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문학과지성 시인선 483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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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의 이런 부분을 기억하십니까?


어머니들은 먹이는 일에 열렬하다. 밥 먹는 아이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풍경은 지상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아름답고 또 조금은 슬픈 듯해 보이는 풍경이다.


먹는다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존재들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존재의 치명적인 약한 고리이며 그리하여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은 도덕적, 미학적 가치 부여 이전에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진다.(17쪽)


다시 읽어도 참으로 수승한 통찰이며 압도적 문체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그 한 문장 자체가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합니다. 이 순결한 문장을 시 한 편으로 피워냈습니다.


먹는다는 것-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


살아 있는 것을 죽여야 한다는 것

죽여서 살게 하는 것


먹는다는 것-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일


하느님을 죽여서 하느님을 살게 하는 것

부처님을 죽여서 부처님을 살게 하는 것


먹는다는 것-

사랑을 지속할 힘을 만드는 일


고맙고 두려운,

나들을 만나는 일


_<나들의 안녕> 전문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은 뫼비우스 띠처럼 생사를 맞물려 나들을 창조해 나아가는 일입니다. 나들의 창조, 그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


반쪽 빛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반쪽 어둠을 찾아 영접하는 것이다.


영혼은 본래부터 완전하였다.


2


영혼의 혈거


그 바닥엔


우주먼지로 지어진 밥상 하나


그 위엔


먼지의 밥 한 그릇 숟가락 두 개


바라보며 나누어 먹으며 가끔 입가를 닦아주며


_<소울메이트> 전문


영혼의 연대는 어둠의 연대입니다. 어둠의 연대는 먼지 밥 한 그릇을 두 사람이 나누어 먹는 혈거에서 기원합니다. 혈거에서 나누어 먹는 일은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을 하나로 만듭니다.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이 하나로 되는 시공에서는 이런 진실이 번져갑니다.


세상에 걸식 아닌 밥이 어디 있니?

본래 자기 것이 없는데

서로 걸식하는 거지


형편 되는 대로 빌어먹고 빌어 먹이고

오늘 내 무릎에 네가 기대고

언젠가 올 오늘엔 네 무릎에 내가 기대고


내 것을 준다는 의식 없이

그저 우린 서로를 빌려주며

먹고 먹이는 거지


걸식하고 남긴 시간에 무얼 하냐고?

열렬히 노동해야지

영혼을 다듬는 거야


_<걸식이 어때서?> 전문


인간의 본질은 거지입니다. 거지의 실천은 걸식입니다. 걸식하고 남긴 시간에 하는 노동은 영혼을 다듬는 것입니다. 영혼을 다듬는 일은 걸식을 더욱 더 편만한 진실로 가꾸려는 벼림입니다.


영혼은 행위란다

몸이 없는 성자들을 믿지 말아라

말씀으로 아름다워진 세상은 없다

오른쪽 가지가 부러지면 왼쪽 가지를 내미는 몸

부르튼 맨발을 닦아주는 풀뿌리들의 몸

마주 보며 서로의 눈 속을 들여다보는 작은 새들

말간 눈물 속에 맺힌 영원을 오늘의 붉은 열매로 가져오는 빛

소소소소, 세상 가장 여릿한 소소한 몸들의

나지막하게 앳된 거기가 영혼의 기원이란다


_<햇봄, 간빙기의 순진보살> 일부


소소소소, 세상 가장 여릿한 소소한 몸들의 나지막하게 앳된 거기”를 돌보고 새로이 찾아냄으로써 영혼의 기원을 지키는 일이 행위로서 영혼입니다. 그 영혼을 지닌 사람이 짓는 풍경은 이러합니다.


그이는 지금 잠들었을까 폐지 수레 끌고 건널목에 서 있던 노란 가방을 멘 소년이 건널목을 뛰다 넘어지는 순간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소년을 일으켜 안던 안녕을 확인하자 이내 굼뜬 노파로 돌아가 소년에게 천천히 밤빛 양갱을 건네던 노쇠하고 남루한 그 손앞에 주춤거리던 소년은

뒤늦게 달려온 아이 엄마가 노파의 손을 쳐내며 아이를 안을 때 울음을 터뜨린 소년에겐 말하기 어려운 어떤 미안함이 있는 듯했고 소년에게 답하듯 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 가득한 손을 아래위로 끄덕이며 괜찮다 네가 괜찮으니 나는 괜찮다 깨끗한 아이에게 더러운 노파가 건네려던 밤빛 양갱 같은

밤의 빛

이름 붙이기 어려운 연약한 고귀함이 밤의 빛 속에 떠 있다


_<om의 녹턴> 일부


밤빛 양갱을 건네는 노쇠하고 남루한 손, 그러니까 저 붓다의 손, 그리스도의 손을 지니려고 열렬히 노동하는 사람은 울퉁불퉁하고 삐뚤빼뚤한 삶의 조건을 견딥니다.


빗방울 밥을 지었어요


어떤 빗방울은 아직 설익고

어떤 빗방울은 너무 푹 익고

어떤 빗방울은 끈기가 너무 없고

어떤 빗방울은 악착같이 달라붙죠


그런대로 섞어서 밥 한 고봉이 되면

밥이라 할 수 없었던 것이

밥이 되는 세월도 오죠


저마다 다르게 몸에 묻혀온

빗방울들의 냄새를

밥냄새라 생각하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죠


가끔 천둥 번개 우르릉대는 밤이 오지만

그런 날은 3백 날 중에 한 스무 날


깨지고 금 간 빗방울의 얼굴이 보여

식욕이 사라지기도 하지만


곧 증발해버리는 빗방울 밥알 때문에

허기가 깊어지기도 하지만


오늘도 빗방울 밥을 지어요

내 관심은 밥보다

밥냄새니까


_<빗방울 밥상> 전문


꿈에서 만난 죽은 사람에게/ 흰죽을 한 숟가락 떠먹이는 자세로/ ·······네거리에서 흰죽을 먹”(<조금 먼 아침>)는 날도 살아갑니다.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리고/ ·······천천히 햇살을 씹어 밥을 먹”(<이런 이별>)는 날도 살아갑니다. “네 슬픔 때문에 목젖이 부은 오늘의 나는 밥을 삼키고 싶은 나와 삼킬 수 없는 내가 샴 자매처럼 붙어 있다 갈팡질팡하는”(<詩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유>) 날도 살아갑니다. 그러면 “비대해진 도시비둘기들이 폴리스라인 밖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혁명의 조건>) 날은 어떨까요?


버려진 그림자들을 모아다 불을 지피는 건 오래 지속해온 나의 소임. 그림자 땔감으로 만든 불은 냄새가 좋다. 냄새가 좋은 불로 나는 오늘의 밥을 짓고 너를 부른다. 나라는 먼지는 너라는 별을 구성하는 중요한 진실이다. 너라는 먼지는 나라는 별을 구성하는 중요한 진실이다. 세상은 빌려 온 이름들로 가득해 너는 점점 야위어가고. 오늘에 어울리는 이름 하나를 주워 들고 너는 불 옆으로 오고. 우리는 포옹한 채 그림자들을 불 속으로 던진다. (어제가 죽어서 오늘이 오고 오늘이 죽어서 내일이 오고)너를 안고 있는 나는 기쁘다. 살아 있는 날은 오늘이니. 오늘 기쁜 너와 내가 종알거린다.


오늘은 어제 채집해둔 이름들을 반죽해 호박칼국수를 끓일까?


_<나들의 시, 너의 무덤가에서> 일부


향락과 모멸이 교차하는 날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버려진 그림자들을 모아 냄새 좋은 불을 피울 수 있다면, 그 불에 나라는 먼지와 너라는 먼지 이름을 반죽해 호박칼국수를 끓일 수 있다면 살아갈만합니다. 살아가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는 숙제가 있습니다. “너희가 못 먹는 밥을 여기서 먹는”(<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자들로서 저 2014년 4월 16일의 아이들에게 갚아야 할 숙제를 해야 합니다. 그 숙제를 다 할 때까지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숙명입니다. 살아가려면 먹어야 합니다. 우리를 먹이려고 바쳐진 목숨 값을 결코 헛되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김선우의 『녹턴』은 먹고 먹이는 나들이 나들을 연주한 야상곡입니다. 사랑보다 애도보다 핍진한 것은 먹고 먹이는 저 도저한 유물론적 극진함, 형언할 수 없는 om입니다. 그 극진함은 도리어 담담하게 이런 웅얼거림으로 펼쳐집니다.


·······스며 그대 몸속

어루만져 속속들이 살린 후

마침내 그대를 빠져나가는


_<한 방울> 일부


스미고 어루만지고 빠져나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먹는 일, 먹이는 일 아니던가요.


저는 2014년 4월 16일 이후 어느 날부턴가 하루를 251명이 함께 하는 아침식사로 엽니다. 생사의 경계를 가로질러 목숨을 주고받는 제사이자 축제인 그 아침식사 때 이제 Maria João Pires가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을 들으렵니다. 녹턴을 타고 김선우가 합류하면 252명이 함께 먹고 먹이는 위엄의 시간om이 빚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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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00년 수도의 역사를 유리벽 아래 가두고 고층 폐허만이 나날이 치솟는다. 수백 년 된 건물이 일상의 공간인 유럽 도시들과 너무도 판이한 풍경이다. 폭력적 권력과 수탈적 재력만으로 통치되는 대한민국의 품격을 고스한히 드러내는 종로1길에서 한 아기가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다. 




2. 아이들을 차고 어두운 바다에 빠뜨려 죽인 지 800번 째 되는 날이 다가온다. 진실을 짓밟은 채 여전히 희희낙락 지절대는 자들이 기억의 문 저멀리 고래등 같은 집에 살고 있다. 저들의 지휘 아래 수천만 개의 기억이 가라앉는 중이다. 지나가는 발길 말고는 한산한 광화문 추모 공간. 




역사를 땅 아래 묻고 기억을 바다 밑에 빠뜨리고서도 공동체인 사회는 없다. 의인 김관홍이 아이들 곁으로 떠나던 날,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공동체 아님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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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 낭떠러지

목놓아, 툭

아득히 가득히

의미 푸른,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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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와 속도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잊어버린 것 가운데 하나가 손 글씨입니다. 손 글씨와 자판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만드는 문자는 서로 전혀 다릅니다. 자판 문자는 그 내용이 어떻게 다르든 똑같은 손가락 동작의 행렬로 조합됩니다. 동일한 손동작의 반복은 인간의 행위라기보다 기계 작용에 가깝습니다. 누가 써도 똑같습니다. 인간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손 글씨는 다른 내용을 일일이 손으로 다른 모양을 그려 구성합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쓴 사람의 실제 행위가 새겨집니다. 누가 써도 다 다릅니다. 인간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저 또한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손가락을 두드려 수많은 글을 씁니다. 그러다 문득 손 글씨로 돌아갑니다. 손이 굳어 있다는 사실을 대뜸 느낍니다. 글씨 모양을 그릴 때 낯설어한다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립니다. 결국 글씨 모양 전체가 아름다움을 잃습니다.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면 그 굳음과 낯섦이 더욱 선명해져 아름다움은 말하기조차 민망한 지경에 이릅니다. 그 글씨를 가만 들여다봅니다. 문명이 내 인간과 그 미학을 이렇게 구겨버렸구나 탄식합니다. 손 글씨를 잊지 말아야겠구나 다짐합니다. 조그매서 커다란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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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날 곳은 

비 그친 뒤에도 비를 내리는


그 숲으로 나는 죽었다


끝과 처음이 맞닿는 숲과 숲 사이

나는 숲하는 말이며 


비 닿지 않는 잎과 잎 사이

나는 

서 있는 기다림이며 기다리는 서 있음




[그림/ 김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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