 갔다. 그렇게라도 시간을 버리고 싶었다. 방황하는 소설-파종(최은영)



새해에 방황하는 소설을 읽어서 더 좋았다.

모든 사람이 희망에 대고 저마다의 소원을 비는 시간이 있다면 반대로 모든 희망을 놓고 세계 밖으로 숨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후자의 사람들과 함께 여전히 남아 있는 혼란스러운 감정 안으로 파고들며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삶을 시간을 걷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방황하는 소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던 각자의 슬픔을 이 책과 함께 나눠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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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
정원 지음 / 미디어창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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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마지막날, 2024년 첫날에 걸쳐 이 책을 읽은 건 행운이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땐 너무 어린애같은 만화책이 아닌지 싶어 그냥 후루룩이면 다 읽겠는데 싶었는데 제목 그대로 한방 얻어 맞았다.


똑똑한데 가끔 뭘 몰라.


정말 난 뭘 모르는 어른 바보, 멍청이였던 것.

4학년이 된 정훈이는 좋아하는 친구와 짝이 되지 못해 속상해 하다가 3반의 똘똘이 지혜에게 일기장에 짝을 바꾸고 싶다고 쓰는 게 어떤지 조언을 구하는데..


이 장면부터 나는 나의 4학년을 떠올렸다. 정훈이와 마찬가지고 5학년이 되면서 꼭 같이 가고 싶은 친구가 생겼고 일기장에 그 바람을 썼더니 정말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된 추억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맘때쯤 모두 느끼는 친구의 소중함과 간절함은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내가 한동안 잊고 살았던 마음이었다. 친구가 세계의 중심이고 전부인 시절을 지나와 지금은 너무도 냉소적으로 변한 사람이 되었지만 결국 짝이 되고 싶었던 친구와 짝이 되지 못한 정훈이가 새로운 짝꿍에 대해 갖는 마음은 내 마음을 녹이기 충분했다. 


이상하게도 이 만화는 슬프다. 그림체, 이야기, 등장인물 모두 밝게 살아가고 우리 옆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사람들인데도 순수하게 집중하는 모습에서 그려지는 여러 에피소드가 읽고 나면 아련하다. 내게도 있었던 일들이었고, 또 찰나로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는 장면들이 많아서였을까?

추억을 복기하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더없이 따뜻하고 재밌는 책이었다.


특히 짝꿍의 할머니가 끓여주신 맛없는 짜파게티를 먹을 때나, 팝콘 만두를 한 사람당 2개씩 먹어야 하는데 3개 먹었다고 오해하는 장면에서, 짝꿍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친구를 위로해주기 위해 맛없는 짜장라면을 끓여주는 4학년의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의 우정과 의리가 이토록 순수해 보일 수 없다.


각자의 세계를 키우는 시기에 만나 또다른 감정의 폭을 겹치고 쌓여 이뤄내는 친구들의 우정이 재밌는 책이어서 어른들도 쉽게 공감하고 응원하게 되는 책이랄까.


마냥 어린이들의 삶이 철없고 웃기다고 생각하면 이 만화를 보면 달라질 것이다.

다문화 가정에서 온 친구가 듣는 말을 차별이라고 구별할 줄 아는 어린이가 있고, 손주를 위해 놀이터를 지어달라고 시위하는 할아버지에게 따뜻한 꿀물을 선물하는 어린이가 있고, 2학년 후배에게 선뜻 비오는 날 우산을 건네는 11살의 어린이가 있다.


아, 이제 알았다. 내가 이 책을 순수하고 슬프다고 한 이유를.

어른도 쉽게 하지 못할 일을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게 함께 해나가는 걸 보면서 자연스럽게 느낀 감동의 슬픔이었던 것이다.


감정과 생각이 세밀하고 예민한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순수한 집중력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멋졌다.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의 가슴 속에 한번쯤은 품었을,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그 순수함을 다시 꺼낼 수 있게 만든 책을 오늘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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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너 1 베어타운 3부작 3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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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사람이라면 10명 중 1명은 반드시 읽었다는 「오베라는 남자」를 아는가?

현재 넷플릭스에서도 방영되고 있는 이 책은 베스트셀러로도 유명한데 이번 2023년 겨울,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이 나왔다.

바로 「위너」

미국에서만 175만부 이상 판매되고 국내 출간을 묻는 문의가 쇄도했을 정도로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위너」

올 겨울, 이 책을 가까이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멋진 겨울 스포츠인 하키의 세계를 통해 사람 사이의 오해와 욕망,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사랑과 아픔의 치유를 돋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2년 6개월 전 마야는 케빈 에르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케빈은 그 마을에서 잘 나가는 하키선수였지만 그 일이 있은 뒤 그와 가족은 마을을 떠났고 마야도 자신의 꿈을 좇아 그곳을 떠났다. 물론 그것은 진실을 감춘 표면에 그친 목표였다.

베어타운과 헤드. 모두 하키타운이다. 그러나 둘은 앙숙. 한쪽 타운이 하키 스포츠의 연승으로 승승장구할 때가 있었고 지금은 반대의 상황을 겪고 있다. 물론 스포츠만으로 대결되는 곳은 아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정치와 경제, 문화가 충돌하면서 양쪽의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증오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거대한 폭풍이 날아들면서 대도시로 떠난 마야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거대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양쪽 마을의 사람들의 경계가 조금씩 흐려진다.

「위너」는 각 캐릭터의 서사가 꽤 탄탄하다. 그래서 각자 지니고 있는 일상과 슬픔이 다 이해가 되고 그것을 품는 마을의 정책과 부흥, 이것을 실현시키려는 자본주의가의 계략도 나름 설득을 지닌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흥미롭고 재밌다. 모든 에피소드가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사건들은 모든 캐릭터의 행동을 의미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위너」의 모든 캐릭터를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더 마음이 가고 신경 쓰이는 건 역시 마야다. 나쁜 경험 때문에 도망치듯 집을 나온 마야는 일찍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유일하게 계속 실망감에 빠져 있지 않은 이유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좋은 이유다. 가까운 가족이 큰 실망감을 안겨줄 때도 있지만 반대로 그 실망을 사랑으로 다시 복구시키는 힘 또한 가지고 있어서. 그걸 이 책에서는 아주 잘 보여주고 있고 그 과정이 따뜻하다.

참, 책 내용에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흡수할 수 있는 인생의 명언들이 포진되어 있는데 이 책의 매력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소!


「위너」가 겨울과 아주 잘 어울리는 소설이라는 점은 이 두 마을의 핵심 스포츠인 하키에 있다. 차가운 바닥을 휩쓸고 다녀야 하는 남자들의 힘과 재능, 냉정한 스포츠의 세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구린 뒷 사람들까지 더해져 하키는 이 두 마을에서 빠트릴 수 없는 또 하나의 무대 장치다.

결국 이 책은 아이스링크 위에 선 사람과 그들을 응원하고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너무 사랑해서 때론 서로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사랑으로 품는 사람들이 있고 추운 마을에서 대립되는 사람들의 알듯 말듯한 증오는 클라이막스를 달려 어느 한 사건으로 폭발하여 2권에서의 또다른 흥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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