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0장 일곱 번째 문단입니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성자천지도야 성지자인지도야.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聖人也.
성자불면이중 불사이득 종용중도성인야.
誠之者 擇善而固執 之者也.
성지자 택선이고집 지자야.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박학지 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
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 措也.
유불학 학지 불능불차야. 유불문 문지 부지부 조야.
有弗辨 辨之 弗明弗措也.
유불변 변지 불명부조야.
有弗行 行之 弗篤弗措也.
유불행 행지 부독부조야.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인일능지기백지 인십능지기천지.
果能此道矣 雖愚 必明 雖柔 必强.
과능차도의 수우 필명 수유 필강.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성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며 저절로 도에 적중하니 성인이다. 성해지려고 하는 자는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는 자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하나를 할 수 있으면 자기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할 수 있으면 자기는 천을 한다. 과연 이 방법을 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연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2. 길고 긴 제20장이 이제야 끝납니다. 처음에는, 울퉁불퉁하고 부자연스러워서 앞부분을 모조리 없애고 딱 이 문단만 가지고 제20장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내용만으로도 성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해 가며 여러 의미 갈래를 거느려 온 텍스트라는 역사적 현실성을 인정해 수신修身을 지도리 삼아 중용과 성을 연결하는 문맥으로 이전 문단들을 자리매김 해 본 것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 자유나마 누릴 수 있는 세상이 고맙습니다. 조선시대 윤휴는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 해서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까지 당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 세상은 지금 세상대로 더 가혹한 질곡이 있지만 주희가 산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 그 아니 다행입니까.
3.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성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고 이해하기에 앞서 중용의 중中과 본질적으로 같은 뜻으로 새겨야 합니다. 제16장에서 살폈듯이 만물의 주체로서 도에서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곧 체물이불가유體物而不可遺하고 치열하게 실천한다는 역동적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확하다, 벗어나지 않는다, 어긋나지 않는다는 내포로서 중과 연속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완전한 성誠과 애쓰는 성지誠之를 구별합니다. 완전한 성이야 순舜 임금 같은 성인이나 할 수 있는 경지이니 현실적으로는 오로지 푯대요 깃발일 뿐입니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찰나 마다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아야 하는, 곧 택선이고집지擇善而固執之하는 노력 과정 자체로 살아갑니다. 늘 깨어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하는, 곧 박문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辨之 독행지篤行之하는 순간순간을 무릎으로 지나갑니다.
안 하면 몰라도 하려 들면 하고자 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남보다 더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유愚柔가 명강明强으로 바뀝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과정 자체가 성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실천이 한 줄기 한 줄기 모여 중용의 강을 이루어 냅니다.
중용은 존재가 아닙니다. 중용은 실천입니다. 중용은 결과가 아닙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완성이 아닙니다. 중용은 영원한 노력입니다. 중용은 특별한 자의 포효가 아닙니다. 중용은 평범한 자의 함성입니다. 바로 이런 중용의 모습을 돋을새김 한 표현이 성입니다.
4. 지금은 그도 쉰을 넘기고 유수한 대학의 교수로 있는 제자가 대학원 다닐 때 제게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릅니다. 명문가 출신인 그의 지도교수가 자녀를 어떻게 호방하고 자유롭게 양육하는가를 간결하게 전해주었습니다. 가령 아이들에게 단 한 번도 공부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운운. 제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거나 못 해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냐?”
제자가 답했습니다.
“에이, 선생님도·······그랬으면 제가 이 말씀 왜 드렸겠어요?”
제자가 당연히 여긴 부분과 제가 당연히 여긴 부분이 사뭇 달랐습니다. 하여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게 세습이야. 이른바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그 아이들은 열린 공부 길 위에 이미 서 있는 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의 아이들은 공부해라, 공부해라 골 백 번 잔소리해야 하고, 심지어 욕하고 때려야 공부 길로 겨우 들어서. 들어서서도 백배 천배 독하게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어.”
물론 여기 공부와 중용은 전혀 다릅니다. 중용은 세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통속한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제3장에서 『중용』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생존의 문제가 걸린 시간들을 어렵게 견뎌야 하는 사람일수록 중용을 선택하고 지속하는 일이 더욱 힘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중용의 덕이 아무리 귀하다 하더라도 하루하루 가족 먹여 살리는 일에 목맬 수밖에 없는, 평범하기조차 어려운 사람이 시시각각 강요되는 극단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중용은 이들에게 독하고 또 독한 요구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용이, 평범하기조차 어려운 사람에게 독하고 또 독한 요구라면, 분명 이들보다 더 용이하게, 더 수준 높게 중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해야 이치상 맞습니다. 공자 당시로 돌아가 말한다면 공자 자신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계층 지성집단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각성하여 중용을 정치경제학 비판의 고갱이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중용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였습니다. 권력에 편입되고 그 중심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다른 개념의 중용을 신봉하겠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지성집단은 반드시 존재하고 또 존재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연히 힘과 돈을 장악하고 있는 제후 집단입니다. 정치경제의 현실은 명실상부 이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이므로 공자가 한 평생 이들을 곡진히 계몽하고 설복시키는 일에 매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실패하였습니다. 이는 공자의 실패가 아닙니다. 인간 자체의 실패입니다. 공자에게서 『중용』이 발원된 지 이천오백 여 년, 여전히 제후의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여전히 이들은, 아니 이들이야말로 중용 실천의 의무 앞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스스로 각성한 지성집단은 나태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는 오히려 날 세우고 떠들던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들어오면서는 입을 닫음으로써 파렴치하게 부역하고 있습니다. 통치 집단과 재벌, 그리고 통속종교의 제후동맹은 날로 그 반중용적 매판독재분단고착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제후의 가치는 갈수록 난공불락이 되어가고 공자의 수레바퀴는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결국 우리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평범함조차 사치랄 저 민중, 미상불 불가촉천민the Untouchable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존의, 생명의 낮은 연대를 형성하는 그 단 하나의 길 말고 달리 생각할 중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용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중용 하도록 숙명 지우는 국가를 끌어안고 우리는 목숨 걸고 중용을 해야 합니다. 아, 참으로 독한 실천의 독한 중용입니다.